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8권 고려 무신정권
  • Ⅰ. 무신정권의 성립과 변천
  • 4. 무신정권의 붕괴와 그 역사적 성격
  • 3) 붕괴기 무신정권의 성격

3) 붕괴기 무신정권의 성격

 최씨정권이 몰락한 이후에도 金俊과 林衍 부자는 각기 교정별감이 되어 무신정치를 계속하였다. 이들도 역시 최씨집권자와 다름없이 왕권까지도 침해하는 초월적인 권력을 휘둘렀다. 예컨대 김준은 원종 9년에 국왕에게 바쳐져야 할 內膳船을 탈취하고, 몽고의 사신을 죽이고자 한 음모를 반대하였다는 이유로 원종을 폐위시키고자 하였다. 임연의 경우는 실제로 원종을 폐하고 安慶公 淐을 세우기까지 하였다.

 이런 점은 문무 원로 중심의 공식적인 정부에 대하여도 마찬가지였다. 원종 9년 3월에 김준과 그 일파가 몽고 사신을 살해할 것을 결정하고 이를 재추에 고하니 그들은 깜짝 놀랐으나 감히 반대하지 못했다. 이런 사례는 임연정권에서도 찾아진다. 원종 10년 6월에 임연이 원종을 폐위하고자 재추에 의논할 때, 재추들이 감히 대답하지 못하였고 결국 侍中 李藏用도 어쩔 수 없이 임연의 뜻에 따르기로 결정하였다.

 이상에서 김준이나 임연정권이 무신정권으로서의 특성을 잘 드러냈지만, 이들 정권이 최씨정권에 비하여 분명히 약체화되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전형적인 무신정권이라 할 수 있는 崔氏政權이 집권자의 확고한 지위와 독자적인 기구의 수립·막대한 사병집단의 형성 그리고 강대한 경제력의 축적을 특징으로 하였는데 대하여, 김준·임연은 그 모든 것이 이보다 약화되었고, 이러한 경향은 김준에서 임연으로 이어짐에 따라 더하여 갔던 것이다.

 정계의 지지를 기대하기 어려웠던 김준은 각별히 군사력에 의존해서 정권을 유지하고자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무력장치로서의 사병은 최씨가의 그것에 비하여 훨씬 미약할 수밖에 없었다. 최씨가의 사병집단 중에서도 가노들을 중심으로 구성된 家兵만을 통수하였던 김준이고 보면, 그가 집권과 동시에 최씨가의 사적 병력이나 그 밖의 군사력을 자신의 수중에 완전히 장악하기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김준정권의 군사적 기반 가운데 상당 부분이 다수의 무인 공신들에 의해 점유되었고, 이 점은 곧 김준에게 치명적일 수 있었다. 임연에 의해 그의 정권이 무력하게 쓰러지게 된 까닭도 여기서 찾아진다.

 원종의 밀명에 의해 임유무를 제거함으로써 무신정권에 종지부를 찍게 한 장본인은 御史中丞 洪奎와 直門下省事 宋松禮였다. 홍규는 임유무의 매부 즉 임연의 사위로 무신란 이전부터 이미 어느 정도의 정치적 기반을 구축하여 온 南陽 洪氏 일족이었다. 명문과의 혼인으로 정치세력을 강화하고자 했던 임연이 결국 자신의 정치적 배경이 되었던 자에 의해 몰락한 것이다. 또 한 사람의 주모자인 송송례는 戊午政變에 낭장으로 참여해서 同力輔佐功臣으로 책봉되었던 인물이다.170)<元宗三年尙書都官貼), 앞의 책, 84쪽. 따라서 그는 김준·임연정권에 참여하여 고위관료로 출세하였다. 그의 아들인 衛士長 宋琰과 宋玢은 임유무를 주륙한 직접적인 실행자였다. 특히 송분은 당시에 神義軍 別抄를 통수하는 장군의 직임을 맡았으므로 신의군을 송송례에게 속하게 할 수 있었고, 신의군을 이끌고 左右邊三別抄所에 이르러 삼별초를 회유하여 그들을 임유무의 주륙에 동원하였다.171)≪元高麗紀事≫至元 8년(고려 원종 12년) 정월 12일. 명문가인 친인척을 배경으로 한 정치적 기반과 삼별초의 군사력 위에 성립한 임연정권이고 보면, 그 자체의 기반은 매우 위태로운 것이었다.

 무신정권을 유지한 군사적·정치적 기반이 미약해짐에 따라 무신집권자로서의 김준과 임연의 지위도 확고할 수 없었다. 특히 이들과 국왕과의 관계는 아무래도 최씨집권자의 그것과는 큰 차이가 있었다. 김준이 국왕에게 바치는 內膳船을 빼앗은 후, 원종의 나무람을 받자 당황하여 되돌리려 했던 사건이나, 몽고 사신을 죽이고 더 깊은 海中으로 천도하자는 김준의 항몽책을 국왕이 정면으로 반박하여 받아 들이지 않았다는 사실을 살펴 볼 수 있다. 최씨가의 항몽책을 무력하게 따를 수밖에 없었던 이전의 왕권과는 사뭇 다르다 하겠다.

 이 시기 왕권의 신장에 따른 또 하나의 변화는 무신정권을 몰락시킨 주체가 바로 국왕이었다는 점이다. 비록 임연과의 연합이 있기는 하였으나, 김준의 주륙을 원종과 그의 측근이 직접 모의하고 실행하였다. 무신정권의 종식을 의미하는 임유무의 제거도 원종의 명령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다. 임연정권은 수립 초기 단계부터 이른바 친위세력들의 도전을 받게 되었다. 宦者들과 국왕의 측근세력이 임연과 벌인 권력투쟁이나 원종의 복위 직후에 일어난 친위적 성격의 무신정변은 그 대표적인 사건이겠다. 더구나 김준정권을 유지시켰던 무인 공신들조차도 임연정권기에 들어서면서, 무신집권자에게서 이탈되어 국왕의 세력에 가담하는 상황이 전개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김준을 몰락시킨 임연 자신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했다. 과거 무신집권자의 교체가 국왕과는 무관하게 진행되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들이 마음대로 국왕을 폐위하거나 옹위하였던 사실에 비추어 보면, 왕권의 강화와 그에 상반되는 무신정권의 약화를 확인하게 된다.

 무신정권의 붕괴와 관련하여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외부로부터의 압력이었다. 몽고세력의 간섭이 무신정권의 존속을 불가능하게 만든 것이다. 누구나 다 아는 바와 같이 항몽정책의 주동자는 무신정권이었으므로 몽고는 무신집권자에 대하여 압력을 가하였다. 이와는 반대로 무신정치로 무력화된 왕권은 대외적으로 몽고세력과 결합함으로써 강화되었고 대내적으로는 독자적인 무신정권의 지속을 방해하게 된 것이다. 어떻게 보면 崔氏政權의 몰락 자체도 장기간에 걸친 몽고와의 항쟁에 의한 내부적 분열이라 할 수 있고, 김준의 주륙도 결국은 그의 심한 독재와 항몽태도로 원종과의 사이가 나빠진 데 원인이 있었다. 더 나아가 林衍政權은 그 스스로가 폐위한 원종을 몽고의 압력으로 복위시키지 않으면 안 되었던 정치적 현실에 직면하면서, 그 몰락이 예고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鄭修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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