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9권 고려 후기의 정치와 경제
  • Ⅰ. 정치체제와 정치세력의 변화
  • 2. 권문세족과 신진사대부
  • 1) 권문세족의 성립과 그 성격
  • (1) 세족층의 형성과 그 특징

(1) 세족층의 형성과 그 특징

 고려 후기 지배세력 가운데는 유력한 문벌로 성장한 가문들이 있었다. 이들은 家勢를 신장시킨 방법이나 문벌로 등장한 시기가 가문에 따라 조금씩 달랐다는 점에서, 이를 몇 가지 유형으로 분류해 볼 수 있을 것이다.0158)閔賢九, 앞의 글(1974a), 38쪽. 閔賢九는 충선왕 복위교서에서 언급한 ‘재상지종’을 고려 후기 권문세족의 전형으로 규정하고 여기에는 ① 고려 전기 이래의 문벌귀족, ② 무신집권시대에 무신으로 득세하여 등장한 가문, ③ 무신란 이후 신관인층으로 대두하여 성장한 가문 및 이와 가까운 경우, ④ 대원관계의 전개를 통하여 등장한 가문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분류는 충선왕대까지 세족의 갈래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우선 고려 전기부터 문벌로 성장하여 무신집권기에도 여전히 그 사회적 지위를 누렸던 가문들이 있다.0159)고려 전기에 이미 문벌가문으로 성장하여 고려 후기에도 여전히 관료를 배출하면서 그 지위를 누리고 있던 가문으로는 慶州金氏·定安任氏·慶源李氏·坡平尹氏·海州崔氏·鐵原崔氏·淸州李氏·黃驪閔氏·孔巖許氏 등이 있다. 이들이 무신집권기에도 계속 가세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가문 내 인물이 무신정권에 의해 충직한 문신으로 인정되었거나 무신들과 혼인관계, 친교를 맺어 무신정권의 탄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0160)金毅圭,<高麗武人政權期 文士의 政治活動>(≪韓㳓劤博士停年紀念史學論叢≫, 知識産業社, 1981), 282∼287쪽. 특히 최씨정권이 통치기반을 다지기 위하여 문벌과의 혼인에 주력함으로써 문벌가문은 이러한 관계를 활용하여 지속적으로 관료를 배출할 수 있었다. 그래서 定安任氏·鐵原崔氏·慶州金氏·橫川趙氏 등 문벌가문에서는 이 시기 62명의 宰樞 인물 가운데 1/4을 넘는 16명의 재추급 인물을 배출할 정도였다.0161)金塘澤,<崔氏政權과 文人>(≪高麗武人政權硏究≫, 새문社, 1987), 135쪽.

 한편, 무신집권기에는 과거를 통해 관료로 진출하여 가문의 기반을 다지는 새로운 세력들이 있었다. 이른바 ‘能文能吏’층이 이들이다.0162)무신집권기 능문능리층에 대해서는 李佑成, 앞의 글 및 趙仁成,<崔瑀政權下의 文翰官-“能文”·“能吏”의 人事기준을 중심으로->(≪東亞硏究≫6, 西江大, 1985) 참조. 문학과 행정실무에 능력을 갖춘 인물을 발탁하려 했던 최씨정권의 인사정책에 따라 진출하게 된 이들은 문벌가문 출신이 아닌 하급관료나 향리의 자제들이 많았다. 무신집권기에 능문능리층의 진출이 두드러지는 것은 물론 무신정권의 지배정책과 관련을 갖는 것이었다. 정권의 안정을 위해서 지방세력의 지지와 협조가 필요했던0163)姜芝嫣,<高麗 高宗朝 科擧及第者의 政治的 性格>(≪白山學報≫33, 1986), 134∼136쪽. 최씨정권은 이들을 승선직이나 대간직에 임명하여 銓注權 행사를 합리화시키고 정권 유지를 뒷받침하게 하였다. 이리하여 무신집권기 능문능리층의 가문은 지속적으로 관료를 배출하면서 세족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을 다져갔다.

