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9권 고려 후기의 정치와 경제
  • Ⅰ. 정치체제와 정치세력의 변화
  • 3. 고려왕조의 멸망
  • 1) 고려왕조 멸망의 배경
  • (2) 이인임 정권 내부의 갈등과 최영의 집권

(2) 이인임 정권 내부의 갈등과 최영의 집권

 이인임 정권의 내분은 우왕 3년(1377)부터 표면화되기 시작하였다. 물론 우왕 3년 고려 조정은 윤환·경복흥·최영·목인길·임견미·조민수·이희필·권중화·朴普老·李寶林·李穡 등의 宰臣과 韓邦彦·우인열·沈德符·이임·도길부·金用輝·安宗源·朴林宗·禹玄寶 등의 樞密이0548)朴天植, 앞의 글, 20∼23쪽<표 2>·<표 3>참조. 이인임에 편당하거나 비호 속에서 현달할 수 있었으며, 역으로 이들 추종 내지 협력세력의 구축으로 이인임 정권 또한 안정을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우왕 2년 9월 “이 때 경복흥·이인임·지윤이 정방제조로 있었는데 지윤과 이인임이 권세를 마음대로하여 종군도 하지 않고 벼슬을 얻는 자가 대단히 많았다. 경복흥은 청렴결백하고 스스로를 지켜 어진사람을 천거하고자 하였으나 견제를 받아서 실행하지 못하였다”0549)≪高麗史節要≫권 30, 신우 2년 9월.는 예처럼 시중의 지위에 있던 경복흥조차 관리의 선발에 그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을 정도로 이인임 일파에 의한 정국 독주는 계속되었다. 그리하여 그 동안 정치에서 소외되어 왔던 우왕은 자신의 嬖幸을 늘리는 한편, 이인임 족당세력 가운데 일부를 흡수하여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되찾으려 하기도 하였다. 이것은 결국 족당세력 내부의 갈등을 야기시켜 갔다.

 이러한 동조세력 내부의 권력투쟁은 우왕 3년 지윤일파, 우왕 5년(1379) 楊伯淵일파, 우왕의 유모 張氏일파, 그리고 이듬해 우왕 6년 경복흥의 제거와 같은 일련의 정치적 숙청으로 나타났다. 그런데 이와 같은 일련의 족당세력 내부의 정치숙청에 무장세력이 적극 동원됨으로써 그들의 정치적 비중은 점차 커져갔으며, 더구나 우왕대 극심해진 왜구창궐은 무장세력의 권한을 점차 확고히 해주었다.

 먼저 우왕 3년 2월 이인임 집 대문에 붙은 익명서를 계기로 일어난 지윤일파 숙청과정을 살펴보기로 하자.

池奫의 문객 金允升 등 7, 8명이 문하사 鄭穆을 사주하여 이인임을 탄핵해서 내쫓고 지윤을 시중으로 삼으려 한다. 사태가 긴급하니 속히 대처하라(≪高麗史≫권 125, 列傳 38, 姦臣 1, 池奫).

 위 사료는 지윤이 제거되는 단서를 연 익명서의 내용이다. 이에 대하여 이인임은 겉으로는 두 사람 사이를 이간질하려는 자의 소행이라고 둘러댔지만 평소부터 비대해진 지윤의 권력을 제거하기 위해 기회를 노렸던 것으로 보여진다.0550)≪高麗史≫권 125, 列傳 38, 姦臣 1, 池奫.

