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9권 고려 후기의 정치와 경제
  • Ⅰ. 정치체제와 정치세력의 변화
  • 1. 정치조직의 변화
  • 4) 군제의 개편
  • (1) 원간섭기의 군제

(1) 원간섭기의 군제

 대몽항쟁이 끝날 무렵인 13세기 후반에 이미 고려의 二軍 六衛는 중앙 상비군으로서의 면모를 거의 상실하였다. 이는 農莊이 형성 발달하는 과정에서 軍人田이 주요 점탈 대상이 되어 전문적 군인을 배출하는 軍戶의 경제적 기반이 없어진 데다가 무신집권기를 거치면서 都房 등 집권자의 사병 조직이 발달하여 무예가 뛰어난 군사는 대부분 이에 소속된 때문이었다. 그 결과 이 무렵에는 6위의 군사가 토목공사에 동원되기도 하였다.0081)≪高麗史≫권 25, 世家 25, 원종 즉위년 11월 계묘.

 대몽항쟁 기간 동안 6위를 대신하여 수도 방위와 각지의 전투에 투입된 부대는 三別抄였다. 그러나 원종 11년(1270)에 삼별초가 항전을 일으켜 고려 정부에 대한 반란군으로 변하자 전투력을 갖춘 중앙군의 수가 더욱 줄어들었다. 이에 따라 耽羅에 웅거하고 있는 삼별초를 토벌하기 위한 6,000명의 고려군사는 대부분 지방에서 뽑은 군인이었다.0082)원종 13년 12월 元으로부터 濟州를 토벌하기 위한 군사 6,000명과 水手軍 3,000명을 뽑으라는 명령을 받고 고려 조정은 곧 각 도에 抄軍別監을 파견했으며, 元帥 金方慶이 중앙에서 거느리고 간 병력은 기병 800명뿐이었다(≪高麗史≫권 27, 世家 27, 원종 13년 12월 을미·기해 및 14년 2월 계묘). 이 때 편성된 출정군의 일부는 중앙군에 편입된 것으로 보이나, 이로써 사정이 크게 나아지지는 않았다. 충렬왕 즉위년(1275)의 1차 日本征伐 때에는 고려의 전투부대 8,000명과 水手軍(뱃군) 등 6,700명이, 7년 뒤의 2차 일본정벌 때에는 각각 10,000명과 15,000명이 동원되었는데, 수수군 등은 물론 전투부대도 대부분 각 도의 일반 민에서 새로 징발하여야 했다.0083)2차 일본정벌을 위해 충렬왕 5년 9월에 군대를 뽑을 때 전투부대인 正軍은 京內 2,500명, 慶尙道 등 5도와 東界에서 7,500명 등을 뽑았는데, 경내에서 뽑은 2,500명 속에는 校尉·隊正을 비롯한 文·武의 時散官이 포함되었지만 나머지는 주로 비교적 상층부에 속하는 농민들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閔賢九,<高麗後期의 軍制>,≪高麗軍制史≫, 陸軍本部, 1983, 333쪽).

 13세기 말엽에는 이같은 전투 경험을 쌓은 군사가 늘어남으로써 2군 6위의 전투력도 강화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忽赤을 비롯하여 成衆愛馬가 조직 정비되어0084)內藤雋輔,<高麗兵制管見>(≪靑丘學叢≫16, 1934 ;≪朝鮮史硏究≫, 東洋史硏究會 ;京都, 1961). 중앙군의 새 구성원이 된 것도 조금이나마 부족한 군사력에 보탬이 되었다. 그러나 당시의 제반 사정 때문에 2군 6위의 군사력을 강화하려는 노력은 여러 측면에서 어려움을 겪었다. 원으로부터의 정치적 통제도 그 하나로, 항복한 삼별초를 중앙군에 흡수하려는 시도는 원의 강력한 제재를 받았다.0085)≪高麗史≫권 28, 世家 28, 충렬왕 3년 4월 경진. 그 결과 충렬왕 16년(1290) 여름 東界에 침입한 원의 반란군 잔당인 哈丹의 무리가 이듬해 여름에는 중부지역에까지 이르렀음에도 고려의 중앙군은 제대로 전투 한번 못하는 실정이었다. 그 뒤 충선왕이 두 차례에 걸쳐 군인전에 바탕을 둔 군호제 복구를 통해 2군 6위를 강화하려 했으나 국가 재정이 취약한 데다가 이미 군인전이 거의 탈점된 상황이어서 개혁이 실현될 수 없었다. 이에 따라 군사의 동원이 필요할 때마다 각 도 농민을 징발하였으며, 그 폐해 또한 적지 않았다.

