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9권 고려 후기의 정치와 경제
  • Ⅰ. 정치체제와 정치세력의 변화
  • 1. 정치조직의 변화
  • 4) 군제의 개편
  • (4) 지방군제의 재편

(4) 지방군제의 재편

 충정왕 2년(1350) 이후 왜구의 침입이 본격화되고 중국 대륙에서 왕조 교체가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고려에 군사적 위협이 가해짐에 따라 지방의 국방력 강화도 중앙군 강화에 못지 않게 중요한 과제로 부각되었다. 취약하나마 萬戶府와 防護所가 설치되고 이에 鎭邊別抄·鎭戍軍 등의 군사력이 소속되어 있던 경상도와 전라도, 양광도 등 下三道는 이를 바탕으로 지방군제를 정비하면 되었으나, 그 밖의 지역 특히 다시금 국방의 중요성이 높아진 東·西北面 지역은 사실상 새로이 제도를 갖추어야 했다. 이에 비해 중부의 경기도·서해도·강릉도·교주도 지역은 군사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현실적인 국방의 필요성이 낮았던 까닭에 군사제도 정비 움직임은 두드러지지 않았다.

 하삼도에서는 공민왕대부터 都巡問使가 각 도의 군사 책임자로 등장하였다. 충정왕 2년 2월 왜구가 固城·竹林·巨濟에 대규모로 침입하자 이 해 3월에 도순문사직을 겸해 오던 합포·전라진변만호부의 만호와 별도로 전라·양광도도순문사와 경상·전라도도지휘사를 파견한 조치가 그 변화의 계기였다.0129)≪高麗史≫권 37, 世家 37, 충정왕 2년 3월 경진. 그 뒤 공민왕 5년 진변만호부가 폐지됨으로써 그 동안 임시 사행에 불과했던 도순문사는 종래 진변만호가 수행하던 직임을 ‘都巡問鎭邊使’로서 계승하였다.0130)吳宗祿, 앞의 글(1986) 참조.

 해안지역이 국방선화함으로써 공민왕 2년 무렵부터 해안지역 군현의 수령에게 방어 임무가 부여되고, 戍所의 수도 크게 증가되어 갔다.0131)吳宗祿, 위의 글, 13쪽. 戍所는 防護所가 이름이 바뀐 것으로, 공민왕 10년에 전라도에만 18개소나 되어서(≪高麗史節要≫권 27, 공민왕 10년 5월 全羅道按廉使田祿生啓) 당시 하삼도 수소의 총수는 50개 이상인 것으로 추정된다. 이어서 우왕 원년(1375)부터 각 도의 원수가 도순문사를 겸직하고 일반 주군의 수령도 兵馬職銜을 띠게 되었다. 수령의 병마직함은 본래 兵馬使·知兵馬事 등이나, 界首官의 수령은 이미 兩府 宰臣이 임명되는 일이 많아서 원수 직함을 띠기도 하였다. 그런데 도순문사는 하삼도와 양계에서만 제도로서 정착하였고, 그 가운데 군사지휘를 전담한 것은 하삼도 도순문사뿐이었다. 즉 도 단위 지방군제의 발달은 주로 하삼도에서 도순문사를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며, 우왕대에는 원수 가운데 한 사람이 出鎭하여 도순문사를 겸직하면서 都巡問使營과 戍所로 짜여진 방어망을 바탕으로 병마직함을 띤 수령들을 지휘하여 국방 임무를 수행하였다.0132)吳宗祿, 위의 글 참조.

 하삼도 도순문사는 수소의 수졸과 기존의 진변별초, 공민왕 13년부터 편성되어 지방군의 주력이 된 농민시위군들을 지휘하여 국방에 임하였다. 수졸은 육군과 수군의 구분이 모호한 상태에 있었다. 도순문사영은 물론 수소에도 전선이 배치되어 있었는데 수졸 가운데 일부는 이 전선을 타고 전투하는 수군이었다. 즉 당시 하삼도의 도별 군사 지휘계통은 육군과 수군이 분화되지 않은 상태에서 도순문사를 정점으로 형성되어 있었다.0133)吳宗祿, 앞의 글(1991), 231쪽. 도순문사 휘하에는 도순문사영에만도 수천을 헤아리는 병력이 있었음에도 煙戶軍·別軍의 명목으로 추가로 군사를 뽑기도 하였다. 도순문사의 휘하에는 군령 기구인 鎭撫所와 행정 실무기구인 錄事가 있었다.0134)吳宗祿, 앞의 글(1986), 26∼27쪽. 그러나 군사행정은 상당 부분이 按廉使에게 맡겨졌다.

