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9권 고려 후기의 정치와 경제
  • Ⅰ. 정치체제와 정치세력의 변화
  • 2. 권문세족과 신진사대부
  • 2) 신진사대부의 대두와 그 성격
  • (1) 신진사대부의 대두 배경

(1) 신진사대부의 대두 배경

 무신란 이후 고려의 지배세력은 이전과는 다른 양상을 보여준다. 무신들이 정권을 잡게 되면서 몰락의 길을 걷게 된 前期의 문벌귀족들 중 일부는 그 위세를 잃고 무인세력 밑에서 가문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고, 한편으로는 한미한 가문출신의 신진 관료가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무신정권이 확립되는 최씨집권기에는 무신에 대한 견제와 아울러 문신을 다시 등용하기 시작하여 崔瑀(怡)·崔沆 집권기에는 문신들의 관직점유율이 증가하였다.0271)金毅圭,<최씨정권과 문신>(≪한국사≫18, 국사편찬위원회, 1993), 228∼242쪽 참조. 그러나 정치의 실권은 무신이 장악하였으므로 문신은 정치적 지위에서는 무신보다 열세일 수밖에 없었다. 무신정권은 자기의 절대적 지배하에서 文·吏들을 출신여하를 불문하고 오직 그 능력을 기준으로 서용하려 하였다. 이에 따라 이 시기에는 고려 전기의 文辭중심의 문신보다는 행정실무에도 밝은 새로운 관료가 요구되었다. 흔히 말하는 ‘能文能吏’, 즉 文에도 능하고 吏에도 능한 관리가 요구되었던 것이다.0272)무신집권자인 崔瑀가 文·吏를 한데 묶어 오직 그 능력을 기준으로 敍用의 서열을 삼았다는 사실이 이를 말해준다(≪高麗史節要≫권 18, 원종 원년 7월 계유).

 고려의 官人體系는 文·武 兩班외에 ‘吏’라고 불리는 官僚群이 있어서 국가행정의 운영에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고려시대에 관료(문반)가 될 수 있는 길은 科擧와 蔭敍 외에 吏職으로의 진출이 있었고 이외에 특수한 경우로써 遺逸 등의 여러 경로가 있었다.0273)≪高麗史≫권 73, 志 27, 選擧 1, 서문. 음서는 문벌자제에게 광범하게 적용되는 일반적인 경로였고 과거는 귀족만이 아니고 良人이나 지방의 향리층도 중앙에 진출할수 있는 신분상승의 통로였으나 실제로 양인이나 南班출신이 과거에 응시하는 데는 여러 제약이 따랐다.0274)≪高麗史≫권 73, 志 27, 選擧 1, 科目 1 정종 12년 4월 判. 무반은 음서로 관직을 받을 때 무반직으로 시작하는 경우와 개인의 능력과 적성에 따라 군인의 길을 걸어 軍功을 쌓음으로써 무반으로 승진하는 것이 가능하였으나 고려말 이전까지 무반을 위한 科擧는 시행되지 않았다.

 한편 吏는 행정말단의 실무자로서 文書·錢穀 등의 실무를 통하여 국가 행정 사무의 밑받침이 되는 직책을 말하는 것으로 ‘刀筆之任’0275)李 穀,<賀崔寺丞登第詩序>(≪東文選≫권 85, 序).이라고도 하였다. 이런 리는 胥吏·吏屬·掾屬 등으로 불리기도 하면서 과거를 거치지 않은 채 官人으로 등용되어 문·무출신자와 함께 국정에 참여하여 양반체제속에서 하나의 계열을 이루고 있었으나 經世濟民의 王道政治를 추구하는 官人層의 정치소양과는 성질을 달리하는 것이다.

 吏는 크게 門蔭출신자와 吏族출신자로 대별할 수 있다. 즉 문무 양반의 자제가 문음으로 처음 仕路에 나갈 때 主事同正이나 錄事 등과 같은 吏職에서 刀筆을 임무로 삼게된 자와 리의 씨족, 즉 吏族으로서 吏職을 세습으로 한 자이다. 또 지방향리의 자제로서 其人役을 치른 후에 이직에 나아간 자들도 이족의 범주에 포함될 것이다.0276)李佑成,<高麗朝의 ‘吏’에 대하여>(≪歷史學報≫23, 1964 ;≪韓國史論文選集≫高麗篇, 一潮閣, 1964, 49∼53쪽).

