•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8권 고려 무신정권
  • Ⅰ. 무신정권의 성립과 변천
  • 2. 최씨무신정권의 성립과 전개
  • 3) 최씨정권의 붕괴

3) 최씨정권의 붕괴

 최씨정권은 제4대 집권자인 최의에 이르러 무너지고 말았다. 최의가 권력을 계승한 후 불과 11개월만인 고종 45년(1258)의 일이었다. 최의는 최항의 심복이었던 金俊·柳璥 등에 의해 살해되었던 것이다.

 김준·유경 등이 최의를 제거하게 된 원인은, 그들이 최의로부터 정치적으로 소외된 데에 있었다 한다. 그렇다고 이것으로 최씨정권의 몰락 이유가 모두 설명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4대 62년 동안 지속되었던 최씨정권의 몰락을 단순히 최의와 김준·유경 등의 인간관계에서만 구할 수는 없는 것이다. 최씨정권을 지탱해 온 여러 요인들이 와해되는 과정에서 최씨정권은 몰락했다고 이해된다.

 최씨가의 마지막 집권자인 최의는 불과 11개월을 집권했을 뿐이었다. 따라 서 최씨정권의 몰락을 가능하게 한 요인들이 최의집권기에 갑자기 나타났다고 보기는 어렵다. 몰락의 징후는 그 이전부터 최씨정권에 내재되어 있었음이 분명한데, 주목되는 것은 최항의 권력 계승을 계기로 이에 대한 불만이 최씨정권 내부 인물들 사이에 심각하게 표출되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최씨정권의 붕괴과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최항정권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최항은 애초부터 최이의 후계자로 지목된 것은 아니었다. 최이가 처음에 그의 후계자로 내정한 인물은 그의 사위인 김약선이었던 것이다. 김약선의 후계자 지명과 함께 최이는 그의 서자인 萬宗과 萬全을 松廣寺에 출가시켰다. 그들이 여기에 불만을 품고 난을 일으킬까 두려워한 때문이었다 한다. 만전은, 최항이란 이름으로 환속하기 전까지 禪僧이었던 것이다.

 최항이 최이의 아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후계자가 되지 못하고 김약선을 피해 출가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데에는 그가 嫡子가 아닌 서자였으며, 더구나 그의 모계가 천했던 점이 큰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그는 최이가 총애하는 기생출신 瑞蓮房의 소생이었던 것이다. 이미 언급하였듯이, 최충헌정권을 성립시킨 무인들은 비교적 좋은 가문의 출신들이었으며, 이들의 자손들 역시 최씨정권 아래에서 크게 출세하였다. 또한 소수의 재상가 가문에서 다수의 문신 재추를 배출시키기도 하였다. 즉 최씨정권의 지배세력은 여전히 좋은 가문의 출신들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바탕으로, 최씨정권 아래서는 기존의 신분질서가 존중되었다고 판단해서 좋을 것이다. 따라서 기생의 소생인 최항은 당시의 정치적 지배세력으로부터 환영받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점도 쉽게 짐작된다.

 한편 앞 절에서 이미 살펴 본 바와 같이 김약선이 최이의 사위가 될 수 있었던 데에는 가문의 배경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더구나 그의 처는 최이와 河東鄭氏 사이의 소생이었다. 하동 정씨는 정숙첨의 딸인데, 정숙첨은 최충헌·최이집권기의 정치적 실력자로서 관직이 평장사에 이르렀다. 따라서 김약선은 최이의 사위라는 점과 아울러 자신의 가문 배경을 이용하여 당시의 정치세력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최항이 김약선을 피해 송광사에 출가했다가 환속하여 최이의 후계자가 된 것은 최이에 의해 김약선이 제거된 이후였다. 그렇다고 최이에 의한 최항의 후계자 지명이 순조로웠던 것은 아니다. 최항에 반대하는 김약선의 세력은 그의 아들 金敉를 최이의 후계자로 밀었던 것이다. 사실 모계가 천했을 뿐만 아니라 오랫 동안 정치와 결별해 있었던 최항이었고 보면, 설사 김약선 세력이 아니었다 하더라도, 그를 달가워 할 인물들은 많지 않았을 것이다. 더욱이 최항이 출가한 이후의 행적은 당시의 관료들로부터 비난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는 門徒를 모아 재물 불리기를 일삼았던 것이다. 집권자의 아들이었으면서도 정치권력에서 소외된 그로서는, 사원을 통한 재산 증식이 유일한 즐거움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이로 인해 조세가 결핍되고, 그의 문도들이 지방수령을 업신여기자 관료들은 최항의 행위를 규탄하기에 이르렀다.