 무신집권기 최고의 가문은 집정무인 자신들의 가문이었다. 무신정권 초기에는 정권이 자주 교체됨으로써 집정무인이 그들의 가문을 성장시키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그러나 4대에 걸쳐 집권한 최충헌의 牛峰崔氏 가문은 그 권력의 행사에 있어서 권문이었음은 물론, 가세 역시 문벌적 지위를 확보하고 있었다.0164)李慶喜,<崔忠獻家門 硏究>(≪釜山女大史學≫5, 1987). 뿐만 아니라 무신집권기에는 비록 집정무인의 지위에 있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무반에서 출신하여 가세를 신장시킨 부류들이 있었다. 이들은 무반 출신이 득세할 수 있는 정치적·사회적 여건이 조성되고 있는 터에, 몽고와의 전쟁 등 외세의 침탈에 대비해야 하는 시대 상황이 전개됨에 따라 무장으로 활약하면서 그들의 가문을 문벌로 성장시킬 수 있었다.

 예컨대 彦陽金氏 金就礪는 거란의 침입을 격퇴하고 몽고와의 전쟁에서 공을 세워 시중직에 오르는 등 고위직을 역임함으로써0165)≪高麗史≫권 103, 列傳 16, 金就礪. 가세를 신장시킬 수 있었다. 平康蔡氏 蔡松年은 몽고 침입 때 대장군으로 활약하면서 무공을 세워 平章事가 되고0166)≪高麗史≫권 102, 列傳 15, 蔡松年. 가문의 기반을 닦았다. 安東金氏 金方慶의 경우도 몽고와의 전쟁, 삼별초 항쟁의 진압과 일본정벌에 참여하여 두각을 나타낼 수 있었고0167)≪高麗史≫권 104, 列傳 17, 金方慶. 그것이 그의 가문을 문벌로 성장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원간섭기의 전개와 함께 무신집권기에 침체를 면치 못했던 가문이 다시 가세를 회복하여 세족으로 성장하거나 새로운 가문들이 문벌로 등장함으로써 세족층의 폭이 넓혀지고 있었다. 무신집권기에는 상당수의 가문이 가세의 침체를 면치 못했다. 이렇게 쇠락해간 가문들은 무신집권기가 끝나도 대부분 가세를 회복할 수 없었다.0168)이 점에 대해서는 李樹健,<高麗後期 支配勢力과 土姓>(≪韓國中世社會史硏究≫, 一潮閣, 1984), 344∼345쪽<표 6-9>高麗時代 名門巨族의 消長表 참조. 그러나 原州元氏와 淸州郭氏처럼 무신정권 붕괴 후 가세를 회복하고 특히 원간섭기 이후에는 지속적으로 관료를 배출하여 세족으로서의 지위를 회복한 경우도 있었다.0169)金光哲, 앞의 책(1991), 80∼82쪽. 光州金氏와 淸州鄭氏는 무신집권기에 土姓吏族에서 무반으로 출사한 후, 문반으로 옮겨 관료를 배출하고 있었다. 이 가문에서도 원간섭기 이후 여러 명의 과거합격자와 고위 관료를 지속적으로 배출하여 세족으로 성장하였다.0170)李樹健,<高麗前期 土姓硏究>(≪大丘史學≫14, 1978 ; 앞의 책, 286쪽·324쪽).
金光哲, 위의 책, 125쪽.

 원간섭기에 고려국왕은 원의 지원을 받아 왕위를 유지하는 한편, 끊임없이 왕권강화를 꾀하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새로운 권력층이 등장하게 된다. 국왕 측근세력이 이들로서 이들은 몽고어 譯官, 원 공주의 怯怜口, 內僚, 宦官, 鷹坊관계자, 侍從臣 등으로 활동하면서 국왕의 嬖幸이 되어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였다.0171)李起男,<忠宣王의 改革과 詞林院의 設置>(≪歷史學報≫52, 1971), 62∼67쪽.
李益柱, 앞의 글(1988), 188∼203쪽.
金光哲, 위의 책, 144∼152쪽.
물론 측근세력 모두가 그들의 가문을 세족으로 성장시킬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당대에 권문으로 등장했으나 관료배출을 지속시키지 못하여 쇠락한 경우도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平壤趙氏·高興柳氏·漆原尹氏·瑞原廉氏·海平尹氏 등은 그 출신 인물이 국왕 측근세력으로 활동하여 권력층이 됨으로써 세족으로서의 기반을 다질 수 있었다.

