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9권 고려 후기의 정치와 경제
  • Ⅰ. 정치체제와 정치세력의 변화
  • 1. 정치조직의 변화
  • 4) 군제의 개편
  • (3) 중앙군제의 개편

(3) 중앙군제의 개편

 공민왕이 즉위할 무렵 국내외의 정세는 긴박하게 변해가고 있었다. 그럼에도 고려 중앙군의 군사력은 13세기 후반에 비해서도 더욱 열악해져 있었고, 그나마 만호직을 띤 권세가들이 사적으로 군사력을 옹위하여 사회적 폐단을 일으킴은 물론 정치의 혼란에도 한 원인이 되었다. 따라서 중앙군제의 개편은 우선 군사력의 강화가 시급한 과제였으며, 지휘체계의 정비도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하였다.

 공민왕 3년(1354) 원의 요청으로 중앙의 정예군사 2,000명을 파견한 뒤 西海道에서 弓手를 모집하여 宿衛를 보완해야 할 정도로 중앙의 군사력은 허약하였다.0111)≪高麗史≫권 38, 世家 38, 공민왕 3년 6월 신해. 이에 따라 공민왕 5년 7월에는 왕실 호위를 강화할 목적으로 忠勇衛를 설치하여 4,000명의 병력이 소속되도록 하였는데, 2군 6위만 약화시켰을 뿐 별 도움이 되지 못하여 동왕 10년 홍건적의 침입으로 왕이 안동으로 피난할 때 충용위 군사로서 왕을 호위한 사람이 하나도 없다고 할 지경이었다.0112)李基白,≪高麗史兵志譯註(一)≫(高麗史硏究會, 1969), 106쪽.
≪高麗史≫권 81, 志 35, 兵 1, 兵制 공민왕 11년 6월 監察司 上言.
그럼에도 충용위는 近侍衛와 함께 왕실을 호위하는 군대로 존속되었다.

 2군 6위는 공민왕 13년과 우왕 2년 두 차례에 걸쳐 10만에 가까운 농민시위군이 편성·보충됨으로써 병력이 대폭 강화되었다. 고려가 격변하는 국제정세 속에서 남북으로부터 침입해 오는 여러 외적을 물리치고 나아가 요동공벌까지 시도할 수 있었던 것은 이들 농민시위군이 편성된 데에 기인한다. 그러나 2군 6위의 조직체계는 이들을 통할하는 장치로 전혀 기능하지 못하였다. 더욱이 그 장교 직책들을 권세가의 나이 어린 자제나 工匠·商人들이 차지하여 祿을 받음으로써 국가재정이 부족한 형편에서 迂達赤·速古赤·別保 등의 成衆愛馬까지도 녹을 받지 못하는 현실이 전개되었다.0113)≪高麗史≫권 81, 志 35, 兵 1, 兵制 공양왕 원년 12월 憲司 上䟽. 이는 또한 강화된 시위군의 군사력을 지휘하는 조직체계가 별도로 형성된 때문이기도 하였다.

 중앙군의 지휘체계에서는 공민왕 5년 6월 기존의 萬戶·鎭撫·千戶 등에게서 군사 지휘권을 박탈하고 兵馬使, 兵馬副使로 지휘부를 편성하여 중앙군을 이끌고 출전하여 양계지역을 회복토록 함으로써 원의 군제로부터의 영향을 배제하고 종래의 전통을 되살리려는 시도가 나타났다.0114)≪高麗史≫권 39, 世家 39, 공민왕 5년 6월 정유·기해 및 권 111, 列傳 24, 趙暾. 그 뒤에 한동안 고려 본래의 元帥와 병마사 외에 도지휘사나 만호 등이 뒤섞인 지휘체계가 짜여지면서도 이들 여러 장수를 지휘하는 기능을 회복하지 못하여 결국은 군사들이 將帥 휘하의 사적 지휘체계에 의해 지휘되었고, 따라서 공민왕대에는 출정군을 파견하면 장수들을 감찰하도록 따로 體覈使·都巡察使·都體察使 등의 직임을 두는 것이 보통이었다.0115)吳宗祿, 앞의 글(1991), 227∼228쪽.