 원래 지윤은 사졸출신으로 여러 차례 종군하여 군공을 쌓아 관계에 진출한 인물이다. 공민왕 23년(1374) 7월 탐라토벌전에 참여하고, 이듬해 우왕 원년에는 심왕파 내침에 대비하여 서북면도원수로서 국경수비를 담당하는 등 무장으로서 뚜렷한 역할을 하며 자연스럽게 우왕초 이인임 정권에 합류하였다. 이미 지적한 바 있듯이 그는 이인임과 함께 정방제조로서 관리임명을 함부로 하였으며, 그들의 비행을 지적한 원로대신 김속명을 제거하는 데 중추적 역할을 하는 등 이인임의 충실한 당여가 되었다. 요컨대 지윤은 여느 무장세력과 마찬가지로 우왕 즉위 초 어수선한 정국 수습에 일조한 무장세력으로서 중앙정계에 대두되었고, 이인임의 충실한 당여로서 밀착하였기 때문에 권력을 유지, 신장해 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지윤은 이인임의 당여로 만족하지 않고, 비록 상징적인 존재에 불과한 왕이지만, 우왕의 측근세력 특히 유모 장씨와 어느 정도 친분을 유지하며 자신의 권력을 키워갔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執義 金承得과 지신사 金允升, 판전교시사 李悅, 좌상시 華之元 등을 그 우익으로 삼아 자신의 정치기반을 다졌다. 뿐만 아니라 이인임이나 경복흥과의 사전 협의도 없이 사대부의 중진 임박을 죽일 수 있을 정도로 그의 권력은 이인임의 비호아래 행사되는 것이 아니라 독자적으로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나아가 이제는 이인임과도 대결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즉 全州에 침입한 왜구를 토벌하기 위한 元帥를 선발하는데 都堂에서 지윤의 아들 池益謙을 보내기로 결정하자 이에 불만을 품고 최영 및 이인임과 크게 다투기까지 하였다.

 따라서 위의 익명서 사건은 “우리 둘 사이를 이간질하려는 자의 소행이라”고 돌리기보다는 양자 사이의 정치적 내분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라 할 수 있다. 급기야 수세에 몰린 지윤은 그의 당여 20여 명을 무장시켜 이인임과의 정면 대결을 하였던 바, 이에 이인임은 다른 무장세력 즉 경복흥과 최영의 협조를 얻어 지윤일파에 대한 숙청작업을 단행하였다.

 당시 지윤 당여로 지목되어 처형된 사람은 지윤의 아들 지익겸, 판전교시사 이열, 좌상시 화지원, 우부대언 김승득, 지신사 김윤승, 대간 韓略, 내부령 金賞, 판사 高如意, 판서 崔奕成, 전객령 黃淑眞·金履·金密·秦金剛 등 26명이었다.0551)≪高麗史≫권 125, 列傳 38, 姦臣 1, 池奫.
高惠玲, 앞의 글, 30∼31쪽.

 요컨대 우왕 3년의 지윤일파 숙청사건은 이인임의 당여로서 권력을 키워왔던 지윤이 우왕의 권위에 기대어 이인임의 정국 독주에 제동을 건 사건이었으나 이인임과 최영의 연합세력에 의해 제거되어 실패로 끝났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인임 정권에 대한 반발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우왕 5년의 陽伯淵·洪仲宣사건과 유모 장씨사건은 이인임의 권력 독점에 따른 결과로 정치권력에서 소외당하고 있던 세력들간의 편당적 대립이 노출된 사건이었다. 먼저 우왕 5년 7월에 일어난 楊伯淵事件은 양백연이 시중 경복흥과 이인임을 제거하고 스스로 수상이 되려고 한다는 상호군 全天吉의 고발에 따라 최영의 주도하에 洪仲宣·金濤·成石璘 등 고위 관직자들 21명이 그의 당여로 지목되어 중앙 정계에서 폄출되거나 처형된 사건이다.0552)≪高麗史節要≫권 31, 신우 5년 7월.
≪高麗史≫권 114, 列傳 27, 楊伯淵.

 양백연은 공민왕대 흥왕사란의 평정과 이성계를 따라 東寧府 수복에 참여하여 무공을 세움으로써 입신하고, 우왕대 초반 수차의 왜구정벌에 공을 세워 문하평리로서 정방제조가 되는 등 정치적으로 부상한 인물이다. 특히 우왕 5년(1379) 경상도 진주에 침입한 왜구를 물리치고 개선한 것을 계기로 우왕의 신망을 얻었으나 이러한 양백연의 부상은 이인임과의 대립을 야기시켰다. 이사건 역시 지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무장세력 양백연이 무공으로 요직을 차지하고 정적을 만들어 제거된 경우이다. 그런데 최영이 이 사건을 처리함에 있어 형벌을 과도하게 했다는 비난을 받을 정도로 최영의 주도로 대규모 숙청으로 귀결된 사건이기도 했다.

