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9권 고려 후기의 정치와 경제
  • Ⅰ. 정치체제와 정치세력의 변화
  • 2. 권문세족과 신진사대부
  • 1) 권문세족의 성립과 그 성격
  • (2) 고려 후기 권력구조와 세족

(2) 고려 후기 권력구조와 세족

 원간섭기의 전개와 함께 고려 후기 정치체제는 중서문하성과 상서성이 통합되어 僉議府로 개편되고, 6부가 典理·版圖·軍簿·典法司 등 4사로 통폐합되는 등 큰 변화가 있었다. 충렬왕 5년(1279)에 都兵馬使가 都評議使司로 개편된 것도0194)≪高麗史節要≫권 20, 충렬왕 5년 3월. 정치체제상의 뚜렷한 변화의 하나였다. 이는 단순히 명칭의 변경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구조와 기능의 변화 등 개편의 성격을 지니는 것이었다. 도평의사사는 도병마사에 비하여 그 구성이나 기능, 절차에 있어 매우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도병마사가 필요에 따라 간헐적으로 개최되고 그 기능도 주로 군사관계에 한정되는 제한적인 범위내의 것이었다면, 도평의사사는 상설의 合坐기구로서 당시 중대 사안들이 이 기구에서 논의되었다.0195)고려 후기 도평의사사의 성립과 그 기능에 대해서는 이 책 Ⅰ편 1장 1절<중앙 통치체제의 변화>참조.

 도평의사사에는 僉議府·密直司의 재추와 三司의 判事·左右使가 참여하고 있었다. 도병마사 시절에는 그 구성원이 이른바 5宰·7樞에 국한되었던 것에 비하면 그 참여 범위가 확대된 셈이다. 더욱이 고려 후기에는 재추의 수가 증가함으로써 도평의사사에서 합좌하는 인원 수는 계속 늘어났다. 원간섭기만 하더라도 매 시기 재추의 수는 20∼30여 명을 헤아리고 있었고, 여말에 가서는 더욱 늘어나 60∼70명이 都堂에서 국정을 논의할 정도였다.0196)≪高麗史節要≫권 33, 신우 14년 8월. 고려 후기 재추급 인물들은 세족출신이 많았다. 시기에 따라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충선왕 2년(1310)의 인사에서는 19명의 재추 가운데 12명이 세족출신이었다.0197)≪高麗史≫권 33, 世家 33, 충선왕 2년 9월 을유. 그러므로 고려 후기 도평의사사의 활동은 세족출신 관료들에 의해 주도되고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처럼 도평의사사는 고려 후기 정치체제상에 중요한 정치기구로 자리잡고 있었다. 그런데 도평의사사의 이러한 기능과 지위가 최고 권력기구로서의 성격을 갖는 것이고, 이 때문에 왕권도 제약당할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0198)閔賢九, 앞의 글(1977), 34∼39쪽.
邊太燮,<高麗의 政治體制와 權力構造>(≪韓國學報≫4, 1976), 33∼38쪽.
이해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고려 후기 권력구조의 특성상 오히려 도평의사사의 권한을 제약할 수 있는 요소가 많았기 때문이다.

