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9권 고려 후기의 정치와 경제
  • Ⅰ. 정치체제와 정치세력의 변화
  • 2. 권문세족과 신진사대부
  • 1) 권문세족의 성립과 그 성격
  • (4) 고려 후기 세족의 역사적 성격

(4) 고려 후기 세족의 역사적 성격

 고려 후기 세족층은 지주층으로서의 경제적 기반을 갖고 국가기구에서 활동하면서 정치권력과 사회적 지위를 누렸던 최고의 지배세력이었다. 세족층은 가문에 따라 토지소유 규모의 차이는 있었지만, 본래 일반 소농에 비하여 많은 사유지를 갖고 있는 데다가, 지속적인 관료 배출을 통해 가문의 경제적 기반을 확대할 수 있었다.0245)尹漢宅은 慶源李氏 출신의 관료들이 시기마다 받은 科田을 통계하여, 문벌가문의 과전지배가 家領地의 형태를 띠면서 중요한 경제적 기반이 되고 있었던 것으로 이해하였다(尹漢宅,<高麗前期 慶源李氏家의 科田支配>,≪歷史硏究≫1, 역사학연구소, 1992). 비록 고려 후기에 와서 전기의 전시과제도가 제대로 시행되지 않고 녹봉도 규정액대로 지급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녹과전의 지급 등 여전히 관직을 매개로 경제적 부를 확대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았다. 특히 세족층은 收租地를 世傳하여 家産化하거나 賜田의 확대를 통해 농장을 형성하고 이를 경제적 기반으로 삼아 지주층으로서의 지위를 강화해 나갈 수 있었다.

 고려 후기 세족층은 문벌로서의 성격을 지닌다. 이들은 지주층으로서의 경제적 기반과 지속적인 관료 배출, 제한된 범위 내에서의 혼인관계 등을 통하여 문벌을 형성하고 있었다. 고려 후기 세족도 문벌가문이라는 점에서 다른 사회계층에 대해 일정하게 배타성과 폐쇄성을 갖고 있었다. 일찍이 공민왕도 비판했던 것처럼 세족은 親黨을 형성하여 서로 이해관계를 도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0246)≪高麗史節要≫권 28, 공민왕 14년 12월. 물론 세족층이 갖는 이러한 배타성과 폐쇄성은 문벌이 존재했던 전근대사회 어느 시기에나 나타날 수 있는 것이었다.0247)宋俊浩는 문벌 숭상의 풍조가 고려시대보다는 조선시대에, 조선시대에도 말기로 올수록 더 발달했으며, 그 배타성도 다른 씨족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씨족내 각 派 간에 심각했던 것으로 이해하였다(宋俊浩,<韓國에 있어서의 家系기록의 歷史와 그 解釋>,≪歷史學報≫87, 1980 ;≪朝鮮社會史硏究≫, 一潮閣, 1987, 36∼44쪽).

 고려 후기 세족이 문벌로서의 성격을 갖는 것은 분명하지만 고려시대 친족구조의 특성 때문에 조선시대의 그것과는 차별성을 지닐 수밖에 없었다. 고려시대 친족구조는 부계 중심이 아닌 양측적 친속관계로 유지되고 있었다.0248)盧明鎬,<高麗時代의 親族組織>(≪國史館論叢≫3, 1989), 105∼116쪽. 이 때문에 상속관계가 부계 중심으로만 운영된 것도 아니었고,0249)許興植,<高麗時代의 親族構造>(앞의 책, 1981b), 318∼330쪽. 정치적 세력집단도 부계의 친족집단을 단위로 하는 것이 아니라 유력자와의 개인적 관계에 따라 결성되고 있었다. 3촌이나 4촌간은 물론이고 형제간에도 세력집단을 달리할 정도였다.0250)盧明鎬, 앞의 글, 116쪽. 그러므로 이러한 친족구조 속에서 세족이 부계 중심의 강력한 문벌을 형성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며,0251)崔在錫은 친족용어, 족보, 양자, 항렬사용 등을 검토하여 고려시대에는 조선 후기에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부계 중심의 혈연집단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으로 이해하였다(崔在錫,<高麗時代의 親族組織>,≪歷史學報≫94·95, 1982, 227쪽). 그만큼 상대적으로 폐쇄성이나 배타성이 덜하였을 것이다.

