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8권 고려 무신정권
  • Ⅲ. 무신정권기의 국왕과 무신
  • 3. 최씨정권과 문신
  • 2) 최씨정권하 문신의 역할과 정치적 지위

2) 최씨정권하 문신의 역할과 정치적 지위

 최씨정권기의 문신정책으로 문신에 대한 관용의 길이 열리고 측근인물로 부상되면서 문신들은 최씨정권의 유지를 위한 여러 역할을 수행하였다. 즉 무신정권의 합리화와 무신들의 사회적 지위를 높임에 크게 기여하였고, 정치적 활동을 통해 공헌하였다.

 먼저 문신들이 최씨정권의 합리화와 정당화에 기여하여 무신세력과 밀착하게 된 것을, 문신의 역할을 통해 살펴보기로 한다.

 최씨정권 이전인 초기 무신정권기에도 정권의 합리화를 위해 문신들이 기여했음은 앞서 잠시 언급한 庾應圭의 활동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유응규는 명종이 즉위하자 告奏를 위해 金에 갔다. 그런데 金帝가 왕위의 禪位를 의심하자 7일간 단식함으로써 드디어 回詔를 받아오는 큰 공을 세웠던 것이다.439)≪高麗史≫권 99, 列傳 12, 庾應圭. 의종의 폐위와 명종의 즉위는 정중부에 의해 자행되었는데,440)≪高麗史≫권 100, 列傳 13, 洪仲方. 이는 정권의 부당성으로 지적될 수 있는 것이다. 아마도 유응규는 명종의 즉위가 의종의 內禪에 의한 것이었음을 강조했을 것이다.

 최씨정권기에 들어와서 문신들이 정권의 합리화에 기여한 것은 趙永仁·金鳳毛·朴暄 등을 통해 구체적으로 살필 수 있다.

 최충헌이 집권한 후 문하시랑평장사로 임명된 조영인은 신종 옹립에 따른 난관을 해결함에 큰 역할을 하였다. 명종의 폐위와 신종의 즉위에 의심을 품 은 금이 사신을 파견하여 전왕이 왕위를 사양한 일을 힐문하고 명종에게 친히 조칙을 전할 것을 주장하자, 임기응변으로 이 사태를 모면하였던 것이다.441)≪高麗史≫권 21, 世家 21, 신종 원년 6월. 만일 최충헌이 자행한 遜位의 실상이 드러나면 최씨정권의 부당성이 밝혀질 것이었지만 조영인은 최충헌정권의 정당성을 위해 헌신하였다.

 김봉모도 신종 옹립에 공을 세웠다. 조부(北面都監判官)와 아버지(守司空左僕射)가 현달하지 못하였던 김봉모는 명종의 퇴위에 관해 조사하러 온 금의 사신을 접대하였다. 그는 능숙하게 외국어(異域方言俗語)를 구사하면서 사신을 적절히 무마하는데 성공하였으므로 조정에서 그를 중하게 여겼던 것이다.442)<金鳳毛墓誌銘>(≪朝鮮金石總覽≫上). 그 후 그는 추밀원부사를 거쳐 참지정사에 이르렀다.443)≪高麗史≫권 101, 列傳 14, 金台瑞. 김봉모도 최충헌정권의 정당화를 위해 기여하였던 것이다.

 박훤은 최우의 가신으로 史館의 수찬관이 되어 최우의 공적을 허황되게 과장하여≪功業錄≫5·6권을 편집하였다.444)≪高麗史≫권 125, 列傳 38, 朴暄. 말하자면 최우를 역사적으로 미화함으로써 최우정권을 합리화시켰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문신들은 최씨정권의 옹호와 역사적인 미화를 통해 정권의 합리화와 정당화를 위한 작업에 적극 가담하여 집권자에 접근하였다.

 다음으로 문신들의 역할에서 최씨정권의 정치적·사회적 지위를 높임에 기여한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즉 문신들은 최씨가문과 통혼함으로써 자신의 위치를 높이려는 최씨집권층의 의도에 따랐던 것이다. 그리하여 최씨집권자들은 최충헌정권 초기 또는 그 이전에 재상을 역임한 문신가문과 혼인하게 되었다. 이것은 비록 무신들이 정권을 장악했다 하더라도 전통적인 신분관념이 중시되고 문벌에 대한 강한 집착이 온존했기 때문이다.445)金塘澤, 앞의 글(1987), 103쪽.

 최씨정권 이전에도 문신들은 무신과 통혼한 적이 있었다. 의종조에 문하시 중 王冲의 아들인 王桂는 정중부의 딸과 혼인하였다. 이로 인해 무신란 때 왕계는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고, 최충헌집권 후 참지정사를 거쳐 문하시랑 동중서평장사에 승진하였다.446)≪高麗史≫권 101, 列傳 14, 王珪. 그리고 문극겸의 딸이 이의방의 아우인 李隣의 처가 됨으로써 문신과 무신이 사돈이 된 예도 있었음은 이미 살핀 바와 같다.