 중앙군의 상급 지휘체계는 都統使가 등장함으로써 다소 짜임새가 갖추어졌다. 공민왕 9년(1360) 左政丞 柳濯을 京畿兵馬都統使로 임명한 데서 비롯된 도통사는 그 뒤 주로 양계 지역에 파견되어 출정한 군사들을 총지휘하였다. 도통사가 이같이 정승급의 인물로 임명되어 도원수 이하의 장수를 지휘하는 최고사령관직으로 자리잡은 데 이어 공민왕 18년 李仁任을 西北面都統使로 파견한 것을 계기로0116)≪高麗史≫권 41, 世家 41, 공민왕 18년 12월 신미. 제도적으로도 정비되었다. 도통사의 하부기구로 鎭撫 2명(1명 종2품·1명 정3품), 經歷 2명(4품), 知事 2명(5품·6품)을 소속시켜 鎭撫所와 經歷司를 설치한 것이다.0117)≪高麗史≫권 77, 志 31, 百官 2, 外職. 이로써 유사시에 도통사가 곧바로 軍令 및 군사행정기구를 갖추어서 출전하여 최고 지휘부로 기능할 수 있게 되었다.

 공민왕대 말엽에는 도통사와 같은 내용의 하부기구를 갖춘 都摠使가 두어져 개경의 군사력을 총괄하였다. 그런데 우왕 3년(1377) 3월에 六道都統使가 설치되어 崔瑩이 그 직책을 맡은 이후 나머지 도통사·도총사가 이에 통합됨으로써 우왕대에는 최영만이 도통사로 활약하였다.0118)六道都統使가 되었을 때 崔瑩의 권한은 각 元帥의 麾下士 10명씩을 뽑아 成衆愛馬 등과 함께 江華 戍卒로 편성할 정도로 강력하였다. 그는 우왕 6년 4월부터 海道都統使도 겸하여 맡아 수군의 강화에 이바지하였다(≪高麗史≫권 113, 列傳 26, 崔瑩). 이로부터 최영은 5군 소속 군사력인 6도의 侍衛軍·都城 坊里軍 등과 海道 水軍까지 총지휘하였다. 그러나 그의 군사 지휘권은 각 도 원수와 都城元帥, 海道元帥 등의 지휘권을 인정한 위에서 그들로 하여금 맡겨진 직임에 충실토록 하는 이상으로 넘어설 수는 없었다.

 공민왕대까지도 宰樞의 지위에 있는 중앙 관직자가 주력군을 거느리고 출전하는 임시 장수직이었던 원수는 공민왕 23년의 탐라정벌군 편성에 楊廣·全羅·慶尙道都統使 최영의 밑에 각 도 上·副元帥가 분속되어 관할 도의 군사력을 이끌고 출전한 것을 계기로0119)≪高麗史≫권 44, 世家 44, 공민왕 23년 7월 무자. 상설직으로 변모하였다. 이 변화의 바탕은 다름 아닌 농민시위군의 편성이다. 공민왕 13년에 처음 편성된 농민시위군은 본래 중앙 관직자가 軍籍 편성의 세부단위인 각 軍目道의 兵馬使를 겸직하여 이들을 통할해 왔으나, 원수가 중앙에서 각 도의 군사를 관할하게 됨으로써 우왕 2년 7월부터 현지 수령이 군목도 병마사를 겸하게 되었다.0120)≪高麗史≫권 81, 志 35, 兵 1, 兵制 신우 2년 7월. 이어서 이 해 8월 농민시위군이 추가로 파악 보고된 뒤 이들을, 도를 단위로 3명씩 임명되는 원수가<六道都巡察使軍目>에 의거하여 分管하게 됨으로써0121)≪高麗史≫권 115, 列傳 28, 李崇仁. 짧은 기간이지만 고려의 중앙군제는 ‘元帥制’라고 부를 만한 체제로 자리잡게 되었다.

