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9권 고려 후기의 정치와 경제
  • Ⅰ. 정치체제와 정치세력의 변화
  • 2. 권문세족과 신진사대부
  • 2) 신진사대부의 대두와 그 성격
  • (3) 사대부의 성격과 시기구분

(3) 사대부의 성격과 시기구분

 士大夫를 고려시대의 지배세력을 칭하는 역사적 성격을 가진 용어로 처음 사용한 이래 이 용어는 더욱 발전·심화되어 충선왕대 개혁에 참여한 신진관료를 新興士大夫로 정의하였다.0332)金潤坤, 앞의 글(1974). 이와 함께 新進士類나 新興士族의 개념도 등장하였고 또 新興儒臣의 개념도 사용하고 있어서 용어에 대한 정리가 필요하다. 한편 사대부는 사족출신의 관료를 의미하는 것으로써 ‘하자가 없는 관료’라는 의미도 갖추고 있다고 하지만 ‘하자가 없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즉 유교적 소양, 공명정대한 태도, 청렴도 등을 기준으로 하는 말이라고 본다면 이는 기존의 사대부의 개념과 그리 거리가 먼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여러 용어가 사용되고 있는 가운데 여기서는 현재 학계에서 가장 많이 통용되고 있는 ‘사대부’를 사용하기로 한다.

 다음으로 사대부의 성격에 관해 살펴보도록 하자.

 첫째, 고려 후기의 새로운 지식관료군을 사대부라 하였을 때 사대부를 배출하는 주 공급원은 기존의 관료, 즉 사대부들의 재생산에 의해 형성되는 사족과 서리 외에 지방의 향리층이 된다. 고려 후기에 지방 향리층의 중앙진출이 두드러지는 현상을 볼 수 있는데 이들이 신진 사대부의 형성에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음은 부정할 수 없다.

 둘째, 사대부는 과거출신의 관료가 다수를 이루고 있었다. 사대부라는 말 자체가 科擧官僚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과거관료는 그들을 儒臣 또는 儒士, 儒者라고 불렀다.0333)李齊賢,≪益齋亂藁≫7, 春軒先生崔良敬公墓誌銘. 사대부라는 어휘는 ‘士’와 ‘大夫’의 합성어이지만 이는 주로 문신 중심의 용어였다. 따라서 과거출신의 관료가 주류를 이루게 되며 그 가운데는 음서출신자나 또는 음서출신자이면서 과거를 거친자도 상당수 있다. 이들은 정통적인 방법(科擧나 蔭叙)에 의하여 관료가 된 사람들이었기에 고위관직으로 오르는 데 하자가 없는 사람들이었고, 비정통적 방법으로 관직에 오른 사람들, 특히 국왕의 측근세력으로 성장하여 고위직을 차지한 사람들, 非儒敎的 성향의 사람들이 전횡과 불법을 자행하는 것에 대해 비난하였다. 고려시기에는 무반이 되는 길은 음서 외에는 자신의 능력, 즉 武功에 의한 것이었기에 그 출신에 賤系가 많았다. 유교적 통치이념을 기반으로 한 고려 문반귀족 중심의 체제는 정치담당자에게 기본적 교양으로서 유학적 소양을 요구하였다. 그러므로 사대부가 반드시 과거관료라고 할 수는 없으나 과거출신이 다수를 점하고 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무신집권 이후 크게 흔들리기는 하였지만 정치의 주축을 이루는 것은 문신이어서 재추 이상은 문신이 담당하게 되어 있었다. 후기에 재추의 숫자가 많아지고 무신도 여기에 참여하는 자가 있게 되었으니 이 과정에서 문신관료를 지칭하던 사대부란 용어가 문무를 통칭하게 되는 것은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이다. 또 고려 후기에는 무반의 지위가 전기보다는 향상되고 한 가문 안에서도 문·무의 혼재현상이 나타났으므로 사대부, 또는 사족 가문내에 무신이 포함되어 있을 수 있고 조선시대에 오면 이 경향은 더욱 일반화되어 사대부란 말은 자연스럽게 문무양반, 즉 양반 신분을 의미하게 되었다고 하겠다.