 평양 조씨 趙仁規는 몽고어 역관으로 출신하여 충렬왕을 수행하면서 권력층으로 부상하였다.0172)≪高麗史≫권 105, 列傳 18, 趙仁規. 그는 수상직을 역임하는 등 정계의 중심인물로 활동하였고, 그의 여러 아들도 고위직을 역임하였으며, 충선왕비 趙妃는 그의 딸이었다.0173)평양 조씨에 대한 가문 분석은 閔賢九,<趙仁規와 그의 家門(上·中)>(≪震檀學報≫41·43, 1976) 참조. 고흥 유씨 柳淸臣은 部曲吏 출신으로서 그 역시 몽고어를 잘하여 충렬왕 측근세력이 되었으며, 충렬·충선왕대에 걸쳐 고위직을 역임하였다. 고흥 유씨는 그가 심왕파에 가담하고 立省策動에 연루되어 타격을 받음으로써 가문이 번성하지는 않았으나, 아들 攸基와 손자 濯이 모두 고위직을 역임하여 세족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0174)≪高麗史≫권 125, 列傳 38, 姦臣 1, 柳淸臣. 칠원 윤씨 尹秀는 충렬왕대에 鷹坊使로 활동하면서 국왕 측근세력이 되어 가세를 신장시켰고, 그의 손자 桓이 공민왕대에 侍中을 역임하여0175)≪高麗史≫권 114, 列傳 27, 尹桓 및 권 124, 列傳 37, 嬖幸 2, 尹秀. 그의 가문을 세족의 지위에 오르게 하였다. 서원 염씨의 경우는 고려 전기에 문벌로서의 가세를 유지하고 있었으나 최씨정권기에 타격을 받아 침체한 상태에 있었는데, 충렬왕의 측근세력으로 활동했던 廉承益에 의해 가세가 회복되어0176)≪高麗史≫권 123, 列傳 36, 嬖幸 1, 廉承益. 이후 세족으로 등장하게 된다. 동복 오씨도 이미 무신집권기부터 관료를 배출해 왔으나, 吳潛이 충렬왕 측근세력이 됨으로써 가세를 신장시켜 세족이 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였다.0177)≪高麗史≫권 125, 列傳 38, 姦臣 1, 吳潛. 해평 윤씨 역시 고종대부터 관료를 배출하기 시작하여 원간섭기 말에 세족으로 성장하는데, 이는 충숙왕과 충혜왕의 측근세력이었던 尹碩의 활약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0178)≪高麗史≫권 124, 列傳 37, 嬖幸 2, 尹碩.

 한편 고려 후기 세족가문 가운데에는 원간섭기 초에 비로소 관료를 배출하기 시작한 가문이 상당수 있었다. 慶州李氏·順興安氏·星州李氏·丹陽禹氏·固城李氏·韓山李氏가 대표적인 경우이다.0179)이들 가문의 가계 분석은 高惠玲,<李仁任政權에 대한 一考察>(≪歷史學報≫91, 1981) ; 李樹健, 앞의 책 ; 金光哲, 앞의 책(1991) 참조. 이들은 원간섭기 이후 주로 科擧를 통해 지속적으로 관료를 배출하여 여말에 가서는 세족으로 성장하게 된다. 이들 가문이 문벌로 성장하는 것은 물론 과거출신 관료의 지속적인 배출과 고위직 진출에 있었지만, 그 출신 인물들이 원간섭기 권력구조에 일정하게 순응해 간 결과이기도 하다. 즉 원간섭기 왕권강화의 일환으로 추진되고 있었던 측근정치 아래에서, 이들은 국왕의 측근기구에 참여하는 등 왕권 강화에 협조하고 국왕 측근세력인 嬖幸과 타협하면서 그 지위를 유지하여0180)李益柱, 앞의 글(1988), 203∼219쪽. 가세를 신장시킬 수 있었다.

 이상과 같이 고려 후기 세족층에 해당하는 가문들이 문벌로 등장한 시기와 유형은 가문에 따라 조금씩 달랐다. 무신집권기에 이미 문벌로 등장한 가문이 있는가 하면, 무신집권기 때부터 관료를 배출하다가 원간섭기 초에 세족으로 성장한 가문도 있었고, 여말에 가서야 비로소 세족이 된 가문도 있기 때문이다.0181)세족층의 등장 시기가 이처럼 가문에 따라 달랐지만, 그 구성적 특징과 성격을 고려할 때 그 뚜렷한 모습을 드러내는 시기는 원의 종속구조가 본격화 되는 14세기 초에서 찾을 수 있다. 충선왕이 복위한 해(1308)에 발표한 교서에서 ‘재상지종’을 언급한 것은 여러 가지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있었고, 그 가문의 성격에 대해서도 논란의 소지가 있지만, 이들 가문이 고려 후기 세족층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이해하여도 좋을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閔賢九, 앞의 글(1974) 및 金塘澤, 앞의 글(1991) 참조. 이들이 세족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기반이나 가세를 신장시키는 방법도 다양하였다. 이미 확보한 문벌적 지위를 지속시킨 경우가 있고, 무신집권기 또는 원간섭기에 관료배출을 집중시켜 세족으로 성장한 가문이 많았으며, 무반에서 출신하여 전공을 세웠거나 국왕 측근세력으로 활동하면서 가세를 신장시켜 세족이 된 가문들이 있었다.