 이 시기의 시위군은 형식적으로는 8위로 통칭되고 있던 2군 6위에 분속되었으나, 실질적으로는 전시상태가 지속됨으로써 늘 五軍에 분속되고 이를 각 도 원수들이 지휘하였다. 5군에는 開京 5部 坊里軍 또한 소속되어 이를 거느리는 원수도 별도로 두어졌으나, 이들은 군사력 강화에는 별 도움이 되지 못하였다.0122)吳宗祿, 앞의 글(1991), 241쪽. 우왕연간에는 권문세족의 정치권력 장악이 한층 심화되고 재추의 지위에 오른 사람들이 크게 늘었는데, 이들은 대부분 군직의 경력이 있는 데다가 자기 집을 방비할 수 있을 정도의 伴倘, 곧 麾下士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이같은 배경 속에 왜구의 침입으로 전쟁상태가 지속되자 재추의 지위에 오른 여러 관직자가 본래의 관직을 띤 채 각 도 시위군·5부 방리군과 해도 수군 등의 원수를 겸직하는 형태로 제도가 정착된 것이다. 각 원수는 군사를 지휘하기 위한 기구로서 도진무와 진무들로 구성되는 진무소를 갖추고 있었으며, 고위 장수의 진무는 하급 장수들이 맡고 있었다. 또한 원수들이 출전할 때 거느리는 하급 장수들은 대개 兵馬使·知兵馬事 등 종래의 5군 조직 안의 직함을 띠고 있었다.0123)吳宗祿, 위의 글, 240쪽.

 元帥는 그 지위에 따라 도원수·상원수·부원수로 구분되었다. 3원수는 시위군 편성 단위가 된 8도에 모두 임명되었고, 서북면에는 군익도 단위로 원수가 파견되었다.0124)吳宗祿, 위의 글, 235쪽. 각 도의 3원수 가운데 중앙에서 시위군을 관할하는 것은 주로 도원수와 상원수였고, 관할 도에 내려가 외적을 막는 것은 대개 부원수였다. 권력의 핵심에 가까이 있을수록 현지에 파견되기보다는 중앙에 남아 특정 도의 시위군을 장기간 분관하면서 유사시에는 東·西江 원수로서 개경을 위협하는 왜구를 막거나 助戰元帥나 도순찰사, 도체찰사 등의 직함을 띠고 출전하였다.0125)吳宗祿, 위의 글, 247∼249쪽. 각 도 원수가 시위군을 장기간 관할하게 되자 자연히 牌記라 부르는 시위군의 명단도 원수가 직접 관장하게 되었고, 때로는 정해진 군액의 시위군 외에 임의로 군사를 뽑아 휘하에 두기도 하였다. 군사력의 선발과 징발은 물론 지방행정조직을 통해서 이루어졌는데, 전시 상황이 지속되고 있는 실정에서 원수가 직접 軍目道 관원인 州郡의 수령에 공문을 보내 군사력을 충원하게 되었다. 즉 원수는 군사 지휘권을 바탕으로 점차 징발권까지 장악해 갔고, 그 결과 시위군 등 각 도의 군사력이 그 원수에 사적으로 예속되는 양상이 두드러져 갔다.0126)閔賢九,<朝鮮初期의 私兵>(≪東洋學≫14, 檀國大, 1984).
吳宗祿, 위의 글, 235쪽.

 이상과 같이 고려의 중앙군제는 우왕연간에 이르러 都統使-元帥로 이어지는 장수 중심체제로 짜여졌으며, 이는 우왕 14년(1388)의 요동정벌군 편성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요동정벌군은 최영이 八道都統使, 曹敏修가 左軍都統使, 李成桂가 右軍都統使가 되고 좌·우군도통사가 세 도통사의 조전원수와 각 도 원수 등 총 28명의 원수를 지휘하여 3만 8천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출전하였다.0127)≪高麗史≫권 137, 列傳 50, 신우 14년 4월 정미. 그러나 잘 알려진 대로 위화도회군이 감행되고 이성계가 실권을 장악한 뒤 군제의 개혁이 이루어짐으로써 새로운 중앙군제가 갖추어졌다.

 회군한 처음에는 조민수와 이성계 두 도통사가 군사력을 지역별로 나누어 관할하였으나, 곧 이성계가 조민수 등을 축출하고 공양왕 2년(1390) 정월 8도시위군을 총지휘하게 되었다. 이어서 이 해 11월 각 원수의 인장을 거두어 그 군사를 풀도록 한 뒤 이듬해 정월 三軍都摠制府가 설치되었다. 그러나 삼군도총제부 아래에 중앙의 고위 관직자가 각 도 군사력을 관할하는 체제를 다시 갖춤으로써 원수제의 명맥은 끊어지지 않았다. 따라서 원수제의 완전한 혁파는 새 왕조 건국 이후의 과제로 넘겨지게 되었다.0128)吳宗祿, 앞의 글(1991), 242∼24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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