 셋째, 사대부는 유교적 소양을 갖추고 있었다. 최씨집권기의 ‘능문능리’의 관인은 시나 문장뿐 아니라 유학의 학문적 능력을 바탕으로 행정실무의 능력을 겸비하는 인물을 요구하는 시대였다. 원간섭기에 도입되는 새로운 학문으로서의 성리학은 사대부들의 학문적 관심의 대상이 되었고 14세기 이후에는 科擧에서 朱子의 經典註釋을 요구하게 되고 성리학이 성균관에서의 講學의 중심이 되면서 사대부의 전형적인 학문이 되었다.

 넷째, 사회경제적 기반에 있어서는 지방의 향촌세력, 품관세력 출신들이 신진관인으로의 진출이 14세기 이후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었고 이들의 사회경제적 기반이 중소지주적인 위치에 있다는 점이다. 이 말은 상당히 애매한 상대적인 용어이므로 일괄적으로 말하기는 어렵지만 고려 후기 권세가가 토지를 불법적으로 탈점하여 ‘山川爲標’하는 현실하에서 지방의 지주는 중소지주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그들이 향리 출신이었을 경우 대체로 중소지주 출신으로 보아도 크게 어긋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中 또는 小의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 밝혀져 있지 않은 상황에서, 예컨대 別墅·別業을 가졌다는 것이 어떤 수준인지 알 수 없고 민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들은 어디까지나 지주임에 틀림없다. 또 관로에서 승진할수록 경제기반도 확대되었을 것이었다. 그러므로 父 또는 祖父가 상당한 고위 관직에 올랐을 경우 경제기반도 그에 따라 상승하였을 것은 틀림없겠지만 그 규모를 구체적으로 밝히기는 쉽지 않다. 다만 사전개혁론에서 급진파가 중소지주적 입장을 대변하였고 온건파는 대개 巨室子弟였다고 하여 대지주의 입장에 있었음을 볼 때 그 추이를 가늠할 수가 있다.0334)≪高麗史≫권 118, 列傳 31, 趙浚.

 고려 후기의 새로운 관인층을 지칭하는 사대부는 시대적 여건에 따라 그 성격에 있어서 차이를 갖게 된다. 각 시대에 있어서 일정한 정치적 역할을 한 이들은 전체적으로 볼 때 공통되는 성격을 갖고 있으나, 세부적으로는 시기에 따라서 조금식 차별성을 갖는다. 그런 의미에서 고려 후기 사대부는 3 시기로 구분하여 논해질 수가 있다.

 제1기의 사대부는 먼저 무신집권하에서 ‘能文能吏’의 관리로 등장하여 정치에 참여하였던 일군의 文士로서 사대부의 祖型으로 일컬을 수 있다. 최씨집권기에는 어느 정도 정치적 안정이 이루어지면서 최우 집권기에 書房의 설치와 이를 통한 文士의 등용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던 것이다.0335)≪高麗史≫권 129, 列傳 42, 叛逆 3, 崔忠獻 附 怡. 물론 무신집권이라는 한계적 상황속에서 이들의 역할도 제한적일 수밖에 없으나 원만한 통치를 수행하기 위하여는 문신의 존재는 필수적인 것이었다.

