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9권 고려 후기의 정치와 경제
  • Ⅰ. 정치체제와 정치세력의 변화
  • 1. 정치조직의 변화
  • 3) 관리 등용제도의 변질
  • (3) 첨설직제와 납속보관제의 신설

(3) 첨설직제와 납속보관제의 신설

 고려 후기 인사행정의 난맥상은 비단 전기 이래의 관리 등용방식이 동요·변질된 데 있는 것만은 아니었다. 임시변통의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관원이 추가되고 관직도 신설되어 그것을 한층 가중시켰던 것이다. 添設職制와 納粟補官制가 바로 그러한 것들이었다.

 그 중 첨설직은 “공민왕 3년(1354) 6월에 政曹를 제외한 6부의 判書와 摠郞을 모두 두 배로 첨설하고 각 司의 3∼4품 역시 모두 첨설하였으며, 또 42都府의 每領마다 中郞將과 郞將은 각 2인씩, 別將과 散員은 각 3인씩 첨설하여 제수하게 하였는데 그것을 일컬어 賞軍政이라 하였다. 첨설직은 여기에서 비롯되었다”고0070)≪高麗史≫권 75, 志 29, 選擧 3, 銓注 添設職. 하였듯이 처음 설치된 것은 공민왕 3년이었고, 그 목적은 軍功이 있는 사람들에게 관직으로 상을 주기 위해서였다. 즉 공민왕 3년 원나라에 구원병을 파견하여야만 했는데, 이것을 계기로 첨설직이 설치되었다.0071)≪高麗史節要≫권 26, 공민왕 3년 6월. 그 후 倭寇나 紅巾賊 등의 잦은 침입으로 인해 군공을 세우는 사람들이 다수 배출되는데 비하여 국가 재정은 고갈되고 또 관직에도 定數가 있었으므로 새로이 첨설직을 설치하여 그것으로 상을 주게 되었던 것이다.0072)鄭杜熙,<高麗末期의 添設職>(≪震檀學報≫44, 1978).
―――,<高麗末 新興武人勢力의 成長과 添設職의 設置>(≪李載龒博士還曆紀念 韓國史學論叢≫, 한울, 1990).
그리하여 처음에는 문반의 경우 인사를 담당하는 이부와 병부, 즉 정조를 제외한 4部의 판서(정3품)와 총랑(정4품) 및 각 사의 3·4품관과 무반의 中郞將(정5품) 이하 산원(정8품) 이상에 첨설직을 두었다. 하지만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첨설직은 더 많이 필요했던 듯, 공민왕 12년 윤3월에는 이부와 병부·대간을 제외하고 동반 3품 이하 6품 이상, 서반 5품 이하의 職額을 증치하였으며, 다시 동왕 20년 12월에는 左承宣 金興慶이 문관 3품·무관 5품 이하 관리의 직위를 늘려 군공에 대한 상으로 줄 것을 건의하였다.0073)≪高麗史≫권 75, 志 29, 選擧 3, 銓注 添設職.

 그 뒤 우왕 2년(1375) 정월에 “첨설직으로 군사에게 상을 주는데 奉翊·通憲으로부터 7, 8품에 이르기까지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으므로 당시인들이 車에 싣고 말로 된다(車載斗量)는 비방이 있었다”고 한다.0074)위와 같음. 말기에 이르러서는 첨설직이 크게 濫設되었음을 알 수 있거니와, 또 하나는 그것이 봉익대부(종2품)나 통헌대부(종2품) 같은 재상급에도 설치되고 있어 주목된다. 앞서 든 공양왕 원년(1389) 12월의 諫官 具成祐 상소에는 공민왕 23년 이래로 奸臣이 擅政하면서 뇌물을 바치면 그의 어짐과 불초함을 논하지 않고 省樞로 발탁하는데, 뇌물은 많고 관직의 수는 적으므로 마침내 商議까지 칭하여 그 수가 70∼80명에 이르렀다고 말한 내용이 보이는데, 그 상의가 곧 재상급에 설치된 첨설직이다. 이 역시 그 후 남설되었던 것 같다. 그러면 첨설직이 그와 같이 남설되게 된 원인은 어디에 있었을까. 우왕 4년 8월의 헌사 上言에 의하면 그것은 본래 군공에 대한 상으로 주기 위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공없이 閑居하는 자들이 이런저런 연유로 해서 받아 名器가 천하게 여겨지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고 말한다.0075)위와 같음. 구성우가 지적하고 있는 뇌물에 의한 제수도 그 한 요인이었을 것 같다. 첨설직의 남설과 그에 따른 폐단은 이후에도 계속되어 문제가 되고 있거니와, 그것이 관제의 문란에 끼친 영향은 매우 컸다고 생각된다.

