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9권 고려 후기의 정치와 경제
  • Ⅰ. 정치체제와 정치세력의 변화
  • 2. 권문세족과 신진사대부
  • 1) 권문세족의 성립과 그 성격
  • (3) 고려 후기 사회모순의 심화와 세족층의 동향

(3) 고려 후기 사회모순의 심화와 세족층의 동향

 고려 후기에는 토지겸병의 확대 등 대내적인 모순과 몽고와의 전쟁, 그리고 원의 간섭으로 말미암은 대외적인 모순이 중첩되어 사회모순이 심화되고 있었다. 12세기 이래 진행되어온 토지겸병은 무신집권기를 거치면서 더욱 가속화되었고 원간섭기 이후 겸병의 정도는 더욱 심각한 상태에 있었다. 당시 권문층들은 고리대를 통해 소농의 토지를 점탈하거나 국가로부터 公牒·賜牌를 얻어 합법을 가장한 점탈을 자행하여 한 번에 많게는 수백 결에 이르는 토지를 겸병하고 있었다.0224)≪高麗史節要≫권 20, 충렬왕 8년 9월.

 토지겸병에 따른 토지 지배관계의 혼란은 조세 수취과정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권력층이 자기 소유지의 田租를 납부하지 않음으로써 그 부담은 향리·백성에게 돌아갔으며,0225)≪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租稅. 일본정벌을 위한 군사비와 국왕과 사신의 잦은 원에의 왕래에 따른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科斂과 같은 임시세가 부과되었다.0226)≪高麗史≫권 79, 志 33, 食貨 2, 科斂. 鹽전매제 역시 소금의 공급은 제대로 되지 않은 채 鹽稅를 신설한 결과를 가져와 민생문제를 야기하였다. 또한 조세를 수납하는 과정에서 선납·대납 행위가 나타나 민의 조세 부담을 가중시켰다.0227)≪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貢賦.

 고려 후기 세족층은 이와 같은 모순구조 속에서 오히려 그들의 기득권을 강화하였다. 세족은 본래 지주층 이상의 경제적 기반을 갖고 있는 데다가 지속적인 관료 배출을 통하여 국가로부터 녹과전, 녹봉을 지급받아 경제적 기반을 확대하고 있었다. 세족은 이렇게 축적한 부를 토지에 재투자하여 매득·개간 등의 방법으로 토지소유의 규모를 확대하였다. 게다가 세족층의 일부는 수조지의 확대, 토지점탈, 사패를 통해 농장을 형성하여 경제력을 집중시켰다. 그러므로 고려 후기 세족층은 권문이든 그렇지 않든 간에 사회모순을 심화시키고 있었던 주체였다.

 고려 후기 세족층의 경제력 집중은 한편으로 소농의 몰락과 국가재정의 고갈을 초래케 함으로써 국가를 위기 상황으로 몰아갔다. 특히 소농의 佃戶化나 流亡은0228)梁元錫,<麗末의 流民問題-특히 對蒙關係를 중심으로->(≪李丙燾博士華甲紀念論叢≫, 一潮閣, 1956).
김순자,<원간섭기 민의 동향>(≪역사와 현실≫7, 1992).
국가재정의 확보와 노동력 징발을 어렵게 할 뿐 아니라, 지배체제를 붕괴시킬 소지도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왕실이나 관료들은 이처럼 심화되어가는 사회모순에 대해 일정하게 대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세족들로서도 사회모순이 심화되어 체제 자체가 파탄 상태에 놓이게 되면 그들이 지금까지 누려왔던 기득권마저도 상실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이에 대응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고려 후기 몇 차례 추진되었던 개혁정치는0229)고려 후기 개혁정치에 대해서는 이 책 Ⅰ편 2장 3절<개혁정치의 추진과 신진사대부의 성장>참조. 바로 이러한 유민문제 등 체제의 위기에 대응하면서 한편으로는 국왕 측근세력 등 이전 권력층의 기반을 와해시켜 왕권을 강화할 목적으로 실시된 것이었다.0230)金光哲,<高麗 忠肅王 12年의 改革案과 그 性格>(≪考古歷史學志≫5·6, 1990), 207∼209쪽.
김순자, 앞의 글, 71∼80쪽.

 충선왕대 개혁정치에서부터 여말의 사전개혁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개혁 추진과정에서 일부 세족출신 관료들은 개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예컨대 충목왕대 세족출신인 王煦·金永旽·金光轍·金英利·許湜 등은 정치도감의 判事나 副使·錄事로서 신흥관료와 함께 개혁을 추진한 바 있다. 이들은 공민왕대 이후 원의 영향력이 일정하게 쇠퇴한 공간을 이용하여 부원세력의 제거를 주도하고, 국가재정의 고갈과 민생문제의 유발 요인이 되고 있었던 私田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하였다. 공민왕대에 활동했던 元松壽·鄭樞·閔霽·金九容·李岡·韓脩·金敬直 등은 세족출신으로서 이제현 등과 함께 개혁세력으로 활동하였다.0231)李淑京,<李齊賢勢力의 形成과 그 역할>(≪韓國史硏究≫64, 1989), 53∼54쪽<표 1>참조.