 고려 후기 세족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던 가문은 그 씨족 전체라기보다는 그 가운데 특정의 가계에 한정되는 것이었다. 동일 씨족이라 하더라도 여전히 吏族으로 남아 있는 가계도 있었고,0182)예컨대 안동 권씨의 경우 適의 가계는 고려 중기부터 관료를 배출하기 시작했고, 守平의 가계는 무신집권기부터 관료를 배출하여 고려 후기 세족 가문으로 성장하지만, 다른 가계는 여말에 이르기까지 여전히 안동지방의 이족으로 남아 있었다(李樹健,<嶺南士林派 形成의 社會的 基盤>,≪嶺南士林派의 形成≫, 嶺南大 出版部, 1979, 52∼55쪽). 관료를 배출하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 한미한 수준의 가계도 있었다. 뿐만 아니라 가문에 따라서는 같은 가문 안의 여러 가계가 세족이 된 경우도 있었다. 예컨대 황려 민씨는 閔令謨 이후 그 아들인 湜과 公桂의 가계로 분화되면서 모두 세족이 되었고, 안동 권씨도 守平과 守洪의 가계가 세족으로 성장하였으며, 남양 홍씨는 斯胤과 大純의 가계, 전주 최씨는 甫淳과 正臣의 가계, 광주 김씨는 鏡亮과 鍊의 가계, 경주 이씨는 瑱과 世基의 가계, 순흥 안씨는 珦과 碩의 가계가 모두 세족이 되었다.0183)金光哲, 앞의 책(1991), 別表 1 高麗後期 世族家門의 世系圖 참조.

 고려 후기 세족이 문벌로서의 사회적 지위를 누리는 데 가장 기본적인 조건은 지속적인 관료 배출이었다. 여기에서 지속적인 관료 배출이라 할 때 그 세대수를 대체로 3대 이상의 기간을 상정하고 있다.0184)李泰鎭,<15세기 後半期의 ‘鉅族’과 名族意識>(≪韓國史論≫3, 서울大, 1976), 253∼255쪽.
朴龍雲,<高麗 家産官僚制說과 貴族制說에 대한 검토>(≪史叢≫21·22, 高麗大, 1977 ;≪高麗時代 臺諫制度硏究≫, 一志社, 1980, 313∼314쪽).
許興植,<高麗의 科擧와 門蔭制度와의 비교>(≪韓國史硏究≫27, 1979 ;≪高麗科擧制度史硏究≫, 一潮閣, 1981, 227쪽).
3대 이상이라는 것이 물론 당시 법제화된 것은 아니었지만, 墓誌銘이나 科擧榜目, 戶口式의 작성에서 그 가계를 주로 증조대까지 기본적으로 밝히고 있는 것을 볼 때, 당시 가계의 내용을 파악함에 있어 3대 이상이라는 것이 하나의 기준 또는 관례화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세족이 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고위직 관료의 배출이 필요하였다. 만일 하급 관료를 배출하는 데 그친 가문이라면 3대 이상 지속적으로 관료를 배출하였다 하더라도 그 가문이 세족으로서 사회적 지위를 누리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고려시대 官階에서 중요한 계선이 되고 있었던 5품 이상의 관료배출을 세족의 요건으로 상정할 수 있을 것이며, 수상직을 비롯하여 재추급 인물의 배출 또한 세족으로 성장하는 데 중요한 요소가 되었을 것으로 생각한다.0185)문벌 형성의 요건으로 세대수보다 출세한 인물의 배출에 비중을 두는 견해가 있기도 하다(金龍善,<高麗門閥의 構成要件과 家系>,≪韓國史硏究≫93, 1996, 9∼13쪽).

