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8권 고려 무신정권
  • Ⅱ. 무신정권의 지배기구
  • 1. 사병의 형성과 도방
  • 1) 사병의 형성

1) 사병의 형성

 武臣政權이 유지되기 위한 필수적인 요건으로 군사력의 밑받침이 있어야 한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 군사력 가운데는 국가의 公的인 군사력과 개인에 의하여 사적으로 통제되는 군사력이 있을 수 있다. 물론 공적인 군사가 사적인 목적으로 사용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무인들이 처음 정권을 장악하던 때에는 국가의 공적인 군사집단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욕구를 성취하였다.172)旗田巍,<高麗武人の政權爭奪の形態と私兵の形成>(≪古代東アジア史論集≫上, 吉川弘文館, 1978), 374쪽.

 그런데「武臣政權」이 지속되면서 권력의 핵심에 위치한 무인들은 사적인 무력집단을 거느리기 시작하였다. 우리가 흔히 私兵이라고 말하는 군사가 바로 이들이다. 무인들이 권력을 계속 보유하기 위해서는 무력기반이 필요하였으며, 특히 자신을 위해 충성을 다하는 사적 성격이 강한 무력집단이 요구되었다. 무인들 간에 계속 정권 장악을 위한 싸움이 벌어지는 상황 아래서 자신의 신변을 보호하여 주고, 상대방의 세력을 견제할 수 있는 사적 집단이야말로 자신의 존립과 직결되는 문제로 인식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무신정권시대 사적 군사집단의 역할을 하는 사병이란 그 범주가 사실 확실하지 않다. 일 개인에게 종속되어 그로부터 명령을 받고 행동하며, 그로부터 경제적 급부를 받는 사병과 비록 공적인 지위를 가지고 있지만 개인에게 사적으로 종속되어 그를 위해 활동하는 사적 성격을 가진 군사가 확실히 구별되지 않기 때문이다. 무신정권 시대의 경우 일 개인의 조직에 종속되어 그를 위하여 사적인 군사활동을 하는 사람 모두를 사병의 범주에 넣고 있다. 이러한 사병은 처음부터 제도적 장치를 통하여 구성된 것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사병을 지칭하는 용어는 그 집단을 거느리는 무인들마다 달리 표현하였으며, 그 형성 시기도 일정하지 않다. 사병의 구성원에 대하여 살펴 보는 것이 사병이 어떻게 형성되어 갔는가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사병의 구성원과 관련하여 먼저 惡少에 대하여 언급하기로 하겠다. 악소는 무뢰배를 의미한다고 하겠다. 그러나 무신 집권기에 보이는 악소는 단순한 무뢰배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173)鄭杜熙,<高麗 武臣執權期의 武士集團>(≪韓國學報≫8, 一志社, 1977), 80∼82쪽.
旗田巍, 위의 글, 387∼389쪽.
무신정권 초기의 핵심적인 인물 가운데 하나였던 李高는 악소들과 몰래 결탁하여 반역을 기도하였다고 한다.174)≪高麗史節要≫권 12, 명종 원년 정월. 이고가 가까이 한 악소는 군사적 활동을 할 수 있는 무사집단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경대승과 같이 정중부를 제거한 許升 등도 악소를 몰래 길러 자신의 세력으로 삼고 있었다.175)≪高麗史≫권 100, 列傳 13, 慶大升. 이로 보아 악소와 같은 무리가 무신의 사병집단으로서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런데 이 악소의 무리에 포함된 이들이 신분적으로 열악한 위치에 있던 사람들로만 구성되었던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鄭國儉이 길가에서 행패를 부리는 악소 5, 6인을 잡아들이도록 하였는데 대장군의 생질과 권세있는 집안 자제 내지는 조카들이었다 한다.176)≪高麗史節要≫권 12, 명종 9년 3월. 악소의 무리 가운데는 무신 가계와 연계되는 이들이 있었으며, 이들이 무리를 지어 탈법적인 행동을 일삼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악소로 표현된 이들이 처음부터 특정한 개인의 사적 군사집단으로 활동하였다고 보여지지는 않는다. 다만 무리를 지어 행동하다가 특정인의 사적 군사력의 일원으로 포용된 것으로 이해된다.

