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9권 고려 후기의 정치와 경제
  • Ⅰ. 정치체제와 정치세력의 변화
  • 1. 정치조직의 변화
  • 1) 중앙 통치체제의 변화
  • (2) 충렬왕대의 관제격하

(2) 충렬왕대의 관제격하

 고려의 3성 6부를 기본으로 한 정치제도는 武臣政權期에도 그대로 유지되었다. 武人執政은 비록 重房이나 敎定都監 등 스스로의 집권기구를 통하여 무신정치를 실시하였으나, 법제적인 3성 6부 및 諸寺·監 등의 관서는 변함없이 존속시켰다. 그러나 몽고에 굴복한 후에는 그들의 강요에 따라 관제를 격하하지 않을 수 없었으니, 그것은 충렬왕대의 개정으로 나타났다.

 충렬왕 원년(1275) 원에서는 고려의 관제가 참월하다 하여 사신을 보내 무릇 省·院·臺·部의 관명과 爵號가 그들의 것과 비슷한 것은 개정하도록 명하였다. 이에 고려는 관제를 개정하여 中書門下省과 尙書省을 합하여 僉議府라 하고 門下侍中을 僉議中贊으로 고쳤으며, 尙書 6部는 吏部·禮部를 합하여 典理司로 하고 兵部를 軍簿司, 戶部를 版圖司, 刑部를 典法司로 하며 工部는 폐지하여 4司로 축소시켰는데 이 때 4사의 장관도 尙書에서 判書로 격하해 불려졌다. 동시에 樞密院(中樞院)은 密直司로 개정되고, 御史臺는 監察司, 翰林院은 文翰署, 寶文閣은 寶文署, 國子監은 國學, 閣門은 通禮門, 司天監은 觀候署로 격하 개칭되었다.0007)≪高麗史≫권 76, 志 30, 百官 1. 또한 충렬왕 2년(1276)에는 몽고 達魯花赤[다루가치]의 힐난에 따라 왕의 宣旨를 王旨, 朕을 孤, 赦를 宥, 奏를 呈으로 개칭하였으며,0008)≪高麗史≫권 28, 世家 28, 충렬왕 2년 3월 갑신. 이 밖에도 陛下를 殿下, 太子를 世子라 부르고 왕의 廟號도 祖·宗 대신에 王을 칭하였는데 앞머리에 ‘忠’ 또는 ‘恭’을 붙이게 하였다.

 충렬왕 원년의 관제 개정은 몽고의 압력에 의해 할 수 없이 단행된 것이었다. 황제의 上國에 복속된 王侯國으로 참월하다는 이유로 격하시킨 개정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때 개정된 정치기구는 상층부서에만 해당되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즉 3성 6부와 중추원·어사대 등 모두 9개 관서에 불과하고 그 밖의 諸司는 그대로 존속하였다. 따라서 충렬왕대의 관제개혁은 상부 관청의 개편에 불과하고 그 밖의 省(殿中省 등)·寺·監 및 署·局의 하부 관서는 그대로 변함이 없었던 것이다. 또한 개칭된 관부의 명칭은 대부분‘司’로 일원화되었으니, 6부가 4사로 되고 중추원이 밀직사, 어사대가 감찰사로 바뀌었으며 그 후에도 도병마사가 도평의사사로 개칭되었다. 원래 사는 唐制에 따르면 6부 밑의 屬司였는데 이 때 고위 관부를 모두 사로 개칭한 것은 하나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이 때의 관제개정은 3성이 첨의부로 단일화되고 6부가 4사로 축소되었을 뿐 전반적인 정치체제나 권력구조에는 변함이 없었다. 오히려 정치체제상의 변화로 본다면 전술한 바 도평의사사가 권력 확장에 의해 일원적인 최고정부기관으로 대두한 점이었다. 도병마사는 원나라 관제에는 없었기 때문에 충렬왕 원년의 기구명 개칭에는 무관하였지만 충렬왕 5년 고려 자체의 의지에 따라 도평의사사로 격상 개정된 것이다. 따라서 충렬왕 원년의 관제 개정은 정치체제상에는 본질적인 변화를 주지 않았으며, 오히려 충렬왕 5년의 도평의사사의 부상이 커다란 의미를 갖게 되었던 것이다.

 충렬왕대의 정치제도 변화에서 자못 중요한 것은 원의 職制에 따른 관부가 설치된 점이었다. 그 중에서 가장 커다란 권력기관은 바로 征東行省이었다. 원은 충렬왕 때 일본정벌을 위한 전방사령부로 고려에 정동행성을 설치하였는데 일본정벌을 단념한 후에도 그대로 존속시켜 고려 내정에 관여하였다. 정동행성의 정식 명칭은 征東行中書省이었는데 ‘征東’이란 일본정벌을 뜻하는 것이고 ‘行中書省’은 지방 파견관을 뜻하였는데 그저 정동행성으로 약칭되었다. 정동행성은 제2차 일본정벌의 준비를 위해 충렬왕 6년에 처음으로 설치되었으며 일본정벌이 실패하자 곧 폐지되었다가 충렬왕 9년 다시 설치되었다. 그러나 이것도 곧 폐지되고 세번째로 동왕 11년에 설치된 후 고려말까지 존속되었다.

 정동행성은 고려가 원에 예속된 관계의 표징이었으나 실제로는 형식적 기구로서 원에 賀正使를 파견하는 일 등의 의례적인 일만 맡았을 뿐이었다. 구성원에서도 그 장관이라 할 수 있는 丞相은 고려왕이 임명되었고 그 하부관리도 고려인으로 채워져 있었다. 충렬왕 25년(1299) 韓希愈事件이 발생하였을 때 원은 濶里吉思를 정동행성의 平章政事, 耶律希逸을 右丞에 임명하여 고려의 내정을 직접 간섭한 일도 있었으나 이것도 곧 폐지되어 정동행성의 형식적 기구로서의 성격은 변함이 없게 되었다. 오히려 정동행성의 하부기구인 理問所가 사법기관으로 반원세력을 억압하고 부원세력의 부패를 방조하는 전횡을 저질러 고려인의 원성의 대상이 되었다. 따라서 정동행성은 엄연히 고려에 설치된 원의 지방관청의 지위에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실제로는 고려의 내정을 감독하지는 못하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0009)高柄翊,<麗代 征東行省의 硏究(上·下)>(≪歷史學報≫14·19, 1961·1962 ;≪東亞交涉史의 硏究≫, 서울大 出版部, 1970).

 이상과 같이 충렬왕대에는 원의 간섭으로 관제가 격하되었으나 그것은 상부 관서에 한하였고, 고려 정치체제나 권력구조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였다. 또 원의 관부라 할 수 있는 정동행성이 고려에 설치되었으나 일반적으로는 형식적·의례적 기구에 불과하였다. 오히려 충렬왕대에는 그 전부터 도당으로 불렸던 도병마사가 도평의사사로 개편됨에 따라 그 정치적 지위가 보다 확대, 강화되었다는 사실이 중요한 정치체제상의 변화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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