 한편 2군 6위의 上將軍 이하 장수와 校尉·隊正 등 장교들로 구성되는 조직체계는 무반의 관직체계로서 구실하였기 때문에 무너지지 않고 유지되었다. 이로써 유사시에 대비한 전투조직인 종래의 5軍도 기능을 잃지 않아서 각지에서 갑자기 군인을 뽑아 출정군을 편성하여도 곧 지휘부를 꾸릴 수 있었다.0086)吳宗祿,<高麗後期의 軍事 指揮體系>(≪國史館論叢≫24, 國史編纂委員會, 1991). 그런데 제2차 일본정벌 때 원의 군제에서 영향을 받아 지휘체계가 짜여진 뒤로 점차 고려의 중앙군은 都元帥와 三軍(또는 三翼)萬戶가 통할하고 그 휘하에 군사 행정을 맡는 首領官과 軍令을 맡는 鎭撫所가 두어지는 체제로 변모해 갔다.0087)고려의 총사령관인 中軍兵馬元帥나 中軍兵馬使의 아래에도 본래 여러 명의 兵馬判官과 兵馬錄事가 소속되어 幕僚로서 軍機에 참여하였고, 이를 內廂이라 하였다. 元의 軍制에서 영향을 받은 뒤로는 내상이 鎭撫所와 首領官 또는 錄事로 구성되었다(吳宗祿, 위의 글, 219∼220쪽). 이 中·左·右軍의 3군 만호제는 출정군의 조직으로도 활용되어, 5군은 본래의 기능을 상실하게 되었다. 이로써 고려의 중앙군제는 본래의 중앙군인 2군 6위가 상존하는 가운데 그 위에 도원수와 3군 만호를 정점으로 하는 지휘체계가 두어져 고려 본래의 것과 원의 군제로부터 영향받은 것이 명확히 정리되지 않은 채 혼재되어 자리잡게 되었다. 도원수와 만호 직책은 주요 권력자가 국왕이나 원과의 관계 속에서 일단 그 지위를 확보한 다음에는 거의 세습되어 중앙의 권력집단이 권력을 유지하는 기반의 하나로 되어 갔다.0088)邊東明,<高麗 忠烈王代의 萬戶>(≪歷史學報≫121, 1989) 참조.