 악소들이 사적 군사기반으로 활용되었다 할지라도 이들이 아직 조직적인 집단은 아니었던 것같다. 수적인 면에서 많은 편도 아니었던 것으로 여겨지며, 실제 행동도 조직적으로 나타나기보다는 비밀리에 특정인과 결탁하여 무리를 지어 행동한 것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177)위에 언급한 이들이 대개 惡少를 모으면서 몰래 불러들였다 한다.

 악소보다 특정 무인과 더욱 개인적으로 강하게 결합한 집단이 死士, 勇士 등으로 표현된 무력집단이다.178)鄭杜熙, 앞의 글, 82∼84쪽.
旗田巍, 앞의 글, 390∼394쪽.
死士는 慶大升과 관련하여 기록이 나오는데, 명종 8년(1178) 청주사람들이 청주 출신으로 京籍에 올랐다가 퇴거한 사람들과 반목하여 그들을 죽이자, 서울에 거주한 그 일파가 死士를 모아 청주사람들과 싸움을 벌이는 사건이 일어나게 된다.179)≪高麗史≫권 100, 列傳 13, 慶大升. 또한 경대승은 死士를 모아 정중부를 제거하고, 100여 인 이상의 死士를 불러 모아 도방을 조직하였다.180)위와 같음. 이로 보아 死士는 특정한 개인의 목적을 위하여 모아진 무사집단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이들이 경대승의 도방 구성원이 된 것으로 보아 어느 정도 조직력을 가진 사병 집단으로 발돋움하였다고 하겠다.

 死士 외에 勇士라고 표현된 무력집단도 보인다. 李義旼은 경대승이 정중부를 죽이고 집권하자 놀라 용사를 집에 모아 두고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였다 한다.181)≪高麗史≫권 128, 列傳 41, 叛逆 2, 李義旼. 이들 용사를 거느리고 이의민은 자신의 집과 그가 사는 마을을 보호 하고자 하였다. 이들이 어떠한 부류의 사람들이었는가는 알 수 없으나 개인에게 예속되어 사적인 군사력을 제공하는 집단이었음은 분명하다고 하겠다. 이들 역시 死士와 비슷한 부류였다고 여겨지며, 조직적인 무사집단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하겠다.

 死士나 勇士로 표현된 사람들은 惡少보다는 수적인 면에서나, 조직면에서 앞선 집단이었다고 보아도 좋을 것 같다. 그 만큼 그들을 거느린 무인은 세력이 강한 사람들이었으며 그들 집단에 대하여 어떠한 대가를 지불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이들 사사나 용사들은 공공연하게 자신의 신분을 노출시키면서 활동할 수 있었으며 사적 결속력도 악소에 비하여 강하였다고 할 수 있겠다.

