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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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권 고려 무신정권
  • Ⅲ. 무신정권기의 국왕과 무신
  • 4. 무신정권기 문신의 정치의식과 그 성향

4. 무신정권기 문신의 정치의식과 그 성향

 무신정권기의 문신은 정계 은퇴 계열인 隱居文士와 疎外文人 그리고 정계 등장 계열인 登用文臣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그런데 대체로 볼 때 정계 은퇴 계열의 문사와 문인들은 무신정권에 대한 반발의식으로 출세를 단념하였으므로 도피적인 성향을 지녔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정계 등장 계열의 문신들은 무신정권에 대해 참여의식을 갖고 집권층에게 타협·아부하면서 활동하였으므로 어용적인 성향이 있었던 것으로 파악할 수도 있다. 이와 같은 인식은 문신들의 내면적인 고충과 갈등을 도외시한 피상적인 고찰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무신정권기의 문신들을 양분하고 정치의식과 그 성향을 유형화하여 논단하는 것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고 할 수 있다.465)金毅圭,<高麗武人執權期 文士의 政治的 活動>(≪韓㳓劤博士停年紀念 史學論叢≫, 知識産業社, 1981), 281쪽.

 정계 은퇴 계열의 은거문사들은 무신정권에서 입신출세하는 것을 단념하였으나 한결같이 도피적인 성향만을 지녔던 것은 아니었다. 神駿과 悟生이 무신란을 맞아 불교에 귀의한 뒤 환속하지 않고 고결하게 여생을 마쳤다고 하지만 무신정권을 향한 동경과 관심은 있었던 것 같다.

시골집에 오디는 익고 보리는 빽빽해지기 시작할 때…무슨 일로 거친 마을 쓸쓸한 곳에서 수풀 건너 가끔 두 서너 마디씩 보내오는가(≪謏聞瑣錄≫).

 위의 글에서 신준은 입산하여 승려가 된 뒤 울적한 심정을 토로한 시에서 슬프고 한스럽게 자신의 처지를 자위하고 있다. 물론 시는 엄격한 역사적인 사실을 나타내는 기록으로 볼 수는 없다. 그러나 시에 표현된 내용은 시대상이 반영된 역사성을 내포하기 마련이다.

 또한 公州 산장에서 지방자제들을 가르친 적이 있었던 신준은 그의 제자를 서울로 보내어 과거에 응시케 하면서, 눈물을 흘리며 보낼 수밖에 없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였다.

信陵公子가 精兵을 통솔하여 멀리 邯鄲에 가서 큰 공을 세우니, 천하의 영웅들이 모두 다 본받아 좇았으나 눈물 흘리며 그를 보내던 늙은 侯籝 가엽구나(≪櫟翁稗說≫前集 1).

 한편 伽倻山에 은거했던 오생도 현실정국에 대한 관심이 매우 컸던 것 같다. 이는 그가 남긴 黃山江樓時의 끝절을 통해서 알 수 있다.

누워서 어부의 노 저으며 하는 말 들어보니, 먼지 휘날리며 말 달리는 사람들은 우리 무리 아니라 하네(≪櫟翁稗說≫後集 2).

 즉 먼지를 휘날리며 말을 달리는 집권세력이 아직도 무신인 것을 풍자하면서 개탄하고 있다. 무신정권에 등용되지 못했던 임춘·오세재 등 소외문인들이 정계에 등장하고자 하였음은 앞서 살핀 바와 같다.

 이로써 볼 때 증거할만한 남긴 글은 미흡하지만 정계에서 은퇴한 은거문사들과 소외문인들이 다시 출세하는 것을 완전히 단념하지 않고, 정계로의 등장을 선망하거나 동경하고 있었다고 추론하는 것은 지나친 억측만은 아닐 것이다.

 무신란 후 정계에 등장하였던 문신들은 무신정권에 기여하면서 활동하였으나 한결같이 완전무결하게 집권세력에 동조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등용문신들의 어용성에서 간과할 수 없는 고충이 있었음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무신정권기를 맞아 전반적으로 의기가 떨어지고 위축된 문신들은 시 짓고 술 마시며 서로 즐기고 사귀어 놀면서 老莊高踏의 風을 즐기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인로는 당세의 명유였던 吳世才·林椿·趙通·皇甫抗·咸淳·李湛之와 더불어 忘年友를 맺어 시와 술로써 즐겼으므로 중국 六朝시대의 江左7賢에 비교하였다고 한다.466)≪高麗史≫권 102, 列傳 15, 李仁老. 여기서 7인의 망년우는 문자 그대로 연령의 고하를 망각한 동지회·동우회와 같은 것으로,467)李丙燾,≪資料韓國儒學史草稿≫(서울대 문리대 國史硏究室, 1959), 84쪽. 西晋代의 竹林七賢(稽康·阮籍·阮咸·山燾·向秀·劉伶·王戎)과 유사한 것이다. 그리고 이같은 망년우의 모임은「竹林高會」라고 하였다 한다.468)≪破閑集≫권 末, 後序.