 하삼도에서는 왜구방어를 목적으로 군사제도가 도를 단위로 체계화된 데 이어 방어시설도 점차 갖추어졌다. 경상도의 合浦營, 전라도의 光州營, 양광도의 伊山營 등 도순문사영이 고정 설치됨은 물론 요새화됨으로써 명실상부한 도의 국방 중심으로 자리잡아 갔다. 왜구가 침입하면 해안지역 주민들을 入保시키던 데서 나아가 우왕 때에는 내륙까지 입보가 확대되어서 많은 산성을 수축하였으며, 특히 寧海·蔚州·東萊·迎日·藍浦·興海 등 해안지역 요충지에 위치한 주요 군현에는 우왕∼공양왕 연간에 읍성을 쌓고 戍所를 설치하여 戍卒을 주둔시키고 군함을 갖춘 위에 병마사나 만호 등을 파견하였다.0135)吳宗祿, 위의 글, 28∼31쪽.

 양계 지역은 공민왕 5년(1356) 군사행동으로 잃었던 땅을 회복한 뒤 국방체제의 틀이 잡혀 갔다. 西北面 국방체제는 공민왕 5년 西北面都元帥로 파견된 廉悌臣에 의해 대략 갖추어졌다. 염제신은 군량을 비축하고 국경 요충지에 수소를 설치하여 수졸을 배치하고 安州 등 주요 방어 거점에도 성곽을 축조하고 군사력을 배치하였으며, 서북면의 군사는 고려 전기의 州鎭軍처럼 유사시에는 전투에 임하고 평시에는 屯田을 경작하는 兵農一致的 존재로 정하였다.0136)≪高麗史≫권 111, 列傳 24, 廉悌臣 및 권 81, 志 35, 兵 1, 兵制 공민왕 5년 11월. 이와 아울러 서북면의 토착 지배질서를 바탕으로 안주와 西京·義州 등지에 만호·천호 등을 두어서 군사조직으로도 활용할 수 있도록 틀을 갖추었다.

 서북면의 翼軍은 이같이 바탕이 갖추어진 위에 北元과 외교를 단절한 시점인 공민왕 18년에 그 침입을 우려하여 병농일치의 군사조직으로 설치되었다. 그 내용은 서경만호부 10익, 안주만호부 8익, 의주·泥城·江界萬戶府 각 4익 등 5개 만호부에 각각 익군을 4∼10익으로 조직하고 만호부에는 만호, 各翼에는 上·副千戶를 두는 체제였다.0137)安州萬戶府에는 우왕 3년에 2익이 추가되어 西京萬戶府와 같이 10익이 소속되었다(李基白, 앞의 책, 202∼203쪽). 이같이 군사조직이 짜여진 위에 口子가 설치되고 꽤 직급이 높은 지휘관이 파견되어 국경지대의 방어망도 강화되었다.0138)吳宗祿,<朝鮮初期의 邊鎭防衛와 兵馬僉使·萬戶>(≪歷史學報≫123, 1989).

 동북면은 공민왕 5년에 吉州 지역까지 수복하였으나, 서북면에서만큼 신속히 국방 강화를 위한 노력이 추진되지는 못하였다. 우왕 9년(1383)에 이성계가 올린 安邊策에 의하면 공민왕 5년 100戶를 단위로 統을 설치하여 統主가 元帥營에 예속되도록 했다고 하나,0139)≪高麗史≫권 135, 列傳 48, 신우 9년 8월. 수복 직후 설치한 咸州萬戶府를 강릉·경상·전라도 등의 군마를 모아서 지켜야 할 정도로0140)≪高麗史≫권 58, 志 12, 地理 3, 東界 咸州. 군사 조직이 엉성하였다. 동북면에서도 함주·安北(北靑州) 등 일부 지역은 공민왕 18년에 익군이 설치되고 이어서 국경지대인 북청주와 端州에 설치된 만호부를 중심으로 짜임새를 갖추어 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익군체제가 서북면만큼 폭 넓게 짜여지지는 못하였다.0141)吳宗祿, 앞의 글(1991), 233∼234쪽.

 익군을 관할하는 각 익의 천호는 토착 유력자로 임명되었고, 만호에는 중앙의 주요 관직자로 임명되는 만호와 토착 유력자로 임명되는 만호의 두 부류가 있었다.0142)吳宗祿, 앞의 글(1989) 참조. 만호부를 관할하여 지휘권을 행사한 것은 전자의 만호로서, 홍건적 등의 침입을 막기 위해 중앙의 고위 장수로 임명했던 안주·서경 등지의 만호부 만호의 계통을 잇고 있다. 이들은 구자에 파견된 장교들을 지휘하여 국방을 맡는 한편, 적의 침략이 일어나면 도통사나 원수의 지휘 아래 관할 군사력을 지휘하여 전투에 임하였다. 그런데 우왕대에 이르러서는 양계, 특히 서북면에 설치되었던 만호부는 軍翼道로 바뀌어 이를 단위로 원수가 파견되어 익군을 지휘하는 변화가 일어났다. 이에 따라 서북면의 익군은 체제가 크게 무너지지 않고 조선이 건국될 무렵까지 유지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비해 동북면에서는 우왕연간에 이미 익군조직이 상당 부분 훼손되어 있었다.0143)吳宗祿, 앞의 글(1991) 참조.

