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8권 고려 무신정권
  • Ⅱ. 무신정권의 지배기구
  • 2. 중방과 교정도감
  • 2) 교정 도감

2) 교정 도감

 敎定都監은 최충헌에 의하여 설치되어 서정을 관장하고 모든 지시와 명령을 내리던 일종의 정청으로서, 최씨정권이 몰락하고 나서도 그 遺制는 金俊을 거쳐 林衍·林惟茂까지 계승되었다. 그리고 최충헌이 교정도감을 설치하고 스스로 그 장의 직인 敎定別監이 되었는데, 그 직은 최우-최항-최의로 이어지다가 최씨정권이 몰락된 뒤에는 김준-임연-임유무로 이어지면서 군국의 서무를 오로지하였다.

 이 교정도감에 대하여≪高麗史≫百官志 諸司都監各色條에 “최충헌이 정권을 오로지 함에 모든 일이 교정도감으로부터 나왔다”라고 되어 있어 이것만 보아서도 그 권능이 막강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교정도감이나 교정별감은 최충헌에 의하여 처음으로 설치된 특별기구로 무신정권의 최고 정청이 되었다. 교정도감이 공적 기구화 되었다는 것은≪高麗史≫百官志 諸司都監各色 조항에 버젓이 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점과 그 장의 직인 교정별감을 왕이 임명하였다는 점만으로도 족히 짐작할 수 있다. 이렇듯 교정도감과 교정별감이 정식 기구화된 것은 그것이 무인집정(무신집권자)의 기구로서 그 위력에 압도되어 어찌할 수 없는 데서 가져온 왕권의 후퇴 현상으로 보여진다.

 교정도감을 설치한 경위를 살펴 보면 다음과 같다. 최충헌이 이의민 일당을 제거하고 나서 집권하자 최충헌을 제거하기 위한 사건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신종 원년(1198)의 萬積의 난과 그 이듬해의 金俊琚의 난에 뒤이어 희종 즉위년(1204)에는 장군 李光實 등 30여 인이 밤에 給事同正 池龜壽의 집에 모여 최충헌을 제거하기 위한 모의를 하다가 이 사실이 발각된 일이 있었다. 또 동왕 5년 4월에는 靑郊驛(開豊郡)吏 3인이 최충헌 부자를 살해하려고 승도를 규합하기 위하여 公牒을 위조하여 여러 사찰에 돌렸는데, 그 공첩이 歸法寺에 이르자 그 절의 중이 공첩을 가지고 온 자를 잡아 최충헌에게 고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최충헌은 곧 迎恩館에 교정도감을 설치하고 그 일당을 수색하였는데, 청교의 吏員이 右僕射 韓琦 및 그의 세 아들을 들어 무고하므로 이들과 다시 장군 金南寶 등 9인을 죽이고 그들의 從者를 먼 섬으로 귀양보냈다. 이처럼 교정도감은 희종 5년에 최충헌이 반동분자를 숙청하기 위하여 설치한 임시 기구였다. 그러나 그 후 계속 존치되면서 최씨정권의 권부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김준과 임연 부자로 이어지면서 이를 통하여 군국의 서정을 오로지 하였던 것이다.

 역대의 권신은 교정도감의 우두머리인 교정별감에 임명되고 그 직책으로써 일국의 정치를 좌우하였다. 따라서 이 직책은 권신으로서 필수의 직책이었으며, 이런데서 이 직책은 권신의 세습적 직책과 같은 것이 되고 말았다.

 처음 최충헌대에는 자신이 스스로 교정별감이 되지는 않은 듯하다. 이러한 점은 고종 2년 11월 尹世儒가 국왕에게 교정별감에 임명해 줄 것을 요청한 사실을 미루어 보아 그러하다. 최우 역시 교정도감을 통해 자신의 정권을 유지하기는 했지만 그가 교정별감에 임명되었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최항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처음으로 교정별감에 임명된 사실이 나오는 것이다. 최항은 최우의 서자로서 일찍이 출가하여 禪師가 되고 그 이름을 萬全이라 하다가, 고종 34년(1247)에 父에 의하여 환속되어 左右衛上護軍에 임명되고 다시 뒤이어 樞密院知奏事에 임명되는 등 군직에 있다가 아버지의 직을 이어 교정별감에 임명되었다.

