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8권 고려 무신정권
  • Ⅲ. 무신정권기의 국왕과 무신
  • 3. 최씨정권과 문신
  • 1) 최씨정권의 문신정책

1) 최씨정권의 문신정책

 명종 26년(1196) 4월 최충헌(1150∼1219)은 이의민을 축출하고 정권을 장악한 후 아들 瑀(?∼1249), 손자 沆(?∼1257), 증손 竩(?∼1258)에 거치는 4대 60여 년간 권력을 세습함으로써 전형적인 무신정치를 실시하였다. 따라서 최씨정권기에는 무신정권의 확립을 보게 되었다.

 명종 말기에 오면 무신란 발생으로부터 초기 무신정권기에 생존하였던 많은 문신과 무신들이 죽었다. 무신란에 가담했던 세대가 거의 물러난 시점에서 등장한 최충헌도 무신란에 참여하지 않았던 인물이다.400)金塘澤,<李義旼政權의 性格>(≪歷史學報≫83, 1979), 46쪽. 그런데 최충헌은 단순한 무장이라기 보다는 정치가로서의 역량을 구비했던 인물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최충헌이 집권한 후 명종 27년(1197) 5월에 上書한「封事10條」401)≪高麗史≫권 129, 列傳 42, 叛逆 3, 崔忠獻.에서 당시 고려사회가 당면한 정치상황을 비교적 정확히 진단하고 새로운 정책의 방향을 제시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 알 수 있다.

 門蔭으로 관도에 진출한402)<崔忠獻墓誌銘>(≪朝鮮金石總覽≫上, 朝鮮總督府, 1919). 최충헌은 본래 文吏출신이었으므로 문학에 대한 식견과 문신들과의 친분유대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집권과정에서 무신들을 다수 살해하거나 유배시켰으나 문신들은 소수의 숙청으로 그쳤다. 최충헌이 소수의 문신만을 제거했다는 사실은 문신이 정치적인 주도권을 장악하지 못했으므로 최충헌정권을 위태롭게 할 소지가 적었다는 것을 알려 주는 것이다. 그렇지만 무력으로 권력을 잡은 최충헌은 문신들에 대한 회유가 필요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문신들을 포섭하고 탄력성있는 정치운용을 도모하면서 새로운 정권을 구축해 나갔던 것이다. 이와 같은 정국의 전환은 명종조 무신정권과는 대조를 이루는 것으로, 지난날 정권으로부터 냉대받아 오던 문신들로부터 크게 환영을 받았다.

 따라서 이 시기에는 문신을 견제하기 보다는 오히려 문신을 우대하는 역현상이 나타났던 것이다. 이처럼 문신이 우대를 받고 점차 중용됨에 따라 무신이 도리어 억압받기에 이르렀다.403)邊太燮,<高麗後期의 武班에 대하여>(≪高麗政治制度史硏究≫, 一潮閣, 1971), 407∼408쪽. 최충헌이 집권한 후 첫 인사발령404)≪高麗史節要≫권 13, 명종 27년 9월.에 이어 명종 27년(1197) 12월에 시행된 두 번째 인사발령405)≪高麗史≫권 20, 世家 20, 명종 27년 12월.에서 등용된 문신들은 다음과 같다.

趙永仁……守太師門下侍郞平章事判吏部事 崔 讜……中書侍郞平章事 任 濡……中書侍郞平章事 崔 詵……知樞密院事 于述儒……左僕射

 이들 문신에 대하여 검토해 보면 문신등용의 배경을 살필 수 있다.

 趙永仁은 의종조에 급제하여 全州書記를 지낸 후 명종조에 참지정사·정당문학을 역임하였고, 첫 인사발령 때에는 문신으로서 유일하게 判吏部事로 임명되었다. 이 때 인사에서 문하시랑평장사가 된 그는 최충수와는 사돈관계였고 신종 옹립에 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그는 정권과 밀착하여 마침내 문하시중까지 승진하였으며 神宗廟庭에 배향되었다.406)≪高麗史≫권 99, 列傳 12, 趙永仁.