 고려 후기에는 도평의사사와는 별도로 일부의 특정 인물들로 구성된 必闍赤[필자적;비칙치]과 같은 국왕 측근기구와 征東行省·萬戶府 등 원간섭기구가 권력기구로 등장하고 있었다. 필자적은 충렬왕 4년(1278), 재추의 수가 많아서 정책을 논의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구실로 설치되었다.0199)≪高麗史節要≫권 20, 충렬왕 4년 10월. 이 기구에는 일부의 재추를 비롯하여 특정 인물들만 참여하고 있었기 때문에 ‘別廳宰樞’라고도 하였다. 이 때 설치된 필자적은 단순히 직임의 의미만을 지니는 것이 아니라 통치기구로서의 성격을 갖고 있었다. 특히 그 구성원이 궁중에 모여 국가 중대사를 결정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이 기구는 충렬왕의 왕권강화를 뒷받침하기 위한 국왕 측근기구로서의 성격을 갖는 것이었다.0200)金光哲,<高麗 忠烈王代 政治勢力의 動向-忠烈王 初期 政治勢力의 變化를 중심으로->(≪論文集≫7­1, 昌原大, 1985), 160쪽.
李益柱, 앞의 글(1988), 208∼210쪽.
朴龍雲,<高麗後期 必闍赤에 대한 검토>(≪李基白先生古稀紀念 韓國史學論叢≫, 一潮閣, 1994), 868∼872쪽.
그러므로 필자적이 권력기구로 남아 있는 한, 도평의사사가 그 기능과 권한을 제대로 행사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필자적과 같은 권력기구는 원간섭기에는 물론 공민왕대와 우왕대에도 ‘內相’·‘內宰樞’로 지칭되면서 존속되고 있었다.0201)≪高麗史≫권 114, 列傳 27, 吳仁澤 및 권 126, 列傳 39, 姦臣 2, 林堅味. 원의 간섭에서 벗어났으면서도 내재추와 같은 국왕 측근기구가 여전히 권력기구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 이는 국왕의 왕권강화나 특정세력의 권력독점 등 당시 정치상황과 밀접한 관련을 갖는 것이다. 즉, 공민왕대는 신돈집권기에 왕권을 강화할 목적으로, 우왕대에는 林堅味 등 권력층이 왕명의 출납을 장악하는 등 권력을 독점하기 위해 내재추제가 필요했던 것이다. 내재추는 그 이름이 말해주듯이 궁중에서 국가 중대사를 처리하는 등 권력을 장악하면서 도평의사사의 권한을 제약하고 축소시키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0202)閔賢九,<辛旽의 執權과 그 政治的 性格(上)>(≪歷史學報≫38, 1968), 78∼84쪽.

 충렬왕대에 원의 종속구조가 본격적으로 자리잡게 되면서부터 국내에는 원의 간섭기구가 설치되는가 하면 원과의 관계개선을 통하여 권력을 행사하는 부류들이 나타나게 된다. 원은 부마관계를 통해 고려국왕을 원의 지배에 순응시키면서 국왕을 매개로 하여 고려를 효과적으로 지배하고 있었다.0203)李益柱, 앞의 글(1988), 176쪽. 이러한 지배방식에 따라 征東行省과 萬戶府가 대표적인 간섭기구로 자리잡고 있었다. 정동행성은 시기마다 그 활동내용에 차이가 있고 원의 공적 연락 기관으로서 그리고 내정 간섭기구로서의 성격을 지니는 것이었지만, 고려국왕이 그 책임자인 丞相에 임명되는 등 국왕을 매개로 하여 이를 관철시키고 있었다. 만호부는 원의 군사적인 요구를 일정하게 반영하고 있었던 군사조직이었다. 이 기구 역시 고려와 원 양측의 정치적 이해관계 속에서 설치되었고 고려국왕에 의해 만호에 임명될 인물이 선정되는 등,0204)邊東明,<高麗 忠烈王代의 萬戶>(≪歷史學報≫121, 1989), 134쪽. 원의 만호부를 통한 군사적 통제 역시 고려국왕을 매개로 하고 있었다.

 정동행성은 그 하부기관으로 左右司·儒學提擧司·理問所·都鎭撫司 등을 두고 대원외교의 사무에 복무하는 한편, 국왕의 인정 하에 국내의 田民·사법·조세 등 대내적인 문제에까지 참여하여 내정을 간섭하였다.0205)張東翼,<征東行省의 硏究>(≪東方學志≫67, 1990), 83쪽. 비록 절차상으로는 행성의 업무를 도평의사사에 보고하여 시행하도록 되어 있었지만, 행성은 오히려 도평의사사를 무시하고 독자적으로 그 활동을 전개해 나가기도 하였던 것이다.0206)≪高麗史≫권 84, 志 38, 刑法 1, 職制. 만호부만 하더라도 원간섭기에 권력기구로서 존재했을 것이다. 그 기능이 왕권의 유지 및 원의 지배정책과 관련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러하다. 특히 순군만호부는 정보와 무력을 장악하여 현실 비판적인 재추나 대간을 왕명에 따라 체포·수감·국문하는 등0207)韓㳓劤,<麗末鮮初 巡軍硏究>(≪震檀學報≫22, 1961), 30∼34쪽. 권력기구로서의 면모를 보이고 있었다.