 다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최이의 후계자로 내정된 최항은 권력승계 과정에서 또 한 차례의 진통을 겪지 않으면 안되었다. 최이의 심복인 지이부사·상장군 周肅이 반발했던 것이다. 그는 夜別抄와 內外都房을 거느리고 정권을 국왕에게 돌리려 하였다. 주숙은 최씨가의 家奴였던 李公柱·崔良伯·金俊 등이 최항에 귀부하자, 반발을 포기하고 최항에게 협력하였다. 주숙의 협력으로 최이의 군사력 대부분이 최항의 권력계승에 협조한 셈이다. 그러나 최항은 여전히 불안을 느꼈던 듯하다. 이러한 사실은 최이의 복상 기간이 2일에 불과했다거나 그가 ‘杜門不出’ 했다는077)≪高麗史≫권 129, 列傳 42, 崔忠獻 附 沆. 것으로 미루어 알 수 있다. 권력 계승에 따른 최항의 이러한 불안은 그가 최씨정권 내부의 인물들로부터 지지를 받지 못한 데 기인한 것이었다.

 최항은 정권을 장악하자 그의 적대세력의 제거에 착수하였다. 그와 더불어 후계자 경쟁을 벌였던 김미의 세력은 첫 대상일 수밖에 없었다. 김미를 후원했던 최이의 後室 大氏, 大氏의 전 남편의 아들인 吳承績, 그리고 김미의 숙부인 金慶孫 등이 여기에 포함될 수 있다. 아울러 최항이 승려였을 당시 그를 규탄했던 朴瑄도 제거 대상이 되었다. 또한 그의 권력 승계를 저지하려 했던 주숙도 제외될 까닭이 없었다.

 그렇다고 자신에게 반대한 인물들 모두를 최항이 제거할 수 있었던 것은 물론 아니다. 일찍이 그가 승려였을 당시 全羅道按察使로서 그와 마찰을 빚었던 金之岱나 그의 무뢰한 행동을 최이에게 보고한 宋國瞻 등은 해하지 못하였다. 최항은 그들의 제거에 따른 관료들의 반발을 우려했던 것이다. 사실 집권자로서 결점이 있었던 최항이고 보면, 그를 달갑지 않게 여긴 인물들이라고 해서 모두 제거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더구나 최항을 달갑지 않게 생각한 인물들의 대다수는 오랫 동안 최씨가에 충성을 바침으로써 그들의 지위를 높여 온 자들이었다. 따라서 그들의 제거는 최씨정권을 지탱해 온 관료들의 離反을 부채질할 수 있는 것이었고, 그렇게 되면 최항정권의 존립 자체가 위태로울 수 있는 것이었다. 최항으로서는 기존 관료들의 회유에 주력할 수밖에 없었다. 최항은 그와 정치적 견해를 달리한 인물들이라 하더라도 자신의 정권에 포용하려 했는데, 이는 鄭晏이나 金起孫의 경우를 통해 알 수 있다.

