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8권 고려 무신정권
  • Ⅲ. 무신정권기의 국왕과 무신
  • 2. 무신정권과 문신
  • 2) 초기 무신정권과 문신의 정치활동

2) 초기 무신정권과 문신의 정치활동

 초기 무신정권기는 명종 원년(1171) 이의방의 정권탈취로부터 명종 26년(1196) 최충헌이 이의민을 제거할 때까지로 무신정권의 성립기에 해당한다. 이 시기는 난에 참가한 무신들의 이해 관계가 정권욕과 결부되어 무신 상호간의 처참한 정권쟁탈전이 계속되었으므로, 장기적으로 어느 한 무신세력에 의한 안정된 집권이 불가능하였다.

 그리하여 명종조 26년간에는 李義方(?∼1174)-鄭仲夫(?∼1178)-慶大升(1154∼1183)-李義旼(?∼1197) 등이 교대로 권력을 장악하고 정치를 주도하였 다. 무신란 직후 문신에 대해 보복적이었던 무신집권자들은 오래되지 않아 의종 때에 관계에 진출해 있던 구문신들을 포섭하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문신들은 무신란 이전처럼 관직을 모두 독점하지는 못하였으나, 무신들보다 관직을 많이 제수받았다.381)Edward J. Shultz, The Military-Civilian Conflict of the Koryo Dynasty, The Studies on Korea in Transition, 1979, p. 11에 보면, 의종조에서 최씨정권기까지 中書門下省, 樞密院, 六部, 御史臺 소속의 관리와 知貢擧를 역임한 인물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문신과 무인의 관직 제수 상황이 다음과 같은 표로 제시되었다.

區 分 毅 宗 明 宗 忠 獻
1170∼75 1175∼96
總 計 96 53 77 77 90 35
文 臣 90(79%) 34(79%) 45(59%) 48(62%) 63(70%) 26(74%)
武 人 6(6%) 18(18%) 31(40%) 24(31%) 24(26%) 7(20%)
未 詳   1 1 5(6%) 3 2(6%)

 무신정권에 포섭되어 등용된 문신들의 관직 제수 내용을 통해 실제 정치활동사항을 살펴 보기로 하겠다. 명종 즉위년(1170) 9월 문극겸의 批目에 의하여 단행된 문신들의 인사발령을 보면 다음과 같다.382)≪高麗史節要≫권 11, 의종 24년 9월.

任克忠……中書侍郎平章事 文克謙……右承宣·御史中丞 庾應圭……工部郎中 尹鱗膽……知樞密院事 金莘尹……左諫議大夫 李應招……左司諫大夫 金甫當……右諫議大夫 崔 讜……右正言

 任克忠은 무신란 전에 翰林學士, 權密院事, 判尙書刑部事 등을 역임하였다. 그는 당시 인사에서 중서시랑평장사로 임명되었는데, 이는 정중부가 받은 參知政事보다 높은 관직이었다.

 文克謙은 앞서 살핀 바와 같이 左正言으로 재직할 때 환관과 嬖臣의 부정을 논란·배척하여 그 충직함이 무장에게 알려졌던 까닭으로 화를 면하였고, 또한 집권세력과 인척관계를 맺어 그 일족이 모두 화를 면한 문신이었다. 명종이 즉위한 후 批目을 쓰게 된 殿中內給事 문극겸은 이의방의 추천으로 右承宣·御史中丞에 임명되었다. 그 후 그는 명종조에 修國史, 中書侍郎平章事, 判禮部事까지 승진하면서 안정된 지위를 누릴 수 있었다. 더욱이 문신으로서 최초로 상장군이 되었는데,383)≪高麗史≫권 103, 列傳 16, 崔冲. 문신의 고위 무반직의 겸임은 정치적 실력자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하였다.

 庾應圭는 무신란 발생 때 閤門祗候로 재직한 인물이었는데, 명종 즉위 후 金에 告奏使로 파견되어 명종 옹립을 정당화시키는 큰 임무를 완수하였다. 그 후 그는 문신으로서의 긍지를 갖고 다른 문신들보다 의연하게 무신정권에 대처하였다. 유응규는 명종 때에 工部侍郎까지 승진하였다.384)≪高麗史≫권 99, 列傳 12, 庾應圭.

 尹鱗瞻은 무신란 당시 60세로 知樞密院事에 임명되었으나, 權貴나 왕에게 간하는 말을 피하고 우유부단하게 처신하다가 군졸들에게 수모를 당하기도 하였다. 金甫當이 거병하였을 때 윤인첨은 재상이었으나 문신이라는 이유로 미천한 군졸에게 결박지어졌고, 鄭筠에 의해 이의방이 제거되었을 때에는 조위총토벌군의 원수였음에도 불구하고 군졸들에게 의심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를 보전하는데 힘써 명종 때에 守太師門下侍郞까지 올라갈 수 있었고 무반직인 상장군을 겸대하였다.385)≪高麗史節要≫권 12, 명종 원년 9월.