 세족의 기준을 이렇게 설정할 때 여기에 해당하는 가문은 40여 개 정도 확인할 수 있다.0186)李樹健, 앞의 책(1984), 344∼345쪽.
金光哲, 앞의 책(1991), 96∼97쪽.
고려 후기 세족층의 특징을 이해하기 위하여 우선 여기에 해당하는 가문과 시기별 관료 배출 정도를 표로 제시하면 다음<표>와 같다.0187)이<표>는 각 가문의 族譜를 바탕으로 하고, 다음의 연구에서 제시한 世系圖의 내용을 참고하여 작성되었다. 여기에서 관료 수는 史書에서 관료로 활동했던 것이 확인된 인물들만 포함시켰다. 그러므로 실제 각 가문의 관료 수는 더 많았을 가능성이 있다.
朴龍雲,<高麗時代의 海州崔氏와 坡平尹氏 家門分析>(≪白山學報≫23, 1977).
―――,<高麗時代의 定安任氏·鐵原崔氏·孔岩許氏 家門分析>(≪韓國史論叢≫3, 誠信女大, 1978).
李萬烈,<高麗 慶源李氏家門의 展開過程>(≪韓國學報≫21, 1980).
高惠玲, 앞의 글,<표 1>李仁任의 家系.
李樹健, 위의 책, 344∼345쪽<표 6-9>高麗時代 名門巨族의 消長表.
閔賢九,<閔漬와 李齊賢>(≪李丙燾博士九旬紀念 韓國史學論叢≫, 知識産業社, 1987),<표 2>驪興閔氏家系表.
金光哲, 위의 책, 別表 1 高麗後期 世族家門의 世系圖.

 아래<표>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우선 세족의 본관지별 분포는 경상도가 가장 많고, 전라도·경기도·충청도 순으로 나타나고 있다. 경기도의 경우는 파평 윤씨 등 전기의 문벌가문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어, 고려 후기에 비로소 세족으로 등장한 가문의 본관지는 三南지방이 절대적 우세를 보이고 있었다. 전기의 문벌가문이 近畿지방 출신이 많았던 것에 비하면 대조적이라 하겠다.

姓貫\時期 원종말-
충렬왕
충선-
충정왕
공민왕
이후
총 계 姓貫\時期 원종말-
충렬왕
충선-
충정왕
공민왕
이후
총 계
海州崔氏
坡平尹氏
定安任氏
鐵原崔氏
孔巖許氏
慶源李氏
慶州金氏
彦陽金氏
淸州李氏
竹山朴氏
平康蔡氏
黃驪閔氏
橫川趙氏
文化柳氏
安東金氏
安東權氏
南陽洪氏
茂松庾氏
全州崔氏
礪山宋氏
原州元氏
淸州韓氏
淸州鄭氏
淸州郭氏
3
2
2
7
3
1
4
4
1
1
3
2
1
2
4
1
3
3
2
6
1
1
1
2
2
9
0
2
6
0
1
4
1
2
3
4
2
3
5
6
9
0
3
0
4
3
3
4
2
10
1
3
11
3
2
2
2
7
3
12
1
5
11
20
18
0
11
3
5
11
5
6
7
21
3
12
20
4
7
10
4
10
9
18
4
10
20
27
30
3
16
9
10
15
9
12
光州金氏
益山李氏
平壤趙氏
羅州羅氏
晋州柳氏
海平尹氏
瑞原廉氏
陜川李氏
淳昌薛氏
幸州奇氏
同福吳氏
固城李氏
淸州慶氏
高興柳氏
漆原尹氏
陽城李氏
慶州李氏
順興安氏
德水李氏
韓山李氏
丹陽禹氏
星州李氏
5
2
2
1
2
1
2
3
1
2
1
1
0
0
1
0
1
2
2
1
1
0
8
2
6
1
3
4
1
2
2
4
6
3
1
2
2
1
6
6
1
1
2
1
12
1
9
1
8
8
7
0
2
0
1
7
4
1
1
4
21
9
2
3
10
13
25
5
17
3
13
13
10
5
5
6
8
11
5
3
4
5
28
17
5
5
13
14
91 141 278 510

<표>고려 후기 세족과 관료 배출 현황

 이는 후기로 내려올수록 삼남지방의 토성이 끊임없이 관료를 배출한 결과이기도 하지만,0188)李樹健, 위의 책, 344쪽. 여러 차례에 걸친 전쟁으로 말미암아 이러한 현상이 나타나게 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즉 고려시대 장기간의 전쟁으로 가장 피해가 컸던 지역은 근기지방으로서 이 지역의 吏族들은 본관과 거주지를 떠날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이것이 후기로 내려올수록 관료 배출을 저조하게 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던 것이다.0189)許興植,<高麗時代의 本과 居住地>(≪高麗社會史硏究≫, 亞細亞文化社, 1981), 394∼402쪽.
金光哲,<麗蒙戰爭과 在地吏族>(≪釜山史學≫12, 釜山史學會, 1987), 60∼62쪽.

