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9권 고려 후기의 정치와 경제
  • Ⅰ. 정치체제와 정치세력의 변화
  • 1. 정치조직의 변화
  • 1) 중앙 통치체제의 변화
  • (1) 도평의사사

(1) 도평의사사

 고려 후기 중앙 정치제제의 변화 가운데 가장 중요한 현상은 역시 都堂, 즉 都評議使司 중심체제로 개편된 점이다. 원래 고려는 3省 6部를 기간으로 한 정치체제였는데 후기에는 도평의사사 중심으로 전환되었으니, 이는 고려 통치체제의 일대 변화를 뜻하는 것이었다. 都兵馬使의 후신인 도평의사사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은 생략하고0001)邊太燮,<高麗都堂考>(≪歷史敎育≫11·12, 1969 ;≪高麗政治制度史硏究≫, 一潮閣, 1971).
―――,<중앙의 통치기구>(≪한국사≫13, 국사편찬위원회, 1993), 65∼75쪽.
여기서는 고려 후기 정치체제상 도평의사사의 위치에 대하여만 논급하기로 하겠다.

 처음 兩界兵馬使를 중앙에서 통령하는 일원적 기구로 출발한 도병마사는 변경·군사문제를 다루는 회의기관이었으나 마침내는 일반 민사문제까지도 관여하는 宰樞會議機關으로 승격하기에 이르렀다. 고종 말년에 도병마사가 ‘都堂’으로 불리게 된 것은 이제 도병마사가 재추로 구성된 중앙의 최고기구로 변화하였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도병마사가 도평의사사로 개칭되는 한 요인이다.

 도병마사는 충렬왕 5년(1279) 도평의사사로 개정되었다. 이 개정은 元의 간섭에 의한 타율적인 것이 아니고 고려 스스로의 의사에 따른 조치였다. 국사 전반을 회의 결정하여 도당으로 불리는 최고기관을 종전과 같이 도병마사로 부르는 것은 적절치 못하였는 데 대하여 도평의사사는 모든 국가 정무를 평의한다는 뜻이어서 그 기능에 알맞은 명칭이라고 하겠다. 이제 도평의사사는 그 명칭상으로도 실제 최고 정무기관의 기능을 표현하게 되었던 것이다.

 고려 후기 도평의사사의 변화는 宰樞의 회의기관이 되었다는 점이다. 도병마사 때에도 회의기관인 점에서는 다름이 없었지만 그 때에는 재추 외에도 副使·判官 등도 회의원이 되었으나 이제는 재추만이 회의원으로 되었다. 재추란 宰臣(中書門下省의 고관)과 樞臣(中樞院의 고관)을 가리킨 것으로, 이른바 고려의 ‘宰相’이었는데 이들이 도평의사사의 회의원이 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그 위상의 격상을 뜻하는 것이 된다. 더욱이 이들 재추의 수는 시대가 내려갈수록 증가하여 처음에 5宰·7樞였던 것이 고려말에는 실직이 아닌 商議까지 포함되어 그 수가 70∼80명까지 이르렀다. 이는 도평의사사가 권력의 집중기관임을 나타낸다. 고려 후기의 도평의사사는 수십 명의 재추를 회의원으로 하는 비대한 합좌기관으로 중요 국사를 의논 결정하였다는 점에 커다란 변화를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도평의사사의 커다란 변질은 그것이 회의기관의 성격을 갖는 동시에 새로이 행정기구의 기능도 갖게 된 점이다. 즉 도평의사사는 국사를 회의할 뿐 아니라 여기서 결정된 사항을 실제로 시행하는 집행관서가 되었던 것이다. 공민왕 20년(1371)의 敎에서는 “百僚·庶務는 都堂에서 摠斷하게 되었는데, 근년에 諸司가 公事를 직접 諸道나 州縣에 下牒하는 경우가 있으니, 이제부터는 반드시 도당을 통하라”고 명한 것은0002)≪高麗史≫권 84, 志 38, 刑法 1, 職制 공민왕 20년 12월. 도평의사사가 중앙 최고기관으로 지방관에 명령하였음을 표시하는 것이다.≪高麗史≫百官志 서문에서 고려말에 도평의사사가 專權을 장악함으로써 6部는 그저 虛設이 되고 말았다고 하였으며, 실제로 공양왕 때는 各司가 受禀할 일은 6曹(6部)를 통하지 말고 도당에 직접 보고하게끔 법제화되었던 것이다.0003)≪高麗史節要≫권 35, 공양왕 4년 4월.

 이와 같이 고려 후기의 도당이 행정기능을 갖게 됨에 따라 이들 행정사무를 담당할 실무요원이 필요하게 되었다. 원래 도병마사에는 甲科權務로 임명된 8명의 錄事가 記事 등 25명의 이속을 통솔하고 있었다(文宗官制). 그러나 고려 후기에는 도평의사사에 6色掌이 설치되고 이들은 창왕 때 吏·禮·戶·刑·兵·工의 6房錄事로 개칭되었으니, 이들이 도평의사사에서 6部의 행정을 담당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때 6방녹사 외에도 또한 知印 10명과 使外하는 임무를 띤 宣差 10명을 두었으니, 이들은 도당에서 중앙·지방의 일을 담당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사무요원의 증가는 마침내 사무관청인 經歷司의 설치를 보게 하였다. 공양왕 때 사무처인 경력사가 설치되고 여기에는 3·4품의 經歷과 5·6품의 都事가 임명되어 6방녹사 등 堂吏를 통할하였다.0004)≪高麗史≫권 77, 志 31, 百官 2, 諸司都監各色 都評議使司. 공양왕 때 새로 건립한 도평의사사 廳舍에 중앙의 使司廳 좌우에 首領官廳이 달린 것은 바로 이들 經歷司의 사무처였던 것이다.0005)鄭道傳,≪三峯集≫권 4, 記 高麗國新作都評議使司廳記.

 위에서 본 바와 같이 고려 후기의 도평의사사는 70∼80명이나 되는 많은 재추가 국가의 모든 중요사를 회의·결정하였을 뿐 아니라 실제로 6부가 관장한 행정사무까지 집행하고 중앙의 諸司와 지방의 諸道·州縣까지 직접 통첩하는 일원적인 최고정무기관이 되었으니, 이는 고려의 정치체제의 일대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종래의 3성 6부 중심체제에서 도평의사사 중심체제로 개편되었을 뿐 아니라 도평의사사의 일원적인 권력집중이란 점에서 커다란 변화라 할 수 있다. 이제 도당은 百僚·庶務를 총단하게 되었으니 趙浚이 도당을 百揆를 총령하고 號令을 반포하였다고 한 것은0006)≪高麗史節要≫권 34, 공양왕 원년 12월 大司憲 趙浚等 上䟽. 이를 표현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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