 그런데 무신정권에 결탁하여 최씨정권기에 들어와 크게 출세함으로써 후세 史家로부터 최씨문객이란 貶評을 받았던 이규보가 忘年七賢과 교유하였다는 사실은 당시 문신들의 동태를 알려 주는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는 이규보가 그들의 분방한 기질에 공명하는 바가 있었기 때문으로 이규보와 이담지와의 문답내용과 이규보의 시구를 살펴 봄으로써 알 수 있다.

7현은 늘 술을 마시고 시를 지어 곁에 사람이 없는 것 같았다. 世才가 사망하여 湛之가 奎報에게 말하기를 ‘자네가 가히 보충하겠는가’라고 하니 규보가 말하기를 ‘7현이 어찌 조정의 관작에게서 그 궐석을 보충하고자 한단 말이오. 아직 稽康·阮籍의 뒤에 이를 계승한 자가 있었다는 것을 듣지 못하였소’라 하자 모두 크게 웃었다. 또 시를 짓게 하니 규보가 입으로 지어 불렀는데 그 한 구절에 ‘7현 안에 누가 연찬하는 사람인지 모르겠다’라고 하자 온 좌중이 모두 노여워하는 기색이 있었다(≪高麗史≫권 102, 列傳 15, 李奎報).

 즉 이규보는 망년7현의 고답적인 태도에 대해 못마땅해 하고 7현 중에 연찬하는 사람이 없으므로 그들과 한자리에 있는 것을 즐겨하지 않았다. 그러나 오세재가 사망하여 7현의 1명이 궐석되었을 때 이규보는 그 보충의 대상자로 거론되었다. 이것은 이규보가 정권에서 소외되어 있던 문인들과 일맥상통하는 바가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오세재가 실의 속에 전야로 영락하여 곤궁 속에서 사망하였을 때 이규보는 애도의 글을 통해 무신집권층의 행폐를 울분에 찬 눈으로 개탄하였다.469)≪東國李相國集≫권 37, 哀詞祭文. 또한 이규보는 사소한 관직을 얻는 데도 뇌물이 요구되었던 사회현실을 비판하기도 하였다.470)≪東文選≫권 96, 舟賂說.

 이로써 무신정권에 아부하였던 이규보의 울분과 불만의 정도를 짐작할 수 있고, 사회비리에 대하여 감연히 규탄하고 반발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는 정사에 뜻이 맞지 않으면 時諱에 저촉될 염려가 적은 시에 가탁하여 비방하고 오연히 대취하여 미친 듯하였으므로 세상사람들이 미친사람으로 여겼다.471)≪東國李相國集≫권 26, 呈尹卽中威書. 하지만 무신정권의 험난한 세태가 장기화되자 이규보의 반발의식은 변화하였다. 당시의 정치상황에서 문신들이 취할 태도를 이규보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나의 두려운 바는 남에게 있지 않고 바로 나에게 있다. …그러므로 성인들이 사람을 두려워 않고 오직 입을 두려워 하였으니, 실로 입을 삼가면 처세에 무슨 탈이 있겠는가(≪東國李相國集≫권 1, 畏賦).

 이규보는 자기 몸을 보전하기 위하여 자신의 입을 두려워하고 말을 삼가함으로써 처세와 행동에 근신을 기하게 되었던 것이다.

 등용문신으로서 무신집권자에게 반발하고 집권층의 비리와 부패를 지적한 것은 비단 이규보만이 아니었다. 文安公 兪升旦은 민가가 날로 퇴락해 가는 것을 막지 못하는 자신의 무능을 한탄하였고,472)≪東文選≫권 13, 書德豊縣公館. 한림학사 柳澤은 집권자인 최충헌의 횡포에 대하여 이를 규탄하는 疏文을 지어 반발하였다.473)≪高麗史節要≫권 14, 고종 3년 3월. 또한 한림학사 陳澕는 무신들의 농민 수탈을 고발하였다.474)≪梅湖遺稿≫詩 桃源歌.

 등용문신들의 반발의식과 비판적인 태도는 마침내 무신정권을 외면하고 부정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사실은 韓惟漢이란 문신의 경우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서울에서 대대로 살았던 한유한은 최충헌이 국정을 마음대로 하고 벼슬을 파는 것을 보고 난이 장차 일어날 것이라 하여 가족을 이끌고 智異山에 들어가 숨어서 평생을 살았다고 한다. 최충헌은 그에게 西大悲院錄事를 제수하려 하였으나 끝내 응하지 않음으로써 관직에 나아가는 것을 거부하였다.475)≪高麗史≫권 99, 列傳 12, 韓惟漢. 한유한의 행동은 최충헌정권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취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위와 같은 사례를 종합해 볼 때 정계에 등장한 문신들이 어용적인 기질을 갖고 모두 무신정권에 결탁하여 활동하였다고 보는 것은 다시 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결국 무신정권하의 문신들은 모두 참여의식과 반발의식을 함께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정계 은퇴 계열의 문신들은 무신정권에 등용되는 것을 동경하는 경향이 있었고 반면에 정계 등장 계열의 문신들은 무신정권에 완전무결한 동조자가 될 수 없었다.476)金毅圭, 앞의 글, 293쪽. 따라서 무신정권에 참여하였던 등용문신은 말할 것도 없고 무신정권을 외면하였던 은거문사와 소외문인들도 정권에 등용되기를 갈망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무신정권기의 문신들의 정치의식과 그 성향은 각기 양면성을 갖고 있었으므로 이를 유형화하여 단정할 수 없다고 본다.

