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8권 고려 무신정권
  • Ⅱ. 무신정권의 지배기구
  • 4. 별초군의 조직
  • 2) 지방별초

2) 지방별초

 地方別抄는 京外別抄 또는 外別抄라고도 하는데, 이는 京別抄(三別抄)290)金潤坤, 앞의 글, 163쪽에서 경별초를 개경별초로 해석하였고, 金塘澤은 앞의 글, 312쪽에서 삼별초를 고유명사로, 경별초를 보통명사로 구분하였다.에 대칭되는 말이다. 이들은 이름 앞에 주현의 이름을 붙이거나 신분을 나타내 는 다양한 명칭을 띤 부대였다. 이들 역시 주로 몽고군과의 전투를 담당하여 혁혁한 공훈을 세우지만 그들의 편성은 아마 그때 그때의 필요에 따라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았고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차츰 상비적인 성격을 지닌 부대들도 생겨났을 것이다.291)池內宏, 앞의 글, 82∼87쪽 및 金庠基, 앞의 글, 114∼115쪽 참조.

 전술한 바와 같이 별초의 기록은 후대로 내려오면서 많이 보이는데 사료상에서 가장 먼저 나타나는 것이 慶州別抄이다. 신종 5년에 원래 永州(慶北 永川)와 사이가 벌어져 있던 경주별초군이 雲門(慶北 淸道)의 적과 大邱에 있는 符仁寺 및 桐華寺의 승도를 이끌고 영주를 공격하자, 영주의 李克仁 등이 정예를 이끌고 성을 나가 크게 싸워 이를 패주시켰다고 했다.292)≪高麗史≫권 21, 世家 21, 신종 5년 10월. 이를 보면 신종 5년 이전에 이미 중앙의 별초군 뿐만 아니라 지방군에도 별초가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즉 무신집권기를 전후해서 기존의 고려 병제와 마찬가지로 중앙에는 삼별초(경별초)가 조직되어 있었고, 지방에는 지방 자체의 방어체제인 지방별초가 조직되어 있었던 것같다. 이 별초도 위에서 살펴본 별초와 같이 지방군에서의 결사대·별동대로서의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들은 대개 都護(安北)別抄·渭州別抄·泰州別抄·牛峯別抄, 忠州別抄 등과 같이 그 지역명을 붙여 불렀으며, 때에 따라 양반으로 조직된 양반별초와 노비·잡류로 된 奴軍·雜類別抄 등 신분에 따른 구별도 있었다.293)≪高麗史節要≫권 16, 고종 19년 정월.
金庠基, 앞의 글, 114쪽 및 閔丙河, 앞의 글, 178∼180쪽 참조.

 이러한 지방별초의 편성은 고종 때에 와서 보편화었는데, 이는 몽고와의 관계가 그만큼 긴박한 것임을 보여준다.294)金庠基, 위의 글, 114∼115쪽 및 김재홍, 앞의 글, 50∼51쪽, 그리고 閔丙河, 위의 글, 177∼180쪽과 申安湜, 앞의 글, 73∼77쪽 참조. 따라서 이때부터의 지방별초의 활 약은 삼별초의 대몽항전과정과 동일한 선상에서 그 의미를 찾아야 할 것이다. 이처럼 지방별초와 몽고병과의 충돌은 이미 제1차 살리타(撒禮塔)의 침입 때부터 일어났는데, 바로 고종 18년 9월에 몽고병이 龜州에 이르자 西北面兵 馬使 朴犀 및 靜州分道將軍 金慶孫 등을 도와 몽고의 대병력을 물리친 것이 최초였다.295)≪高麗史節要≫권 16, 고종 18년 및 金庠基, 위의 글, 114쪽 참조. 그리고 지방별초의 전법과 전술 등은 삼별초와 유사한 유격전술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요컨대 州縣別抄 가운데에서도 경주와 같은 큰 고을에는 지방 치안의 필요상 평상시에도 별초를 둔 곳이 있었던 것 같으나, 대부분의 주현별초는 외적의 침입과 지방폭동에 대비하기 위하여 수시로 필요에 따라 조직된 것이었다. 앞에서 예거한 각종의 주현별초는 몽고침략을 기점으로 조직된 것으로 보인다. 즉 김경손이 李延年의「草賊」을 격파할 때에 수시로 뽑아들인 별초라든지, 扶寧別抄 全公烈이 본래 醫業擧人으로서 별초가 되어 몽고병을 격퇴하고 그 공으로서 본업으로 입사하였다296)≪高麗史≫권 23, 世家 23, 고종 23년 10월.든지 하는 것은 그러한 사실을 알려 주는 좋은 예가 된다. 이처럼 일시적 필요에 의하여 조직된 주현별초는 최충헌의 지휘하에 있었던 戰鋒別抄와 같이 변란이 종식되자 해체되었던 것이다.297)池內宏, 앞의 글, 82∼87쪽 참조. 어떻든 이들 지방별초는 독립적 부대라기보다는 임시 편성의 특별부대였고, 이들의 임무는 지방의 동란과 외적의 침입을 방비하며 지방보위를 유지하는데 있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한편 이들 지방별초와 삼별초와의 관계에 대한 자료가 거의 없기 때문에 양자의 관계를 알 수 없는 형편이지만, 지방별초가 보편화되어 간 고종 이후의 경우를 놓고 볼 때 그들은 모두 몽고병을 방어하거나 격퇴하는데 서로 호응하여 활동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결국 지방별초의 역할이나 그 공적은 역시 삼별초의 대몽항쟁과 동일한 맥락에서 찾아져야 한다.