 최씨정권기에 이르면 최씨가와 통혼하는 문신의 사례가 매우 빈번하게 나타나고 있다. 최충헌집권 초부터 크게 활약하고 정권의 정당성을 위해 헌신한 바 있는 조영인의 아들 趙準은 최충수의 사위가 되었다.447)≪高麗史≫권 129, 列傳 42, 崔忠獻. 조영인은 최충수의 딸을 며느리로 맞아들인 것이다. 이로써 최씨집권층은 명문인 조영인가문과 인척을 맺어 신분적 지위를 높일 수 있었다. 동시에 조준이 최충헌집권 직후인 명종 26년(1196) 4월에 權判吏部事에 임명된 것을 비롯하여 그 후 우간의대부와 우승선을 역임한 것도 양가의 통혼과 무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최충헌이 가장 신임하던 측근 문신이었던 임유의 형 任溥는 그 딸을 최충헌의 재취로 들임으로써 최충헌의 처숙이 되었다. 또한 임유의 아들 任孝明은 최충헌의 딸과 혼인함으로써448)위와 같음. 최충헌과 이번에는 사돈이 되었다. 임유의 조부 任懿는 숙종조에 문하시랑평장사를 지냈고, 아버지 任元厚는 의종조에 문하시중에 이르렀다. 최충헌이 이처럼 대대로 재상가문이었던 임유와 이중으로 통혼한 것은 자신의 사회적인 지위를 높여 보려는 의도 때문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 후 임유의 세 아들(景肅·景謙·孝順)도 재상이 될 수 있었다.449)≪高麗史≫권 95, 列傳 8, 任懿 附 濡.

 또한 최충헌이 집권하기 전부터 친분이 두터웠던 문하시랑 崔詵의 아들 崔 宗峻은 최우를 조카사위로 맞이하였다.450)≪高麗史節要≫권 15, 고종 9년 4월. 최종준은 문하시중에 이르고 다시 그의 아들들(崔昷·崔坪)도 재상이 되었다.451)≪高麗史≫권 99, 列傳 12, 崔惟淸 附 宗峻·昷·坪. 최씨가문이 이처럼 번창한 이유 는 최씨집권자와 통혼한 것이 크게 작용하였기 때문이었다. 뿐만 아니라 최종준이 그의 손녀를 최항에게 출가시킴으로써452)≪高麗史≫권 129, 列傳 42, 崔忠獻 附 沆. 그의 아들 최온은 집권자의 장인이 되었다. 결국 최선의 후손들은 최씨집권자와 중첩된 혼인으로 인척관계를 이루어 무신들의 지위향상의 계기를 마련하였고, 동시에 최선가문도 번성하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앞서 최충헌가문과 인척관계를 맺는 조영인의 손자 趙季珣의 딸도 최항의 배필이 되었다.453)≪高麗史≫권 129, 列傳 42, 崔忠獻 附 沆. 최항의 장인이 된 조계순은 최항집권기에 재상이 되었다. 따라서 조영인가문은 2대에 걸쳐 최씨집권자와 통혼하였음을 알 수 있다.

 위와 같은 사례를 검토할 때 문신들이 최씨집권층과 통혼함으로써 최씨정권의 정치·사회적인 지위와 신분적인 위치를 높임에 기여하였음을 알 수 있다. 동시에 문·무신 간의 각기 다른 입장과 의도가 서로 부합되었기 때문에 통혼이 이루어졌던 점도 결코 간과해서는 아니될 것이다. 가문에 대한 열등의식을 지녔던 최씨집권자들은 문신가문과 혼인함으로써 사회적 지배계층 속에 굳게 뿌리를 내리고,454)朴菖熙, 앞의 글(1969), 109쪽.
閔賢九,<高麗後期의 權門世族>(≪한국사≫8, 국사편찬위원회, 1977), 17쪽.
문신의 명문가문과 결합함으로써 그들의 정치·사회적인 지위를 이용코자 하였던 것이다. 반면에 문신의 입장에서는 최씨집권층과의 혼인을 통해 인척관계를 맺고, 이의 반대 급부로 그들의 사회적 진출을 보장받고 나아가 정치적 지위를 확보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최씨정권기의 문신들은 정권의 합리화와 집권세력의 지위를 높히는 일에 기여하는 한편, 또 다른 정치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고려시대의 가장 중요한 관직인 재추·승선·대간의 활동을 중심으로 검토해 보면 문신들의 구체적인 역할의 내용이 밝혀진다.455)이하 서술은 金塘澤, 앞의 글(1987), 112∼125쪽을 참조하여 요약 정리한 것이다.

