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8권 고려 무신정권
  • Ⅰ. 무신정권의 성립과 변천
  • 4. 무신정권의 붕괴와 그 역사적 성격
  • 2) 임연·임유무 정권
  • (2) 임연·임유무의 집권

(2) 임연·임유무의 집권

 金俊의 심복 중의 심복이었던 林衍은 김준이 집권한 후 10년째가 되던 원종 9년(1268)에 그를 게거하고 새로운 무신정권을 탄생시켰다. 이 사건의 직접적인 원인은 김준과 임연 사이의 관계 악화에 있었다. 김준의 집권이 임연의 정치적 지위를 갑자기 상승시킨 계기였지만, 김준의 독재체제가 강화되는 과정에서 임연은 점차 그로부터 소외되었던 것 같다. 衛社功臣의 서열상 변화에 다시 주목한다면, 고종 45년에 임연은 7위의 서열로 공신에 책봉되었다. 그러나 원종 3년에는 새로이 공신에 오른 김준의 여러 아들과 차송우에 밀려 그는 11위의 서열로 떨어졌다. 유경이나 박송비 등과 같이 실각하여 집권체제 밖으로 내몰리는 처지는 아니었으나 임연도 결코 김준의 독단적인 지배체제를 달가워하지 않았을 것이다. 임연이 독자적인 정치세력을 구축하려던 의도도 이와 같은 불만에서 비롯되었으리라 여겨진다.

 김준의 독단적인 지배체제가 강화됨과 동시에 임연을 중심으로 한 독자적인 정치세력이 형성되면서 이 두 사람의 관계는 악화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임연이 김준의 아들과 田地를 가지고 다툰 일이 있었는데, 이를 지켜본 김준은 자신이 죽은 뒤에 벌어질지 모르는 일을 크게 우려하면서 그를 경계하였다. 집권자가 생존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아들과 경제적인 이권을 두고 대결할 정도라면, 이보다 더 우려할 만한 일이란 정치적인 모반을 의미함은 쉽게 짐작이 간다. 마침내 임연의 처가 자기 손으로 종을 살해한 사건이 발생하자 김준은 그녀를 귀양보내고자 하였다.151)≪高麗史節要≫권 18, 원종 9년 12월 정유. 이에 이르러 두 사람 사이는 적대적 관계로 치달아 조만간 김준이 임연을 제거하지 않으면 안될 상황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드디어 원종 9년(1268) 12월에 임연이 김준을 살해한「戊辰政變」이 일어났다. 임연과 그의 아들 임유무는 정변을 계획하고 야별초를 동원하여 김준일당을 제거하는 등 정변의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한편 정변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인물들 가운데에는 임연의 측근자 내지는 심복으로 생각되지 않는 일군의 정치세력이 존재하였다. 가령 낭장 康允紹와 같은 사람이 그러하였다. 그는 본래 가노 출신이었지만 몽고어를 해득하여 원종의 신임을 받아 출세한 인물이다. 그는 임연을 사주하여 김준을 타도하도록 권하면서 한편으로는 국왕에게 김준을 제거할 수 있는 인물로서 임연을 추천하여 국왕의 긍정적인 반응을 얻어 내었다.152)≪高麗史≫권 123, 列傳 36, 嬖幸 1, 康允紹 및 권 130, 列傳 43, 叛逆 4, 金俊. 이러한 사실은 강윤소가 국왕의 총애를 받고 있었다는 점과 그가 김준을 타도하기 위하여 임연과 연합하게 되었다는 점을 밝혀 주고 있다.

 임연이 김준 일파를 제거하는 데에는 궁궐 안에 있는 宦者와 결탁하는 일이 중요하였는데, 그는 崔王恩과 金鏡 등을 통하여 원종으로부터 김준을 제거해도 좋다는 승낙을 받아냈다. 이들 환자들은 왕명이라 하여 김준과 김승준을 궁궐 안으로 끌어들여 抄 金尙挺·宦者 金子廷 그리고 그의 동생 金子厚 등에게 명령하여 암살하도록 하였다. 궁궐 안에서 使命에 대비하는 관노였던 抄와153)洪承基, 앞의 책, 346쪽. 국왕의 측근인 환자들이 직접 김준 형제를 살해하였다는 점을 미루어 보아, 원종이 정변의 주체자였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정변의 진행과정을 살펴보면, 원종과 그의 측근세력은 거사에 참여하는 것을 두고 여러 차례 망설였던 적이 있다.154)≪高麗史節要≫권 18, 원종 9년 12월 정유. 그만큼 김준세력이 두려웠 기 때문이다. 김준정권의 성립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던 대부분의 무신들이 여전히 김준을 지지하던 상황이고 보면, 당시에 임연과 원종이 이들과 상대한다는 것은 결코 간단하지 않았으리라 짐작된다.155)元宗과 林衍을 연합시킨 康允紹가 원종에게 金俊의 제거를 권유하며 언급한 내용을 보면, 김준과 임연 사이가 좋지 않았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었으며, 당시에 여러 공신들이 모두 김준과 더불어 잘 지냈으나 오직 임연만이 그에게 붙지 않았다고 한다(≪高麗史≫권 130, 列傳 43, 叛逆 4, 林衍). 더군다나 정변 이전에 원종이 임연을 간흉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두 사람 사이 또한 원만하지 못했다.156)≪高麗史≫권 105, 列傳 18, 許珙.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종이 임연과 연합하여 김준을 제거하려고 하였던 이유는, 원종도 임연 만큼이나 절박한 정치적 위기에 직면했기 때문일 것이다.