 金莘尹은 左諫議로서 右諫義 李應招·左司諫 金甫當·右正言 崔讜 등 젊은 문신들과 함께 상소하여 의종 때 환관의 告身에 대한 탄핵을 요구하고 이의방의 형인 承宣 李俊儀와 이의방과 인척관계였던 문극겸의 臺省職 겸직의 해임을 요구한 바 있다. 이는 이의방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되어, 김신윤은 隍城에 갇히고 判大府事로 좌천되었다.386)≪高麗史≫권 96, 列傳 9, 尹瓘 附 鱗瞻. 그는 무신란때 開京에 일어난 유혈사태를 개탄하기도 하였으나387)≪東文選≫권 19, 庚寅 重九. 난 직후 등용되어 관직을 맡고 同知貢擧로서도 활동하였다.

 이응초도 김신윤과의 상소사건으로 좌사간대부에서 禮部員外郎으로 좌천되었다. 그 후 정중부집권기인 명종 8년(1178) 우간의대부로서 동지공거가 되었고, 경대승집권기인 명종 10년(1180)에는 지추밀원사가 되었다.

 김보당은 난 후 우간의대부가 되었으나 위의 상소사건으로 공부시랑으로 좌천되었다. 그러나 곧 복직이 된 것으로 보아 무신들에게 인정을 받았던 것 같다. 그 후 명종 3년(1173) 김보당은 동북면병마사·간의대부로서 무신정권의 타도와 의종복위를 표방하면서 거병하였다. 그는 무신정권에 등용되어 활동하였으나 무신에 반감이 쌓여 정치성을 띤 反武臣亂을 일으켰다.388)邊太燮,<武臣政權期의 反武臣亂의 性格-金甫當의 亂과 趙位寵의 亂을 中心으로->(≪韓國史硏究≫19, 1978). 당시 문신들의 무신에 대한 반항이 상당히 컸음을 알 수 있다.

 崔讜은 덕망 높은 문사였던 崔惟淸의 아들로 우정언에 등용되었으나 역시 상소사건으로 한때 전중내급사로 좌천되었다. 그러나 다시 吏部員外郞이 되었고 관직이 여러 차례 승진되어 명종조에 참지정사까지 승진하였다.389)≪高麗史≫권 99, 列傳 12, 崔惟淸 附 讜.

 또한 무신란 때 화를 면하였던 문신들도 재등용되어 크게 활동하였다. 최유청은 昌原郡人으로 그의 6세조는 태조공신이었으며 부친은 守太保門下侍郞 同中書門下平章 判吏·禮部事를 지낸 귀족가문 출신이었다. 그는 무신란 당시 75세의 고령이었으나 평소에 덕망이 있었으므로 명종 즉위 후에도 중서시랑의 자리를 그대로 유지하였고, 그 후 守司空 集賢殿大學士 判禮部事를 지내고 물러났다.

 이지명은 난 전에 황주서기와 충주판관을 역임하면서 선정을 베푼데 대해 감사해 하는 지방민들의 보호로 구면된 문신이었다. 그 후 尙書右丞이 되었고 이어 정당문학이 되었다.

 위에서 살핀 바와 같이 무신란 후 문신들은 宰樞兩府로부터 6부·대성직 등 중요 관직에 임명되었다. 이처럼 문신들이 고위관직을 제수받아 등용될 수 있었다는 것은 무엇보다 그들의 정치능력을 인정받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와 같이 많은 문신이 무신정권에 등용되었으나, 초기 무신정권기는 정권이 확립되지 않았으므로 문신들은 무신들에게 의심과 경계의 대상이었고 심한 압박과 견제를 받았다. 이러한 문신 탄압의 현상은 명종조는 말할 것도 없고 고종조에 이르기까지 起伏은 있었을 망정 꾸준히 계속되었던 것이다.390)邊太燮, 앞의 글(1971), 400∼401·413쪽. 따라서 문신들의 정치활동은 위축되어 많은 제약이 따랐던 것이다. 당시의 형국이 이와 같았음은 윤인첨의 사례에서 잘 알 수 있다.

정중부의 난부터 문신은 기운을 잃게되어 鱗瞻이 무신과 더불어 일을 같이 함에 늘 견제되어 스스로를 보전할 따름이었다(≪高麗史≫권 96, 列傳 9, 尹瓘 附 鱗瞻).