 위와 같은 부류 이외에 壯士·將士 등으로 불리워지는 집단도 보인다. 亡伊·亡所伊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정부는 장사 3,000명을 모집하여 토벌에 나서고 있으며,182)≪高麗史節要≫권 12, 명종 6년 2월. 崔忠獻이 이의민을 제거하고 집권할 당시에도 이러한 부류의 군사집단이 가담하고 있다.183)≪高麗史節要≫권 13, 명종 26년 4월. 이들이 어떠한 군사인가는 분명하지 않다. 장사의 경우 용사와 비슷한 의미로 쓰여진 것으로 이해되나, 이들이 중앙의 정규군과 관련이 없는 무사집단이라고 단언하기는 어렵다.184)정두희는 이들을 국가의 정규군에 소속하지 않은 무사집단으로 보고 있다(앞의 글, 84쪽). 다만 공적인 기능을 수행하는 것보다는 사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사적 결합체로서의 성격이 강한 것은 분명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적 결합체로서의 사병의 형성과 관련하여 빼놓을 수 없는 집단의 하나가 家僮 즉 家奴이다. 가동이라고 불리는 집단은 가노로서 원래 군사적 기능을 가진 것은 아니었으나 무신정권 아래에서 유력한 무인들은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가노를 군사력으로 이용함으로써 자신에게 가장 충성할 수 있는 세력집단을 형성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가동의 군사적인 활동이 드러나는 것은 이의민이 최충헌에게 제거될 때이다. 최충헌 등이 이의민을 제거하자 이의민의 아들 대장군 至純과 장군 至光이 가동을 이끌고 최충헌에게 대항하였던 것이다.185)≪高麗史節要≫권 13, 명종 26년 4월. 이들 가동은 이의민의 사적 군사집단으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개인의 가노 이외에 관노비도 군사적 역할을 담당한 기록이 보인다. 최충헌이 이의민을 제거할 무렵 상장군 吉仁 등이 禁軍·宦官·奴隷 등 1,000여 인을 거느리고 최충헌에 맞섰다.186)위와 같음. 여기의「노예」가운데는 개인의 사노도 포함되어 있을 수 있으나, 주로 왕실과 관련있는 관노가 대상이었을 것이다. 이들 관노는 평소에 군사적인 역할을 한 것은 아니고 임시로 군사로 편성되었다고 하겠다. 하지만 군사로서 활동할 수 있는 기회가 빈번하지 않았나 여겨진다.

 이처럼 ‘노예’ 특히 그 가운데 가노들이 무인들에게 예속되어 군사적 활동을 함으로써 사병으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해냈다고 하겠다. 특히 가노들은 자신의 주인의 세력이 강하였을 경우는 그 세력을 믿고 불법적인 일도 자행하였던 것 같다. 정중부가 집권한 이후 그의 家僮과 門客이 불법적인 행동을 한 것은 그 일례라고 할 수 있다.187)≪高麗史節要≫권 12, 명종 4년 12월.

 가노들이 사적인 군사로서 활동하는 경우는 무신집권 초기부터 노골적으로 이루어졌을 것으로 여겨지지만, 조직적으로 활동하게 된 것은 최충헌정권이 들어선 이후라고 생각된다. 崔瑀는 崔沆에게 家兵 500여 명을 나누어 주었다고 하는데 이 때 가병은 최씨가의 家奴들로 구성된 사병집단이었을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188)洪承基,<崔氏武人政權과 崔氏家의 家奴>(≪高麗貴族社會와 奴婢≫, 一潮閣, 1983), 289∼292쪽. 또는 최씨가의 사적인 군사 전부를 일컫는다고 보는 의견도 있다.189)旗田巍,<高麗の武人崔氏の家兵>(≪白初洪淳昶博士還曆紀念史學論叢≫, 1977), 5∼6쪽. 이에 따르면 都房, 馬別抄 등 최씨가의 모든 사병이 이에 포함된다고 할 수 있다. 가병이라는 용례는 최씨가의 사병을 전부 지칭하는 경우도 있으며, 가노로 구성된 집단만을 의미하는 경우도 있다고 이해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최항이 집권한 이후에는 가노 출신들이 최씨가의 권력의 핵심에 진출하고 있다. 이로 미루어 짐작하건대 최충헌이 집권한 이후, 특히 최우의 집권 이후 최씨가는 가노로 구성된 가병집단의 세력을 확대하여 나갔음을 알 수 있다.

 가노가 중심이 되어 구성된 가병은 가노 출신 가운데서 최씨정권의 측근으로 떠오른 이들이 지휘 통솔하였다. 李公柱·崔良伯·金俊 등이 바로 가병의 지휘자에 해당하는 사람들로 이들은 최항의 정권 승계에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으며, 최항이 죽고 崔竩가 정권을 승계하는 데에도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들이 그러한 행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가노로 구성된 가병이 최씨가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그 만큼 커졌기 때문이었을 것이다.190)洪承基, 앞의 글, 286∼294쪽.