 관료의 지속적인 배출은 세족층이 문벌로서의 지위를 유지해나가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특정 시기에 권문의 지위에 있었다 하더라도 관료 배출이 지속되지 않는 한, 그 권력은 당대에 그치고 가문이 쇠락해 간 반면, 비록 권력층으로 부상하지는 못했지만 지속적으로 관료를 배출한 경우는 세족으로 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지속적인 관료배출과 정치기구에의 참여는 세족으로서의 지위를 유지하는 데 결정적 요소가 되고 있었다. 세족층은 권문이 권력을 독점하는 가운데에서도 꾸준히 관료를 배출하여 사회적 지위를 유지하고 있었으며, 그들의 문벌적 지위에만 의존하지 않고 도평의사사 등 정치기구를 매개로 정치활동을 전개하면서 정치적 지위를 확보하고 있었다. 이러한 점에서 고려 후기 세족층은 관료적 성격을 갖는 지배세력이라고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0252)閔賢九, 앞의 글(1977), 58∼59쪽.

 세족층은 고려시대 대표적인 入仕路였던 음서와 과거에 의존하여 관료를 배출하고 있었다. 음서에 의해 관료가 되는 것은 과거에 합격한 경우보다 文翰職을 갖지 못하는 등 제약이 따랐다. 그러나 음서는 과거에 비해 일찍 관료로 진출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등, 세족층이 관료배출을 지속시키면서 문벌로서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는 중요한 제도적 장치가 되고 있었다.0253)金龍善,≪高麗 蔭敍制度硏究≫(韓國硏究院, 1987), 141∼148쪽.
朴龍雲,<高麗時代의 蔭敍制와 科擧制에 대한 比較 檢討>(≪高麗時代 蔭敍制와 科擧制硏究≫, 一志社, 1990), 660쪽.
과거로 진출하는 것은 座主·門生 사이에 집단의식을 바탕으로 굳건한 유대관계를 맺을 수 있는 장점이 있었고, 국가도 이를 장려하는 등 사회의식상 음서로만 진출한 관료보다 여러 가지로 유리하였다.0254)許興植,<高麗의 科擧와 門蔭制度와의 비교>(≪韓國史硏究≫27, 1979 ; 앞의 책 , 1981a, 229∼235쪽). 더욱이 문한직으로 진출할 수 있는 데다가 승진에서 음서출신보다는 우월한 지위를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에, 개인과 가문의 영광을 위하여 가능한 한 과거에 합격하기를 원하였다.0255)朴龍雲, 앞의 책(1990), 660쪽. 許冠이 과거 응시를 고집했던 것처럼0256)≪高麗史≫권 105, 列傳 18, 許珙 附 冠. 세족출신들은 家業의 준수라는 의무를 다하기 위하여 과거에 합격하는 것을 최고의 목표로 삼기도 하였다. 그래서 일단 음서로 진출하고나서도 상당수의 관료는 과거에 응시하여 합격하였다.0257)金龍善은 확인되는 음서출신자 가운데 41.1%가 과거에 합격하였고, 불합격자까지 감안하면 음서출신자의 과거에 대한 관심은 매우 높았을 것으로 이해하였다(金龍善, 앞의 책, 181쪽).

 과거에 응시하거나 합격한 후 관료로 진출하는 데에는 상당한 경제적 기반과 후원이 필요하였다. 세족 출신은 이러한 점에서 유리한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세족층은 상당수의 과거출신 관료를 배출할 수 있었다. 고려 후기 세족가문 가운데에 과거출신 관료를 배출하지 못한 가문은 몇 예에 지나지 않으며, 대부분의 세족은 가문에 따라 그 규모를 달리하고 있기는 하나, 2∼3명 이상의 과거출신 관료를 배출하였다.0258)金光哲, 앞의 책(1991), 125쪽<表-8>世族家門의 科擧官人 비율표. 관료를 많이 배출했던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 파평 윤씨·공암 허씨·황려 민씨·안동 권씨·청주 한씨·청주 정씨·청주 곽씨·경주 이씨·순흥 안씨·단양 우씨·성주 이씨 등 11개 가문에서는 50% 이상의 과거출신 관료를 배출하고 있었다. 과거출신 관료의 배출 정도가 세족의 가세를 좌우할 정도였다. 그러므로 세족층은 음서에만 의존하지 않고 과거를 중요한 入仕路로 활용하고 있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따라서 과거에 합격하는 것이 그들의 문학적·유교적 소양을 가늠하는 것이라면, 세족출신도 예외일 수는 없을 것이다.