 그러면 文과 吏의 범주는 무엇일까. 먼저 ‘能文’이란 書와 表를 잘 짓는 것, 즉 왕의 교서나 외교문서를 작성하는 등 문장에 능한 것을 의미한다.0277)趙仁成,<崔瑀政權下의 文翰官-“能文” “能吏”의 人事基準을 중심으로->(≪東亞硏究≫6, 西江大, 1985), 364쪽. 그런데 서나 표를 잘 짓기 위해서는 중국의 역사와 시문에 대한 지식이 선행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며, 그 바탕이 되는 경학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經術도 포함된다고 하겠다.0278)<金鍼墓誌>(≪朝鮮金石總覽≫上, 朝鮮總督府, 1919), 357쪽. 나아가서 현실 사회·경제·정치·역사 등에 해박한 지식이 요구되며 이러한 지식의 바탕위에서 현실정치를 수행해 가는 능력, 곧 경륜이 쌓이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고려 후기의 한 기록에는 “侍從·獻替의 官과 選擧·銓注의 職을 모두 문관이 주관하고 吏는 감히 바라지도 못한다”고 하였다.0279)李 穀,<賀崔寺丞登第詩序>(≪東文選≫권 85, 序). 시종이란 임금을 가까이 모시는 직책, 즉 近侍의 직을 의미하는 것이며, 헌체는 임금을 보좌하여 선을 권하고 악을 범하지 못하게 하는 역할이므로 臺諫을 의미한다. 또 선거는 관리를 선발하는 일이며 전주는 인물을 평가하여 등용하는 인사행정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근시·대간·인재 등용의 직은 임금을 보좌하여 정치를 담당하는 가장 핵심적인 역할로서 吏는 여기에 참여할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文官은 書·表의 작성과 같은 일을 맡고 시종·헌체·전주 등의 중요 업무를 맡았다고 할 수 있다.

 반면에 吏는 일반적으로 서리의 말단행정을 일컫는 것이지만 문과출신자가 지방관으로 보임되어 처리하는 행정실무도 吏務라고 표현된다. 고려시대에는 과거합격자가 지방관으로서의 실무를 거쳐서 중앙으로 발탁되어 갔고 그들이 지방관으로 재직하는 동안의 근태·고과 등은 중앙에의 발탁을 좌우하는 근거가 되었다. 그러므로 리의 범주는 단순한 서리·향리와 같은 말단 행정사무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관리의 행정실무 전반을 포함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0280)趙仁成, 앞의 글, 366∼368쪽.

 이렇게 볼 때 문관도 吏務의 경력을 쌓아야 하고 그 바탕위에서 政務를 담당해 갈 수 있으므로 궁극적으로 문과 리는 대립적인 것이 아니고 相補的인 관계라 하겠다. 최우집권기에 오로지 문의 능력만을 중시하는 대신에 ‘能吏’를 겸비하는 인재를 최우선으로 서용하려 하였다는 사실은 이와 같이 문장과 경술 외에 행정능력에 대한 평가를 강화한 것을 말해준다. ‘능문능리의 신관료’는 이제 고려 후기 관인의 새로운 모습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요구에 부응하여 고려 후기에 등장하는 관료는 문음출신의 인물보다는 과거합격자나 吏族, 특히 지방향리층에서 많이 나오게 되었다.0281)李佑成, 앞의 책, 69쪽.