 고려 본래의 지방군인 州縣軍은 12세기 이래로 대규모 인구 유리와 치열한 농민항쟁을 거치면서 조직 자체가 무너져 대몽항쟁에서는 새로 조직된 別抄가 주로 활약하였다.0089)別抄는 二軍·六衛나 州縣軍·州鎭軍 등 정규군 이외에 따로 뽑아서 조직한 군대를 말한다. 別武班과 三別抄, 공민왕 때에 새로 편성되는 農民侍衛軍 등도 모두 별초에 속한다(閔賢九, 앞의 글). 대몽항쟁이 끝난 뒤로는 왜구에 대비해 주로 남방의 국방이 강화되었으며, 해안지역에 설치된 防護所의 防護別監·防護使와 水軍을 지휘하는 水路防護使 등이 국방을 맡게 되었다.0090)車勇杰,<高麗末 倭寇防戍策으로서의 鎭戍와 築城>(≪史學硏究≫38, 1984).
吳宗祿,<高麗末의 都巡問使>(≪震檀學報≫62, 1986).
이어서 두 차례에 걸친 일본정벌이 끝난 뒤 해안지역에 새로이 국방 거점으로 萬戶府가 설치됨으로써 지방의 군제도 원의 군제로부터 영향을 받으며 변모해 갔다. 당시 고려 자체의 지방 군사제도를 새로 갖추려는 시도도 없지는 않았다. 대몽항쟁 때 도를 단위로 하는 지방군제 운용이 나타난 데 이어 13세기 말엽에는 원이 일본정벌과 관련하여 고려에 요구한 병력과 군량, 전함의 조달을 위해 都指揮使가 빈번히 파견되어 도 단위로 군사업무를 맡는 관직으로 정착해 가고 있었다.0091)都指揮使의 아래에는 判官과 錄事 등이 두어졌고, 여러 사신을 보내 처리하고 있는 업무를 도지휘사로 일원화하자는 주장도 있다(吳宗祿, 앞의 글, 1991, 222쪽). 나아가서 충렬왕 27년(1301) 무렵 도지휘사를 원의 경우처럼 지방 군사기구인 都指揮使司를 관장하는 직책으로 만들고자 하였으나 결국 원의 제지를 받음으로써 좌절되었다.0092)吳宗祿, 위의 글.
그러나 이를 耽羅에 軍民都指揮使司를 설치하려다 철회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崔根成,<高麗 萬戶府制에 관한 硏究>,≪關東史學≫3, 1988).

 도지휘사사 설치 기도가 좌절된 뒤로 고려의 지방 군사력은 남해지역의 중요한 방어 거점 세 곳에 두어진 만호부의 만호가 장악하였다. 이들 만호부는 일본정벌이 실패한 뒤 일본의 공격을 염려하여 설치된 것들이다. 뒤에 合浦萬戶府로 이름이 바뀌는 金州等處鎭邊萬戶府가 먼저 충렬왕 7년(1281)에 설치된 데 이어서 충렬왕 16년에 全羅萬戶府, 그 이듬해에는 耽羅萬戶府가 설치되었다. 이 가운데 특히 합포·전라 두 만호부는 정식 명칭이 ‘鎭邊萬戶府’로서 남부 해안지대를 지킨다는 것을 분명히 하였다. 만호부의 만호는 千戶所 千戶-百戶所 百戶로 연결되는 지휘체계와 소속 防護所의 지휘관들을 통하여 만호부와 방호소 소속 군사들을 지휘함으로써 국방에 임하였다. 방호소는 유사시에 대비하여 兵船을 갖추는 한편 烽火를 통해서 만호부와 통신을 하였다.0093)≪高麗史≫권 32, 世家 32, 충렬왕 28년 12월 임오.

 진변만호부 또한 진무소를 갖추고 있었으며, 행정 실무를 맡는 만호부 錄事는 고려조정에서 어느 정도 통제하였다.0094)≪高麗史≫권 35, 世家 35, 충숙왕 11년 5월 병신. 그러나 14세기 전반에는 만호가 권세가의 세습제로 변하고 원이 직접 진변만호부 만호를 임명하는 경우도 많아 그 권한은 상당히 넓었다. 이 시기 만호부와 방호소에 소속되어 있던 병력은 일본정벌에 동원되었던 군인들의 계통을 잇는 鎭邊別抄와 해안지역 농민 중심으로 구성된 鎭戍軍 등인데, 이들의 징발과 같은 군사행정에 대한 권한은 형식상 도순문사에게 주어져 있었으나 이 권한도 진변만호부 만호가 도순문사직을 겸하여 아울러 장악하였다.0095)吳宗祿, 앞의 글(1986).
閔賢九, 앞의 글.
따라서 이들 만호는 남부지역에 대해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는 존재로 자리잡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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