 고려 후기 세족은 가문배경이나 경제적 기반에 있어 동질성을 갖는 지배세력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지배세력으로서의 동질성이 세족가문끼리 굳건한 연대나 공통의 정치적 지향을 갖게 했던 것은 아니다. 세족층은 권력기구에 참여하여 권문층이 된 가문이 있는가 하면, 부원세력으로서 고려의 국익을 손상시키는 행위를 일삼았던 가문도 있고, 본질적으로는 사회모순의 주체일 수밖에 없으면서도 권력독점 현상 등 파행적·기형적인 정치행태에 비판적이거나 현실의 민생문제를 개선하려 한 개혁세력도 있었다.

 세족층의 이러한 내적 분화는 동일한 가계 안에서도 나타나고 있었다. 예컨대 황려 민씨의 경우 閔渙처럼 충혜왕의 폐행이 되어 전횡을 일삼았던 인물이 있는가 하면,0259)≪高麗史≫권 124, 列傳 37, 嬖幸 2, 閔渙. 閔漬·閔宗儒·閔祥正·閔霽 등과 같이 개혁정치에도 참여하고 고려의 자주성을 지키기 위해 활동했던 인물들이 있었다.0260)≪高麗史≫권 107, 列傳 20, 閔漬 및 권 108, 列傳 21, 閔宗儒. 안동 권씨의 경우 權載(王煦)와 權謙은 형제간이면서도 그 정치적 지향을 달리하고 있었다. 권재는 충숙왕대에 심왕파의 책동을 저지했고 충목왕대에도 정치도감의 판사로 활동하면서 개혁정치를 주도한 반면,0261)≪高麗史≫권 110, 列傳 23, 王煦. 권겸은 부원세력으로 지목되어 공민왕대에 숙청당한 바 있기 때문이다.0262)≪高麗史≫권 131, 列傳 44, 叛逆 5, 權謙. 세족층의 이러한 내적 분화는 그 자체로는 세족층의 결속을 약화시킬 수 있는 것이지만, 가문 단위로 보면 오히려 이것이 정치적 위기를 타개하고 가세를 유지·신장시키는 데 도움이 되었다. 즉 세족가문내 특정인물이 권력 교체기에 정치적으로 타격을 입어 몰락한다 하더라도, 이를 보완해줄 수 있는 세력이 넓게 자리잡고 있음으로 해서 그 가문 자체는 몰락하지 않고 가세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만큼 세족층은 문벌로서의 지위를 지속시킬 수 있는 정치적·사회적 기반이 튼튼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세족층은 당시 권력구조 내에서의 위치나 대원관계, 그리고 현실인식의 차이에 따라 내적 분화를 보이고 있었다. 이것이 고려 후기 세족층의 특징이기도 하다. 이러한 내적 분화는 가문이나 개인에 따라 기득권을 향유하는 방식을 달리한 결과로서, 원간섭기 개혁정치는 세족층의 내적 분화를 촉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대체로 과거출신 관료가 많은 세족가문일수록 개혁세력으로 활동한 인물을 많이 배출하고 있음을 감안할 때,0263)세족의 개혁세력을 배출한 내용과 그 성격에 대해서는 金光哲,<高麗後期 改革勢力과 世族>(앞의 책, 1991) 참조. 세족층은 가문내 인물들의 학문적 성향과 현실인식의 차이에 따라 개혁정치의 참여 여부를 둘러싸고 분화하고 있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세족층은 우왕대 이인임정권의 등장과 위화도회군 후 이성계집단의 권력장악 과정에서 다시 한 번 내적 분화를 보이고 있었다. 우왕대에는 이인임을 중심으로 족당세력이 형성되어 이들이 권력을 독점하게 됨으로써0264)이 시기 족당세력의 구성 내용과 그 성격에 대해서는 盧明鎬,<高麗後期의 族黨勢力>(≪李載龒博士還曆紀念 韓國史學論叢≫, 한울, 1990) 참조. 세족층 가운데는 여기에 참여하여 권력을 향유한 부류가 있는가 하면, 광주 김씨 김속명의 경우와 같이 이에 비판적인 입장을 갖고 있던 세족층이 상당수 있었다. 또한 우왕 즉위 초 北元 사신의 영접문제를 둘러싸고 이인임 세력과 신진사대부가 권력투쟁을 전개하고 있을 때 金九容·尹虎 등 세족층의 일부는 신진사대부와 노선을 함께하여 숙청당하기도 했다.0265)高惠玲, 앞의 글(1981), 25쪽. 이렇게 볼 때 우왕대 세족층은 이인임정권에 대한 정치적 대응방식과 외교노선에 따라 내적으로 분화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위화도회군 이후 세족층은 사전개혁과 왕조 교체과정에서 그 대응방식을 둘러싸고 분화하고 있었다. 사전개혁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이에 반대했던 세족출신은 정치적으로 배제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더욱이 이성계 집단이 권력기반을 강화하고, 왕조 교체를 주도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金佇의 獄이나 尹彛·李初사건, 정몽주 살해사건과 관련하여0266)이 사건들의 전개과정과 그 성격에 대해서는 다음의 연구가 있다.
李相佰,<李成桂와 高麗末期의 政爭>(≪李朝建國의 硏究≫, 乙酉文化社, 1949).
鄭在勳,<朝鮮王朝 建國過程에서의 舊勢力>(≪考古歷史學志≫2, 1986).
趙啓纘,<朝鮮建國과 尹彛·李初事件>(≪李丙燾博士九旬紀念 韓國史學論叢≫, 知識産業社, 1987).
李亨雨,<鄭夢周의 政治活動에 대한 一考察>(≪史學硏究≫41, 1990).
상당수의 세족출신 인물들이 숙청되기도 하였다.

