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8권 고려 무신정권
  • Ⅰ. 무신정권의 성립과 변천
  • 3. 무신란과 최씨무신정권의 역사적 성격
  • 1) 무신란의 역사적 의의

1) 무신란의 역사적 의의

 무신란은 고위 무신들의 정치적인 쿠데타가 아니었다.081)본고의 서술은 본 1장 1절의 주 1)과<崔滋의 ‘補閑集’ 저술동기>(≪震檀學報≫65, 1988)에 크게 의존하였다. 따라서 앞의 책이나 논문을 인용할 경우, 일일이 전거를 밝히지 않기로 한다. 난에 참여한 인물들의 성격이나 그들이 난에 참여했던 이유 등을 살펴 볼 때 그러하다. 애초에 난을 모의한 인물들은 국왕의 시위부대인 牽龍軍 소속의 장교들이었고, 여기에 고위 무신들이 참여하였다. 그리고 특히 주목되는 것은 미천한 신분 출신의 무신들을 비롯하여 일반군인들이 대거 참여하였다는 사실이다. 무신란은 이들 하급 무신들과 일반 군인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있었기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고위 무신들이 무신란에 가담한 목적은 의종의 총애를 독차지한 문신 몇 명의 제거에 있었다. 무신란에서 드러난 바와 같은 국왕의 제거나 다수 문신들의 살해는 염두에 두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이 난에 참여한 것은 그들이 불만을 품고 있던 문신 몇 명의 제거에 있었다. 무신란과 같은 커다란 변화는 결코 원하지 않았던 것이다. 당시 그들의 지위가 높았음을 염두에 두면 무리가 아니다. 급격한 변화는 그들의 지위를 위협할 소지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했던 만큼 무신란에 대한 그들의 태도는 소극적일 수밖에 없었다. 흔히 무신란의 三巨頭 중 하나로 알려진 鄭仲夫는 이러한 인물의 대표였다고 할 수 있다.

 한편 하급 무신들, 특히 그 가운데서도 미천한 신분 출신의 인물들은 무신란에 매우 적극적이었다. 玉靈寺 종의 아들이었던 李義旼의 경우는 그 대표적인 예가 될 것이다. 그는 무신란 직후 두 계급을 뛰어 넘어서 승진했는데, 무신란에서 죽인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물들은 그들의 불우한 처지를 개선해 볼 목적으로 무신란에 적극적이었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그들은 무신란을 일대 변혁의 계기로 삼았음이 분명하다. “文冠을 쓴 자는 비록 胥吏라고 하더라도 씨를 남기지 말라”는 것은082)≪高麗史節要≫권 11, 의종 24년 8월 병자. 이들에게 적합한 행동 지침이었던 것이다.

 하급무신들에 호응하여 “군졸들이 벌떼처럼 일어났다”고 한다.083)위와 같음. 군졸 즉 일반군인들이 봉기했다는 것은 통제가 불가능한 상태에 이르렀음을 말해 준다. 그들은 무신란을 통해 그들의 누적된 불만을 표출했던 것으로 이해된다. 온갖 力役에 시달렸던 그들은 무신란과 같은 기회가 오기만을 기다렸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제 문신이라면 누구를 막론하고 살륙하라는 상급자의 지시까지 있었고 보면 그들의 행동이 걷잡을 수 없게 된 것은 당연하다 하겠다. 그들은 문신 50여 인을 살해하는데 협력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가혹하게 굴었던 인물들을 색출하여 처단하였다.

 결국 하급 무신들과 일반 군인들의 참여로 인해 무신란은 애초의 계획과는 다른 방향으로 전개될 수밖에 없었다. 훨씬 과격한 양상을 띠고 확대된 형태로 무신란은 전개되었던 것이다. 국왕의 총애를 독차지한 문신 몇 명만이 제거된 것이 아니라, 서리까지 살해하라는 지시가 내려진 것으로 짐작되는 일이지만, 실제로 많은 문신들이 피해를 당했으며 국왕인 의종도 폐위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일반 군인들의 무신란에의 광범위한 참여는 지방민들에게까지 커다란 영향을 미쳤던 듯하다. 무신란으로 인해 지방으로 피신한 문신들을 지방의 주민들이 용납하지 않았다는 사실로 미루어 짐작된다.084)≪高麗史≫권 99, 列傳 12, 李知命. 또한 무신란 이후 서북 양계의 주민들이 끊임없이 중앙정부에 대항했던 것도 무신란의 영향이었다. 이와 아울러 명종 3년, 이의민에 의한 의종의 살해에 慶州民이 협력했던 것도 기존체제에 대한 경주민의 불만을 대변한 것으로 이해된다. 결국 무신란의 성공으로 고무된 것은 일반군인들 뿐만 아니라 지방민들도 마찬가지였다고 생각된다. 무신란 이후 민란이 빈발했던 이유 가운데 하나는 여기에서 찾아진다.