 첫째 문신들은 산천의 裨補 延基에 관한 일이나 지방에서 일어난 반란의 진압, 또는 왕의 죽음에 따른 복상기간의 논의 등 국가의 중대사를 결정하는 재추회의에 참석하였다. 그리하여 최씨정권의 제반정책을 설득력이 있는 것으로 만드는데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 재추는 무신란 직후와는 달리 최씨집권기에 들어와 모든 국정에 참여하였다. 초기 무신정권기에는 重房에서 국가의 중대사를 결정했는데, 최씨정권기에는 중방을 배제시키고 재추들을 사제에 모아 국정을 논의하도록 하였다. 이는 중방의 권한을 약화시키려는 최씨집권자의 정치적인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또한 최씨집권자는 자신의 의견이라 하더라도 이를 재추회의의 의결을 거치게 함으로써 그들의 정책을 훨씬 설득력이 있는 것으로 만들었다.

 둘째로 문신들은 최씨정권의 인사행정 수행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것은 承宣이 최씨집권자의 전주권 행사를 합리화시켜 주었던 것으로 알 수 있다. 승선은 최씨정권의 인사행정에 따른 비난을 감소시켜 주었다. 최씨집권자는 이부와 병부를 통하지 않고 그들의 사제에서 백관의 전주를 행했는데, 이것은 인사행정에 다수의 관리가 관여하는 것을 차단시키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여기에 승선을 참여시킴으로써 최씨정권의 인사행정이 합법적인 절차를 거쳤음을 가장하려 하였다. 인사행정은 출세와 직결되는 것이었으므로 많은 관리들의 관심의 대상이었고, 이에 대한 불만은 커다란 반발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것이었으므로 최씨집권자는 왕의 비서와 같은 존재인 승선을 여기에 참여시켰던 것이다. 그리하여 인사행정에 따른 관리들의 불만을 적절히 무마하고 해소시킬 수 있었다.

 최우가 그의 사제에 政房을 설치하고 여기에 승선이나 내시들을 속하게 했던 사실도 최씨집권자에 의한 인사행정이 왕의 의도와 같았음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다. 결국 승선은 최씨집권자의 인사행정에 대한 비난을 감소시켜 주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이리하여 최씨정권은 전주권을 완전히 장악하는데 성공하였다.

 셋째 최씨집권자들은 자신들이 꺼리는 인물들을 대간으로 하여금 탄핵케 함으로써, 문신들은 무신정권을 두둔하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하였다. 고려시대의 대간은 諫諍·封駁과 관리의 탄핵·규찰·서경 등의 권한을 행사하였다.456)朴龍雲,≪高麗時代 臺諫制度硏究≫(一志社, 1980). 대간은 최씨정권기에 들어와서도 그 기능을 상실하지 않았다.457)朴龍雲, 위의 책, 96∼97쪽. 그러므로 대간은 최씨집권자들을 견제할 수 있는 제도적인 장치였다고도 할 수 있다. 실제로 대간은 최씨집권자에게 반발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렇다고 대간이 최씨집권자를 규제했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최씨정권의 존립을 위태롭게 하는 인물들을 대간은 철저하게 탄핵했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대간은 사소한 문제에 있어서는 최씨집권자와 견해를 달리 할 수 있었으나, 정권유지와 관련된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는 최씨를 적극 응호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대간은 최씨정권을 견제했다기보다는 제도적인 장치를 통해 정권의 유지를 뒷받침했다고 할 수 있다. 요컨대 최씨집권자는 대간의 활동을 어느 정도 보장함으로써 그들의 정적을 대간으로 하여금 탄핵케 하는 명분을 마련할 수 있었다.

 최씨정권기에 문신들의 위와 같은 역할과 기여로 문신들의 정치적 지위는 점차 높아지게 되었다.458)金塘澤, 앞의 글(1987), 126∼130쪽. 그리하여 최씨정권의 전개에 따라 문신들의 지위는 향상되었다.459)李基白,≪韓國史新論≫新修版(一潮閣, 1990), 202·205쪽. 최씨정권기 문신의 정치적 지위를 시기별로 나누어 검토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최충헌 집권기에는 정권을 장악하는 과정에서 군사력에 의존하였으므로 최충헌은 무신들을 정치권력에서 배제시킬 수 없었다. 그리하여 이 시기에는 무신들이 문신들을 압도하였고, 따라서 문신들은 그들의 관직에 따른 정치 권력을 제대로 행사할 수 없었다. 곧 최충헌집권기에는 무신이 문신보다 우월한 정치적 지위를 차지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최우집권기 이후에는 문신들의 지위가 점차로 향상되었다. 최우는 자신에게 협력하는 한 문신과 무신은 다를 바 없었으므로 문신들의 협력도 필요하였을 것이다. 그가 寒士를 많이 발탁하였음은 이와 같은 필요성 때문이었다. 한편 최우는 무신들의 정치적 지위가 높아지는 것을 경계하였다. 왜냐하면 무신들의 지위가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군사적인 힘을 이용하여 최씨정권에 반기를 들 염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최우는 고위무신들을 견제·억압하게 되었고 반대로 그가 등용한 문신들을 우대하게 되었다. 또한 최우집권기에 있어서 문신들의 중요 관직 점유율이 최충헌집권기에 비해 증가하였다는 사실도 이를 뒷받침하는 것이다.460)Edward J. Shultz, The Military-Civilian Conflict of the Koryo Dynasty, The Studies on Korea in Transition, 1979에 의하면, 문신의 관직 점유율이 최충헌집권기가 62%였는데 대해 최우집권기에는 70%로 증가한 것으로 보고되었다. 요컨대 최우집권기 문신의 정치적 지위의 향상은 최충헌 이래 최씨집권자들의 무신에 대한 견제와 아울러 그들이 등용한 문신들에 대한 우대의 결과였다고 할 수 있다.