 任濡는 여러 대에 걸쳐 재상을 배출한 가문의 후예로서 명종조에 등제하였고 참지정사가 되었다. 최씨가문과는 이중의 혼인관계를 맺었고, 희종을 폐하고 漢南公 貞을 강종으로 옹립할 때 최충헌에게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이번 인사에 중서시랑평장사로 임명되었다가 문하시랑평장사가 되었으며 康宗廟庭에 배향되었다.407)≪高麗史≫권 95, 列傳 8, 任懿 附 濡.

 崔讜은 앞서 살핀 바와 같이 무신란 직후 우정언으로 임명된 후 승진을 거듭하다가, 이 때 인사에서는 중서시랑평장사에 임명되었고 門下侍郎同中書平章事가 된 다음 곧 물러났다. 于述儒는 명종조에 등제하였고 이 때 인사에 좌복야에 임명되었으나 곧 그만두었다. 崔詵은 최유청의 아들이었으므로 崔讜과 마찬가지로 무신들과 밀착될 소지를 지닌 인물이었다. 더욱이 최선은 20년 전부터 최충헌과 교분을 맺고 있었다. 즉 최충헌이 28세 때인 명종 6년 知安東府事副使로 있었을 때 최선이 이 지역의 察訪使였으므로 친분이 성립되었던 것이다.408)≪崔忠獻墓誌銘>(≪朝鮮金石總覽≫上).
朴菖熙,<崔忠獻小考>(≪史學志≫3, 1969), 107쪽.
이번 인사에 지추밀원사에 임명되었고 신종을 폐하고 희종을 옹립할 때 큰 역할을 하였다. 그후 門下侍郎 同中書平章事까지 승진하였으며 熙宗廟庭에 배향되었다.

 이처럼 인사발령으로 등용된 문신들을 검토해 볼 때, 최충헌은 집권하기 전에 비교적 좋은 가문 배경을 지닌 문신들과 교섭을 가졌고 이들 고위문신들이 측근으로 들어섰음을 확인할 수 있다. 최충헌은 친분관계를 가졌던 문신들을 고위관직에 등용하였고, 이들은 최충헌정권에 깊이 간여하여 신왕 옹립과 같은 일에 적극 협력하였던 것이다. 최충헌은 비단 등용문신들에게 뿐 아니라 정권에서 외면당하고 있던 문인들에게도 관직을 제수하였다. 즉 ‘竹林七賢’이었던 이인로는 翰林, 李湛之는 留院, 咸淳은 司直이 되었다.409)≪補閑集≫권 中, 己未 仲夏.

 그러면 문신이 최씨정권에 발탁·등용되는 과정과 집권자의 의도를 결부시켜 문신우대정책의 실상을 고찰하여 보기로 한다. 최씨정권에 발탁된 문신들은 모두 과거 합격자였다. 그런데 이들 문신은 반드시 최씨정권과 밀착된 측근문신의 천거가 있어야만 발탁되었고, 琴儀·李奎報·崔滋 등은 그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과거에 여러 차례 떨어지다가 명종 14년에 급제한 금의는 삼한공신의 후예였지만 그의 가문은 별로 떨치지 못하였다. 최충헌이 집권하면서 문사를 구할 때 그는 李宗揆에 의해 천거되어 발탁되었다. 그 후 금의는 최충헌에게 아첨하여 華要職을 역임하였다.410)≪高麗史≫권 102, 列傳 15, 琴儀. 그는 마침내 최충헌의 가장 신임받는 측근 문신이 되었다.