 무신란 이후 문인 지식층의 동향은 다양하게 나타나는데 이들을 크게 보면, 무신정권과의 타협을 거부하고 현 정권 밖에서 자기의 주체성을 지키면서 淸高한 일생을 산 사람들과 무신정권에 참여하여 현실에서의 榮達을 구한 사람들로 대별된다.0282)무신집권하에서 문인지식층의 동향은 네 갈래로 대별된다. 첫째는 무신란 초에 儒冠을 벗어던진 후 속세를 떠나 끝내 일생을 마친 神駿·悟生같은 사람, 둘째는 亂初에 피신하여 지방에서 유학을 닦으면서 處士 생활로 일생을 보낸 權敦禮같은 사람, 셋째 처음에는 피신하였다가 세상이 약간 달라진 후에 개경에 돌아와 관직을 구했으나 여의치 않아 불우하게 일생을 보낸 林椿같은 사람, 마지막으로 亂 이후 얼마 안되어 發身했거나 최씨정권 이후에 등용되어 최씨문객이 된 사람으로 李仁老·李奎報 등이 있다(李佑成,<고려 무신정권하의 문인 지식층의 동향>,≪韓國의 歷史像≫, 創作과批評社, 1977, 182∼192쪽). 이들 중 지방에서 유학을 닦으면서 일생을 마친 사람들은 젊은 자제들을 모아 교육에 전념하게 되는데 이 때 지방의 수령이나 향리층의 자제들에게 교육의 기회가 확대되었을 것임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고려 후기에 중앙에서 관직을 그만두고 지방으로 내려간 사람들의 경우 이들은 대부분 그 곳에 경제적 기반을 보유하고 있어서 여유있는 생활을 할 수 있었으며 관직에서 물러났다 하더라도 그들의 사회적 지위에는 커다란 영향없이 지방사회에서 하나의 세력으로 존재할 수 있었다.0283)朴恩卿,<高麗後期 地方品官勢力에 관한 硏究>(≪韓國史硏究≫44, 1988), 53∼54쪽. 이러한 지방품관세력은 지식계급으로서 자제의 교육을 통해서 지방사회와의 유대를 더욱 공고히하게 되었을 것이다. 이들에게 교육받은 지방자제들이 과거에 급제하여 중앙에 진출하게 됨으로써 이른바 한미한 新進은 무신집권시대 집권자인 최씨의 문객이 되어 봉사하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동요와 불안이 가시지 않는 현실의 정치상황속에서 신변의 보호를 받으면서 官人으로 성장하여 갈 수 있게 되었다.

 그러면 무신정권하에서 新進官人으로 성장하는 부류 중 다수를 차지하였던 지방의 향리계층이 중앙으로 진출할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이었을까. 이를 이해하기 위하여 고려 후기의 괄목할 만한 농업기술과 생산력의 발전에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 같다. 고려 후기에 休閑法의 극복과 水利施設의 확충, 水田의 개발 등은 지방의 중소지주로서의 향리층의 경제적 기반을 확대시키는 계기가 되었다.0284)고려 후기 농업생산력의 발달에 관한 연구는 다음과 같다.
李泰鎭,<14·5세기 農業技術의 발달과 新興士族>(≪東洋學≫9, 檀國大, 1979 ;≪韓國社會史硏究≫, 지식산업사, 1986, 95∼97쪽).
魏恩淑,<12세기 농업기술의 발전>(≪釜大史學≫12, 1988).
―――,<고려시대 농업기술과 생산력 연구>(≪國史館論叢≫17, 國史編纂委員會, 1990).
李平來,<고려후기 수리시설의 확충과 수전개발>(≪역사와 현실≫5, 한국역사연구회, 1991).
이들은 14세기의 전시과체제가 붕괴된 현실에서 농장의 폐해를 인식하는 한편 地主·佃戶관계를 통해서 자신들의 경제력을 더욱 극대화시키고자 적극적으로 농업생산력을 향상시키기 위한 조치를 취하기도 하였다.0285)崔 瀣,≪拙藁千百≫1, 送安梁州序.

 농법에 있어서 水田에서는 고려 전기의 휴한법(歲易法)의 단계에서 후기에는 연작법이 확대되었고0286)고려시대 경지 이용방식에 대하여는 첫째 고려 전기에는 山田은 歲易農法단계, 平田은 연작단계로 보는 설, 둘째 고려 전기에는 휴한농법이 일반이며 고려 후기 내지 선초에 가서 常耕化가 보편화된다고 보는 설, 셋째 고려 전 시기에 걸쳐 연작법이 일반적이었지만 전기에는 토지 생산성이 낮고 심히 불안정하여 진전화되기 쉬운 단계로 보는 설 등이 제기되어 있다(李泰鎭,<畦田考>,≪韓國學報≫10, 1978 ; 앞 의 책). 旱田(밭농사)의 경우도 이미 고려 전기부터 ‘1년 1작’의 연작법이 행해진 것으로 보기도 한다. 고려 후기에는 산전(한전) 개발은 어느 정도 한계에 도달했던 것으로 보이며 따라서 농경지 개발은 연해안 저습지 개발로 이어진다.0287)魏恩淑, 앞의 글, 17쪽. 14세기에는 휴한법이 극복되어 평지가 한전으로 개발되었는데 이로써 평지가 많은 下三道가 한전농업의 중심이 되었다