 고종 43년에 지문하성사가 된 김기손은 김약선의 아우였고, 김미의 숙부였던 것이다. 따라서 그는 최항과 김미의 경쟁에서 당연히 김미를 지지했을 것이다. 한편 鄭晏은 최이의 장인인 정숙첨의 아들로서, 김약선에 협력한 인물이었다. 그러했던 만큼 그는 최항과 평소에 사이가 나빴다 한다. 이러한 정안이었지만 최항은 집권과 더불어 그를 지문하성사에 임명하였는데 인망을 얻기 위함이었다는 것이다. 최항으로서는 인망을 얻지 않으면 안될 정치적 상황에 처해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최항과 정치적 이해관계를 달리한 정안이나 김기손이 최항정권에서 고위직을 차지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최항에 의한 새로운 정치질서의 개편이 불가능했음을 시사해 준다 하겠다.

 최항은 관료들을 철저하게 장악하지 못하였다. 崔滋나 崔璘을 비롯한 당시의 재상들이 몽고와의 강화를 강력하게 주장했던 사실로 미루어 짐작되는 일이다. 이러한 주장은 최항의 의도와는 상반된 것이었다. 최자는 일찍이 강화도를 ‘金城湯池’ 또는 ‘萬世帝王之都’라고 칭송하였다.078)尹龍爀,≪高麗對蒙抗爭史硏究≫(一志社, 1991), 159∼161쪽. 그가 강화도의 지리적인 형세를 이처럼 칭찬한 것은 곧 최이정권에 의한 강화천도를 정당화시킨 것과 다를 바 없다. 그런데 최자가 최항정권에 들어와서 몽고와의 강화를 주장하고 나섰던 것이다. 최자의 이러한 태도 변화는 대몽관계에 대한 그의 태도가 바뀌었기 때문이 아니라, 정치적 상황의 변화에 기인한 것이었다. 즉 최이정권 아래에서는 어떤 정책에 대한 반대 의견을 제시하기 어려웠으나, 최항정권에서는 최항과 다른 정치적 견해를 피력할 수 있었다고 생각되는 것이다. 최항에 의한 새로운 정치질서의 개편이 불가능했음을 감안하면 무리가 아니다.

 최항정권은 최이정권과는 달리 일정한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그것은 4차에 걸친 국왕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封侯立府’를 거절했던 사실로 미루어 짐작된다.079)이와는 달리, 최항이 府를 설치했다고 주장한 논고도 있다. 金翰奎,<高麗崔氏政權의 진양부>(≪東亞硏究≫17, 1989)가 그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필자가 제3절
<무신란과 최씨무신정권의 역사적 성격>에서 비판하였으므로 참고하기 바란다.
고려의 경우 관료들이 설치한 府는 왕자와 왕비의 예에 따른 것으로서, 봉작된 인물이 立府하게 되면 작위에 따른 권위를 현실적으로 인정받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따라서 그들에게 주어진 식읍도 현실적인 의미를 갖게 되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이러한 입부는 당시로서는 집권자라 하더라도 자신의 정권이 안정된 상태에서 가능했던 것 같다. 최이의 경우, 고종 8년에 입부를 거절했다가 동왕 21년에는 부를 설치한 사실이 이를 말해 준다. 최이가 고종 8년에 봉후입부를 고사했던 것은, 이 때가 그의 집권 초기였음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즉 자신의 독재체제를 구축하지 못한 시기였던 것이다. 이와는 달리 최이가 입부한 고종 21년은 그에 의해 강화천도가 이루어진 직후로서 그가 정권을 장악한 시기였다. 따라서 최항이 봉후입부를 고사한 것은 곧 그가 강력한 전권을 구축하지 못했음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최이의 후계자로 내정된 과정이나 권력승계의 과정에서 적지 않은 관료들의 반발을 감수해야 했던 최항은, 집권 이후 그의 심복에게 크게 의존하였다. 그의 심복으로는 우선 최씨가의 가노였던 이공주·최양백·김준 등을 들 수 있다. 또는 朴松庇나 宋吉儒도 빼놓을 수 없다. 이들과 아울러 문신으로는 宣仁烈과 柳能, 그리고 최항의 두터운 은덕을 입었다는 柳璥과 兪千遇를 꼽을 수 있다.

