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9권 고려 후기의 정치와 경제
  • Ⅰ. 정치체제와 정치세력의 변화
  • 3. 고려왕조의 멸망
  • 1) 고려왕조 멸망의 배경
  • (3) 요동정벌과 위화도회군

가. 명의 철령위 설치와 요동정벌

 이인임 집권 후 고려와 명과의 관계는 북원과의 통교와 채빈살해사건으로 원만하지 못하였다. 물론 우왕 11년(1385) 明 太祖는 고려의 요구를 받아들여 공민왕의 시호를 정하고 우왕을 책봉해 줌으로써 사대관계를 재개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명의 고려에 대한 태도는 고압적이었다. 고려에서 파견한 사신들의 입국을 거절한다거나, 또는 고려사신을 정탐꾼으로 몰아부치기까지 하였다.

 명의 이러한 태도에 대하여 고려 조정에서 배명감정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하다. 게다가 우왕 13년(1387) 都堂을 통하여 명에서 장차 처녀와 秀才 및 宦者 각 1천 명과 牛馬 각 천 필을 요구할 것이라는 말이 전해짐으로써 그 동안 공물문제로 시달려온 고려 조정은 다시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듬해 2월 명나라에 파견되었던 偰長壽가 돌아와 明帝의 口傳을 전하였는데, 첫째 고려에서 보낸 말은 모두 작고 힘없는 것으로서 쓸모가 없는 것이며, 둘째 고려에서 몰래 사람을 大倉에 보내어 興師·造艦의 여부를 규찰하거나, 또 명나라 사람을 매수하여 명의 동정을 살피고 있으니 앞으로는 이러한 일을 하지 말 것이며 또 사신을 보내지도 말라는 것과, 셋째 철령 이북의 땅은 본래 元朝에 속하였던 땅이므로 모두 遼東에 귀속시킨다는 것이었다. 이 가운데 앞의 두 건은 명나라에서 으레 상투적으로 써오던 트집이었기 때문에 별로 주목되는 바가 아니었으나 철령위 귀속문제는 고려 조정을 경악시키는 대사건이었다. 鐵嶺衛, 즉 鐵嶺으로부터 公嶮鎭에 이르는 지역은 이미 공민왕 때 회수한 것이었는데 이제와서 이를 새삼 명에 귀속한다는 것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명은 원을 구축하고 안으로 경쟁세력을 토평하면서 그 영역을 만주지역으로 확대하였다. 때마침 북원의 納哈出〔나하추〕의 저항이 격렬하였지만 오래지 않아 이들은 명에 투항하였다. 주지되는 바와 같이 나하추는 우왕 3년 경부터 막강한 서여진의 지배자로서 고려에 화친책을 강구한 바 있다. 이것은 명의 東進을 저지하려는 고려의 대북정책에 청신호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나하추의 명으로의 투항은 곧 명의 동진정책의 재개를 의미하는 것으로 명은 즉각 遼東都司로 하여금 1천여 기를 거느리고 鐵嶺衛를 세우게 하였다. 그 준비로써 요동에서 철령에 이르기까지 70개의 역참을 설치한다는 보고가 고려에 접수되었다. 이 소식을 접한 고려는 전국 8도에 군사를 징발하고 각 도의 성을 재정비하는 등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게 하였다. 비록 철령위 설치가 당장의 군사적 침공은 아니었다 할지라도, 역사적 경험에 비추어 대륙 정권의 안정은 필연적으로 한반도에 대한 공격을 야기시켰다는 것을 경험한 터라 그 대응책에는 국운을 걸 수밖에 없었다.

