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8권 고려 무신정권
  • Ⅲ. 무신정권기의 국왕과 무신
  • 2. 무신정권과 문신
  • 1) 무신란과 문신의 동향
  • (2) 소외문인

(2) 소외문인

 은거문사와는 달리 무신란 초에 피신하였다가 다시 開京으로 돌아와 仕宦하려 했던 문인들이 있었다. 林椿·吳世才 등이 이 유형에 속하는데, 시문을 숭상했던 이들 문인은 당시 문단의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375)朴菖熙, 앞의 글, 257쪽.

 임춘은 원래 개국공신의 후예로 살림이 넉넉하고 안정된 가문에서 성장하였다. 그러나 무신란이 일어나자 功蔭田을 京軍에게 모두 탈취당하고 그의 일가는 화를 입었다. 그는 겨우 몸을 피하여 한때 영남지방을 유랑하기도 하였다. 그 후 개경으로 돌아와 생활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무신정권에 참여하고 있었던 문신들에게 관직에 등용시켜 줄 것을 간청하였으나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는 마침내 고난과 실의에 빠지고 기아에 허덕이다가 일찍이 죽음으로써 불우한 일생을 마쳤다. 그가 죽은 후 崔瑀는 그의 문집인≪西河集≫에 跋文을 써 주었고 서적점에 명하여 널리 인쇄하여 반포하게 하였다.376)≪西河集≫권 末, 崔瑀跋(高麗版).

 오세재는 조부(吳學麟)가 翰林學士였고 두 형(世功·世文)은 문인으로 이름이나 있었다. 그는 의종대에 청년기를 보냈는데 과거에 응시하지 않아 재야의 문인으로 있었다. 무신란으로 國子監 大司成으로 있던 빙부 李知深이 피살되는 액운을 겪었고, 그 후 호구책을 마련하기 위해 여러 차례 과거에 응시하였다. 마침내 급제하여 仕宦의 길을 원했으나 등용되지 못하고 말았다. 오세재는 무신집권자들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하였으며 사회적 신분도 보장받을 수 없었다. 결국 그는 비참한 모습으로 開京을 떠나 말년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377)≪高麗史≫권 102, 列傳 15, 李仁老 附 吳世才.

 이처럼 임춘이나 오세재는 무신정권에서 소외되어 등용되지 않았으므로≪高麗史≫에는 그 기록을 거의 찾을 수 없고 문집류에 나타나는 시문을 통하여만 그들의 생애를 알 수 있을 뿐이다. 임춘과 오세재는 당대의 명시인들이었는 바, 이들 문인의 정치편력에 대하여는 항을 달리하여 초기 무신정권과 문신의 정치활동을 고찰할 때 재론할 것이다.

 요컨대 난 이후 소외되었던 문인들은 정권에 등용되지 못한 인물이었다. 곧 은거문사와 소외문인은 정계에서 은퇴한 계열로 볼 수 있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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