 최항의 심복들은 막강한 정치권력을 행사했었다. 정7품 별장에 불과했던 김준의 경우, 장군 송길유의 비행에 관한 안찰사 宋彦庠의 탄핵보고가 都堂에 올라 가지 못하도록 조치한 적이 있었다.080)≪高麗史≫권 122, 列傳 35, 宋吉儒. 최의가 집권한 직후의 일이기는 하지만, 이를 통해 최항집권기 사정을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국가의 통치질서를 무시한 김준의 이러한 행동은 최항의 심복이었기에 가능했다.

 집권자의 심복이 그들의 지위를 능가하는 권력을 행사한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다만 최항 심복들의 경우, 최충헌이나 최이의 심복들보다 그 정도가 지나쳤다는데 문제가 있다. 이는 최항이 그의 심복들에 의존하는 바가 컸음을 보여 준다고 하겠다. 또한 최항이 관리들 내부에 강력한 지지기반을 구축하지 못하였음을 감안하면 무리가 아닌 것이다.

 이러한 최항의 심복들은 최의가 권력을 승계한 것을 계기로 내부 분열을 일으켰다. 즉 김준은 최의가 최양백과 유능만을 총애하고 신임하여 자신을 소외시킨 데 대해 불평을 품었다 한다. 사실 정치권력의 핵심에 근접해 있는 심복들 간에 집권자의 총애를 독차지하기 위한 갈등은 있을 수 있는 법이다. 다만 집권자가 강력한 정치적 지지기반을 확보하고 있을 경우 심복들의 갈등은 표면화되기 어려운 것이다. 이와는 달리 집권자의 심복에 대한 의존도가 크면 클수록 심복들 간의 갈등은 심각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최항의 뒤를 이어 집권한 최의는 최항과 마찬가지로 모계가 천했을 뿐만 아니라 나이 가 어렸다. 그의 어머니는 장군 宋㥠의 여종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심복에 대한 그의 의존도는 클 수밖에 없었다. 그가 심복들의 갈등을 무마시킬 수 없었음도 무리가 아니다. 정권을 지탱해 온 심복들의 내부 분열은 결국 정권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최의를 제거하는 과정에서 김준은 추밀원사 崔昷과 상장군 朴成梓를 그 주모자로 내세웠다. 그런데 최온은 최항의 장인이었다. 鐵原崔氏인 그의 가문은 최충헌의 집안과 중첩적인 혼인을 맺은 당대 최고의 귀족가문이었다. 한편 박성재는 최항의 문객이었다. 김준이 최의 제거의 주모자로 이들을 내세운 것은 최씨정권과 밀착한 인물들의 호응을 얻기 위함이었다.

 최온과 박성재는 김준에게 협력하였다. 이는 최씨정권에 밀착되었던 다수의 인물들이 최씨정권에 불만을 품고 있었고, 따라서 최의 제거는 이미 기정 사실화되었음을 말해 준다. 결국 최씨정권은 오랫 동안 최씨가에 충성을 바쳐 온 인물들에 의해 막을 내렸다. 야별초와 신의군, 그리고 도방이 최의 제거에 이용되었음은 물론이다. 야별초나 신의군도 도방과 마찬가지로 최씨가의 사병처럼 이용되어 온 부대였음을 감안하면, 최의는 최씨정권이 의존해 온 군사력에 의해 제거되었음을 알 수 있다. 강력한 독재체제를 구축해 온 최씨정권을 무너뜨릴 수 있는 힘은 그 내부에서 나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후의 정치권력도 최씨정권과 밀착되었던 인물들이 장악했으리라는 점은 쉽게 추측할 수 있다.

<金塘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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