 이들은 중앙의 吏 출신이나 지방의 향리출신의 新進官人이 많았고, 경제적으로는 전기의 문벌귀족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농장의 규모가 작은 중소지주적 위치에 처해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또 이들의 出仕路는 蔭叙로 진출하는 경우보다는 과거를 통해 진출하여 역사의 주인공이 된 사람들이 많다는 것도 하나의 특징이다. 이 시기 문사들의 사상동향은 현실타협적 측면이 강하고 체제 비판이나 개혁의 추구라는 측면은 찾아보기 어렵다. 과거출신의 문사들은 집권층의 부패와 민을 핍박하는 정치 현실에 대해 儒者로서의 갈등을 느끼기도 하였으나, 자신의 입장이나 이해관계로 이를 외면할 뿐이었다. 반면에 몽고침입에 대한 항쟁의 현실속에서 민족의 자존을 희구하는 민족의식의 표현으로 역사의식이 크게 고양되기도 하였다.0336)李佑成,<高麗 中期의 民族敍事詩 -東明王篇과 帝王韻紀의 硏究->(≪韓國의 歷
史認識(上)≫, 創作과批評社, 1976), 148∼165쪽.
河炫綱,<高麗時代의 歷史繼承意識>(≪梨花史學硏究≫8, 1976), 203∼206쪽.
―――,<李承休의 史學思想硏究>(≪東方學志≫69, 1991), 189∼195쪽.
卓奉心,<東明王篇에 나타난 李奎報의 歷史意識>(≪韓國史硏究≫44, 1984), 102∼104쪽.
劉璟娥,<李承休의 생애와 歷史意識>(≪高麗史의 諸問題≫, 三英社, 1986), 556쪽.
이들은 대체로 新進士人, 新興官人 등으로 표현되어 왔다.

 이렇게 등장한 사대부는 2∼3세대를 지나면서 지속적으로 중앙으로 진출하여 5품 이상의 높은 관직을 얻어 문벌화하는 추세를 보여준다. 따라서 이들을 13세기 말 원간섭기 이후 진출하는 신진사대부와 구분시켜 보기도 한다.

 다음 제2기의 사대부는 14세기 새로운 麗元關係하에서 官途에 진출한 과거 관료들로서 성리학의 수용에 앞장 선 사람들이다. 성리학은 安珦·白頤正 이후 權溥·李齊賢 등을 중심으로 적극 수용되었다. 이 시기에 지방 향리출신으로 과거를 통해서 현달한 사람들과 父 또는 祖父代 이후 중앙에 진출하여 현달한 가문출신자들을 중심으로 성리학이 적극 수용되었다. 이제현을 비롯하여 禹倬·安軸·李穀·白文寶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이들을 일반적으로 ‘新進士大夫’라 할 수 있다. 이 시기 고려는 원간섭으로 국왕 부자간의 갈등이 일어나고 관료의 내분 등으로 정치적 혼란이 거듭되던 시기였다. 유교적 정치이념에 입각하여 관료로 진출한 儒臣으로서는 혼란의 와중에서 그들의 정치이념을 구현하기에는 여건이 허락되지 않았다. 왕들은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하여 嬖幸 등 측근세력을 구성하여 파행적인 정치를 전개하였고 정상적 경로를 밟아 진출한 관료들은 왕의 측근세력에 의해 정치일선에서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국가적 위기나 왕실 존망의 위기에 직면했을 때 이들 문신 관료들은 자신을 돌보지 않고 충성을 다하였으며, 사회경제적 積弊에 대한 개혁안을 제시하는가 하면 개혁에 직접 참여하기도 하였다. 그들은 원에 왕래하며 국제적 학문 조류에 직접 접하여 성리학을 수용한 제1세대이기도 하다.

 史書에서 사대부라는 용어가 자주 나타나는 것도 14세기 이후이다.0337)高惠玲,<고려후기 士大夫의 개념과 성격>(≪擇窩許善道先生停年紀念 韓國史學論叢≫, 一潮閣, 1992), 217∼235쪽. 이들중에는 父나 祖父 때부터 관인으로 등장하여 가문적 배경을 가진 사람이나 후기 이래의 귀족가문 출신자도 많았다. 이 시기 사대부는 사상적으로는 유교적 도덕정치를 지향하면서도 정치적으로는 기존의 권문세족과의 혼인관계나 권세가와의 타협으로 권력지향적인 측면을 보여주고 있다.0338)稼亭 李穀은 知貢擧로서 掌試하였을 때 世家子弟를 많이 뽑았다 하여 憲司로부터 탄핵을 받았다(≪高麗史≫권 109, 列傳 22, 李穀).