 무신란의 성공으로 성립된 최초의 무신정권은 李義方政權이었다. 이 이의방정권 아래서는 문신들의 반발이 두드러졌다. 명종 3년에 일어난 金甫當의 亂과 동왕 4년의 趙位寵의 亂은 그 대표적인 예가 될 것이다. 당시 김보당은 간의대부·동북면병마사였으며, 조위총은 서경유수였다. 따라서 이들은 어느 정도 무신정권에 협력한 문신들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이 태도를 바꾸어 무신정권에 반기를 든 것은 그들의 예상과는 달리 무신란 이후의 변화가 컸던 데에 그 원인이 있었지 않았나 한다. 그들 역시 의종 때에는 정치적으로 다소 소외된 인물들로서, 의종의 총애를 독차지한 문신들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무신란 이후와 같은 변화를 원한 것은 결코 아니었던 것이다. 사실 이의방정권은 무신란에서의 일반 군인들의 역할을 과소 평가할 수 없었다. 따라서 당시는 일반 군인들이 상당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던 시기였다. 명종 3년, 일찍이 延福亭의 터를 잡아 工役을 크게 일으키는데 일조를 했던 李公升을 이의방이 살해하려고 했던 것으로085)≪高麗史≫권 99, 列傳 12, 李公升. 미루어서도 짐작되는 일이다. 이의방의 이러한 행동은 공역에 동원되었던 일반 군인들을 의식한 행동이었다고 이해되기 때문이다.

 이의방정권 아래에서는 상·대장군의 합의기구였던 重房이 최고의 권력기 구화 되었는가 하면 문신만이 보임되던 지방관에 무신이 임명되기도 했다. 특히 김보당이 군사를 일으킨 직후에는 전왕인 의종을 살해하기까지 하였다. 국왕이 王朝를 상징하는 존재였음을 감안하면, 국왕의 살해는 기존체제에 대한 전면적인 부인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이의방정권을 무너뜨리고 성립한 정중부정권은 변화에 적극적이지 않았다. 그 자신 무신란에 소극적이었음을 감안하면 무리가 아니다. 따라서 하급 무신이나 일반 군인과 마찰을 빚을 수밖에 없었는데, 정중부정권은 그들의 반발에 강력하게 대처하지 못했다. 그들의 요구를 어느정도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무신란을 성공으로 이끄는데 그들의 역할이 결정적이었음을 감안하면 이상할 것은 없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점 때문에 정중부정권은 일부 고위 무신들로부터도 비난을 받아야 했던 것이다. 고위 무신들 가운데 상당수는, 하급 무신을 포함한 일반군인들에 의해 주도된 무신란 이후의 급격한 변화에 두려움을 느꼈던 것이다.

 고위 무신들이 무신란 이후의 급격한 변화에 불만을 품었음은 좋은 가문의 출신으로서 ‘復古의 뜻’을 품었다는 慶大升이 정권을 장악한 것으로도 미루어 알 수 있는 일이다. 경대승이 품었다는 복고는 무신란 이전의 상태로 되돌아가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그는 무신란이나 그 이후 성립된 무신정권을 부인한 인물이었다. 이러한 그가 정중부를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한 데에는, 정중부 정권이 하급 무신들의 변화에 대한 요구를 제어하지 못한 데 불만을 느낀, 고위 무신들의 묵인이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보수적 성향의 경대승은 집권기 동안 내내 정적으로부터의 위협에 시달려야 했다. 都房을 조직하여 이에 대처한 것으로 미루어 그의 불안이 어느 정도였는가 짐작할 수 있다. 그의 가장 커다란 정적은 두말할 나위도 없이 무신란을 성공으로 이끄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던 인물들이었다. 무신란에 참여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무신란을 부정하기까지 했던 경대승의 집권에 그들이 분개하지 않았을 까닭이 없었던 것이다. 결국 경대승은 이들에 대한 심리적인 불안을 극복하지 못한 채 30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뜨고 말았다.

 경대승이 죽은 후 정권을 장악한 인물들은 李義旼으로 대표되는, 무신란에 적극 참여함으로써 출세의 계기를 마련한 자들이었다. 그들 대부분은 한미한 가문의 출신들로서 限品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그들이 집권층으로 부상함에 따라 그들에게 씌워졌던 신분적 굴레는 자연스럽게 제거되었을 것이다. 기존의 신분질서가 그대로 유지될 수 없었음은 당연하다. 그들은 문벌이나 학식에 의존하지 않고, 자신의 힘에 의존하여 출세한 자들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인물들에 의해 주도된 이의민집권기는 그 이전과는 크게 다른 사회 분위기를 조성하였다.

 이의민정권은 崔忠獻에 의해 타도되었다. 그런데 최충헌을 비롯하여, 그의 이의민 제거에 협력한 무인들은 모두 좋은 가문의 출신들이었다. 그들은 이의민집권기의 급격한 변화를 달가워하지 않았던 것이다. 무신란을 계기로 정권을 장악한 미천한 신분 출신의 무인들이 좋은 가문 출신의 무인들에게 정권을 양도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은 고려가 신분제 사회였음을 알려 주는 단적인 예가 될 것이다.

 무신란 이후 최충헌의 집권에 이르는 약 25년 동안 5인에 이르는 무신 집권자들이 바뀌었다. 李義方·鄭仲夫·慶大升·李義旼·崔忠獻이 그들이다. 이처럼 많은 수의 무신 집권자가 등장한 것도 변화를 추구하는 자들과 보수적 성격의 무인들과의 갈등의 결과였다. 따라서 이러한 정권의 변동을 혼란으로만 이해해서는 안될 것이다. 무신란 이후 역사의 전개 과정에서 당연히 나타날 수밖에 없는 현상의 일부였던 것이다.

 결국 무신란과 이후 성립된 무신정권은 고려 역사에 커다란 변동을 초래하였다. 만일 무신란이 정중부를 비롯한 고위 무신들의 정치적인 쿠데타에 불과했다면, 이러한 변동은 초래될 수 없었을 것이다. 하급 무신들을 비롯한 일반 군인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러한 점에서 무신란은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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