 최항집권기에 오면 최항과 정치적 견해를 달리 한 문신들이 많았다. 이처럼 문신 가운데 최항과 견해를 달리 할 수 있는 인물이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은, 최항이 권력을 세습한 이후 기존의 정치질서를 개편하기 어려운 상황에 있었기 때문이다. 최항은 최우의 후계자로 내정되는 과정과 권력세습의 과정에서 많은 관리들의 반발이 있었으므로 최우정권의 골격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새로운 정치 세력을 구축하였다. 따라서 최우집권기의 문신들은 최항과 의견을 달리할 수도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문신들이 최항과 다른 정치적 견해를 피력할 수 있었다는 것은, 최우집권기 문신들이 정책에 추종만 했던 것과는 좋은 대조가 된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문신들의 관직 점유율도 최우집권기보다 증가하였다 한다.461)Edward J. Shultz, 위의 글에 의하면, 최항집권기 문신의 관직 점유율은 74%였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은 최우집권기의 70%보다 증가한 것이다. 최항집권기 문신의 정치적 지위는 최우집권기보다 향상되었다고 할 수 있다.

 최의집권기는 1년에 불과하였으므로 문신의 정치적 지위에 큰 변화는 없었을 것이다. 문신들이 무신에 비해 정치적 지위가 향상되었다지만 문신의 정치적 지위가 무신보다 우세하였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정치의 실권은 무신이 장악하였던 시기였으므로 문신은 정치적 지위에 있어서 무신보다 열세였다.462)金塘澤, 앞의 글(1987), 130∼134쪽.

 무신의 정치적인 지위가 문신보다 우월하게 된 것은 무신란 이후부터이었다. 문신 가운데 유력자는 무반직을 겸하였는데 윤인첨과 문극겸이 그 대표적인 인물이었다.463)邊太燮,<高麗期의 文班과 武班>(≪史學硏究≫11, 1961;≪高麗政治制度史硏究≫, 一潮閣, 1971). 이들은 전술한 바와 같이 상장군이란 무반직을 겸하였다.

 고위문신의 무반직 겸대와 아울러 일반문신들에게 무반직을 제수하기도 하였는데, 이것은 出仕路를 바꾸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과거에 합격한 문신들이 출사로를 바꾸는 것은 무신란 직후에는 별로 없었다. 왜냐하면 문신들은 무반으로 나가는 것을 영예롭게 생각하지 않아 이를 꺼려했기 때문이다.464)≪東國李相國集≫권 35, 尹承解墓誌銘. 따라서 초기 무신정권기의 문신들은 문반직을 고수함으로써 무신에 대한 우월감을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최씨정권 이후에는 과거에 합격한 많은 문신들이 무반직을 제수받게 되었다. 이처럼 문신들이 무반직으로 바꾼 것은 무신정권이 장기화함에 따라 무신에 대한 우월감만을 고집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과거에 급제하였다 하더라도 쉽게 관직에 나갈 수 없었을 뿐 아니라 빠른 출세에도 지장이 많았던 것이다. 따라서 무신란 이후 최씨정권까지 지속된 무신의 우월한 정치적 지위는 문신으로 하여금 무반으로 출사로를 바꾸는 계기를 마련하였던 것이다.

 요컨대 최씨정권기 문신들의 무신에 대한 정치적 지위의 열세는 많은 문신들이 무반직을 택하는 결과를 가져 왔다. 특히 과거합격자들이 무반으로 출사로를 바꾸었는데, 이는 무신란 직후에는 별로 없었던 현상이었다. an신정권이 장기화되고 더구나 과거에 급제했다 하더라도 곧 관도에 나아갈 수 없었던 당시의 상황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결국 이와 같은 문신의 무반화는 무신의 문반직 겸대와 함께 문·무의 구분을 모호하게 만들었다.

<金毅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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