 사회모순의 주체인 세족출신 관료들이 개혁정치에 참여했다는 것에 의문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당시 개혁정치의 내용과 그 성격을 보면 이 점을 곧 이해할 수 있다. 원간섭기 이후 정부가 주도한 개혁은 당시 토지 지배관계나 수취구조 그리고 원의 종속구조로 말미암은 고려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근본적으로 해결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다만 제도 운영상에 나타나는 문제를 시정하거나 부분적인 개혁을 통해 심각한 사회모순을 완화하려는 양보적이고 개량적인 것으로서, 반원적이거나 체제 변혁적인 것이 아니었다.0232)金光哲, 앞의 글(1990), 201∼207쪽.
權寧國,<14세기 전반 ‘개혁정치’의 내용과 그 성격>(≪역사와 현실≫7, 1992), 107∼110쪽.
여말의 사전개혁은 수조권 분급체제의 정비를 목적으로 하였다는 점에서는 원간섭기의 개혁과 차이가 있지만, 이 개혁도 수조권의 집적을 부정하는 것일 뿐 지주층의 소유권을 박탈하는 것은 아니었다.0233)李景植,<高麗末의 私田 捄弊策과 科田法>(≪東方學志≫42, 1984 ;≪朝鮮前期土地制度硏究≫, 一潮閣, 1986, 92쪽).
姜晋哲,<高麗末期의 私田改革과 그 成果 -농민의 처지에서 본 개혁과 그 성과의 문제점->(≪震檀學報≫66, 1988 ;≪韓國中世土地所有硏究≫, 一潮閣, 1989, 314쪽).
당시 개혁의 성격이 이러했기 때문에 세족출신들 가운데서도 그들의 현실인식에 따라서 개혁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었다. 물론 세족이 참여한 개혁은 그들의 경제적 기반에 손상을 입지 않는 범위 내에서였다.

 한편 원에 대한 종속구조가 정착됨에 따라 고려의 지배세력들은 이에 순응하거나 원과 적극적으로 결탁하여 그들의 지위를 확보하려 하였다. 고려 관료들은 정동행성의 좌우사·유학제거사·이문소·도진무사에서 활동하였으며,0234)張東翼,≪麗·元關係史硏究≫(釜山大 博士學位論文, 1992 ;≪高麗後期外交史硏究≫, 一潮閣, 1994, 52∼102쪽). 만호직을 수여받아 원 및 고려국왕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원과의 직접적인 교류를 통해 그들의 지위와 권력을 신장시켜 갔다. 대원관계가 외교의 중심을 이루게 되면서 몽고어 역관출신의 지위가 상승하고 그들의 가문을 성장시키는 계기가 되는가 하면, 응방관계자가 출세하여 가세를 신장시키기도 하였다. 원으로 환관과 공녀를 보내는 일은 그 가족과 국가에 비탄과 모멸감을 안겨주는 것이었지만, 일부에서는 이를 통해 권력층으로 부상하는 경우도 나타나게 되면서0235)≪高麗史節要≫권 23, 충선왕 2년 9월. 고려와 원 사이의 인적 교류는 급격히 확대되어 갔다. 뿐만 아니라 고려 관료들은 원과의 학문적 교류나 원의 과거에 합격하여0236)張東翼, 앞의 책, 206∼234쪽.
高惠玲,<高麗 士大夫와 元制科>(≪14世紀 高麗 士大夫의 性理學 受容과 稼亭 李穀≫, 梨花女大 博士學位論文, 1992), 71∼81쪽.
그들의 지위를 향상시키려 하였다. 당시 이들 유교 지식인이나 원의 과거에 합격한 인물들은 고려의 文名을 드날렸다는 칭송을 받고 있었지만, 엄밀히 말하여 이러한 활동 역시 고려의 자주성과는 거리가 있는 것이었다. 세족출신을 비롯한 관료집단은 그들의 출신기반에 관계없이 종속구조를 종식시키는 데 앞장서기보다는, 오히려 이를 이용하여 그들의 세력기반을 확대하려는 경향을 보이고 있었던 것이다.0237)張東翼,<元의 政治的 干涉과 高麗政府의 對應>(≪歷史敎育論集≫17, 慶北大, 1992), 22쪽. 원의 간섭이 장기화되면서 관료집단의 이러한 지향은 더욱 심화되어, 자주적인 모습을 보이기보다는 친원적 세계관에 매몰되고 있었다.0238)도현철,<14세기 전반 유교 지식인의 현실인식>(≪14세기 고려의 정치와 사회≫, 민음사, 1994), 571∼579쪽. 도현철은 당시 지식 관료들은 지배층으로서의 기득권을 계속 보장받기 위해, 원의 형세론적 도통관에 의하여 원을 천자국으로 긍정하는 등 원의 간섭을 인정하고 있었던 것으로 이해하였다. 원간섭기 관료들이 친원적 세계관 속에 매몰되고 있었음은 이 시기 사대부의 전형적인 인물로 평가받고 있는 李穀이 당시 세족이었던 평양 조씨 趙瑋의 묘지명을 쓰면서 원과의 관계를 극찬한 데에서도 드러나 있다(李 穀,≪稼亭文集≫권 12, 趙瑋墓誌銘).