 이 시기에는 농경지 개발뿐 아니라 농업기술상으로도 이앙법이 행해지고 시비법의 발전도 꾀하여 졌다. 수리사업에 있어서도 제언의 수축이 감무·현령의 책임으로 인식되어 소규모화된 수리시설이 많이 축조되었다. 수리사업은 국가의 권농책의 일환으로 수령들에 의해 주도되기도 하지만 재력을 가진 지배층이나 소농민들에 의해서도 사적으로 개간되어 갔다.0288)魏恩淑, 위의 글, 18쪽. 고려 전기에는 과거합격자의 수가 근기지방이 다수를 차지하였으나 후에는 하삼도출신자의 합격률이 급격히 증대되고 있는데, 이는 연해지 및 저지개간의 성행과 함께 농업기술의 발전에 따라 하삼도지역 지방세력의 경제력의 성장과도 연계시켜 생각할 수 있다. 더욱이 특기할 점은 13세기 말엽 이후 신진관료의 진출은 고려 전기와는 달리 삼남지방에서 더욱 두드러져 전기의 문벌귀족과는 구분된다는 점이다.0289)李泰鎭,<高麗末·朝鮮初의 社會變化>(≪震檀學報≫55, 1983), 9∼10쪽.

 한편 12세기에는 송에서 신유학으로서의 性理學이 일어나 남송의 朱熹에 의해 성리학이 집대성되었다. 고려에서도 12세기에는 이미 四書에 관심을 집중시키면서 性命·義理의 학문 경향이 일어나고 있었다. 원과의 관계가 긴밀해진 이후로 양국의 교류가 더욱 활발해지면서 주자성리학은 빠른 속도로 도입되었다. 물론 원과의 관계 이전에도 남송을 통한 주자학의 도입 가능성은 충분히 상정할 수 있겠으나0290)李齊賢,≪櫟翁稗說≫前集 2.
그러나 尹瑢均은 이 자료의 신빙성을 부정하였다. 그는 “남송의 주희가≪語·孟集注≫를 완성한 것은 1177년이고 이를 간행한 것이 1211년이니 주자학이 송에서 전래되었다면 적어도 명종대 이후이나 이 때 고려는 국가가 다난하여 승려 문신이 감히 宋에 入朝할 틈이 없고 송에서는 朱子가 배척되었으며 金과의 전쟁에서 大敗한 때이므로 송의 朱子學이 전래된 것을 믿을 수 없다”고 하였다(尹瑢均,<朱子學の傳來とその影響に就いて>,≪尹文學士遺稿≫, 朝鮮印刷株式會社, 1933, 24쪽).
본격적인 수용은 13세기말 安珦·白頤正에 의해서 시작되었다고 하겠다. 안향·백이정 이후 고려의 사대부들은 성리학에 관심을 갖고 이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는데 특히 원에 왕래하며 선진문물을 수입하는 사대부들이 주축을 이루었다. 성리학 수용기에 활동한 유신 가운데 李穀·白文寶·安軸 등은 지방에서 과거를 통해 중앙에 처음으로 진출한 신진들이다.0291)高惠玲,≪14세기 高麗 士大夫의 性理學 受容과 稼亭 李穀≫(梨花女大 博士學位論文, 1992), 82∼102쪽 참조.

 성리학의 보급과 함께 14세기에는 科擧의 과목에서 四書가 더욱 중시되었다.0292)≪高麗史≫권 73, 志 27, 選擧 1, 科目 1 충숙왕 7년. 그리하여 詩·賦보다는 策問을 시험하여 성리학을 중심으로 한 과거를 운용하였다. 이에 儒者들은 주자학을 주축으로 하게 되었고 과거를 통한 신진관인의 등용은 座主·門生關係를 더욱 돈독히하여 공고한 학벌을 형성하게 되었다.0293)李楠福,<麗末鮮初의 座主·門生關係에 관한 一考察>(≪藍史鄭在覺博士古稀紀念東洋學論叢≫, 高麗苑, 1984) 참조.

 이러한 경제적 조건과 교육의 기회는 지방출신의 신진관인이 중앙으로 진출하는 데 큰 힘이 되었다. 즉 지방의 향리층은 신진관인으로 중앙에 진출하여 14세기 중엽에는 정치적·사회적 기반을 확대시키고 지속적으로 성장·발전하여 새로운 정권담당자로서의 사대부계급을 형성하는 태반이 되었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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