 그런데 최의는 최항의 사생자로서 군직을 주어도 이를 거절하고 殿中內給事의 직에 있다가 부직을 이어 교정별감에 임명되었다. 즉 최항이 죽자 왕은 최의를 먼저 借將軍에 임명하고 뒤이어 교정별감에 임명하였는데, 차장군의 임명은 교정별감에 임명하기 위한 한 절차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교정별감으로 임명하기 위하여 차장군에 임명한 것은 최의의 경우에만 보이는 것이나, 이것은 그가 군직에 있지 않았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사실을 미루어 볼 때 장군 내지 군직에 있지 않은 자는 교정별감에 임명되지 못하였음을 짐작케 하여 준다. 장군 내지 군직에 있는 자로서 교정별감에 임명하여 국정을 재량케 한 것은 무신정권의 성격을 잘 드러내는 것으로서, 최씨정권이 몰락된 후에도 김준은 장군으로서, 임연 부자는 대장군 또는 군직자로서 각각 교정별감에 임명되어 군국의 서정을 오로지 한 것도 같은 흐름에서 이해할 수 있다.

 한편 교정별감과 임명 사례는 다음과 같다.

1. 고종 36년 11월 임신에 최이(우)가 죽으므로 최항을 樞密院副使·吏部尙書·御史大夫로 삼았고, 뒤이어 동서북면병마사를 겸하게 하고 또 교정별감을 삼았다(≪高麗史≫권 23, 世家 23, 고종 36년 11월 및 권 129, 列傳 42, 叛逆 3,崔忠獻 附 怡·沆).

2. 고종 44년 윤4월 정해에 최항이 죽자, 殿前 崔良伯이 숨겨 發喪하지 않고 칼을 어루만지며 侍婢를 꾸짖어 울지 못하게 하고 宣仁烈과 함께 야별초·신의군·서방 3번·도방 36번을 모아 최의를 옹위하고 이에 발상하니, 왕이 곧 최의를 借將軍에 제수하고, 또 교정별감을 삼았다(≪高麗史≫권 24, 世家 24, 고종 44년 윤4월 및 권 129, 列傳 42, 叛逆 3, 崔忠獻 附 沆).

3. 원종 5년 8월 을사에 참지정사 김준을 교정별감으로 삼아 국가의 非違를 규찰케 하였다(≪高麗史≫권 26, 世家 26, 원종 5년 8월).

4. 원종 10년 7월 병오에 安慶公 淐이 임연을 교정별감으로 삼았다(≪高麗史≫권 26, 世家 26, 원종 10년 7월).

5. 원종 11년 2월 을미에 임연이 등창이 나서 죽자, 順安侯 琮이 임유무를 교정 별감으로 삼았다(≪高麗史≫권 26, 世家 26, 원종 11년 2월).

 위의 기사에서 주목되는 것은 1의 최항, 2의 최의, 3의 김준의 경우는 왕이 교정별감에 임명하였으나, 4의 임연과 5의 임유무의 경우는 왕이 아닌 안경공 淐과 순안후 琮이 각각 교정별감에 임명하였다는 점이다. 그러나 임연의 경우 그가 원종을 폐하고 안경공 창을 왕으로 삼아 창으로부터 임명되었으므로 왕이 임명한 것과 다름이 없으며, 임유무의 경우도 원종이 몽고에 들어가면서 국사의 감독을 위임받은 순안후 종(원종의 제3왕자)이 임명한 것이므로 이것 또한 왕이 임명한 것과 다름이 없는 것이다.

 교정도감은 위에서도 말한 것과 같이 최충헌이 비상시국에 대처하여 긴급조치로 두어진 기구였으나, 그 비상사태가 수습된 후에도 존속되면서 최씨정권의 중추적 권부로서 그 기능을 발휘하였을 뿐만 아니라 뒤로 내려오면서 그 기능은 더욱 강화되었다.

 고종 14년(1227)에 최우는 교정도감으로 하여금 禁內 6官(궁내 6관, 즉 秘書省·史館·翰林院·寶文閣·御書院·同文院)에게 통첩하여 과거에 급제한 자로 아직 관직에 나아가지 않은 자 가운데 재주가 있는 자를 천거케 하였는데,231)≪高麗史節要≫권 15, 고종 14년 2월.
≪高麗史≫권 129, 列傳 42, 叛逆 3, 崔忠獻 附 怡.
이것을 보면 교정도감이 인사행정권도 행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짚고 넘어갈 것은 인사행정권에 있어서 교정도감과 정방과의 관계이다. 최씨정권에 있어서 인사행정을 전담하던 정방이 설치된 것은 고종 12년(1225)인데, 위에서 보이는 것과 같이 정방이 설치된 2년 뒤인 고종 14년에도 교정도감이 인사행정권을 행사하고 있다. 원래 최씨정권에서 인사행정권을 행사하던 곳은 교정도감이었으나, 그 임무를 전담하는 기구로 政房이 설치됨으로써 인사행정권이 정방에 이속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렇게 인사행정권이 정방에 이속되었다고 하지만, 교정도감으로서는 원래 인사행정권을 행사하여 왔고 또 최씨정권의 최고기관으로서 인사행정권에 간여할 만한 처지였던 까닭에 정방이 설치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교정도감에서 인사행정을 행하였던 것으로 믿어진다. 그러나 그 인사행정권은 어떠한 정책적인 것이었을 것이고, 실질적인 인사행정권은 정방에서 행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또 교정도감은 지방행정에까지 관여하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고종 15년(1228)에 한 승려가 慈惠院을 지으려고 江陰縣(金川)에서 목재를 벌채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사건은 그러한 실례를 보여준다. 즉 監務 朴奉時가 별채를 금하고 그 목재를 몰수하므로, 그 승려가 대장군 大集成과 결탁하여 드디어 최우에게 청하여 敎定所 곧 교정도감의 공첩을 얻어 보냈으나 들어 주지 않았다. 이에 대집성이 창피하고 분하게 여겨 최우에게 호소하여 박봉시를 먼 섬으로 귀양보냈다는 사건232)≪高麗史節要≫권 15, 고종 15년 8월.
≪高麗史≫권 129, 列傳 42, 叛逆 3, 崔忠獻 附 怡.
이 그것이다.