 무신정권 시대에 사병 본연의 성격을 가장 강하게 내포하고 있었던 집단은 아마 가노로 구성된 집단이었다고 여겨진다. 이들은 주인에 대한 충성심의 면에서도 다른 어떤 무사집단보다도 강한 면모를 가졌으며, 주인과의 관계 역시 절대적인 복종으로 일관되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들이 무신집권기 동안 특정한 무인과 사적인 결합관계를 통하여 무력기반을 제공한 무사집단의 일반적 형태는 아니었다. 무신정권 시대에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사적 군사집단의 형태는「門客」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문객이란 무인 권력자의 휘하에 있는 부하를 일컫는 것으로 무신정권 시대 무인들은 각자 문객을 거느리고 있었다. 문객은 무신정권이 성립하던 시기에 보이고 있는데, 李義方이 장군 蔡元을 살해하면서 그의 문객도 죽이고 있다.191)≪高麗史節要≫권 12, 명종 원년 4월. 채원의 문객은 그의 휘하에 개인적인 친분으로 연계되어 있었던 무인들을 지칭한다. 그리고 이의방의 형 이준의도 문객을 거느리고 있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이의방도 문객을 거느리고 있었는데, 정중부가 이의방을 제거하자 그의 문객 將軍 李永齡, 別將 高得時, 隊正 敦章 등이 이의방을 위하여 복수하려다 일이 발각되어 유배당하였다.192)≪高麗史≫권 128, 列傳 41, 叛逆 2, 李義方.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보아 무신정권 초기 무인 가운데 세력 있는 자는 거의 자신의 문객을 거느리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의방을 죽이고 정권을 장악한 정중부도 문객을 거느리고 있었다. 정중부의 문객은 가동과 함께 불법적인 일을 일삼고 있었는데, 문객들이 자신의 우 두머리 무인의 세력을 믿고 멋대로 행동하더라도 제어하기가 곤란하여졌던 것이다. 경대승의 문객은 일반 양가의 자제를 죽이고도 경대승이 구원하여 주어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고 있다.193)≪高麗史≫권 100, 列傳 13, 慶大升. 이것은 문객과 그 우두머리와의 관계가 더욱 강한 연계 속에 맺어지고 있음을 암시하여 준다. 우두머리가 문객을 보호하는 만큼 문객들도 그 우두머리에게 충성을 다하여야 했을 것이다. 최씨정권이 들어선 이후에도 문객은 여전히 사적인 무력기반을 제공하는 집단으로 남아 있었다.

 무신정권 시기 동안 무인 가운데 세력이 있는 자들은 대부분 자신의 문객을 거느리고 이를 개인적인 무력기반으로 삼았기 때문에 문객집단이 바로 무신정권기의 사병집단을 대변하여 준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어떠한 사람이 특정한 개인의 문객으로 수용되었는가는 한마디로 대답하기 곤란하다. 이의방의 문객 가운데는 중앙군의 장군, 별장, 대정 등 무관이 포함되어 있었다. 무신정권 초기에는 중앙군에 소속되어 있는 무반이나 하급 군인 가운데서 무인 세력자와 개인적인 관련을 맺고 있는 사람이 주로 문객으로 선택되어진 것으로 보여진다. 무인 집권자들이 문객을 확보할 수 있는 가장 쉬운 길은 자신이 거느린 중앙군 가운데서 자신의 측근세력으로 포섭하는 방법이었을 것이다.