 우왕 5년 9월 유모 장씨사건은 정당문학 許完과 동지밀직 尹邦晏 등이 내재추 林堅味와 都吉敷의 전횡에 반발하여 이들을 제거하려고 하자, 이를 집권세력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인 이인임·경복흥·최영이 국론의 형식을 빌려 그 당여를 숙청한 사건이다. 더구나 이 사건은 주모자로 유모 장씨가 연루되어 있다는 사실에서 볼 때 우왕이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구축하기 위한 자구책으로서 장씨로 상징되는 측근세력에 의지해 불안정한 왕권의 회복을 꾀하는 과정에서 파생된 사건으로 보기도 한다. 그런데 이 사건 역시 이인임 등 집권세력의 반발에 부딪혀 실패로 돌아갔다는 점에서 우왕의 한계가 재확인된 사건이며, 그나마 즉위 초반에 보였던 우왕의 국정 운영에 대한 의욕이 이 사건 이후로는 사라지고 방탕한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다는 점에서 주목되는 사건이기도 하다.0553)姜芝嫣, 앞의 책, 39쪽.

 이상이 이인임의 당여로서 집정권신으로 속하였던 무장세력들에 대한 숙청이었다면 우왕 6년 3월의 慶復興 제거사건은 이인임정권의 다른 측면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경복흥은 성격이 청렴하고 정직하며 위민의식이 투철한 관리로 이인임 정권에 참여한 집정권신 가운데 비교적 좋은 평가를 받고 있던 인물이다. 공민왕의 모친인 明德太后와 인척인 경복흥은 원래 이인임과 달리 우왕을 옹립하려는 세력도 아니었으며, 이인임·임견미·지윤 등이 정방제조로서 인사권을 남용할 때에도 비판적이었다. 그럼에도 그가 지금까지 정권을 유지한 것은 명덕태후의 비호가 있어 가능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우왕 6년 정월 명덕태후가 사망하자 이인임과 임견미의 주청에 의해 경복흥이 제거된 것은 당연한 순서라 하겠다. 그와 함께 귀양에 처해진 사람은 문하평리 薛師德, 밀직부사 表德麟, 판사 鄭龍壽·裴吉·李乙卿·王伯, 상호군 薛懷, 총랑 薛群·薛拳, 중랑장 羅興俊 등 11인이다.0554)≪高麗史≫권 111, 列傳 24, 慶復興. 이들 숙청에 앞서 이인임은 그와 대립하였던 무장세력 睦仁吉도 유배시켰다.

 이처럼 이인임은 최영의 지원아래 그의 당여라 할지라도 그의 정책에 반기를 들거나, 비판적이었던 인물에 대하여는 가차없이 숙청을 가함으로써 권력의 독주를 확고히 할 수 있었으며 아울러 인사행정의 전횡과 공무를 빙자한 전민의 탈점을 광범위하게 자행하며 정치질서의 혼란을 가중시켰다.0555)≪高麗史≫권 126, 列傳 39, 姦臣 2, 李仁任.

 요컨대 우왕대 전반기는 이인임의 권력 독점현상이 만연되면서 이로 말미암아 각 정치세력간의 대립과 반목이 심하였다. 우왕 2년 대원관계를 둘러싼 신진사대부 일파에 대한 숙청이 반대세력에 대한 숙청이라면, 우왕 3년의 지윤 사건, 5년 양백연·홍중선일파 숙청사건, 왕의 유모 장씨사건과 6년의 경복흥 제거사건 등은 이인임의 정국 독주에 반발한 이인임 일파의 내부 분열을 보여주는 예이다. 그런데 이인임은 자신의 정국 주도에 반발한 세력들을 순차적으로 제거함으로써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하였지만 권력의 공동화 현상을 유발시켰으며, 숙청과정에서 무장적 기반을 갖고 있지 않은 이인임을 대신하여 숙청을 주도한 최영과 임견미의 세력 강화는 당연한 결과라 하겠다.