 제3기의 사대부는 제2기에 등장한 사대부들의 후손이나 새로이 관인으로 등장한 과거출신의 유신들이 주축을 이루는데 이들은 공민왕대의 반원적인 분위기와 함께 권문세족을 배제하고 신돈을 주축으로 田民辨整都監에서 개혁에 참여하거나 李穡이 중심이 되어 成均館을 重營하고 학풍을 크게 진작시키는 데 참여하였던 유신들이 여기에 속한다고 하겠다. 이들은 성리학 수용의 제2세대라 할 수 있으니 앞 시기 李齊賢이나 李穀의 성리학 이해가≪周易≫이나 四書에 접근하는 수준에 머물었음에 비하여 학문에 대한 이해도가 심화되었다. 특히 앞 시기인들이 불교를 異端視하면서도 다만 불교의 폐단을 지적하는 수준에 그치고 불교와 유교의 공존을 인정하였던 것에 비하여 불교에 대한 비판도 더욱 논리적으로 심화된다. 이 시기의 신진사대부는 정치세력으로 성장하여 갔다.

 제3기의 이들 신진사대부는 우왕대에 李仁任의 권세하에서 일시적으로 위축되었으나 우왕 14년(1388) 崔瑩의 요동정벌에 반대하는 李成桂의 신흥세력과 연계하여 정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이들 중 일부는 신흥관료로서, 지배계급으로서의 경제적 혜택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것에 반발하여 당시 현실모순을 타개하는 방편으로 전제개혁을 요구하였다. 대외적으로는 元明交替期를 당하여 親明政策을 표방하면서 원과 연결되어 과거부터 권세를 누려오고 있던 權門世族을 제거하고 정치의 주도권을 잡으려 하였다. 이 과정에서 신진사대부는 온건파와 개혁파로 갈라지게 되었으며 개혁파는 전제개혁과 廢假立眞을 추진하며 새 왕조 건국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지금까지 고려 후기의 사대부의 성장·발전과정을 세 시기로 나누어 보았다. 다시 말하면 사대부는 12세기 말 최씨집권기에 그 원형을 찾을 수 있고, 성리학이 도입되기 시작한 13세기 말 충렬왕대부터 성리학의 수용이 본격화되던 14세기 전반기에는 신진사대부의 모습이 갖추어졌다. 이들 신진사대부는 공민왕대에는 신돈집권에 참여하였고, 성균관을 중심으로 학문을 진흥시키는 데 주역이 되면서 고려왕조의 멸망 전까지 성장·발전하였다. 위화도회군 이후 신진사대부는 다시 분기하여 온건파와 개혁파로 나뉘면서 개혁파는 조선건국의 주역이 되었다.

 한편 유교적 王道政治를 추구하는 사대부의 현실 인식은 사회모순을 직시하고 개혁을 추진해 나가는 면에 있어서도 시기별로 크게 차이를 보인다. 제1기 무신집권 체제하에서의 관료의 현실인식에서는 현 사회 모순에 대한 문제 제기는 미약하다. 현실을 직시하고 모순을 인식하는 사람들은 官途에 참여조차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최씨집권기의 문신들은 체제에 아첨 또는 타협하는 입장이었던 반면에 대외적으로 몽고와의 항쟁과정에서 민족의식의 발로로 國祖 檀君이나 高句麗 始祖 東明王의 존재를 부각시켜 민족의 자주의식과 역사의식을 고양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제2기에는 元과의 새로운 관계 이후 고려 왕실의 위상이 격하되고 왕 측근의 비정통적 관료들이 권세를 장악하여 정치를 농단하던 시대이다. 이에 따라 人事權을 비롯한 田制와 收取體制의 문란, 재정의 궁핍이 심화되고 가혹한 수렴으로 民의 流亡을 초래하였다. 또 밖으로는 원의 정치 간섭과 왜구의 침입으로 각종의 수탈과 노략질을 당하여 어려움을 더해 갔던 시기였다. 원 제국의 정치간섭과 경제적 수탈 속에서 고려의 민족자존을 유지하고 전통적 체제를 최대한으로 지켜 나가는 것이 이 시기 사대부들의 최대의 관심사가 되었다. 이 시기 정국은 충렬왕 이후 안으로는 즉위와 퇴위를 반복하는 잦은 왕의 교체와 왕 측근의 폐행들의 횡포가 자행되는 가운데서 사대부들은 이를 제거하기 위하여는 政房을 혁파하고 인재를 등용하여 王道政治를 이룰 것과 전제의 釐政을 통한 민생의 안정을 목표로 하는 등의 개혁책을 제시하였다. 그런 한편 원에 대해 고려 왕실체제를 온존시켜 나가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는 등 정치 일선에서 활약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기존의 권문세족이나 국왕 측근세력과의 연결을 통해서 자신들이 貴族化되어감으로써 그들의 개혁론은 한계성을 갖는 것이었다.0339)한국역사연구회,≪14세기 고려의 정치와 사회≫(민음사, 1994).

