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9권 고려 후기의 정치와 경제
  • Ⅰ. 정치체제와 정치세력의 변화
  • 1. 정치조직의 변화
  • 3) 관리 등용제도의 변질
  • (2) 과거제와 음서제 등의 변질

(2) 과거제와 음서제 등의 변질

 앞에서 설명하였듯이 고려시대의 가장 중요한 관리 등용방식은 科擧와 蔭叙였다. 이들은 고려 일대를 통해 줄곧 시행되었는데, 후기에 들어와서는 운영상에도 좋지 않은 방향으로 변질되어 갔다. 과거제에 대해서부터 살펴보면, 우선 앞에서 지적했던 바 선거지 서문에도 나오는 내용으로, 분홍 옷 입기를 좋아하는 세가의 젖비린내 나는 아동들을 합격시키는 일이 많았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이 점은 공민왕이 “監試에서 취하는 바는 으레 모두 童蒙들이요, 經明·行修의 선비가 아니어서 국가에 이익됨이 없다”0055)≪高麗史節要≫권 28, 공민왕 17년 2월.고 한 언급을 통해서 다시 확인할 수 있지만, 구체적인 사례로 충혜왕초의 權臣 崔安道가 배움이 별로 없는 어린 아들 璟을 감시에 이어 禮部試에까지 급제토록 했다가 간관의 탄핵을 받은 사실도0056)≪高麗史≫권 124, 列傳 37, 嬖幸 2, 崔安道. 보이고 있다. 그런데 실제로 이 최경의 예를 제외한 다른 사례들에 의하면 감시의 경우에 최하 13세로부터 14, 15세 이상의 나이에서 합격하고 있었으며, 고려 전 기간의 평균 연령은 18세가 넘고 있었다. 그리고 이 연령은 예부시의 경우 훨씬 더 올라가고 있거니와,0057)朴龍雲,<高麗時代 科擧의 考試와 體系에 대한 檢討>(≪韓國史硏究≫61·62, 1988 ;
≪高麗時代 蔭叙制와 科擧制 硏究≫, 一志社, 1990, 168∼170쪽).
따라서 사실 ‘乳臭之童’ 또는 ‘童蒙’ 등으로 표현하고는 있지만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나이 그 자체가 아니라 그들의 배움이 아직 科試에 합격할 만한 수준에 이르지 못했다는 데 있었던 것 같다.0058)이 점은 위에 든 공민왕의 발언과 崔璟의 예에서도 드러나고 있지만, 또 李穀과 같은 이도 “與陽川君許伯掌試 取金仁琯等 穀伯徇私 多取世家不學子弟 憲司彈之 不出新及第依牒” 이라고 한 데서도 엿볼 수 있다(≪高麗史≫권 109, 列傳 22, 李穀). 그러므로 이들의 합격에는 권력과 부정이 따르게 마련이었고, 바로 이 점이 더 문제였던 게 아닌가 생각된다.

 원나라 공주를 따라와 충렬왕 때 위세를 부리며 권신이 되었던 印侯와 張舜龍에게 아부코자 어느 試官이 不學無才인 그들의 아들 印承光과 張瑄을 모두 합격시킨 것과,0059)≪高麗史≫권 123, 列傳 36, 嬖幸 1, 印侯. 우왕 11년(1385) 4월의 科試를 주관했던 廉國寶와 鄭夢周가 역시 魚魯를 분별하지 못할 정도로 무식한 懿妃의 동생 盧龜山을 中場에서 불합격시켰다가 우왕의 노여움을 사서 할 수 없이 급제까지 시킨 것은0060)≪高麗史節要≫권 32, 신우 11년 4월.
≪高麗史≫권 117, 列傳 30, 鄭夢周.
전자에 해당하는 예라고 할 수 있다. 또 위에 든 최경과 같이 남의 글을 빌려 써서 급제한 것과,0061)≪高麗史≫권 110, 列傳 23, 韓宗愈. 친구의 對策을 훔쳐 써서 급제한 文允慶,0062)≪高麗史節要≫권 32, 신우 11년 4월.
≪高麗史≫권 117, 列傳 30, 鄭夢周.
남의 손을 빌려서 會試에 합격했다고 생각되는 王康0063)≪高麗史≫권 116, 列傳 29, 王康. 등은 후자의 예에 속하는 것들이다.0064)이에 대해서는 曺佐鎬,<麗代의 科擧制度>(≪歷史學報≫10, 1958), 147∼148쪽·158쪽에 비교적 자세하게 언급되어 있다. 공민왕 14년(1365) 10월에 李仁復과 李穡이 건의하여 수험생들이 책을 끼고 科場에 들어가는 것을 금하고, 試卷을 易書해 채점하여 假濫을 방지케 하려는 조처를 취하였는데,0065)≪高麗史≫권 73, 志 27, 選擧 1, 科目 1. 이 역시 당시 과거의 문란상과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된다. 물론 고려 전기라 하여 과시에 부조리가 없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특히 고려 후기에 들어와 그로 인한 문제가 집중적으로 발생하고 있는 데서 과거제 운영상의 변질된 모습을 볼 수 있을 것 같다.