 임견미는 공민왕 때 于達赤〔우달치〕에 소속되어 왕의 측근에서 활동하게 되면서 중앙의 정치무대에 등장하였다. 공민왕 10년(1361)에는 제2차 홍건적의 대규모 침입을 받아 왕이 남행하였을 때 호종하여 무공을 세움으로써 홍건적평정 후 1등공신에 책봉되고, 이어 동왕 12년 4월 흥왕사의 변을 일으킨 金鏞을 국문하는 일을 맡아 그 사후 수습을 맡음으로써 정치적 영향력을 증대시켰다. 이후에도 임견미는 같은 해 5월 德興君의 내침에 대항하고, 공민왕 19년(1370)에는 최영과 함께 탐라의 반란세력을 진압하는 데 참여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임견미는 공민왕대 연이어 일어난 내우외환에 적극 참여하여 무공을 세움으로써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다져간 전형적인 무장세력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공민왕 시해 후에는 이인임 정권을 지원하며 권력기반을 다져나갔다. 우왕 원년(1375) 8월에 무장으로서 瀋王의 내침에 대비하였고, 왜구정벌에 빈번히 참전하여 우왕 3년 8월에는 문하평리로 발탁되어 이인임·지윤과 함께 인사행정을 장악하기에 이르렀다.0556)≪高麗史≫권 126, 列傳 39, 姦臣 2, 林堅味. 나아가 지윤일파의 숙청에서 시작된 일련의 정권투쟁은 이인임 족당세력내에서의 임견미의 위치를 한층 더 부각시켜 주는 계기가 되었다.

 더구나 우왕 8년 정월에 일어난 익명서 사건은 임견미의 숙청을 가져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임견미에 의해 그 발설자가 처벌되었다는 점에서 임견미의 세력 기반의 강고성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사건의 발단은 曹敏修·임견미·廉興邦·都吉敷·文達漢 등이 이인임과 최영을 제거하고 定昌君 瑤를 왕으로 옹립하기로 모의한다는 투서가 이인임의 사위 집에 던져진 것이었는데, 오히려 임견미가 그 말을 전한 金克恭을 고문하여 모의사실을 뒤집어 씌어 사건을 종결지었다.0557)≪高麗史節要≫권 31, 신우 8년 정월.
≪高麗史≫권 113, 列傳 26, 崔瑩.
이처럼 우왕 8년의 익명서 사건은 임견미의 기민한 대응으로 정치적 파장을 일으키지 않았지만 이 사건을 통해 당시 권력구조에 일정한 변화가 마련되어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즉 이인임과 최영을 제거하고 실권을 장악하려고 한다는 모반의 주동자로 실제 임견미와 친당을 형성하여 권력을 누린 도길부·염흥방이 거론되고 있다는 사실은 집권세력 내부의 변화를 반증하는 것이다. 급기야 우왕 8년 8월 한양천도를 전후하여는 이인임이 정계 일선에서 물러나고 임견미가 그 뒤를 이어 모든 권력을 독점하기에 이르렀다.0558)우왕 8년 이후 우왕대 정치성격에 대하여 高惠玲, 앞의 글에서는 ‘이인임 정권 第2期’로, 姜芝嫣, 앞의 책에서는 ‘임견미 정권기’로 규정짓고 있다.

 한편 우왕 5년을 전후로 한 임견미의 부상과 마찬가지로 최영의 영향력 또한 상승하고 있었다. 고려 전기이래 문벌 鐵原崔氏家 최영은 우달치로서 왕의 숙위를 맡아 주목되기 시작하여 공민왕 원년 護軍으로 趙日新의 난을 진압하고, 공민왕 3년에는 助元兵으로 원에 파병되기도 하였다.0559)≪高麗史≫권 113, 列傳 26, 崔瑩. 이후 홍건적의 칩입, 金鏞의 난, 德興君·崔濡의 난 등을 선두에서 지휘하며 탁월한 군사활동을 통해 순조로운 출세를 거듭하였다. 공민왕 12년에는 문하평리로 시중 柳濯보다 더 강력한 권한을 행사하는 등 동왕 14년 신돈에 의해 숙청되기 전까지를 ‘최영집권기’로 표현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물론 이러한 그의 정권 장악은 문무겸전의 탁월한 능력때문이기도 하지만 특히 그가 거느리고 있는 정예의 군사력에 기인한다고 보는 것이 순리라 하겠다.0560)柳昌圭,<高麗末 崔瑩 勢力의 형성과 遼東攻略>(≪歷史學報≫143, 1994).