 이처럼 원간섭 이후 고려 국가기구 가운데에는 왕권의 유지 및 강화, 그리고 원의 지배정책과 관련된 기구들이 권력기구로 등장하고 있었다. 원간섭기 동안은 필자적·정동행성·만호부가, 공민왕대 이후에는 내재추가 권력기구로 존속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같은 권력기구가 존재하는 한, 도평의사사는 그 권한과 기능을 행사하는 데 제약당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고려 후기에는 이와 같은 권력기구의 존재와 함께 가문배경에 관계없이 막대한 권력을 행사하고 있던 권력층이 시기마다 등장하고 있었다. 이들 권력층은 국가기구의 기능과 권한을 무력하게 하고 토지겸병 등을 통해 경제력을 집중시킴으로써 당시 비판의 표적이 되고 있었다. 권문층으로 규정할 만한 이들은 당시의 사정을 전해주는 기록들에서 ‘權門’·‘權貴’·‘權勢之家’ 등으로 지칭되고 있었다.0208)金光哲, 앞의 책(1991), 19∼34쪽. 당시 권력층에 대한 지칭은 이외에도 權臣·權豪·勢家·豪强·豪勢家·豪猾之徒·權姦·巨室 등이 있다.

 무신란 이후 권력은 무신 중심, 그것도 집정무인을 정점으로 행사되고 있었다. 그러므로 무신집권기 동안에 권문층은 바로 이들이었다. 무신들은 비록 정권의 유지를 위하여 국왕의 권위를 인정하고 왕실과 혼인하기도 하지만0209)金塘澤,<崔氏政權과 國王>(앞의 책), 173∼174쪽. 그들의 권력은 왕권을 능가하는 것이었다. 원간섭기 권문층은 국왕 측근세력들이었다. 국왕 측근세력은 응방 관계자, 몽고어 역관, 내료, 환관, 겁령구나 이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던 폐행 인물들과 원에 국왕을 시종했던 인물들이 그 구성원이 되고 있었다.0210)李益柱, 앞의 글(1988), 188∼203쪽.
金光哲, 앞의 책(1991), 144∼152쪽.
鄭希仙,<高麗 忠肅王代 政治勢力의 性格>(≪史學硏究≫42, 1990), 34∼37쪽.
朴宰佑,<高麗 忠宣王代 政治運營과 政治勢力의 動向>(≪韓國史論≫29, 서울大, 1993), 17∼22쪽.

 폐행은 국왕에 대하여 헌신적으로 봉사하는 등 충성을 다하였고, 국왕은 이에 대한 반대급부로 이들에게 상당한 권력을 부여해주었다.0211)洪承基,<元의 干涉期에 있어서의 奴婢出身 人物들의 政治的 進出>(≪韓國史學≫4, 韓國精神文化硏究院, 1983), 122쪽. 이들은 왕권을 배경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왕위 교체에 따라 파멸의 위기를 맞기도 하였다. 그러나 왕위가 유지되고 그 지원이 계속되는 한 ‘권력이 한 나라를 기울게 했다’고 표현될0212)≪高麗史≫권 123, 列傳 36, 嬖幸 1, 廉承益·印侯. 정도로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원의 지배정책에 따라 원간섭기 고려의 국왕은 즉위 전부터 원에서 宿衛의 절차를 거쳐야 했고, 즉위 후에는 원의 요청이나 현안 문제의 해결을 위해 자주 入朝하였다. 특히 충선왕의 경우는 즉위한 후에도 원에 계속 체류하면서 왕권을 행사하였다. 이 과정에서 시종신은 국왕의 측근세력이 되어 왕권을 배경으로 상당한 권력을 행사하였다. 예컨대 충선왕대에는 權漢功·崔誠之·李光逢 등이, 충숙왕대에는 崔安道 등이 시종신이 되어 권력층으로 군림하였다.0213)≪高麗史≫권 124, 列傳 37, 嬖幸 2, 崔安道 및 권 125, 列傳 38, 姦臣 1, 權漢功.

 이렇게 형성된 권문층은 다양한 구성을 보이고 있다. 가문배경과 관계없이 권문층이 될 수 있었다는 점이 고려 후기 권력구조의 특징이기도 하다. 비록 천한 신분의 소유자라 할지라도 무인집정이 되거나 국왕 측근세력이 되면 권력층으로 부상할 수 있었다. 세족출신 관료들은 재추직 등 고위직에서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에 권문층이 되는 데에도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그래서 서원 염씨 廉承益이나 황려 민씨 閔渙, 안동 권씨 權適과 같이 국왕의 폐행이 되어 권문으로 등장한 부류도 있었다.0214)≪高麗史≫권 123, 列傳 36, 嬖幸 1, 廉承益 및 권 124, 列傳 37, 嬖幸 2, 閔渙.