 명종 20년에 급제한 이규보는 오랫 동안 관직에 나아가지 못하다가 조영인·임유·최당·최선 등 재상에 의해 천거되었다. 그러나 불평하는 자들의 방해로 사환이 이루어지지 못하다가 10년이 지난 신종 2년(1199)에 全州司錄에 始補되었다.411)≪高麗史≫권 102, 列傳 15, 李奎報. 그것은 이규보가 이인로·이담지·함순 등과 함께 최충헌의 저택에 초청받아 祝壽의 시<千葉榴花>를 지은 것이 계기가 되었다.412)≪東國李相國集≫권 9, 謝知奏事相公見 喚命賦千葉榴花 幷序. 또 희종 3년(1207) 이규보는 최충헌이 새로 마련한 정자 茅亭에서 지은 기문413)≪東國李相國集≫권 23, 晉康候茅亭記.이 제일로 뽑힘으로써 直翰林에 들게 되었다. 그 후 고종 초에도 참직을 구하는 시를 짓고 스스로를 천거하여 최충헌에게 또 다시 발탁되기에 이르렀다. 이규보는 최충헌·최우 부자 2대에 걸쳐 집권자에게 각별한 배려를 받으면서 만년에는 재상이 되어 당대의 영화를 누렸다.

 崔冲의 후예인 최자는 강종조에 등제하였는데 國學 學諭로 있을 때 이규보의 천거로 최우에게 발탁되었다. 그는 文翰을 담당했던 이규보의 후계자로 뽑혀 최우에게 주목되어 文柄을 승계하였고 마침내 정언에 이르렀다.414)≪高麗史≫권 102, 列傳 15, 崔滋. 이처럼 금의·이규보·최자 등 과거에 합격한 문신들은 출신에 관계없이 최씨정권과 밀착된 측근문신들의 천거로 발탁되어 출세가 보장되었던 것이다.

 앞서 살핀 바와 같이 최충헌은 집권하자 문사를 구하였다. 최우도 마찬가지로 문사를 구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최우가 구한 문사는 주로 寒士로, 최우는 이들을 발탁하여 인망을 얻었던 것이다.415)≪高麗史≫권 129, 列傳 42, 崔忠獻 附 怡. 그런데 최우가 한사로 발탁한 문신들의 가문은 대체로 한미하였으나 문장은 탁월한 인물들이었다.416)金塘澤,<崔氏政權과 文臣>(≪高麗武人政權硏究≫, 새문사, 1987), 106∼108쪽. 그리고 한미한 가문출신의 과거합격자가 최씨정권에 발탁되려면 그들의 座主(知貢擧·同知貢擧)의 영향이 크게 작용하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최씨정권기의 좌주들은 최씨와 친밀한 측근문신이었기 때문이다.

 희종 4년 우부승선 금의가 동지공거로서 皇甫瓘 등을 뽑자 최충헌 부자는 이들을 후하게 대접하고 왕도 이들에게 특혜를 베풀었다.417)≪高麗史≫권 102, 列傳 15, 琴儀. 이는 말할 것도 없이 이 科試의 동지공거가 최충헌이 신뢰하는 금의였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최씨를 중심으로 恩門·門生의 상하관계의 계열화가 강화되었던 것이다.418)朴菖熙,<武臣政權時代의 文人>(≪한국사≫7, 국사편찬위원회, 1973), 283쪽. 실제로 최충헌정권기의 과거에서 좌주는 任濡·崔詵·李桂長·琴 儀·崔洪胤 등이 주축이 되었는데,419)≪高麗史≫권 73, 志 27, 選擧 1, 科目 1 選場 명종 20년∼고종 3년.
張叔卿,<高麗武人政權下의 文士의 動態와 性格>(≪韓國史硏究≫34, 1981), 81쪽의<表 3>최충헌집권기의 과거합격자 일람 참조.
이들은 최충헌의 측근 문신이었다. 그리고 과시를 담당하였던 좌주인 금의와 최홍윤은 함께 정승이 되었고 특히 문생이 많기로 유명하였던 금의는 여러 번 과거를 관장하였으므로 물러난 후 축하연 때 많은 문신이 경하하여 감탄하였다고 한다.420)≪補閑集≫권 上. 또한 금의는 훌륭한 인재를 많이 골라썼다. 翰林曲에 보이는 ‘琴學士’란 바로 그를 가리킨다.421)≪高麗史≫권 102, 列傳 15, 琴儀. 좌주와 문생은 매우 가까웠을 뿐 아니라 정치적 유대를 지닌 엄격한 상하관계를 평생 지속하였다.422)曺佐鎬,<麗代의 科擧制度>(≪歷史學報≫10, 1958), 162쪽. 또 좌주들은 문생의 문하에서 나온 문생을 볼 수 있게 되었으므로,423)≪補閑集≫권 下. 최씨정권이 60년간 지속하는데 이들 문신이 구축한 인맥은 큰 비중을 차지하였을 것이다.