 즉 문신들은 정사에 있어서 항상 무신들에게 견제되어 기를 펴지 못하고 스스로 몸을 보전할 수밖에 없었으므로 의기를 잃을 수밖에 없었다.

 한편 문신들의 사기가 위축되었던 것은 출사로의 축소에서도 살필 수 있다. 명종 원년 이의방이 집권한 후 무신세력이 확대되면서 문신의 출사로였던 외직에 무신이 임용되었는데,391)≪高麗史≫권 75, 志 29, 選擧 3, 銓注 凡選用. 이는 문신들의 출사로가 축소된 반면 무신들의 宦路의 폭이 확대된 것을 뜻한다. 또 명종 5년(1175)에는 이의방에서 정중부로 집권세력이 바뀌었지만 외직에 武散官을 채움으로써392)위와 같음. 문신들의 출사로는 더욱 축소되었다. 문신들의 사기가 위축되었을 것임은 당연하다.

 그러나 경대승집권기에 오면 그간 계속되었던 문신 탄압의 현상이 사라지게 되었다. 반정중부세력이었던 경대승은 문신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던 온건한 인물로서 유학을 존중하고 문신에 대해 비교적 호의적이었다. 이 기간에 주목되는 것은 지금까지 정권에서 소외되었거나 외면당하였던 문인들이 점차 과거에 응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즉 科試에 대하여 부정적 입장을 견지했던 임춘이 과거를 통해 생활의 방도를 찾으려 하였고,393)≪東文選≫권 59, 與皇甫若水書. 뛰어난 글재주를 지녔던 오세재는 낙방을 거듭하다가 명종 12년 50세의 나이로 겨우 과거에 급제하였다.394)≪破閑集≫권, 下. 또한 이인로도 명종 10년 과거에서 29세로 장원급제를 하였는데,395)위와 같음. 이와 같은 사실은 이전보다 나아진 문신들의 상황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이와 같은 추세는 이의민의 집권기에 접어들자 다시 반전되었다. 이의민은 무신란에 적극 가담하여 행동한 인물로 스스로의 신분적 열세를 극복하면서 파격적으로 실력에 의해 출세하였다. 그는 이전의 집권자인 이의방·정중부·경대승보다 출신성분이 더 하층인 천민출신(寺婢의 아들로 태어났음)이었으므로 무력에만 의존하여 집권하였을 것이다.396)金塘澤,<李義旼政權의 性格>(≪歷史學報≫83, 1979) 참조. 따라서 문신들에 대한 대우는 냉혹하였을 것이다.

 임춘은 신병으로 과거를 포기하여397)≪東文選≫권 13, 病中有感 및 권 59, 與趙亦樂書. 사환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명종 17년(1187) 무렵에 빈궁 속에서 30대에 요절하였다.≪西河集≫이란 遺文集을 남긴 임춘의 죽음은 문인들의 수난을 의미하며, 이인로가 제문을 짓고 이규보가 그를 추도한 것도 문인에 대한 슬픔 때문이었다. 과거에 급제한 오세재는 사환을 원하여398)≪東文選≫권 116, 吳先生德全哀詞幷序. 자신과 이인로 등의 천거·진정의 글을 올렸으나 끝내 입사가 좌절되었다. 그는 55세에 東京(慶州)에서 살다가 임춘이 사망한 비슷한 시기에 비참하게 객사하고 말았다. 오세재가 등용되지 못한 것은399)≪東文選≫권 102, 吳德全載巖詩跋尾.
≪高麗史≫권 102, 列傳 15, 李仁老 附 吳世才.
사회 현실에 대한 그의 날카로운 비판의식이 집권층에게 용납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무신정권에 추종하던 문신들에게도 환영받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인로도 장원 급제하여 翰官으로 입사하였으나 집권층의 푸대접으로 명종 말까지 14년간 같은 관직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이인로는 출세를 하지 못했을 뿐이며 임춘이나 오세재와는 달리 안정된 생활은 할 수 있었다. 대체로 볼 때 이의민집권기는 문신들에게 시련기요 암흑기였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정치세태 때문에 명종 14년 무렵 임춘·오세재·이인로 등이 주축이 된 ‘竹林七賢’이 등장하여 현실도피적인 은거생활의 풍조가 나타나게 되었다. 요컨대 이의민집권기에는 문신에 대한 견제가 다시 계속되어 문신의 사기는 가라앉고 말았던 것이다.

 이상으로 초기 무신정권기에도 문신들이 무신보다 많이 관직을 제수받고 등용되었으나, 항상 무신들의 견제와 탄압으로 문신들의 정치활동은 위축된 상태가 계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

<金毅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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