 이러한 사정에서 양계의 도순문사는 군사지휘보다는 군사행정을 담당하며 도내 행정을 총괄하는 직책으로 자리잡아 갔다. 서북면에서는 공민왕 때부터 도순문사는 서경에, 도내 군사를 총지휘하는 장수는 안주에 위치하였으며, 동북면 도순문사는 和寧府를 都巡問使營으로 하여 도내 행정을 총괄하면서 북쪽의 단주·북청주 만호부를 통한 국방을 지원하였다. 이에 따라 남방 5도의 안렴사가 격상되어 都觀察黜陟使로 바뀔 때 양계의 도순문사는 하삼도 도순문사와는 달리 都觀察黜陟使兼兵馬都節制使로 직함이 바뀌었다가 복원되는 과정을 밟았다.0144)吳宗祿,<朝鮮初期 兵馬節度使制의 成立과 運用(上)>(≪震檀學報≫59, 1985), 88쪽.

 서해도와 교주도·강릉도에는 도순문사가 파견된 예가 없지 않으나 제도화되지는 않았으며, 우왕연간에는 필요할 경우 원수가 파견되어 국방을 맡았다. 交州·江陵道에는 일반적으로 교주도, 강릉도 각각을 단위로 원수가 파견되었지만 유사시의 군사 운용에서는 교주·강릉도 또는 교주·강릉·朔方道가 하나의 단위가 되기도 했다. 이에 비해 경기에는 별다른 군사력이 없었으며, 적이 개경 부근에까지 이르면 도통사가 원수들을 통해 개경 5부 坊里軍과 각 도의 시위군을 거느리고 출전하였다.0145)吳宗祿, 앞의 글(1991), 245∼249쪽.

 우왕대 이후 왜구 방어에 큰 공을 세운 것은 수군이다. 수군은 海道水軍과 各道水軍으로 나뉘어 편성되어 있었다. 공민왕대에는 捕倭使 또는 倭賊追捕使 등을 두어 수군을 거느리고 경기를 중심으로 서해안 일대의 왜구를 막도록 했었는데, 동왕 23년(1374) 李禧와 鄭地의 수군 강화 주장을 수용하여 양광도와 전라도의 수군을 재건할 때0146)≪高麗史≫권 83, 志 37, 兵 3, 船軍 공민왕 23년 정월. 포왜사 등이 거느리던 수군이 해도수군으로 재건된 것으로 짐작된다. 해도수군의 거점은 개경의 입구에 위치한 江華와 喬桐이었으며, 전국의 바다를 작전권으로 삼아 활동하였다. 그 최고 지휘권은 海道都統使에게 있었으나 실제 지휘권은 3명의 海道元帥에게 있었다. 우왕 3년(1377) 해도원수 孫光裕가 강화에서 왜구에 대패하여 해도수군의 전함 대부분이 소실되자 최영이 곧바로 僧徒 2,000여 명·船匠 100여 명을 징발해 800여 척의 전함을 다시 만든 바 있다.0147)≪高麗史≫권 113, 列傳 26, 崔瑩. 우왕 6년에는 羅州·木浦 지역의 정예 수군을 추쇄, 교동과 강화에 배치하여 해도수군의 병력이 증강되었다.0148)≪太宗實錄≫권 3, 태종 2년 2월 무오.
≪世宗實錄地理志≫권 148, 京畿 江華都護府 長番水軍.
2년 뒤 최영은 다시 승려를 동원하여 거함 130여 척을 만들어서 전국의 요충지에 배치하였으며, 이로부터 각 도의 수군도 전보다 강화되어 왜구 방어에 큰 효과를 볼 수 있었다.0149)≪高麗史≫권 113, 列傳 26, 崔瑩. 각 도 수군의 도별 지휘권은 도순문사가 가졌지만 실제 수군을 통할한 것은 水軍都萬戶·萬戶·千戶와 領船頭目 등이었다.0150)李載龒,<朝鮮初期의 水軍>(≪韓國史硏究≫5, 1970 ;≪朝鮮初期社會構造硏究≫, 一潮閣, 1984, 115쪽).

 지방군제 또한 위화도회군 이후 큰 변화를 겪게 되었다. 그 동안 하삼도를 중심으로 발달해온 도 단위 지방군제의 핵심인 도순문사를 개편하여 창왕 원년(1389)에는 전임 지휘관인 都節制使를 설치하고 각 도 도절제사가 도내에 파견되는 절제사와 병마사, 만호 등 육군과 수군의 지휘관을 지휘하여 국방을 전담토록 하였다.0151)吳宗祿, 앞의 글(1985), 80쪽. 이는 중앙 시위군을 지휘하는 직책과 각 도의 국방 책임자를 구분한 조치이기도 하여서 이어서 진행된 三軍都摠制府 설치를 통한 元帥制 정리와 맥을 같이하는 변화였으나, 도절제사가 제도적으로 내용을 갖추게 되는 것은 새 왕조가 건설된 다음의 일이었다.

<吳宗祿>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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