 그런가 하면 세족출신 가운데 일부는 사전개혁을 추진하거나 왕조 교체에 협조하고 조선건국을 주도하면서 그 지위를 지속적으로 유지하기도 하였다. 조선건국 후 개국공신이 된 趙浚·趙狷·趙璞·金士衡·李濟·李稷·鄭摠·鄭擢·尹虎·李懃·韓尙敬·閔汝翼 등은0267)韓永愚,<朝鮮 開國功臣의 出身에 대한 연구>(≪朝鮮前期社會經濟硏究≫, 乙酉文化社, 1983). 사전개혁을 주도했거나 왕조 교체에 협조했던 대표적인 세족출신 인물들이다. 물론 이들 세족출신 인물들이 모두 현실 개혁적 입장을 갖고 있어서 조선건국에 참여한 것은 아니었다. 이들 가운데는 이성계 가문과의 혼인관계를 통해 결합되고 있던 부류들도 상당수 있었기 때문이다.0268)朴天植, 앞의 글(1985), 63∼65쪽.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세족출신이 조선건국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는 신진사대부 가운데 급진적 개혁파가 조선건국을 주도하기는 했지만, 세족출신의 일정한 협조 아래 성공할 수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0269)李泰鎭은 신흥세력이라 하더라도 사대부들에게는 신분적 지위 향상의 욕구가 있었음을 지적하고, 신진사대부는 세족출신이 그들의 정치적 입장에 동조하는 한, 정치적 신분적으로 자신들에게 이익이 될 그들과의 제휴를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고 하였다(李泰鎭,<15世紀 後半期의「鉅族」과 名族意識>,≪韓國史論≫3, 서울大, 1976, 302∼303쪽). 현실정치의 상황변화에 상대적으로 더 민감할 수밖에 없었던 세족층으로서는 자기 생존을 위해서라도 오히려 적극적으로 조선건국에 참여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세족의 상당수는 왕조 교체라는 정치변동이 진행되는 가운데서도 가세를 유지하여 계속 지배세력으로 남을 수 있었다.0270)조선건국 후에도 문벌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던 고려 후기 세족가문에 대해서는 李泰鎭, 위의 글, 237∼253쪽 및 李樹健, 앞의 책(1984), 343∼352쪽 참조.

 조선건국 후에 세족의 상당수가 그 가세를 유지할 수 있었다 하여, 고려 후기의 세족과 조선 전기의 문벌가문 사이에 전혀 차별성이 없었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이미 관료적 성격을 지니고 있던 고려 후기 세족은 조선건국 과정에서 그 성격을 더욱 뚜렷이 하였고, 신진사대부와 제휴하는 과정에서 정치적 대응방식이나 현실인식을 새롭게 할 수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지만 고려 후기 세족가문의 상당수가 조선건국 후에도 지속적으로 가세를 유지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조선으로의 이행과정에서 지배세력의 교체를 지나치게 강조할 수 없는 중요한 요소라 하겠다.

<金光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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