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9권 고려 후기의 정치와 경제
  • Ⅰ. 정치체제와 정치세력의 변화
  • 2. 권문세족과 신진사대부
  • 3) 개혁정치의 추진과 신진사대부의 성장
  • (3) 신진사대부의 성장

(3) 신진사대부의 성장

 고려 후기 개혁정치의 추진은 아직 중앙 정계에 확고한 정치적 기반을 갖고 있지 못한 신흥관료들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즉 향리출신을 비롯한 한미한 가문출신 관료들이 개혁세력이 되어 개혁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신장시키고 있었다. 물론 한미한 가문 출신이라 하여 모두 현실 비판적 성향을 지니고 개혁세력이 된 것은 아니었다. 일찍이 공민왕이 비판했듯이 ‘草野新進’에 해당하는 이들은 옳지 못한 행위로 명망을 얻거나 가문이 한미함을 부끄러워 하여 문벌가문과의 혼인을 선호하는 등0469)≪高麗史節要≫권 28, 공민왕 14년 12월. 현실 순응적인 자세를 보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원간섭기 국왕 측근세력으로서 권력층이 된 인물들 가운데는 한미한 가문 출신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과거를 통해 관료로 진출한 신흥관료들은 그들의 현실인식을 바탕으로 개혁적 입장에 서는 경우가 많았다. 과거출신 신흥관료라고 하더라도 이들은 고려 후기 지배세력의 하나라는 점에서 기본적으로 그 성향에 있어 세족출신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문벌가문 출신이 아니라는 점에서 혈연적 폐쇄성이나 배타성이 세족출신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한 편이었으며, 대부분 지방출신이었기 때문에 보다 진취적인 성향을 가질 수 있었다. 이들은 문벌출신도, 권력층도 아니었기 때문에 수조권 집적 등 불법적 토지겸병에 대한 비판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울 수 있었다.

 고려시대 지배세력인 사대부층 가운데 이러한 특징을 갖는 신흥관료는 매 시기 등장하고 있었다. 이들은 세족출신 사대부와는 달리 아직 문벌화하지 않은 가문배경의 소유자였으며, 특히 유교적 소양을 바탕으로 현실 비판적인 성향을 보이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들을 사대부층의 한 갈래로 계보화할 수 있을 것이며, 이를 ‘신진사대부’로 지칭할 만하다.0470)1980년대 이후 사대부층의 형성 시기와 범주, 그리고 성격 규정에 대한 비판적 견해가 제시되면서 신흥관료를 ‘사대부’로 표현하는 것은 그 의미나 시기상으로 보아 꼭 적절하다고 말하기 어렵다 하고, 이를 ‘新進士類’ 또는 ‘新興儒臣’ 등으로 지칭하자는 대안이 제시되기도 하였다. 사대부의 이해방식에 대한 이러한 비판적 견해는 사대부의 범주를 향리출신 등 특정 가문배경의 소유자로 국한하는 데 대한 문제제기였으며, 결코 사대부의 존재 자체를 부정한 것은 아니었다. 사대부는 고려시대 역사적 용어로서 엄연히 존재하고 있었으며, 당시 지배세력을 지칭할 때 ‘사대부’보다 더 적절한 용어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대부가 신흥관료만이 아니라 세족출신을 포함하여 문신관료 일반을 지칭한다는 이해가 전제된다면, 가문배경이나 사상경향 등에 있어서 새로운 특징을 보이는 고려 후기 사대부층의 한 갈래를 ‘신진사대부’라 지칭하여도 무리는 없을 것이다. 사대부 및 신진사대부의 형성 시기와 그 성격 규정에 대한 여러 견해는 다음의 연구와 논평이 참고된다.
李佑成,<高麗朝의「吏」에 대하여>(≪歷史學報≫23, 1964).
金潤坤,<新興士大夫의 擡頭>(≪한국사≫8, 국사편찬위원회, 1974).
朴龍雲,<李成茂 著 『朝鮮初期 兩班硏究』 書評>(≪亞細亞硏究≫66, 高麗大, 1981).
李泰鎭,<高麗末·朝鮮初의 社會變化>(≪震檀學報≫55, 1983).
金塘澤,<回顧와 展望(高麗時代)>(≪歷史學報≫104, 1984).
―――,<忠烈王의 復位과정을 통해본 賤系출신 관료와 ‘士族’출신 관료의 정치적 갈등-‘士大夫’의 개념에 대한 검토>(≪東亞硏究≫17, 西江大, 1989).
浜中昇,<高麗末期政治史序說>(≪歷史評論≫437, 1986).
劉承源,<士大夫階層과 良賤身分制>(≪朝鮮初期 身分制硏究≫, 乙酉文化社, 1987).
金光哲,<고려시대「士大夫」의 용례>(≪石堂論叢≫14, 東亞大, 1988).
高惠玲,<高麗後期 士大夫의 槪念과 性格>(≪擇窩許善道先生停年紀念 韓國史學論叢≫).
박재우,<고려말 정치상황과 신흥유신>(≪역사와 현실≫15, 1995).
홍영의,<고려말 신흥유신의 추이와 분기>(위의 책).

 고려 후기 지배세력의 한 갈래로 신진사대부를 설정한 것은 이를 통해 사대부층의 내부구성과 그 계보를 밝히고, 여말선초 사회변동 과정에서 지배세력의 동향과 그 성향의 변화를 파악하고자 하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었다. 즉 조선건국을 주도한 신진사대부의 성장과정과 특징, 내적 분화, 다른 지배세력과의 차별성 등을 드러내어 이를 통해 여말선초 사회변동을 이해하고자 한 것이었다.

 이제 이 글에서는 고려 후기 사대부층 가운데 세족과는 가문배경을 달리하면서 주자성리학적 사상경향을 지녔던 과거출신 관료집단을 신진사대부로 설정하고,0471)신진사대부의 형성 시기와 범주 설정, 그리고 성격 규정에 대해서는 아직 견해의 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는데, 이는 궁극적으로 사대부층의 등장 시기를 어디에 설정할 것인가 하는 문제와 관련을 갖는 것이라 하겠다. 지금까지 논의의 대상이 되어온 사대부는 중국의 唐宋 변혁과정에서 새롭게 등장한 宋代 사대부를 모델로 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우리의 경우 중국보다 3, 4세기 늦은 시기인 여말선초에 가서야 같은 유형의 사대부가 등장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한지 의문이다. 비교사적으로 보건대 우리 역사에서 중국의 당송 변혁기와 유사한 시기를 찾는다면, 그것은 여말선초보다 나말여초에 더 가까울 것이라는 점에서, 사대부층의 형성 시기를 고려 전기의 어느 시기에 설정하는 문제를 적극 검토할 필요가 있다. 신진사대부는 이렇게 등장한 사대부층이 사회변화와 함께 분화하는 과정에서 등장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어떨까 한다. 이들 신진사대부층의 형성과 성장과정, 그리고 내적 분화를 살피고자 한다. 신진사대부가 사대부층의 한 갈래로 뚜렷이 자리잡는 것은 공민왕대 이후의 일이지만, 원간섭기에 추진된 일련의 개혁정치가 그 성장의 계기가 되었다는 점을 고려하여 이 시기 개혁세력으로 활동한 신흥관료층의 동향에도 주목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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