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8권 고려 무신정권
  • Ⅲ. 무신정권기의 국왕과 무신
  • 2. 무신정권과 문신
  • 1) 무신란과 문신의 동향
  • (1) 은거문사

(1) 은거문사

 전술한 입산도피의 경우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무신란이 일어나자 신준과 오생은 虎口에서 몸을 빼어 佛門으로 들어갔다. 그리하여 儒者의 복식인 冠帶를 버리고 승려복인 가사를 입고서 무신정권에 좇지 않고 고결하게 여생을 마쳤다. 신준과 오생은≪高麗史≫에는 나타나지 않고 다만≪西河集≫·≪破閑集≫·≪櫟翁稗說≫등 문집이나 詩話類에 보일 뿐이다. 신준의 호는 白雲子로서 公州로 도피하였고,368)≪破閑集≫권 下, 白雲子棄儒冠. 오생은 伽倻山에 은둔하였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그의 명성은 세상에 떨쳤고 절조는 숭상의 대상이 되었다.369)≪西河集≫권 4, 寄伽倻山人悟生書.

 그런데 신준이 공주의 산장에서 지방의 郡守 자제들을 모아놓고 교육에 종사했다는 사실은370)≪破閑集≫권 下. 크게 주목해야 할 것이다. 고려 말의 명유 이제현과 충선왕의 대화내용은 그 사정을 짐작하게 한다.

또 묻기를 ‘우리 나라는 예전에는 문물이 중국과 같다고 하였는데, 지금은 학자들이 다 승려를 따라 다니며 章句나 익히어 彫蟲篆刻의 무리는 번성하고 경서에 밝고 덕행을 수양하는 선비는 매우 적으니 그 까닭은 무엇인가’라고 하셨다. 신이 대답하기를 ‘…그 뒤에 국가가 차츰 文敎의 정치를 다시 쓰게 되어 선비들이 비록 배우기를 원하는 뜻이 있으나 도리어 쫓아가서 배울 곳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깊은 산중에서 가사를 입고 숨어 사는 자를 발을 싸매고 멀리 찾아가서 강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臣이 생각하기에 학자들이 승려를 따라다니며 章句를 익히게 된 것은 그 근원이 대체로 여기에서 시작된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櫟翁稗說≫前集 1).

 즉 충선왕이 우리나라 학자(배우는 자)들이 사원의 승려를 찾아가 글을 익히는 관습이 언제부터이냐고 했을 때, 이제헌은 무신란 후 화를 피해 山門으로 들어간 문사들이 그곳에서 학자(지방자제)들을 교육시켜 그것이 한 근원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이 지방자제들의 성분은 구체적으로 알 수 없으나 아마도 신준의 경우와 같이 군수의 자제이거나 향리층의 자제일 것이다. 이 지방자제들은 계속 성장하여 중앙으로 진출하였고, 후일 士大夫 형성의 주체가 되었으며 나아가 조선왕조 건국의 주동세력이 되었던 것이다.371)李佑成, 앞의 책(1982), 192쪽.

 儒冠을 버린 신준이나 오생과는 달리 난 초에 피신은 하였으나 끝까지 유관을 버리지 않고 지방에서 유학을 닦으며 처사생활로 일관했던 權敦禮와 같은 문사도 있었다. 권돈례는 어사 출신이나≪高麗史≫열전에는 그 이름이 없고, 朴仁碩의 墓誌에 보면 그의 字가 不華였음을 알 수 있다.372)<朴仁碩墓誌>(≪朝鮮金石總覽≫上, 1919). 그는 原州에 은거하면서 門徒들을 길렀는데, 늘 문을 닫고 가르쳤으므로 제자들이 모여 들어 강습하는 소리가 공자의 고장을 연상케 할 정도였다.373)≪西河集≫권 4, 答權御史書.

 권돈례는 끝내 세상에 나오지 않았으므로 林椿이 오생과 권돈례에게 보낸 서한에 의하면,374)≪西河集≫권 4, 寄伽倻山人悟生書 및 代李湛之奇權御史敦禮書. 당시 이재와 봉록에만 마음을 두고 명예와 이권에 유혹되는 俗儒들에게 그의 청명은 위의 오생과 함께 큰 모범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입산도피한 은거문사는 기록에 전하지 않은 것이 오히려 더 많았던 듯하니, 그것은 공양왕 3년(1391)에 成均生員 朴礎 등이 불교의 폐해를 논박한 다음의 상소문에서 잘 알 수 있다.

우리 국가가 경인·계사년 이전에는 通儒와 名士가 중국보다 많았기 때문에 唐에서 군자의 나라라고 하였으며 宋에서는 문물과 예악의 나라라고 하여 본국의 사신이 유숙하는 곳을 小中華의 館이라 하였습니다. 경인·계사년 이후에는 兵難에 죽지 않았으면 산림으로 도망하여 들어갔으므로 통유와 명사가 1백명에 한 두 명도 남은 사람이 없었습니다(≪高麗史節要≫권 35, 공양왕 3년 6월).

 庚癸亂 이후 문사들은 병란에 죽었거나 산림으로 들어갔으므로 통유와 명사로서 남은 사람이 별로 없었던 것이다. 통유와 명사는 곧 문사를 뜻하는 것으로 이 상소문에 의하여 무신란에서 살아 남은 문사들은 거의 입산도피하여 승려가 되거나 지방에 은거하였음을 알 수 있다.

 신준·오생·권돈례 이외에 현재 문집을 통하여 찾을 수 있는 은거문사로는 李仲若·朴仁碩·王若壽·皇甫若水·趙亦樂 등이 있다. 은거문사는 문헌의 발굴로 더 나타날 것이 기대되고 이들의 동향에 대하여도 앞으로 구체적인 연구가 있어야 하겠다.

 결국 은거문사들은 유관을 버린 경우와 버리지 않은 차이는 있었으나 무신정권과 타협을 거부하고 후학들을 가르치면서 맑고 고결한 입장을 고수했던 지식층이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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