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8권 고려 무신정권
  • Ⅲ. 무신정권기의 국왕과 무신
  • 1. 국왕의 권위
  • 2) 국왕의 권위

2) 국왕의 권위

 무신집권기 무신들의 전횡으로 왕권이 크게 위축된 상황에서도 고려왕조가 붕괴되지 않고 존속할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일까. 이에 대한 해답은 먼저 출신가문이 미천한 집권무인들이 전통적 신분사회에 대한 잠재의식을 불식할 수 없었고, 고려왕조를 상징하는 국왕의 권위를 무시할 수 없었던 데서 찾게 된다. 명종 때에 일어난 무신정권에 대한 반란이나 집권무인들의 정권투쟁은 바로 국왕의 권위를 배경으로 하여 전개되었던 것이다.339)金塘澤,<高麗 崔氏武人政權과 國王>(≪高麗武人政權硏究≫, 새문사, 1987).

 국왕의 살해가 반란이나 정권투쟁의 명분으로 이용되었음은 다음 사료를 통하여 알 수 있다.

1. 李俊儀가 (동생 義方을 꾸짖어 ‘네게 세 가지 큰 죄악이 있다. 임금을 시해하고 그 第宅과 姬妾을 탈취하였으니 죄악의 하나이요…’라고 말하니 의방은 크게 노하여 칼을 빼어서 죽이려 하였다(≪高麗史節要≫권 12, 명종 4년 정월).

2. (趙)位寵이 군사를 일으켜 (이)의방이 임금을 시해하고 장사하지 아니한 죄를 聲言하였으므로 선왕을 禧陵에 받들어 장사하고 그의 화상을 海安寺에 봉안하였다(≪高麗史節要≫권 12, 명종 5년 5월).

3. 將軍 慶大升이 정중부와 그의 사위 宋有仁을 베어 죽였다. 조정의 벼슬아치들이 궁궐에 나아가 축하하자 대승이 말하기를 ‘왕을 시해한 자가 아직 있는데 어찌 축하할 수 있는가’하니 李義旼이 듣고 크게 두려워하였다(≪高麗史節要≫권 12, 명종 9년 9월).

 1은 이의방 형제의 불화가 빚은 사건이지만, 형 이준의가 동생을 꾸짖어 임금을 축출하고 시해한 죄를 성토하자 이의방은 격분하여 형을 죽이려 하였다는 내용이다. 한편 2는 조위총이 정중부·이의방을 타도하기 위한 구실로서 이의방이 임금을 시해하고 장사하지 않은 죄를 성토하므로 의종의 화상을 海安寺에 봉안했다는 기록이다. 한편 3은 장군 경대승이 정중부를 죽이자 조정의 벼슬아치들이 이를 축하하였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경대승은 왕을 시해한 이의민이 있음을 상기시킴으로써 국왕의 권위를 인정하였지만, 그 이면에는 자신의 정권 장악을 정당화시키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다음으로 重房政治의 취약성에서 고려왕조의 계속성을 찾을 수 있다. 명종 때에는 아직 무신정권이 안정되지 못하여 그들의 지위가 확고하지 못하였고 정치도 중방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이러한 정치상황이 한편으로는 미약하나마 왕권을 유지시켜 주는 배경이 되기도 하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무신집정자들이 王氏의 고려왕조를 감히 넘보려는 의도조차 갖지 못하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명종 때에 국왕의 권위가 지속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고려왕실과 깊은 연관을 갖는 문신세력의 집요한 뒷받침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의종 때보다 수적으로는 감소하였지만, 무신란 이후에도 많은 문신들이 국정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리고 대외적으로 외교를 통한 금나라 조정의 후견적 측면도 명종 당시 국왕의 권위를 뒷받침해 준 또 하나의 요인이 되었던 것이다. 명종 즉위 후 금나라에 告奏使로 파견된 庾應圭는 金帝의 禪位에 대한 의심과 힐난을 단식투쟁으로 극복하면서 回詔를 받아오는데 공을 세웠다.340)≪高麗史≫권 99, 列傳 12, 庾應圭.

 金甫當의 亂을 당하여 ‘文臣之長’으로 지목된 宰相 尹鱗瞻이 묶임을 당하고 이어 유응규를 핍박하려 함에 그가 이를 힐난하면서 의연하게 대처하자, 諸將이 말하기를 “庚寅의 일은 金帝에 대한 公의 告奏가 아니었더라면 우리 무리는 죽어 젓담게 되었을 것이다”라고 하면서 사죄하였는데,341)≪高麗史節要≫권 12, 명종 3년 9월. 이 같은 당시의 상황인식을 다만 의례적, 관념적 측면으로만 보아 넘길 수는 없는 것이다.

 최충헌은 집권 후 국왕의 폐위를 마음대로 하고 독자적인 집정부라 할 수 있는 敎定都監을 설치하여 국정을 천단하면서도 스스로 왕이 되지는 못하였다. 무신세력의 대두로 인해 신분제가 붕괴되고, 귀족제의 해체를 야기시킨 것은 사실이지만 유교적 전통이 강한 고려왕조에 있어서 전통적 신분관념을 떨쳐버릴 수 없는 당시의 사회적 여건이나, 북방민족과 연관을 갖는 대외정세의 추이는 최씨정권 자체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다.