 또한 최우는 백관의 전주를 담당할 政房을 그의 사저에 설치하고 이곳에 문사들을 소속시켰으므로424)≪高麗史≫권 129, 列傳 42, 崔忠獻 附 怡. 문신세력이 성장하는 기반이 되었다. 정방은 문객 중의 명유들로 조직하여 교대로 숙위케 할 書房425)위와 같음.의 존재와 함께 최씨정권의 對文臣政策의 중요한 단면을 알려주는 것이다.

 요컨대 문사를 구하고 한사를 발탁한 최씨집권자들은 이들 문신들을 측근으로 기용·장악하여 문무양반의 지배자로서 정권을 장기간 유지하고 권력을 강화시켜 나갈 수 있었다. 결국 최씨정권기의 문신에 대한 우대정책은 문신들에게 정치·사회적인 진출을 보장하면서 그들을 정권에 예속시키려는 고도의 용인술에서 비롯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최우가 설치한 정방과 서방도 문신정책의 일환이었다.

 최씨정권의 문신우대정책으로 문신들은 관직을 얻어 각각 주어진 위치에서 국정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무신정권을 보좌하는데 지나지 않았고 최씨정권의 지지가 전제되었으므로 문신들은 무신세력과 결탁할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최씨집권이 장기화되자, 문신들은 정권에 대한 태도를 바꾸어 그들의 지위를 유지하고 생활안정의 보장만을 바라게 되었다. 이에 따라 초기 무신정권기의 비판의식은 사라지고 현실에의 영합과 적응이 생리화되어 최씨정권과 타협하고 집권세력에 아부하면서 정치활동에 종사하였다.

 초기 무신정권기에 충직하여 화를 면하였던 문극겸은 집권세력에 등용되어 정치활동을 하였던 문신이다. 그는 당시 어진 재상으로 일컬어졌으나 권세가의 간청을 듣자 어짊과 어리석음을 살피지 않아 전주에 어긋남이 많았다. 또한 어린 자제들을 벼슬시키고 종을 나누어 보내 전원을 넓혀 잡았으므로 당시의 여론은 애석하게 여겼다 한다.426)≪高麗史≫권 99, 列傳 12, 文克謙. 이처럼 문극겸은 집권자의 청탁에 협력·순종하면서 관리의 인사처리에 잘못된 점이 많았던 것이다.

 최씨정권기에 들면서 무신세력에 아첨하여 결탁하였던 문신의 像은 금의와 이규보의 행적에서 엿볼 수 있다. 금의가 최충헌에게 발탁되어 가장 신임반는 측근문신이 되어 華要職을 역임하였음은 이미 살핀 바와 같다. 그러나 그는 신종 때 많은 문신이 있는 자리에서도 말 앞에 서서 최충헌에게 이야기를 하였고,427)≪高麗史節要≫권 14, 고종 2년 5월. 고종 2년(1215) 최충헌이 別第로 옮겨 갈 때에 이전에는 재상으로서 따라가는 자가 없었는데, 簽書樞密院事로 호위병과 함께 처음으로 따라갔다.428)≪高麗史≫권 129, 列傳 42, 崔忠獻. 이처럼 금의는 사람들이 비루하다고 여길 정도로 무신집권자에게 극도의 아첨을 하였다. 이윽고 금의가 권세를 믿고 교만하고 방자한 행동을 취하면서 집권자에게 아부하자 이에 불만을 품은 문생에게 야유를 받기도 하였다. 즉 희종 4년(1208) 우부승선 금의에게 과거에서 뽑힌 황보관은 금의로 숙직하고 있는 집에 가서 시를 지어 그만 둘 것을 풍자하였다. 황보관은 금의로 말미암아 섬으로 유배되었고 세론은 이것을 야박하게 여겼던 것이다.429)≪高麗史≫권 102, 列傳 15, 琴儀. 또한 고종 초에 翰林承旨로 있던 금의는 觀碁詩 40여 韻을 고열하면서도 집권자의 비위를 거슬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 최충헌에게 사랑받는 문객이었던 이규보의 시를 으뜸이 되게 하였다.430)≪高麗史≫권 96, 列傳 9, 尹瓘 附 世儒.