 신돈 실각 후 다시 복귀한 그는 왕 시해 후 정국 안정과 계속되는 왜구의 격퇴과정에서 혁혁한 무공을 세워 군사적으로나 정치적으로 그 비중을 높여왔다. 우왕 원년 判三司事로 임명된 최영은 이인임의 집권체제 확립에 협조함으로써 권력을 유지해 왔는데, 우왕 3년 지윤일파의 숙청과 5년의 양백연사건, 유모 장씨일파 폄출에 일익을 담당한 사실에서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유모 장씨사건에서 최영이 유모 장씨의 축출을 종용하자 이에 우왕이 “내가 임금으로서 유모 하나를 구하지 못하겠는가”라고 하여 장씨의 구명을 위해 애를 썼지만 결국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고, 이 사건 종료 후 문하평리 金庾가 최영의 태도가 신하로서 참월하였다는 점을 지적하였다가 오히려 최영의 미움을 받아 유배된 사실에서 우왕 5년의 최영의 발언권 내지 권력기반이 확고해져 있음을 추측할 수 있다.0561)≪高麗史≫권 113, 列傳 26, 崔瑩.

 이상 임견미와 최영의 경우를 통해 알 수 있듯이 공민왕대 우달치로 궁중숙위를 맡아 왕의 측근에서 활동하고, 잦은 내우외환에 참전하여 무공을 쌓아 정치 일선에 부각된 임견미와 최영을 통해 무장세력의 대두와 성장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들은 연이은 정치 숙청에서도 살아남아 우왕 8년 이후로는 이인임을 의존하지 않고서도 독자적으로 권력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우왕 8년(1382) 8월 한양천도를 전후하여 이인임이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고 대신 임견미가 모든 권력을 독점하게 되어서는0562)李仁任이 정치일선에서 물러나게 된 계기에 대하여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우왕 7년과 8년 연이어 사직을 청한 사실은 그의 정치권력에 이상이 있음을 반영하는 것이며, 아마도 우왕대 전반 일련의 정치숙청에서 그에 동조했던 무장세력이 이제 독자적 권력을 유지할 정도로 성장한 데에 따른 결과로 보기도 한다(姜芝嫣, 앞의 책). 최영은 임견미 세력을 적극 지원하고 있지 않은 듯하다. 오히려 여러 재상들의 전민탈점에 대한 폐단을 시정할 것을 강력히 촉구하는 등 비판적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0563)≪高麗史≫권 113, 列傳 26, 崔瑩.

 우왕 8년 이후 새로운 실력자로 부상한 임견미는 왕명조차 무시할 정도로0564)≪高麗史≫권 126, 列傳 39, 姦臣 2, 林堅味. 교만 방자하였으며, 이인임 집권기 모든 인사행정이 이인임과 그의 당여에 의해 독점되었듯이 이 시기의 관리임명권 역시 임견미 일파, 즉 廉興邦·都吉敷·禹玄寶·李存性 등에 의해 장악되었다. 때문에 우왕초 임견미와 함께 內宰樞로서 국정을 관장하면서 이인임 집권에 기여해 왔던 洪永通과 曹敏修마저 시중의 자리에 있었으면서도 그의 실권에 눌리어 실질적으로 아무런 권한을 행사할 수가 없게 되었다.0565)≪高麗史節要≫권 32, 신우 9년 3월.

 이러한 양상은 이인임 집권기부터 시작된 일부 집정권신에 의한 정국주도가 임견미 집권기에 이르러 더욱 그 당여에게 국한되어 있음을 의미하며, 정치권력의 파행성이 극에 달하여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특히 임견미와 염흥방은 당시 관행으로 행해지던 문서 위조에 의한 토지탈점뿐 아니라, ‘水精木公文’ 이라하여 자신의 노비를 풀어 수정목을 가지고 토지소유자를 협박하여 그 토지를 빼앗는 방법으로 산천을 경계로 할 정도의 대규모 농장을 소유하였다. 이러한 정치질서의 혼란과 전제문란에 대하여 비록 실권없는 왕이라 할지라도 수수방관만 할 수는 없었다.

 우왕 10년 9월 왕은 임견미를 파면하고 대신 이성림을 수시중으로 앉혔다. 하지만 배후 세력이 없는 우왕에게는 역부족이었는지 임견미는 두달 만에 다시 시중의 자리에 복귀하였다. 이에 왕은 또다른 무장세력인 최영에 의지해 임견미를 제거하려 하였다.0566)≪高麗史節要≫권 32, 신우 11년 4월. 우왕 12년 8월 왕은 임견미를 파면한 데 이어 이듬해 6월에 측근 潘福海의 아버지 潘益淳을 발탁하여 우시중에 임명하고, 임견미를 포함한 권신들에 의해 침탈된 田民의 변정을 단행하였다. 이처럼 우왕이 임견미의 권력독점에 제동을 걸기 시작하였을 때 임견미의 당여인 염흥방의 家奴 李光이 주인의 권세를 믿고 趙胖의 토지를 불법적으로 빼앗은 일이 발생하였다.

