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8권 고려 무신정권
  • Ⅰ. 무신정권의 성립과 변천
  • 4. 무신정권의 붕괴와 그 역사적 성격
  • 2) 임연·임유무 정권
  • (1) 임연의 출세

(1) 임연의 출세

 林衍은 鎭州를 관향으로 하는 향리 출신의 인물로 여겨진다.139)林衍의 아버지는 鎭州 향리의 딸과 결혼하여 林衍을 낳고 鎭州를 貫鄕으로 삼았다(≪高麗史≫권 130, 列傳 43, 叛逆 4, 林衍). 成鳳鉉은 高麗時代 향리가 향리 상호간의 혼인을 일반적으로 하고 있는 경우를 주목해서, 林衍과 그의 아버지가 향리였을 것으로 보았다(成鳳鉉, 앞의 글, 21쪽). 그는 몽고군사를 물리친 전공으로 選軍되어, 경군의 장교인 대정에 임명되었다. 그가 중앙에 진출한 후에, 김준과 직접 관계를 맺을 수 있었던 것은 남의 부인을 간통한 범죄 때문이었다. 이 때에 김준은 임연을 힘써 구하여 죄를 면하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천거하여 낭장이 되게 하였다. 이를 계기로 임연은 김준을 父로, 김승준을 숙부로까지 부르는 긴밀한 사이가 되었다.

 김준은 최의에게 그를 추천할 때 장사로서 쓸만한 인물임을 강조하였다. 그렇다면 그의 무사적 자질이 높이 평가되어, 진급과 동시에 최씨가의 사적 병력으로 활동하였을 것이다. 이후 그의 활동이 주로 야별초를 지휘한 점으로 미루어, 야별초의 부대장 같은 임무를 띠지 않았나 짐작된다.140)成鳳鉉, 위의 글, 24∼25쪽. 김준이 임연을 구원하였던 시기는 김준이 집권자인 최의한테 소외당하고 정치적으로 위기를 느끼던 최씨정권의 말기였다. 이러한 때 김준이 임연을 적극 구원하고 천거하였던 것은 김준이 정치적 위기를 당하여 자신의 세력을 강화할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임연의 무사로서의 자질은 김준이 그를 적극적으로 자기 세력으로 끌어들인 이유가 되었으리라 본다. 요컨대 林衍은 최씨정권 말기에 지지세력을 강화해 나가던 김준에게 무사적 능력을 인정받아 발탁되고 출세하게 된 김준의 심복이었다. 따라서 임연이 최씨가와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 할지라도, 김준에 대한 봉사와 충성이 더 우선할 수밖에 없었다.

 임연이 김준의 측근 정치세력으로 두각을 나타낸 것은 최의를 주살한「戊午政變」에서 핵심적인 주모자로 활약한 데에서 찾아진다. 그는 정변에 성공한 직후 8인의 위사공신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고 정치적 지위도 갑자기 상승하였다. 그의 무관직은 정변시 도령낭장이었다가 원종 3년(1262) 상장군으로 진출하였다. 그후 김준을 제거한 원종 9년(1268)에 그의 관직은 樞密院副使에 이르고 있다.141)≪高麗史≫권 130, 列傳 43, 叛逆 4, 林衍. 김준이 집권 후 정치세력을 재편하는 과정에서 대부분의 정변주체자들이 정계에서 제거된 반면 임연은 고위관직에까지 승진하였다.142)앞에서 검토한 바에 의하면 정변 직후 衛社功臣에 책봉된 8인의 정변주체자 가운데 金俊·金承俊·林衍만이 金俊政權의 말기까지 정치적 활동을 하였다. 李公柱의 경우는 정치활동에 관한 기록이 없는 점으로 미루어 일찍 死去하거나 정치 일선에서 물러났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는 그가 김준의 측근 심복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임연은 김준 형제 다음으로 손꼽힐 만큼 김준정권을 지탱시킨 핵심적 정치가로 성장할 수 있었다.

 金俊政權을 유지하기 위한 임연의 역량은 군사적인 활동에서 제일 먼저 찾아 볼 수가 있다. 임연이 김준의 여러 아들과 그의 일당을 살해하는데 이용한 군사력은 야별초였다.143)≪高麗史≫권 130, 列傳 43, 叛逆 4, 金俊. 그렇다면 김준정권에서 야별초는 임연의 지휘 아래에 있었고, 임연에 의하여 사적으로 동원될 수도 있었던 병력이라 할 수 있겠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임연이 야별초의 낭장으로 진출하여 김준집권기에 상장군으로 진급하였기 때문에, 그가 야별초를 지휘할 수 있는 상당한 권한을 가졌으리라 여겨진다. 더군다나 김준이 최씨가의 가노 출신임을 감안하면 김준은 야별초를 직접 장악하지는 못하였고, 그를 지지하는 야별초의 지휘관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통수한 것이 아닐까 한다. 정권을 장악한 뒤에도 임연은 정적을 제거하거나 국왕을 폐위하고 재추를 위협할 때마다 야별초-또는 야별초를 포함한 삼별초-의 군사를 동원하였다. 요컨대 임연은 야별초를 실질적으로 지휘할 수 있는 군사적 실력자로서 김준정권에 참여하였다고 본다.