 이와 아울러 고종 37년(1250)에 최항이 교정도감의 공첩으로써 情州의 雪緜·安東의 璽絲·京山(星州)의 黃麻布 海陽(南海)의 白紵布와 모든 別貢 그리고 金州(金海)와 洪州(洪城) 등지의 魚梁船稅를 면제케 하였으며 각 도의 敎定收獲員을 불러 돌아오게 하고 그 임무를 안찰사에 위임하여 인심을 수습하게 하였다는 기록이 나타난다.233)≪高麗史節要≫권 16, 고종 37년 정월.
≪高麗史≫권 129, 列傳 42, 叛逆 3, 崔忠獻 附 沆.
이것을 볼 때 교정도감은 전국의 공물과 특별세(별공) 등 세정도 맡고 있었음을 알 수 있고, 또한 그 임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교정도감에서 직접 수획원 즉 징세원을 각 도에 파견하였다는 사실을 알게 해 준다. 그러나 수획원들은 그 임무를 행함에 있어 행패가 컸다. 곧 고종 45년에 최의가 장군 邊軾·낭장 安洪敏·산원 鄭漢珪로 江華收獲使를 삼아 수탈을 감행하니 백성들의 불평이 많았다는 것이다.234)≪高麗史節要≫권 17, 고종 45년 정월.
≪高麗史≫권 129, 列傳 42, 叛逆 3, 崔忠獻 附 怡.

 고종 44년(1257)에 별장 李成義·劉正이 몽고에서 내투한 사람들을 꾀어 함께 몽고로 도망하려고 하다가 李陽이 敎定所(교정도감)에 고하자 그들을 잡아죽였으며,235)≪高麗史≫권 24, 世家 24, 고종 44년 7월. 원종 5년(1264)에는 왕이 몽고로 떠나면서 김준으로 하여금 監國케 함에 앞서 그를 교정별감에 임명하여 국가의 비위를 규찰케 하였다.236)≪高麗史≫권 26, 世家 26, 원종 5년 8월. 이것을 보면 교정도감이 형옥과 규찰의 임무도 수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위에서 교정도감의 기능에 대한 사례를 들어 보았다. 이것을 다시 정리하여 보면 교정도감은 인사행정·지방행정의 통제·징세·형옥·규찰 등의 기능을 발휘하였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교정도감은 무신정권의 정청으로 내외의 국가 중대사를 시행하는 권력기구였으며, 위의 사례들은 그 구체적인 내용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단지≪高麗史≫百官志 諸司都監各色條에 교정도감에 대하여 “최충헌이 정권을 오로지함에 모든 일이 교정도감으로부터 나왔다”라고 하였고, 또≪高麗史≫崔忠獻傳에도 “충헌이 교정도감을 두어 모든 일을 맡아 다스리게 하였다”라고 한 것을 보면, 무신집권자(權臣)들의 교정도감을 중심으로 한 권력행사는 비단 인사 행정·지방행정의 통제·징세·형옥·규찰 뿐만 아니라 국정 전반에 걸친 광범위하고 강력한 것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무신정권기를 정중부에서 이의민까지를 제1기(성립기), 최씨정권기를 제2기(성숙기 또는 전성기), 그리고 김준에서 임유무까지를 제3기(붕괴 또는 몰락기) 로 나눌 때, 교정도감은 제2, 3기에 존재하였다. 특히 제2기인 최씨정권기 교정도감은 무신집권자의 집권부로서 모든 권력행사를 다하여 실질적으로 왕권을 능가하는 기능을 발휘하였다고 여겨진다.

<閔丙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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