 과거와 관련하여 고려 후기에 또 문제가 된 것은, 위에서 제기된 것과 좀 차원이 다른 내용이긴 하지만, 향리 및 그 자제들의 활발한 진출로 인한 鄕役 부담자의 결핍현상이었다. 이같은 사실은 먼저 공민왕 12년 5월에 왕명으로 “근년에 外吏들이 本役을 면하기 위하여 잡과로 出身하는 자가 많으므로 鄕邑이 彫廢케 되고 있으니 지금부터는 단지 正科에 赴擧하는 것만 허락하고 諸業에는 참여하지 못하게 하라”고 한 데서 알 수 있다.0066)≪高麗史≫권 75, 志 29, 選擧 3, 銓注 鄕職. 또 우왕 9년 2월에 左司議 權近 등이 “나라의 안위는 州郡의 성쇠에 달려 있는데 근년 이래로 外方 주현의 吏輩들이 본역을 면하고자 꾀하여 明書業·地理業·醫業·律業을 한다고 칭하나 모두들 재주는 없는데도 출신하여 면역하기 때문에 향리가 날로 줄고 공무는 유지되기 어렵습니다 …”고 하자 “東堂雜業과 監試明經은 예전처럼 시행토록 하고, 향리의 경우는 三丁 가운데 한 아들만 赴試를 허가하도록” 지시하였다.0067)위와 같음. 이같은 몇몇 사료를 통해 확인할 수 있듯이 향리들은 비교적 급제하기 쉬운 잡과를 주로 이용하여 관리로 진출하였다. 어떻든 그로 인해 향역을 부담할 향리의 숫자가 감소하였고 그에 따라 군현이 피폐해졌으므로 말썽이 된 것이지만, 이는 職役체제의 불균형이라는 면에서뿐 아니라 관리 수의 증가와 그로 인한 인사행정의 난맥상과도 복잡하게 얽혀 있는 문제로서 주목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 蔭叙制에 있어서 고려 후기에 이르러 전기와 비교하여 많이 달라진 것으로는 初蔭職의 위계가 크게 높아진 점을 들 수 있을 것 같다. 전기에는 실무와 관계없는 品官同正과 吏屬同正이 주류를 이루고, 거기에 얼마간의 吏屬職(胥吏職)과 權務職·品官職 등 實職이 주어졌던 것에 비해, 후기에는 그와 반대로 권무직과 무반의 品官實職이 대부분이고 동정직을 초음직으로 준 예는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0068)朴龍雲,<高麗時代 蔭叙制의 實際와 그 機能(下)>(≪韓國史硏究≫37, 1982 ; 앞의 책, 53∼72쪽). 이처럼 고려 후기에 들어와 초음직이 上級職位로 변환됨에 따라 음서출신자들이 고위직으로 진출하는 기간도 그만큼 단축되었을 것이 예상된다. 더구나 음직은 대체적으로 이른 나이에 주어지던 것이므로 더욱 그러하였으리라 생각되는데, 이는 당시의 정치적·사회적 주도세력인 ‘권문세족’의 의도와 결코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며, 그에 따른 인사행정상의 어려움도 대략은 짐작할 수가 있다.

 ≪고려사≫권 73, 선거지 서문에는 名卿大夫와 같은 고위직으로 올라가기 위한 入仕路로서 위에서 설명한 과거·음서 이외에 遺逸의 薦擧와 成衆愛馬의 選補, 南班을 통한 陞轉, 雜路를 통한 승전이 거론되고 있다. 이 중 後三者는 고려 후기의 상황을 두고 한 말인 것 같다.0069)朴龍雲,<관리 등용의 여러 방식>(≪한국사≫13, 국사편찬위원회, 1993), 365∼367쪽. 성중애마의 경우 고려 전기에는 內侍·茶房 등 일련의 宮官들을 成衆官이라고만 일컬어 왔었으나 뒤에 몽고와의 관계가 긴밀해지면서 숙위 임무를 맡은 愛馬와 합쳐져 성립된 칭호이다. 또 남반은 왕명의 전달·殿中의 당직 등을 맡은 內僚職으로 7품을 限職으로 하고 있었고, 잡로는 말단이속인 注膳·幕士 등 雜類의 仕路로서 역시 品官線을 상한으로 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것들은 명경대부로 진출하는 방식이 되지 못했었는데 고려 후기에 접어들어 관제의 문란과 함께 신분제가 동요되면서 비로소 그것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남반·잡로를 통한 승전이 명경대부로 올라가는 길의 하나였다는 선거지 서문 자체의 기술이 고려 후기 인사행정의 문란상을 보여주는 한 자료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전기 때의 여러 관리 등용방식이 동요·변질되면서 관인들의 충원제도는 혼란을 면치 못하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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