 사적 무력기반의 대상이었던 악소나 死士, 壯士 등도 문객집단으로 포섭되 어 갔던 것같다. 경대승의 경우 사사로 표현된 이들을 대상으로 도방을 구성 하였다. 그런데 경대승이 거느린 문객 역시 도방의 구성인과 차이가 없었다고 보여진다.194)金鍾國,<高麗武臣政權の特質に關する一考察>(≪朝鮮學報≫17, 1960), 56∼57쪽. 따라서 도방에 소속한 사사도 문객으로 지칭되었다고 보아도 좋을 줄 안다. 장사라고 표현된 사람들도 문객으로 포용되어간 흔적이 최충헌정권 때에 보인다.

 이들은 문객 가운데서도 하층부를 구성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문객의 상층부는 중앙군의 무관급 이상의 관직을 역임한 무반들이 자리잡고 있었을 것이다. 물론 문객집단이 엄격한 상하관계로 묶어진 것은 아니라고 여겨지기 때문에 그들 사이에 철저한 명령·복종관계가 이루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동일한 문객집단에 소속하였을 경우 고위 관직을 역임한 사람이 그문객의 우두머리와 더욱 친밀한 관계에 있었을 가능성이 높으며, 문객집단 내에서도 더 많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문객집단이 주로 사적인 무력기반을 제공하였다고 하여 무인들로만 구성된 것은 아니었다. 문객 가운데는 문인도 포함되어 있었다.195)鄭杜熙, 앞의 글, 85쪽.
旗田巍, 앞의 글(1978), 400쪽.
무신정권 초기에는 문인이 문객으로 편입되는 경우는 희소하였을 것이지만, 무신정권이 지속되면서 무인 뿐만 아니라 문인도 자신의 측근 세력으로 편입하여 정치적인 면에서 도움을 받을 필요가 생겨났을 것이기 때문이다. 최우가 문객 가운데 名儒를 3번으로 나누어 書房을 두었다는 사실은 이를 증명하여 준다.196)≪高麗史≫권 129, 列傳 42, 叛逆 3, 崔忠獻 附 怡.

 이처럼 무인을 중심으로 문인을 일부 포용하여 이루어진 개인의 문객집단은 어떻게 그 우두머리와 문객과의 관계를 설정하고 있었을까. 문객집단이 사적결합체로서 무력을 제공하고 있었다는 점만을 강조하다 보면 내부의 관계가 엄격한 상하관계에 의해 결속되어 있는 것처럼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실상이 그렇지만은 않았던 것같다. 가노를 제외하고, 무신정권기 동안 사적인 결합은 세력자의 일방적인 명령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무인들은 자신을 필요로 하는 무인 세력자에게 자발적인 의사에 의하여 문객으로 가담하고 있는 것이다.197)鄭杜熙, 앞의 글, 88∼91쪽.

 악소를 모아서 무리를 만든 무인들도 강제로 그들을 자신의 세력으로 편성한 것이 아니고 자발적으로 가담하도록 권유하였으며, 경대승이 도방을 만들 때도 자유 의사에 따라 死士를 모집하였다. 최충헌이 이의민을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할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문객으로 가담한 이들은 자발적인 의사에 의하여 행동하였던 만큼 그들을 불러 모은 무인 세력자도 그들에 대하여 엄격한 명령에 따른 복종관계를 유지하기는 곤란하였을 것이다.

 이들의 관계는 일 개인에 의한 집권이 확실시 되기까지는 오히려 자율적인 상하관계로 유지되는 정도였을 것이다. 경대승의 경우는 都房을 설치하고 때로 도방의 구성원과 같이 잠자리를 하는 등 세심한 배려를 하고 있다.198)≪高麗史≫권 100, 列傳 13, 慶大升. 이것은 바로 자신이 도방의 구성원과 동일한 입장에 놓여 있음을 보여 주고자 한 것이다. 비록 다른 무인 세력자들이 경대승과 같은 행동을 취하지는 않았다 할지라도 그들의 문객이 요구하는 것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최충수의 경우, 그의 문객 가운데 장군직을 가지고 있던 이들의 압력을 받아 그의 형 최충헌과의 대결을 최종 결정하고 있다.199)≪高麗史≫권 129, 列傳 42, 崔忠獻. 이것은 문객들의 입장을 완전히 무시할 수 없었음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문객들에 대한 대우도 그들 집단의 관계가 서로의 이해관계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문객에 대한 대우는 경제적 급부나 문객집단 내에서의 지위·인정 등을 통하여 이루어지기도 하였으며, 관직을 차지할 수 있도록 하거나 승진시켜 주는 방법을 통하여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주로 문객집단 내의 개인적인 차원에서 주어진 대우로서 물질적으로 보상하여 주는 사례를 들 수 있다. 최씨 무신정권 시대 최씨가에서 銀甁을 미끼로 그의 문객을 모집하거나 또 문객에게 자신의 재산을 나누어 주는 것이 바로 그러한 경우이다.200)≪高麗史≫권 129, 列傳 42, 崔忠獻.