 고려 후기 세족의 관료 배출은 가문에 따라 그 규모면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 차이는 세족의 성쇠를 좌우하는 것이었다. 앞의<표>에서 드러나고 있듯이 파평 윤씨 등 24개 가문은 10명 이상의 고위 관료를 배출하면서 세족으로서의 면모를 뚜렷이 보여주고 있다. 특히 파평 윤씨·공암 허씨·안동 김씨·안동 권씨·남양 홍씨·광주 김씨·경주 이씨 등 7개 가문에서는 재상급 인물을 포함하여 20명 이상의 고위관료를 배출하여 고려 후기 대표적인 세족으로서의 지위를 확보하고 있었다. 반면에 칠원 윤씨·고흥 유씨와 같이 3대 이상에 걸쳐 재상급 인물을 배출했으면서도 많은 수의 관료를 배출하지 못했거나, 정안 임씨·무송 유씨·횡천 조씨·합천 이씨·익산 이씨·행주 기씨·동복 오씨와 같이 원간섭기에는 관료 배출이 활발하다가 여말에 이를수록 저조한 경우도 있다. 이들은 이후 세족으로서의 가세 유지가 어려웠을 것으로 보인다.

 고려 후기 세족의 관료 배출은 전 기간에 걸쳐 고른 분포를 보이고 있지만, 가문에 따라서는 시기별로 편차가 있었다. 대체로 세족층 모두가 공민왕대 이후에 관료 배출을 집중시키고 있는 것이 특징이기도 하다. 그 가운데서도 황려 민씨·안동 권씨·전주 최씨·청주 한씨·서원 염씨·고성 이씨·경주 이씨·단양 우씨·성주 이씨 등은 그 이전에 비해 공민왕대 이후에 배 이상의 관료를 배출하였다. 이러한 현상이 나타나게 된 것은 당시 정치상황이 이들 가문에 유리하게 작용했거나 과거 합격자를 많이 배출한 것이 그 계기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세족층의 혼인관계도 관료 배출 못지 않게 가문의 사회적 지위를 유지하는 데 크게 작용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세족층은 그들의 가문배경과 비슷한 가문이나 왕실을 대상으로 통혼권을 형성하고 있었다. 예컨대 파평 윤씨는 언양 김씨 등 11개의 세족가문과,0190)朴龍雲, 앞의 글(1977), 151쪽. 철원 최씨는 황려 민씨 등 16개 정도의 세족가문과 혼인관계를 맺었다.0191)朴龍雲, 앞의 글(1978), 66쪽. 남양 홍씨의 통혼권은 당시 세족가문을 망라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광주 김씨·청주 정씨·원주 원씨·청주 한씨·안동 권씨·진주 유씨·죽산 박씨·언양 김씨·서원 염씨·파평 윤씨·해평 윤씨·평양 조씨·공암 허씨·문화 유씨·고성 이씨·철원 최씨·성주 이씨·나주 나씨 등 18개의 세족가문과 혼인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0192)金光哲, 앞의 책(1991), 別表 1 高麗後期 世族家門의 世系圖 참조.

 세족층은 왕실과도 혼인관계를 맺고 있었다. 원간섭기 이후 고려왕은 왕위를 유지하기 위해 원공주를 왕비에 책봉하는 한편, 다수의 異姓后妃를 두고 있었다. 충렬왕대에서 공민왕대까지의 이들 후비는 12명 정도 확인되고 있다.0193)정용숙,<고려 후기의 異姓后妃>(≪고려시대의 后妃≫, 민음사, 1992), 295∼296쪽. 이 가운데 충숙왕비 壽妃와 충혜왕비 銀川翁主, 공민왕비 定妃를 제외하면 모두 세족출신 왕비들이었다. 즉 언양 김씨·남양 홍씨·평양 조씨·공암 허씨·안동 권씨·파평 윤씨·경주 이씨·서원 염씨 등이 왕비를 배출하고 있었다. 남양 홍씨는 충선왕비 順和院妃, 충숙왕비 明德太后, 충혜왕비 和妃 등 3명의 왕비를 배출할 정도였다. 이처럼 고려 후기 세족층이 모두 왕실과 혼인관계를 맺은 것은 아니었지만, 유력한 가문일수록 왕비를 배출하면서 가세를 신장시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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