 한편 국가에서는 관직을 공공연하게 팔기도 하였다. 어려운 나라의 재정을 보충하기 위한 한 방편으로 양인이나 하급관원들에게 곡식이나 은을 받고 관직을 주는 納粟補官制(鬻爵制)가 그것이었는데, 충렬왕 이후부터 시행되었다. 즉 충렬왕 원년(1275) 12월에 “都兵馬使가 國用이 부족하므로 사람들로 하여금 銀을 바치게 하고 벼슬에 임명하였는데, 白身으로 初仕를 바라는 자는 白銀 3근, 초사를 거치지 않고 權務를 바라는 자는 5근이며, 초사를 거친 자는 2근, 권무 9품으로 8품을 바라는 자는 3근, 8품으로 7품을 바라는 자는 2근, 7품으로 參職을 바라는 자는 6근이며, 군인으로 隊正을 바라는 자와 대정으로 校尉를 바라는 자는 3근, 교위로 散員을 바라는 자는 4근, 산원으로 別將을 바라는 자는 2근, 별장으로 郞將을 바라는 자는 4근으로 하였던” 것이다.0076)≪高麗史≫권 80, 志 34, 食貨 3, 納粟補官之制 및 권 75, 志 29, 選擧 3, 銓注 鬻爵制. 이어서 충렬왕 3년 2월에는 역시 도병마사가 건의하여 그 원년(1275)의 기준에 의거해 “無功者나 차례를 뛰어넘어 벼슬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과등에 따라 은을 國贐都監에 바치게 한 후 授職토록” 하였다.0077)위와 같음.

 그 후 충목왕 4년(1348) 2월에는 征東省都事 岳友 등이 국왕에게 “그 補官을 위해 輸米하는 자가 白身으로 종9품에 들어가고자 하는 자는 米 5석, 정9품은 10석, 종8품은 15석, 정8품은 20석, 종7품은 25석, 정7품은 30석으로 하여 그칠 것이며, 혹 전직이 있는 사람으로 米 10석을 납입하는 자는 1등을 올리되, 4품 내지 3품 이상은 이 예에 구애받지 말 것입니다”라고0078)위와 같음. 건의하였다. 납속보관제가 4·3품 이상에게까지 미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이러한 납속보관은 군수의 충당을 위해 우왕 2년(1375) 12월에도 행해졌다.0079)위와 같음. 당시인들은 경제력만 있으면 얼마든지 떳떳하게 벼슬을 할 수 있었음이 확인된다. 그같은 상황에서 관제가 문란해지리라는 것은 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이다.

 인사의 난맥은 제도면에서뿐 아니라 개별적인 사례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이는 특히 천인신분에서 두드러지고 있었다.

충렬왕 2년(1276) 윤3월 僉議府가 上言하기를, ‘근래에 內竪·微賤者들이 隨從한 공로로 仕路에 허통되어 조정의 반열에 섞이게 되었으므로 祖宗의 법제에 어긋남이 있으니 청컨대 成命을 거두십시요’라고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나라의 제도에 內僚職은 남반 7품에 한정시키고 그를 가리켜 常式 7품이라 불렀으며, 만약에 큰 공로와 특이한 능력이 있다 하더라도 다만 賞賜를 가할 뿐이어서 5, 6품에 이르는 사람은 없었다. 원종조에 그 길을 터 놓았으나, 將軍·郞將에 임명된 자가 한둘에 지나지 않았었는데, 충렬왕이 즉위함에 미쳐 內人·無功者들이 大官 高爵에 올라 허리에는 누런 가죽띠를 띠었고, 자손에 이르러서는 臺省·政曹에 허통된 자도 매우 많았으며, 別將·散員 같은 것은 이루 다 헤아릴 수가 없었다(≪高麗史≫권 75, 志 29, 選擧 3, 銓注 限職).

 위와 같이 충렬왕대와 그 이후의 복잡다단했던 정치현실 속에서 상당수의 노비와 宦官 등 천인출신들은 국왕이나 원의 세력을 등에 업고 고위직으로까지 승진하는 예가 자주 나오게 되었던 것이다.0080)李愚喆,<高麗時代의 宦官에 대하여>(≪史學硏究≫1, 1958).
黃雲龍,<高麗賤流顯官考>(≪釜山史學≫4, 1980).
洪承基,<元의 干涉期에 있어서의 奴婢出身 인물들의 政治的 進出>(≪韓國史學≫4, 韓國精神文化硏究院, 1983 ;≪高麗貴族社會와 奴婢≫, 一潮閣, 1983).
비슷한 사례는 천인 이외의 신분층 경우도 있었는데, 이들 역시 신분제의 동요와 함께 당시 어지러웠던 인사행정의 일면을 말해주는 것이라 이해된다.

<朴龍雲>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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