 제3기는 공민왕대에 원의 간섭과 권문세족 압력을 배제하고 왕권을 강화해 가는 과정에서 그를 즉위시키는 데 적극 노력한 李齊賢을 座主로 한 신진사대부의 세력이 크게 대두된 시기이다. 과거출신의 유자들은 좌주·문생관계를 돈독히 하여 하나의 정치세력으로 성장하였으며 이들은 여말 중국의 원명교체기를 당하여 친명책을 통하여 원의 압력에서 벗어나고 기존의 附元輩를 제거하려 하였다. 이제현의 뒤를 이어 이색이 성균관 대사성이 되자 사대부들은 성균관을 중심으로 학문을 일으키면서 하나의 정치세력으로 성장하여 갔다. 또 14세기 이래의 반복되는 개혁책이 전대의 권세가에 의해 야기된 사회경제적 폐단을 제거하는 수준에 머물고 있는 것에 대해 고려 말기의 사대부 중에는 더욱 적극적이고 과감한 개혁책을 제시하기도 한다. 이런 과감하고 근본적인 개혁이 실현되기 위하여는 기존의 체제부정은 필수적인 것일 수밖에 없게 된다. 이에 따라 왕조 말기에는 이미 세족화한 신진사대부는 온건개량파로, 중소지주적 입장을 견지하고 세족화되지 않은 사대부는 급진파로 분기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성리학에의 접근이 심화됨에 따라서 불교에 대한 입장에도 변화가 왔다. 고려 전기의 儒者들은 불교를 정신적 敎化의 근본으로서 인정하여 상호 공존적인 것으로 인식하여 왔는데 성리학은 그 철학적 논리구성에 있어서 불교의 영향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불교를 이단시하여 배척하고 있다. 이 때문에 성리학을 업으로 하는 유자들은 불교에 대해 비난의 눈을 돌리게 된다. 고려 후기 사대부로서 불교에 대한 비판은 성리학을 처음 도입한 안향에 의해서 시작되었으나 이후 14세기 전반기의 신진사대부들은 아직도 불교와의 상호 공존체제를 유지하면서 불교의 교화의 역할에 대해 긍정적 태도를 보이고 그 비판도 사회적 폐단을 지적하는 수준에 머물었다. 반면에 공민왕대 이후의 신진사대부가 정치세력으로 성장하게된 시기에는 불교에 대한 비판은 더욱 철저하고 논리적이 되어 간다는 점이다.

 이상 고려 후기 사대부의 존재를 그 시기 별로 세분하여 보았을 때 각기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 공통점과 차이점을 어떤 쪽에 비중을 두고 보느냐에 따라 세 시기의 사대부의 존재를 별개로 보느냐 아니면 동류로 보느냐가 결정된다. 또 이는 역사의 연속성과 비연속성의 문제이기도 하다. 고려 후기의 사대부는 能文能吏型의 新官人層에서 발원하여 14세기에는 신진세력으로서의 사대부로 등장하기 시작하였고 신진사대부는 고려말에는 온건파와 개혁파로 분기를 이루었다. 이들 말기의 개혁파 신진사대부는 조선초의 양반신분을 구성하는 모체가 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高惠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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