 이처럼 권력기구가 등장하고 권문층이 형성됨으로써 도평의사사와 이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던 재추들은 위축당할 수밖에 없었다. 충렬왕의 폐행이었던 환관 崔世延은 장군직만 갖고 있으면서도 상당한 권력을 행사하였다. 관료의 승진과 강등이 모두 그의 손에 달려 있었고, 재상이라도 그의 뜻을 거슬리지 못할 정도였다.0215)≪高麗史≫권 122, 列傳 35, 宦者 崔世延. 최세연과 같은 권문의 존재때문에 세족출신의 재추들도 그 권한을 제대로 행사할 수 없었던 것이다. 원간섭기에 활동했던 李齊賢은 당시 도평의사사에 참여하고 있는 재추들이 겨우 부부간의 사사로운 일이나 개인적인 이해관계만을 얘기할 정도라고 혹평한 바 있다.0216)李齊賢,≪櫟翁稗說≫前集 1. 무신정권 하에서 당시 재상들이 공작새나 모란꽃에 관한 이야기로 소일한 것보다 더 못했다는 것이다. 이제현은 그 원인을 재추의 수가 많은 데서 찾고 있는데, 그도 그렇지만 당시 재추가 이렇게밖에 할 수 없었던 것은 도평의사사가 국가 정책의 결정이나 행정운영에 있어 그 위상에 걸맞는 실질적인 권한을 갖지 못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여말에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우왕대의 재상이었던 金續命은 자신은 도당에서 허수아비와 같다고 토로하면서 도평의사사가 약화되고 있음을 비판하다가 李仁任 등의 사주를 받은 대간의 탄핵으로 유배된 바 있다.0217)≪高麗史≫권 111, 列傳 24, 金續命. 역시 세족출신인 정당문학 許完과 동지밀직사사 尹邦晏은 내재추인 林堅味·都吉敷를 비판하다가 오히려 죽임을 당하기까지 하였다.0218)≪高麗史節要≫권 31, 신우 5년 9월.

 물론 도평의사사는 여말까지 계속 존속하면서 정치체제의 중추기구로 자리하고 있었다. 비록 내재추와 같은 권력기구와 권문층의 존재로 도평의사사가 권력기구로서의 지위를 확보하고 있지 못했다 하더라도 정치운영에 있어 갖는 상징적 지위는 매우 컸다. 그것은 권력기구나 권문층의 지나친 권력독점으로 정치과정이 왜곡될 때마다 도평의사사의 기능 회복을 강조하고 있는 데서 알 수 있다. 즉 지방에 발송되는 왕의 교지를 도평의사사를 경유하게 해야 된다고 요구한다든지0219)≪高麗史節要≫권 21, 충렬왕 22년 2월. 정동행성에서 지방에 공문을 보낼 때에도 도평의사사에 보고해야 함을 강조하고, 국가의 여러 정책이 도평의사사에서 결정되야 함을 촉구하면서0220)≪高麗史≫권 84, 志 38, 刑法 1, 職制. 그 기능과 권한을 유지하려 하고 있었다.

 특히 개혁정치가 추진되었던 시기에는 도평의사사가 그 기능과 권한을 어느 정도 회복할 수 있었다. 예컨대 충선왕대 개혁정치 시기에는 왕명에 의해 도평의사사가 공무를 맡아 처리하고, 지방관을 감찰하기도 하였다.0221)≪高麗史≫권 33, 世家 33, 충선왕 원년 10월 기묘. 충목왕대에는 도평의사사가 녹과전의 설치를 건의하는 한편, 賜給田의 폐해를 지적하면서 수조권 분급체제의 정비를 주장하는 등0222)≪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祿科田. 사회모순의 해결에 관심을 보인 바 있다. 공민왕대에도 개혁정치 기간 동안에 도평의사사가 왕명에 따라 양전사업을 주관하는 등0223)≪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經理. 정치운영의 중추기구로서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었다. 이러한 도평의사사의 위상은 이 기구가 권력기구로서 존재했느냐의 여부를 떠나서 항상 정치운영의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활동하고 있던 세족출신의 재추들은 이를 매개로 그들의 정치적 기반을 확보할 수 있었고, 이를 통해 가문의 사회적 지위를 유지·신장시킬 수 있었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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