 김준은 독재체제가 굳어져 가면서 최씨집권자와 다름없이 왕권까지도 억압하는 초월적인 권력을 휘두르며 국정을 마음대로 하기에 이르렀다. 원종 9년 3월에 김준은 자신의 항몽책에 반대한 원종을 폐위시키려고 하였다. 고려의 태자가 입조하여 강화를 맺고 몽고군이 철수한 지 꼭 10년이 되지만 고려의 出陸還都는 이루어지지 않았고 지금까지 몽고가 정복한 나라에서 빠짐없이 요구했던 군사징발을 비롯한 여러가지 사안도 해결되지 않고 있는 시점에서, 몽고는 당시의 실력자 김준과 그의 자제를 입조토록 요구해 왔다. 이에 대하여 그는 입조 요구를 거부했을 뿐 아니라 몽고 사신을 죽이고 더 깊은 海中으로 천도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 주장을 왕이 받아들이지 않자 김준은 원종을 폐위시킬 것까지 고려하였다.157)≪高麗史節要≫권 18, 원종 9년 3월.

 이 해 11월 그러니까「戊辰政變」이 일어나기 불과 한 달 전에 김준이 국왕에게 바치는 御膳을 마음대로 빼앗은 사건도 발생했다. 그의 아들 金皚의 종이 龍山別監 李碩과 사소한 감정이 있던 중 이석의 배가 대궐에 바치는 음식물을 싣고 강에 대자 김준이 야별초를 보내어 그 어선을 빼앗았다는 것이다. 김준의 사적인 감정이 왕권까지도 무시한 하나의 사례로서, 원종이 김준을 더 한층 증오하는 계기가 되었다.158)≪高麗史節要≫권 18, 원종 9년 11월. 따라서 원종은 자신의 왕위를 지키기 위하여 그와 대적할 만한 역량을 갖춘 임연의 도움을 필요로 하였던 듯싶다.

 김준정권을 붕괴시킨 주모자는 임연과 국왕이겠지만, 이들의 거사가 당시의 정계에서 지지를 받아야 했을 것이다. 특히 김준정권을 떠받들어 왔던 무신들의 호응이 필요했으리라는 점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대장군 李汾禧나 동지추밀원사 趙璈와 장군 趙允蕃 부자가 무진정변의 위사공신이 된 이유를 여기서 찾을 수 있겠다. 이들이 정변에서 어떤 활약을 했는가는 알 수 없다. 이는 달리 말하면 김준 일당을 제거하는 일을 주도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의미이다. 이분희는 그의 동생 李槢과 함께 김준의 심복이 되었으며 아울러 원종의 총애를 받았던 인물로, 그의 아버지인 대장군 李松이 崔怡의 문객이었던 이래로 무신정권에서 견고한 토대를 마련한 실력자였다. 임연은 김준을 죽이고 이분희를 의심하여 그를 회유코자 대장군으로 승진시키고 곧이어 다시 상장군을 제수하였다.159)≪高麗史≫권 123, 列傳 36, 嬖幸 1, 李汾禧. 이분희가 임연과 원만한 관계를 갖지 못하였는데도 위사공신이 된 것은 그가 당시 무신집권층 내지는 국왕의 폭넓은 지지를 받았기 때문이 아니었나 한다. 이런 추측은 趙璈의 경우를 보더라도 마찬가지다. 조오는 평소에 공손한 인품으로 사람들의 인심을 얻었다고 한다. 더군다나 그는 나중에 임연이 원종을 폐위할 때 병을 칭탁하여 참여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원종의 복위 직후에 일어난 임연의 암살 모의에 깊이 관여하였다.160)成鳳鉉, 앞의 글, 42쪽. 요컨대 임연과는 정치적 성격을 달리하는 무신들이 무신정변의 공신이 되었으며, 이들은 임연보다도 국왕인 원종을 보위하는 입장에 있었다고 보아진다.