명나라가 鐵嶺衛를 설치하였으므로 신우가 密直提學 朴宜中을 보내 서면으로 다음과 같이 청하였다. 遼 乾統 7년(1107)에 東女眞이 반란을 일으켜 咸州 이북의 땅을 강점하였으므로 睿王이 요에 통고하여 토벌에 대한 동의를 얻어 군사를 파견하여 그 땅을 회복하고 咸州와 公險鎭 등에 성을 쌓았다. 원나라 초엽 무오년에 몽고의 散吉大王·寶只官人 등이 군사를 이끌고 여진을 예속시켰을 때 우리 나라 定州의 叛民 卓靑과 龍津縣人 趙暉가 화주 이북의 땅을 가지고 투항하였다. 이 때 금나라의 遼東 咸州路 부근에 있는 瀋州에 雙城縣이 있고, 또 함주 근처인 우리 나라 和州에도 옛날에 쌓은 성이 두 군데 있다는 말을 듣고 황제에게 애매하게 보고하였다. 그래서 화주에 쌍성이라는 당치 않은 이름을 붙이고 조휘를 雙城官으로, 탁청을 千戶로 임명하여 인민을 관할하게 하였다. (그 후) 至正 16년에 이르러서 (우리 나라는) 원 조정에 통고하고 이들 總管·千戶 등의 직제를 혁파하여 화주 이북을 다시 우리 나라에 귀속시켰다. 지금은 州縣에 관원을 임명·배치하여 인민을 관할하고 있다. 이로써 반역자에 의하여 침해된 국토가 大國에 예속되었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게 된 것이다(≪高麗史≫권 137, 列傳 50, 신우 14년 2월).

 위의 사료는 철령위 설치 철회를 요청하는 표문의 일부이다. 명의 철령위 설치를 보고 받은 후 사태의 심각성을 우려하여 5도에 城堡를 수축하게 하고, 동시에 밀직제학 朴宜中을 명에 보내 이 지역이 비록 탁청과 조휘의 배반으로 원에 귀속된 적이 있지만 이미 12세기초 윤관의 9성 설치 이래 고려땅임을 역사적인 연원을 들어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고려는 외교적인 노력을 통해 영토분쟁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다음달(3월) 명에서는 遼東百戶 王得明을 고려에 보내 철령위 설립을 정식 통고해 왔다. 이에 우왕은 최영과 함께 요동공격을 실행해 옮기고자 비상사태를 선언하였다.

 물론 이 요동공격은 이성계의 ‘四不可論’ 가운데도 지적되어 있듯이 미약한 군사력으로 흥기하는 명에 대응한다는 것은 지극히 무모한 행동이라 할 수 있다. 더구나 우왕 즉위 이래 권신들의 횡포를 겨우 잠재운 시기였으며 거듭되는 왜구의 침구로 농촌이 황폐화되고 국고는 고갈되어 있었다는 현실에 비추어 볼 때 요동공격은 무모한 계획으로도 보여진다. 하지만 영토를 수호하려는 국가의 의지를 표출하기 위해서도 고려는 요동진공의 원정을 감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왕은 평양으로 진격하여 군사를 징집하여 압록강에 부교를 설치하고, 또 중외의 승도를 징발하여 군사력을 보강시켰다. 이 해 12월 최영을 八道都統使로 삼아 원정군을 총령하게 하고, 그 아래 左右軍을 편성하였다. 창성부원군 曹敏修를 左軍都統使로, 이성계를 右軍都統使로 삼으니 좌우군이 38,830명이요, 딸린 인원이 11,634명, 말이 21,682필이었다.

 고려의 마지막 북진정책은 이렇게 전군을 동원하여 시작되었던 것이다.0574)金成俊, 앞의 글, 383쪽.
이러한 견해와 달리 이 요동공벌은 최영이 자신의 정국주도의 걸림돌인 이성계 세력을 제거할 기회로 삼았기 때문에 이성계를 배제한 채 우왕과 의논하여 요동공벌을 시작하며 정국을 전시체제로 몰아갔던 것으로 평가하기도 한다(姜芝嫣, 앞의 책, 102쪽).
아울러 명의 홍무 연호를 정지하고 백성들로 하여금 元服을 입게하여 명에 대한 적개심을 분명히 하였다. 하지만 당시 요동공벌의 총책 8도도통사 최영은 우왕의 청으로 서울에 남아 있었다. 이것은 곧 처음부터 요동정벌의 불가를 주장한 이성계 및 그의 친위부대를 대거 참여시킨 정벌군의 성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소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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