 이러한 문객집단 안의 차원에서 이루어진 보상 이외에 문객에 따라서는 관직을 얻고자 하는 경우도 있었던 것 같다. 최충헌은 그의 문객에게 무관직을 주고 있다. 최충헌은 자신이 정권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마음대로 관직을 제수하여 줄 수 있었던 반면, 그럴 만한 입장에 있지 못한 무인 세력자의 경우는 자신의 문객에게 관직을 얻어 주기 위하여 애쓰고 있다. 최충헌이 집권하는 데에 공헌하였던 朴晋材는 자신의 문객을 거느리고 있었는데, 그의 문객 가운데 관직을 얻은 자가 적어 불만을 가졌다 한다.201)≪高麗史節要≫권 14, 희종 3년 5월. 즉 개인적인 차원에서의 보상도 중요하였겠지만 국가 권력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하여 주는 것이나 승진의 기회를 제공하는 것도 문객집단을 유지하는 데에 중요한 요소였다고 하겠다.

 특정한 무인 세력자에게 소속한 문객집단도 자신의 우두머리가 더욱 강력한 지위를 획득하거나 유지하는 데에 최대한 노력을 기울였을 것이다. 그럼으로써 자신들에게 돌아오는 반대 급부가 늘어날 것이고, 상대적으로 다른 문객집단의 우위에 설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들이 추종하는 무인 세력자가 제거되면, 그의 문객집단도 대부분 제거되거나 도태되는 것도 바로 이 같은 세력 다툼에서 빚어진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사적인 무력기반을 제공하기 위하여 형성된 문객집단은 군사적인 임무 이 외에도 그의 우두머리를 위한 개인적인 일까지도 하는 경우가 있었다. 崔瑀가 문객 장군을 시켜서 나무심는 일을 감독하도록 하였던 것은 그러한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202)≪高麗史≫권 129, 列傳 42, 崔忠獻 附 怡. 문객 구성원들은 그들이 추종하는 무인 세력자가 경제적 부를 확대할 수 있도록 도와 주었으며, 여러 가지 일상적인 일에도 참여하였던 것같다. 그럼으로써 문객집단의 역할이 더욱 강조되고, 무신정권이 몰락하기까지 문객집단이 무인 세력자의 세력기반으로서 계속 존재한 것이 아닐까 여겨진다.

 무인 집정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무력기반을 제공한 사적 결합체 이른바「사병집단」은 여러 가지 용어로 표현되어졌다. 그러한 집단은 무신집권 초기에는 조직적인 형태로 등장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무신정권이 지속되면서 수적인 면에서 증가하고 더욱 사적 관계가 강조되는 집단으로 변화하고 있다. 그 가운데는 더욱 체계적으로 조직된 도방과 같은 기구도 있으며, 가노를 중심으로 구성한 가병도 포함되어 있다. 그렇지만 무신정권이 지속되는 동안 가장 보편적인 사적 무력기반으로 나타나는 것은 문객집단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사병 집단은 상호 이해관계에 따라 성립되었으므로 절대적인 명령·복종관계보다는 자율적인 상하 복종관계를 고리로 존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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