① 전밀직부사 趙胖이 廉興邦의 집 종 李光을 白州〔배주〕에서 베었다. 처음에 이광이 조반의 토지를 빼앗았다. 胖이 흥방에게 애걸하여, 흥방이 이를 돌려주었으나 光이 또 그 밭을 빼앗고 능욕하였다. 반이 광에게 가서 애걸하니 광이 더욱 포학을 부렸다. 반이 분함을 견디지 못하여 數十騎로 광을 포위하여 베고 그 집을 불지르고 서울로 달려 들어와 장차 흥방에게 고하려 하였다. 흥방이 듣고 크게 노하여 반이 반란을 꾀한다고 무고하고 순군을 시켜 반의 어머니와 아내를 붙잡고 400여 기를 배주에 보내어 반을 잡게 하였다.

② 초하루 병자에 염흥방이 신우에게 권하여 令을 내려 조반을 현상하여 잡기를 매우 급하게 하였다. 鄭子喬가 조반을 붙잡아서 순군옥에 가두었다. 이 때에 흥방이 순군 상만호로 있었는데, 흥방과 도만호 왕복해·부만호 도길부·이광보·위관 윤진·강회백이 대간 전법과 함께 어울려 신문하였다. 조반이 말하기를 ‘6, 7명의 탐욕스런 재상들이 사방에 종을 놓아 남의 토지와 노비를 빼앗고, 백성들을 해치며 학대하니 이들은 큰 도적이다. 지금 이광을 벤 것은 오직 국가를 돕고 민적을 제거하려 하는 것인데, 어째서 반란을 꾀한다고 하는가’하였다. 종일토록 고문하였으나 굽히지 않았다. 흥방은 반드시 조반을 허위자백시키려고 매우 참혹하게 다스렸다.

③ 경진일에 신우가 최영의 집에 가서 좌우를 물리치고 한동안 이야기하였는데, 대개 趙胖의 獄事를 의논한 것이었다. … 임오일에 신우가 명하여 반과 그 어머니와 아내를 석방하고, 또 의약과 갖옷을 주고 영을 내려 ‘재상들이 이미 부자가 되었으니 녹을 주는 것을 정지하고 먼저 먹을 것이 없는 군대에게 나누어주라’고 하고 드디어 흥방을 순군옥에 가두었다. 國人이 모두 기뻐 말하기를 ‘우리 왕이 밝다’하였다(이상≪高麗史節要≫권 32, 신우 13년 12월 및 권 33 신우 14년 정월).

 ‘趙胖의 獄’으로도 불리는 이 조반사건의 경과는 위의 사료에 보이는 바와 같이 크게 3부분으로 나누어 이해해 볼 수 있다. ① 이 사건은 권신 염흥방의 가노 이광이 주인의 권세를 믿고 전밀직부사 조반의 토지를 불법적으로 빼앗은 일에서 비롯되었으나 이 문제를 처리함에 있어 염흥방은 조반을 반란죄로 무고하려다 자신의 정치생명을 단축시킨 사건이라는 점, ② 조반의 공술에도 나오듯이 가노 이광의 토지탈점은 단순히 자기 주인의 권세를 믿고 한 행위가 아니라 당시 권신들사이에 일반적으로 행해지고 있는 田民奪占과 그 경영의 한 방법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우왕 말기 불법적인 농장확대가 심각하게 이루어지고 있었으며 이를 비판하는 여론이 팽배해 있었다는 점, ③ 이러한 토지탈점 행위는 이미 우왕 역시 절감하고 있는 문제였기 때문에 이 사건을 계기로 권신들에 의해 탈점된 토지를 환수하여 국용에 쓰게 함으로써 민심수습의 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결국 이를 계기로 염흥방은 물론, 그를 비호하고 있던 임견미와 이인임까지도 정치일선에서 완전히 제거되고 대신 그 자리를 최영이 차지하게 되었다.