 정변의 성공으로 국왕과 임연으로 대표되는 두 정치세력 사이에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다. 이듬해인 원종 10년(1269) 6월, 임연은 야별초를 동원하여 金鏡·崔王恩을 살해하고 어사대부 張秀烈과 대장군 奇蘊을 유배보냈다. 임연의 주장에 따르면 김경 등을 제거한 이유는 이들이 원종과 공모해서 자신을 살해하려 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또한 장수열 등은 김준의 집 재산을 적몰하여 그 보화를 김경과 최은에게 뇌물로 주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김경과 최은은 김준을 제거할 때 공을 세운 宦者였고 장수열은 원종의 신임을 받는 인물이었다. 기온도 원종의 서모가 낳은 누이의 사위로 機密에 참여하던 터였다.161)≪高麗史節要≫권 18, 원종 10년 6월. 그렇다면 이들 모두는 원종의 측근세력이라 할 수 있고 이는 임연과 원종의 측근세력들 사이에 권력투쟁을 시사한다. 당시 정국의 판도가 김경 등에게 기울고 있었고 이에 불안을 느낀 임연이 먼저 원종의 측근을 제거한 것이라 하겠다.

 그런데 임연이 장차 자기를 해칠까 두려워한 인물에 원종도 포함되어 있었다. 원종의 측근을 제거한 임연은 곧 이어 원종이 이들과 공모하여 자기를 살해하려 했다는 이유로 재추에게 국왕 폐위를 요구하였다.162)≪高麗史節要≫권 18, 원종 10년 6월 임진. 그가 김준을 거세하고 집권하는데 결정적 도움을 준 원종이지만, 자신이 권력을 휘두르는데 거북한 존재였고, 또 몽고와 연계되어 親蒙으로 기운 원종이 있는 한 그의 정치적 장래가 불안하였던 것이다. 임연은 폐위를 기도한 지 3일 뒤에 삼별초와 도방을 동원하여 원종을 상왕으로 물러선 형식을 취하게 하는 한편, 원종의 아우인 安慶公 淐을 옹립하였다.163)≪高麗史≫권 26, 世家 26, 원종 10년 6월 을미. 그리고 그 자신은 창에 의하여 교정별감에 임명되었고, 비로소 무신정권의 집권자로서의 면모를 갖출 수 있었다.164)≪高麗史≫권 26, 世家 26, 원종 10년 7월 병오.

 그러나 원종의 폐위는 국내외의 반발을 받게 되었다. 마침 몽고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이 소식을 들은 태자는 다시 몽고로 돌아가 특별한 조치를 호소하였다. 몽고는 강력한 어조로 그 일을 비난하며 원종의 복위를 명하였다. 동시에 원종과 임연의 입조를 요구하는 조서를 보내면서 몽고군의 고려 진입을 준비하였다. 임연은 의외로 강경한 몽고의 압력에 굴복하여 폐위 5개월만에 원종을 복위시키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165)≪高麗史≫권 26, 世家 26, 원종 10년 11월 갑자. 대몽관계 속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난 임연정권의 한계는 국왕의 친위집단을 크게 고무시켰던 것으로 보인다. 즉 원종이 복위된 후 15일만에 친위적 성격의 무신들에 의해 임연을 살해하려는 기도가 있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사전에 임연에게 알려지게 되어 실패하였다. 임연 살해를 모의했던 대표자인 조오는 戊辰政變에서 衛社功臣에 책봉된 자다. 임연이 원종을 폐위하고 권세를 멋대로 휘두르게 되자 조야의 마음이 조오에게 돌아갔다고 한다. 임연에 의한 국왕의 폐위는 대다수의 조정관료들이 임연정권에 등을 돌리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본다. 이와는 반대로 친위적 무신인 조오는 복위한 원종과 정계의 지지를 받으며 정치적으로 부상하였고 마침내 임연의 제거에 앞장섰던 것이다.166)成鳳鉉, 앞의 글, 45∼46쪽.

 원종 10년 12월 친위적 성격의 정변이 실패하자 원종은 돌연히 몽고로 떠나갔다.167)≪高麗史≫권 26, 世家 26, 원종 10년 12월 경인. 이는 몽고의 입조 요구에 응하는 것이었으나, 정변의 실패에 따른 신변상의 안전이 불투명했기 때문일 것이다. 원종 11년(1270) 초에 몽고에 도착한 그는 원의 世祖를 만나 혼인 및 군대를 청하였다.168)≪高麗史≫권 26, 世家 26, 원종 11년 2일 갑술. 몽고 왕실과의 혼인이 성사된다면, 원나라는 고려 왕실의 막강한 정치적 배경이 될 것이라는 계산이었다. 또 몽고의 군사를 빌어 임연을 제거하고 왕정복고를 기도하고자 했다. 원종은 元帝에게서 병력지원만을 허락받아 元軍을 거느리고 고려에 돌아왔다. 그 동안 불안감 속에 삼별초를 각 섬에 보내어 入保하게 하고 몽고와 항전할 준비를 갖추던 임연은 등창으로 사망하고 말았다. 監國을 맡았던 順安侯 琮은 그의 아들 임유무를 교정별감으로 삼아 그 지위를 계승시켰다.169)≪高麗史≫권 26, 世家 26, 원종 11년 2월 을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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