 무신정권 하에서 군사적인 역량은 곧 정치·사회적 지위와 직결된다. 임연도 역시 군사적 역량을 배경으로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시켜 나갔다. 특히 그의 자녀들이 당대 명문의 자제들과 혼인한 것이 가장 두드러진 예이다. 임연은 그의 아들인 林惟茂를 孔巖 許氏 가문인 許珙의 딸과 억지로 혼인시키려 한 적이 있었다. 허공의 결사적인 반대에 부딪쳐 그 뜻을 이룰 수는 없었지만, 임연은 원종에게 호소하면서까지 그 혼인을 성사시키려 하였다.144)≪高麗史≫권 105, 列傳 18, 許珙. 그런데 공암 허씨 집안은 무신란 이전부터 이미 문벌귀족으로 입지를 굳힌 가문이다. 그 뿐만 아니라 무신집권기에도 허공의 부친은 추밀원부사를 지냈고, 허공 자신은 원종대에 승진을 거듭하여 동왕 10년에 右副承宣·吏部侍郎·知御史臺事에 오르는 등 여전히 유력한 문벌이었다.145)成鳳鉉, 앞의 글, 32쪽. 그렇다면 임연은 당대의 명문들과의 혼인을 통해 자신의 정치·사회적 기반을 강화하려고 의도했다고 하겠다. 이러한 사정은 그의 자녀들의 혼인관계를 추적해보면 더욱 분명히 밝혀질 것이다.

 허공에게 혼인을 거절당한 후에 임유무는 李應烈의 딸과 혼인했다. 이응렬은 出陸還都를 거부했던 최항정권의 핵심세력으로, 김준의 집권시에도 승선으로서 공신책봉에 관여하는 등 정치적 영향력이 적지 않았던 인물이다.146)≪高麗史≫권 24, 世家 24, 고종 41년 7월 무오.
<元宗三年 尙書都官貼>(≪李基白 編著,≪韓國上代古文書資料集成≫, 一志社, 1987), 79∼80쪽.
이후 그는 임연의 지지자가 되어 임연이 원종을 폐위시킬 때 적극 가담하기도 하였다.147)≪高麗史節要≫권 18, 원종 10년 6월 임진.
≪高麗史≫권 26, 世家 26, 원종 11년 5월 계축.

 蔡仁揆는 임연의 3남인 林惟梱을 사위로 삼았다. 그의 가문은 蔡松年이 최충헌의 신임을 얻어 참지정사에까지 올라 平康 蔡氏 가문을 일으킨 이래, 그의 아버지 蔡楨에 의해 무신정권기의 유력한 가문으로 성장하였다. 최항의 문객 대장군으로 활약했던 채정은 원종대에도 右副承宣·樞密院副使·御史大夫 등을 역임하였고, 鐵原 崔氏인 崔瑛과 통혼관계를 맺고 있었다.148)成鳳鉉, 앞의 글, 34∼35쪽.

 최영은 채인규의 장인으로 임유인의 처외조가 되므로 간접적으로 임연과 통혼관계가 있다. 철원 최씨는 고려시대 대표적인 귀족가문이었다. 최영의 4대조인 최유청은 무신란 이후에도 中書侍郞平章事를 지내는 등 가문을 보존하였으며, 아버지 崔宗峻도 고종 때에 15년간 문하시중을 역임했다. 최영 자신도 채정과 더불어 최항의 문객 대장군으로 최의의 권력 세습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최영은 원종 폐위사건에 가담한 임연의 측근 정치인이었다.149)成鳳鉉, 위의 글, 34쪽.

 임연의 사위인 崔宗紹는 世家 자제로서 임연의 집권 이전부터 임유무의 살해로 정권이 붕괴되기까지, 임연정권과 정치적 운명을 함께 하였다. 임연의 또 다른 사위인 洪奎는 무신란 이전부터 어느 정도 정치적 기반을 갖춘 南陽 洪氏 가문의 출신이다. 그의 아버지 洪진縉은 동지추밀원사를 지내는 등 당시의 정치적 실력자였다. 비록 나중에 임유무와의 사이가 갈라지게 되나, 홍규는 임연의 생존시에는 그의 사위로서 정치적으로도 밀집한 관계를 맺고 있었을 것이다.150)成鳳鉉, 위의 글, 35∼37쪽.

 이상을 통해 임연은 고려 전기 적어도 무신집권기부터 유력한 가문으로 성장한 집안들과 사돈관계를 맺었음을 알겠다. 이들 가문들은 임연과의 혼인을 통해 정치적으로 긴밀하게 연계되어 임연에게 정치·사회적 기반을 확대해 주었을 것이다. 그 결과 김준정권 말기에 이르면, 독자적인 정치세력이 임연을 중심으로 구축되어 있었다고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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