 무신정권기를 대표하는 문신은 이규보였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어려서부터 문장으로 이름이 있었으나 불우와 실의 속에 天摩山에 우거하면서 스스로 白雲居士라 이름하였다. 20대 초에는 임춘·오세재·이인로 등 ‘竹林七賢’과 사귀면서 음주 속에서 放達하여 비관적 기개가 강렬하였다. 방달이란 언행이 기존 권위와 인습에 구애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그 후 이규보는 22세에 司馬試에 수석으로 합격하고 23세에는 禮部試에 합격하여 환로에 나가기를 열망하였다. 최씨정권기에 이르러 그는 최충헌에게 발탁되어 입신양명을 성취해 나갈 수 있었다. 이규보는 관직이 계속 승진함에 따라 무신정권에 예속되어 갔고 현실비판의 자세는 점차 둔화되었다.

 그리하여 이규보는 최충헌이 주최하는 詩會에서 집권자에게 아부하기 시작하였다. 신종 3년 이규보는 축수의 현시를 통해 최충헌을 절대적인 국가공로자로서 숭배하였고, 희종 3년의 茅亭記에서는 최충헌을 위력이 있고 존경해 마지않는 지도자로 찬양하였다.431)朴菖熙,<李奎報의 본질에 대한 연구 Ⅱ>(≪外大史學≫2, 1989), 6∼7쪽. 또한 이규보는 최우도 칭송하고 그의 시책에 적극 추종하면서 아부하였다. 즉 최우를 위해 지은 十字閣의 기문에서 최우의 공렬이 빛나 일월과 더불어 광명을 다툰다고 하였다.432)≪東國李相國集≫권 24, 崔承制十字閣記. 고종 19년(1232) 대다수 관리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단행된 강화천도가 정권의 건재를 위한 현명하고 다행스런 결단으로 여겨 최우를 국가 수호의 공로자로 찬양하는 시를 지었다.433)≪東國李相國集≫권 18, 望海因追慶遷都. 그리고 이규보는 불교기반을 통한 백성들의 단합을 꾀해 대몽항쟁을 지속시키려는 정치적 목적에서 大藏經의 조판을434)閔賢九,<高麗의 對蒙抗爭과 大藏經>(≪韓國學論叢≫1, 국민대, 1978). 옹호하였다. 그리하여 불교의 신통력으로 몽고의 병화를 물리쳐 국가의 평안을 간구하는 글을 지음으로써435)≪東國李相國集≫권 25, 大藏刻板君臣祈告文. 최우정권을 두둔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이규보가 최씨정권에 적극 아부하게 된 것은 文名을 영구히 유지하고 가문의 영달을 보장받을 수 있을 것으로 확신하였기 때문일 것이다.436)朴菖熙, 앞의 글(1973), 289쪽. 이규보를 비롯하여 당시 대부분의 문신들은 입신출세의 집념 때문에 무신집권자에게 아부하였을 것이다. 최씨정권에 아부하였던 금의와 이규보는 ‘영국의 집권자 크롬웰에 대한 시인 밀턴’으로 비유되기도 한다.437)李丙燾,≪韓國史≫中世篇(乙酉文化社, 1961), 520쪽.

 요컨대 많은 문신들이 무신정권에 추종하고 아부하면서 그들의 활로를 개척하였으므로 문신들은 마침내 무신집권자의 충실한 예속적 굴종자가 되고 말았다.438)朴菖熙, 앞의 글(1989), 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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