 원간섭기 고려 관료들이 이처럼 친원적 세계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면서도 개인에 따라서는 소극적이지만 자주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하고,0239)충렬왕대 수상직을 역임했던 洪子藩은 역관출신 재상 柳淸臣이 원의 사신과 몽고어로 직접 대화하는 것을 비판한 바 있는데, 이러한 사례를 통해 고려 관료들 가운데는 한계는 있었지만 자주성을 유지하려 했던 인물들이 있었음을 엿볼 수 있다(李齊賢,≪櫟翁稗說≫前集 1). 특히 국가가 소멸될 위기에 처했을 때에는 고려의 독립을 위하여 적극 대처하기도 하였다. 충렬왕 26년(1300) 정동행성 平章政事인 闊里吉思가 노비제도를 개혁하고 관원수를 줄이는 등0240)≪高麗史≫권 31, 世家 31, 충렬왕 26년 10월 정유. 내정을 간섭하여 왔을 때 재추관료들은 이에 적극 대처하여 좌절시킨 바 있다. 충렬왕대 말 宋邦英 등 충렬왕파가 원의 실력자들과 연결되어 충선왕비인 寶塔實憐公主를 개가시켜 충선왕의 왕위계승권을 박탈하려 했을 때에도 洪子藩·崔有渰 등 세족출신 재추들은 元都에까지 가서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여 이를 저지한 적이 있었다. 물론 세족층의 이러한 활동은 국왕 측근세력의 권력장악에 따라 소외당하고 있는 현실을 극복하려는 것이었지만, 고려 국가의 독립과 자주성을 유지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점도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충선왕대 이후 부원세력에 의해 주도된 立省策動은 고려 국내 정치세력을 분열시켰을 뿐만 아니라, 국가의 존립 자체를 위기로 몰아넣었다. 입성책동은 곧 고려를 원의 內地로 만들려는 것으로,0241)≪高麗史節要≫권 24, 충숙왕 10년 정월. 충선왕대 이후 몇 차례에 걸쳐 자행되었다.0242)高柄翊,<麗代 征東行省의 硏究>(≪歷史學報≫14·19, 1961·1962 ;≪東亞交涉史의 硏究≫, 서울大 出版部, 1970).
北村秀人,<高麗末における立省問題について>(≪北海道大學文學部紀要≫14­1, 1966).
김혜원,<원간섭기 입성론과 그 성격>(≪14세기 고려의 정치와 사회≫) 참조.
이 가운데에서도 충선왕대 遼陽行省右丞 洪重喜와 충숙왕 10년(1323) 瀋王派의 입성책동은 국가의 존폐를 좌우할 정도로 심각한 것이었다. 당시 국내 정치세력들은 입성책동에 맞서 원의 황실과 중서성에 그 부당성을 알리고 이를 저지하는 데 적극성을 보였다.0243)≪高麗史≫권 108, 列傳 21, 崔誠之. 閔宗儒·崔誠之·金倫·최유엄 등 세족출신 재추들은 심왕파의 왕권 장악을 저지하는 한편, 이들이 주도하는 입성책동을 봉쇄하기 위하여 적극 대처하였다. 재추 관료들은 원의 실력자를 움직이기도 하고, 직접 원으로 가서 중서성을 상대로 그 부당성을 주지시켜 입성책동이 중지될 수 있었다.0244)≪高麗史≫권 110, 列傳 23, 李齊賢.
≪高麗史節要≫권 24, 충숙왕 10년 정월·12년 윤정월.

 이처럼 고려 후기 세족층은 사회모순을 완화시키기 위해 개혁활동에 참여하기도 하고, 고려의 자주성을 말살하려는 원과 부원세력의 책동을 저지하려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세족층이 당시 모순 주체이면서도 이처럼 동시에 개혁적인 모습을 보이게 된 것은 현실인식의 차이에 따라 그 대응방식을 달리한 결과일 것이다. 세족층 가운데는 외세 간섭이나 체제모순을 방치하면서 오히려 이를 이용하여 더 많은 기득권을 누리려는 집단이 있는가 하면, 국가재정과 민생문제를 어느 정도 해결하고 고려의 자주성을 유지시키면서 기득권을 향유하려는 세력집단이 있었다. 그러므로 후자의 입장에 있었던 세족들은 개혁정치에도 참여하고 원의 내정 간섭을 저지하는 데도 적극성을 보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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