 야별초가 조직된 것이 언제인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최우집권기의 일임에는 틀림없다. 그 설치목적은 농민폭동군을 제압하기 위한 것으로, 서울과 각 지방에 야별초를 파견하여 폭동군을 제압하게 하였는데, 그 수가 너무 많아 좌우별초로 나누었던 것이다. 이때 지방에 파견된 야별초의 분견대와 기존의 지방별초와의 관계를 보면 양자의 합류도 생각할 수 있겠지만, 대부분은 독자적 지방별초로서 기존의 지위를 그대로 유지하였던 것으로 보인다.298)閔丙河, 앞의 글, 180쪽.

 지방별초의 설치 시기는 앞서 본 별초군의 예와 같이 숙종 때의 특별부대인 別武班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2군 6위의 정규군이 무력해졌을 때 尹瓘의 건의에 의해 조직된 것이 바로 이 별무반이다. 별무반은 전국의 양반·서리로부터 상인·노예에 이르기까지 말을 가진 자는 神騎軍에, 말을 갖지 못한 자와 20세 이상의 남자로서 과거를 보지 못한 자는 神步軍 및 특수부대인 跳蕩·精弩·發火軍에 편입하고, 또 승도를 뽑아 降魔軍에 편성함으로써, 신기군(기병)을 중심으로 한 신보군(보병), 항마군(승병)의 3군으로 편제되었다. 이로써 예종 2년 윤관이 원수가 되어 17만의 군사로 함흥평야에 나가 여진을 정벌하고 그곳에 9성을 쌓았다. 이 별무반은 후의 별초와 같이 임시적이고 선취적이며 기동적인 특별부대였다. 이 사실은≪高麗史≫에서 “별무반은 옛 제도에 부합하지 않으나 한때 이를 이용하여 공을 거두었으니 목적을 달성하였다고 하겠다”299)≪高麗史≫권 81, 志 35, 兵 1, 總論.라고 한 것으로 보아 그것의 임시성을 알 수 있다. 또 별무반은 병력 충원의 대상이 양반에서 노비에 이르렀다고는 하지만, 그 대상자를 전원 징집한 것이 아니므로 결국 선취의 형식을 취하였다고 할 수 있으며, 그 편성에 있어서도 기병에 중점을 두었으므로 정규군보다 기동력이 더욱 우세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300)김재홍, 앞의 글, 42∼43쪽 및 閔丙河, 앞의 글, 182∼183쪽 참조.

 이러한 점에서 볼 때 규모나 편제 등에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임시적으로 선취한 특수부대라는 점에서 뒷날의 별초와 상통함이 있다. 그러므로 후세에 내외의 변란이 있을 때 편성된 각종 별초는 그 이전의 별무반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믿는다. 어떻든 지방별초군은 중앙의 별초군, 즉 삼별초의 역할과 마찬가지의 임무를 띠고 그에 대한 보강과 번상 그리고 지방 자체적인 방어를 담당하였던 것이다.301)申安湜, 앞의 글, 74쪽.

 이들의 활동 가운데 중앙의 야별초와 연합전신을 구축하여 혁혁한 공을 세운 예로서 다음의 사료가 주목된다.

야별초군이 砥平縣 사람들과 함께 몽고군을 야간에 쳐서 죽이고 사로잡은 것이 매우 많았으며 말과 나귀를 노획하여 나라에 바쳤다(≪高麗史≫권 22, 世家 22, 고종 23년 10월).

 즉 야별초와 지평현(현 京畿道의 楊平郡) 사람들이 밤에 몽고군을 습격하여 많이 죽이고 사로잡았다고 하였다. 여기서 야별초와 지방농민들이 연합전선을 형성해서 게릴라 전법으로 몽고군을 섬멸시켰음을 알 수 있다. 이 전법은 대몽항쟁 초기부터 제주도에서 삼별초군이 최후 항전하기까지 거의 일관되게 사용되었던 것 같다.302)金潤坤, 앞의 글, 161쪽. 이밖에도 지방별초 가운데 大府島(남양)의 별초가 珍島로 남하한 삼별초정부와 호응하여 밤에 仁州(仁川) 경계의 蘇來山 아래에 나아가 몽고병 100여 인을 살해하고 봉기한 사실도 있다.303)≪高麗史≫권 24, 世家 24, 고종 3·43년 4월. 대몽항쟁 전 기간에 걸쳐 주체적인 역할을 담당한 것은 정부군이 아니라 이들 지방별초군이었다. 또한 이들은 이른바「초적」들과 규합하여 항몽전선을 구축하였는데, 여기에 노비·부곡민들까지 가세하여 아군의 사기를 높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304)지방별초군의 대몽항쟁에 관한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 논문이 주목된다.
關丙河, 앞의 글.
金潤坤,<抗蒙戰에 參與한 草賊에 對하여>(≪東洋文化≫19, 嶺南大, 1979).
―――, 앞의 글, 162∼16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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