 최씨집정자들은 국왕이 되려는 모험을 시도하여 정권의 몰락을 초래하기 보다는 오히려 국왕의 권위를 이용하여 그의 정권을 공고히 하려 하였다.342)金塘澤,<崔氏武人政權과 國王>(≪韓國學報≫42, 1986). 최충헌 형제가 政敵 이의민을 제거할 때에 “그가 일찍이 시역의 죄를 범하고 백성을 포학하게 침해하여 왕위를 엿보고 있었다”343)≪高麗史節要≫권 13, 명종 26년 4월.는 구실을 들고 있지만, 최충헌은 집권한 직후 왕에게「封事10條」를 올려 舊政을 개혁하고 新政을 도모하여 태조의 正法을 준행할 것을 한결같이 건의하였다. 이는 고려왕조에 대한 권위를 부정하지 않겠다는 그의 의도를 엿보게 하는 것이다.

 최충헌 집권 후 동생 崔忠粹가 그의 딸을 태자비로 들여 정치적 열세를 만회하려 하다가 최충헌의 반대에 부딪혀 결국 살해되었다. 이는 비록 최충헌 형제의 권력투쟁에서 비롯된 문제이기는 하지만, 최충수가 그의 딸을 태자비로 들이려 하는 것을 최충헌이 반대하여 설득하는 다음의 내용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최)충헌이 타이르기를 ‘지금 우리 형제의 세력이 비록 한 나라를 기울이고 있으나 가계가 본래 미천하니 만약 딸을 東宮에 시집보낸다면 비난이 없겠는가. …옛 사람이 말하기를 앞 수레가 넘어지면 뒷 수레가 경계한다 하였는데, 전번에 이의방이 딸을 시집보냈다가 마침내 남의 손에 죽었으니 지금 그대가 앞 사람의 실패한 자취를 따라 하는 일이 옳겠는가’라 하였다(≪高麗史節要≫권 13, 명종 27년 10월).

 이러한 것은 무신집정자가 아직 전통적 신분사회에 대한 잠재의식을 떨쳐버리지 못하였다는 것이 되며, 또한 왕실의 권위를 배경으로 하여 권력투쟁이 전개되고 있음을 알게 해 주는 기록이기도 하다.

 이의민 일당을 타도한 최충헌은 그의 정권을 공고히 하기 위하여 구세력의 상징인 명종을 폐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명종의 후계자 선정문제는 최충헌의 집권 후 그의 형제간에 일어난 최초의 정치적 대립의 양상을 띤 사건이었으나, 이 문제는 최충헌이 지지한 平涼公 旼(神宗)을 왕위에 올림으로써 일단락지었다. 그런데 이 때 최충헌에 동조하였던 조카 朴晋材의 다음과 같은 발언은 금나라와의 외교관계에 있어서 주목을 끌게 한다.

(박)진재가 말하기를 ‘縝(진)과 旼이 모두 왕이 될만하나 금나라에서 진이 있는 것을 알지 못하니 만일 진을 왕으로 세운다면 저들이 왕위를 찬탈하였다고 할 것이니 민을 세우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의종의 옛일처럼, 아우에게 왕위를 전했다는 것으로서 금나라에 알린다면 후환이 없을 것입니다’라 하니 의논이 이에 정하여 졌다(≪高麗史節要≫권 13, 명종 27년 9월).

 이것은 새왕을 세우는데 있어서 독재정권인 최씨정권 조차도 금나라를 크게 의식하고 있었던 것을 확인시켜 주는 하나의 실례가 된다.

 예측대로 금나라는 신종 원년에 宣問使 孫俁를 보내와 전왕의 양위를 힐문하고 “詔勅이 있는데 반드시 전왕을 보고야 친히 주겠다”하였으나, 門下侍郎 趙永仁의 임기응변으로 이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외국어에 능통하여 금나라 사신의 접대로 출세한 金鳳毛와 그의 자손들이 최씨정권과 연결하여 크게 번성하면서 김봉모계의 慶州 金氏를 이루어 뒤에 충선왕의 ‘宰相之宗’에 오르는 귀족가문이 된 것은 그 동안 금나라와의 관계의 일면을 잘 보여준다.344)<金鳳毛墓誌銘>(≪朝鮮金石總覽≫上, 朝鮮總督府, 1919).
≪高農史≫권 101, 列傳 14, 金台瑞.

 최씨 집권기인 13세기 초엽 동아시아의 정세는 몽고족의 흥기로 일대 변동기를 겪고 있었으며, 滿洲에서는 금나라가 쇠퇴하고, 고려는 대외적으로 새로운 시련기를 맞게 된다. 금나라가 쇠약해진 틈을 이용하여 독립하게 된 거란족이 몽고군에게 쫓겨 고려로 침입하였다.

 최충헌이 죽자 그 뒤를 이은 崔瑀(怡)는 능숙한 정치적 수완으로 그의 부친이 구축해 놓은 권력적 기반 위에 왕실의 권위를 배경으로 그의 정권을 한층 더 공고히 하였다.

 최우가 집권할 무렵 동아시아의 정세는 몽고족의 강성으로 한층 더 긴박감이 감돌게 되었고, 만주에서 금의 쇠망과 함께 고려는 대몽항쟁의 시련기로 접어들게 된다. 특히 몽고 침략에 접한 최우정권은 단호한 항전을 결의하고 고종 19년에 江華 천도를 단행하여 대처하였으며, 국왕을 앞세워 대몽교섭에 임하는 한편 국내의 강화 여론을 무마하였다.

 최씨정권이 존립하기 위하여는 대몽항쟁이 불가피하였던 것으로 몽고와의 강화는 최씨정권의 지위를 무의미하게 만들어 결국 최씨정권의 몰락을 가져오게 된다는 것은 최우 자신도 모를 리가 없었다. 최우가 조직한 三別抄는 都房과 더불어 최씨정권의 군사적 지주로서 대외적인 시련기를 맞이하여 대몽항쟁의 핵심부대로서 괄목할만한 활약을 하였다. 이와 같은 대몽항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국왕은 대몽교섭의 상징적 존재로서 그 권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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