 염흥방은 시중 廉悌臣의 아들로 공민왕 때 장원급제하여 관계에 진출하였으며, 공민왕 16년(1367) 국학 중영사업에 능력을 발휘하여 많은 자금을 거두어, 국고를 쓰지 않고서도 국학을 운영할 수 있게 하였다. 이어 知申事에 오르고 홍건적 평정의 공으로 2등공신이 되었다. 그러나 우왕 원년(1375) 북원사신접대를 반대하는 李詹의 李仁任請誅上疏에 연루되어 유배된 바 있다.0567)≪高麗史≫권 126, 列傳 39, 姦臣 2, 廉興邦. 그 후 그가 언제 복권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이 때 유배된 신진사대부들이 우왕 2년에 대부분 복직된 사실에서 그 역시 곧 유배지에서 풀려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염흥방의 대두는 이인임이 정치일선에서 한발짝 물러나 있던 우왕 8년 三司左使가 된 이후부터이다. 이는 염흥방이 임견미의 인척이기 때문으로 보인다.0568)高惠玲, 앞의 글, 40쪽.

 우왕 8년 이래 임견미의 족당으로 國務를 독점해 온 염흥방은 조반이 자기의 토지관리를 맡고 있는 庄主0569)≪太宗實錄≫권 2, 태종 원년 8월 임오. 이광을 죽이자 그를 반란죄로 무고하여 처벌하려한 것이다. 이처럼 당시 권신들은 자신의 노비들을 통해 전국 도처에 있는 토지, 즉 농장을 관리하게 하였는데, 이들은 단순히 주인으로부터 맡겨진 농장의 관리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강제탈점에 의한 경지확장과 조세수취를 담당하고 있었다. 하지만 조반이 이광을 죽이고 서울까지 올라와 문제를 확대시키자 그는 정국을 비상체제로 만들어 자신의 불법적인 토지탈점을 정당화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우왕은 최영과 숙의하여 염흥방을 제거하고 왕명에 저항하려던 임견미와 도길부 등을 아울러 제거함으로써 임견미 당여를 정치 일선에서 몰아내었다. 즉 당시 사전구폐책에 대한 필요성을 절감한 우왕은 이미 강화·교동의 사전혁파를 요구하여 관철시킨 바 있고, 바로 몇해전 다시 한 번 전제문란상을 들어 그 해결책을 강구하도록 간절하게 간한 바 있는 최영0570)≪高麗史節要≫권 30, 신우 3년 3월 및 권 32, 신우 10년 윤10월.과 의논하여 이 사건을 해결하려 하였다. 이 사실에서 우왕은 정국수습의 관건이 私田문제의 해결에 있다고 인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사전구폐를 절감하고 있던 우왕과 최영은 조반의 옥을 계기로 이 시기 사전겸병의 표본격이었던 인물인 염흥방·임견미·이인임 등의 권신들을 제거하고 田民辨正都監을 설치하여 그들에 의해 탈점된 토지를 원주인에게 돌려주는 등으로 민심수습을 꾀하였다. 특히 이 사건 처리의 왕명을 받은 최영은 신흥무장세력이며 동북면 방면에 확고한 기반을 가지고 있던 이성계의 협력을 얻어 이들을 제거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이처럼 우왕대 이인임을 중심으로 정권에 참여한 권신들은 사회적 모순에 대한 개혁 의지는 커녕 모순을 심화시키는 장본인으로서 각종의 실정을 낳았으므로0571)高惠玲, 앞의 글, 47∼55쪽. 그러한 정치·경제 상태에 불만을 느끼고 사전구폐를 절감하고 있던 무장세력에 의해 무너졌다고 하겠다.0572)韓永愚, 앞의 책, 40쪽.

 비록 완전하지는 못하였지만 이 때의 전민변정사업은 공민왕 15년 신돈에 의해 추진된 이래 23년 만에 무장세력에 의해 재추진된 것이었다.0573)≪高麗史≫권 137, 列傳 50, 신우 14년 정월. 그러나 최영의 정국수습 과정에서 같은 무장세력이지만 그 출신기반과 대외정책에 차이를 지닌 이성계와의 제휴는 개혁의 효과를 제대로 거두지 못한 채 明의 鐵嶺衛 설치라는 새로운 문제를 접하게 되면서 양자의 갈등은 노골적으로 드러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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