 이상 살핀 바와 같이 무신란이 발발하면서 문신들은 대살륙을 당하였으나 그 존재가 소멸된 것은 아니었다. 무신란의 와중에서 화를 면하고 목숨을 구 한 문신들은 그들의 입장과 성격에 따라 제각기 무신정권에 달리 대응하였다. 이른바 은거문사들은 무신들과 타협을 거부하고 지방에 은둔하면서 맑고 고결한 절개와 지조를 고수하였다. 난 후 무신정권에 사환하려 했으나 등용되지 않아 불우한 일생을 마친 소외문인들도 있었다. 은거문사와 소외문인은 정계에서 은퇴한 계열로 볼 수 있다. 반면에 난 후 문신지위가 그대로 유지된 舊文臣과 신규로 무신정권에 참여하였던 신진문신이 주류를 이룬 등용문신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정계에 등장한 계열이었다.

 난 직후 문신에 대해 보복적이었던 무신들은 오래지 않아 옛 문신들을 포섭하고 신진문신을 등용하였다. 이에 따라 초기 무신정권기의 문신들은 난 전과 같이 관직을 모두 독점하지는 못하였으나 관직의 점유율은 무신들을 앞섰고 중요 관직에도 임명되었다. 그러나 문신들은 무신들에게 견제되어 정치활동이 전반적으로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그 후 최충헌이 등장하여 최씨정권이 확립되자 문신들은 다시 등용되고 집권자로부터 우대를 받게 되었다. 최충헌은 집권하기 전에 친분관계를 맺었던 좋은 가문출신의 문신들 뿐만 아니라 정권에서 소외되었던 문인들도 등용하였다. 최씨정권의 문신들에 대한 우대정책은 그들을 장악함으로써 문무양반의 지배자로서 정권을 유지하고 권력을 강화시키기 위한 고도의 용인술이었다고 할 수 있다. 문신들이 최씨정권에 발탁되어 등용되려면 반드시 정권과 밀착된 측근 문신의 천거가 필요하였고, 그들은 座主로 있으면서 門生 중에서 믿을 수 있는 인물을 선발하였던 것이다. 좌주와 문생간의 정치적 유대는 평생 지속되었으므로 이들에 의해 형성된 인맥은 최씨정권의 장기화에 큰 힘이 되었다.

 이처럼 문신들이 우대를 받기는 하였으나 그들의 정치활동은 최씨집권자의 지지가 전제되었으므로 문신들은 무신정권과 결탁하게 되었다. 문신들은 문장가로서의 명성의 영구성과 가문의 영달을 위해 최씨정권과 타협하고 집권층에게 아부하면서 그들의 활로를 개척해 나갔다. 이리하여 문신들은 집권자의 충실한 예속적 굴종자가 되고 말았다.

 최씨정권하의 문신들은 정권의 합리화와 정당화에 크게 기여하였고, 최씨가문과 통혼함으로써 최씨정권의 사회적 지위를 높임에도 공헌하였다. 최씨가문과의 혼인은 문신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사회적 진출과 정치적 위치를 확보하려는 의도 때문이었다. 또한 문신들은 宰樞·承宣·臺諫 등 고위관직에 임명되어 국정 수행에 참여하면서 무신정권을 옹호하였다.

 문신들의 위와 같은 역할로 그들의 정치적 지위는 점차 높아지게 되었다. 그렇다고 문신의 정치적 지위가 무신보다 우세하였던 것은 결코 아니다. 무신정권의 시기였으므로 정치적 지위에 있어서 문신은 무신보다 열세였다. 이에 따라 문신의 무반화현상이 나타나게 되었던 것이다.

 무신정권기의 문신은 정계 은퇴 계열인 은거문사와 소외문인 그리고 정계 등장 계열인 등용문신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이들 문신들은 무신정권에 대하여 참여의식과 반발의식, 어용적 성향과 도피적 성향을 함께 가지고 있었으므로 무신정권에 등용되는 것을 동경하는 경향이 있는 반면에 무신정권에 완전무결한 동조자가 되지 못하였다. 등용문신은 말할 것도 없지만 은거문사와 소외문인들도 대부분 정권에 등용되기를 갈망하였다고 볼 수 있다.

<金毅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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