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9권 고려 후기의 정치와 경제
  • Ⅰ. 정치체제와 정치세력의 변화
  • 3. 고려왕조의 멸망
  • 2) 이성계의 집권과 고려왕조의 멸망
  • (1) 이성계 집정체제 강화를 위한 개혁

가. 전제개혁을 통한 사전혁파

 위화도회군의 성공으로 실권을 장악한 이성계는 정도전·조준·尹紹宗·趙仁沃 등 신진사대부들의 도움을 받아 정치·경제·군사제도 등에 대한 일련의 개혁을 단행하였다. 특히 원간섭기 이래 사전과 농장의 전국적인 확대는 민생에 대한 위협은 말할 것도 없고, 軍需 및 관리에게 지급할 祿俸조차 제대로 줄 수 없을 정도로 국가체제를 파탄으로 몰고 갔다. 따라서 科田受得은 물론 녹봉조차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던 소장관료, 즉 중소지주출신 신진사대부들에게 있어 전제개혁의 문제는 한층 절실한 것이었다.

 물론 이미 원간섭기 일련의 개혁과정에서도 보여지듯 개혁을 위한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전제개혁의 주체가 국왕을 중심으로 한 측근세력과 개혁성향을 지닌 世族, 즉 기득권자들에 의해 주도되었기 때문에 근본적인 해결은 불가능하였다. 이런 형편으로 고려 말에는 이성계 일파뿐 아니라 집권층 상하를 막론하고 私田捄弊를 절실하게 느끼고 있었다. 공민왕대 李穡의 服中上書, 우왕 3년과 10년의 두 차례에 걸친 최영의 사전혁파 요구, 동왕 6년 權近이 收租 重複에 따른 농민들의 피해를 지적한 것 등은 당시 모두 사전구폐를 지상과제로 인식하고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0586)李景植,<高麗末의 私田捄弊策과 科田法>(≪東方學志≫42, 延世大, 1984 ;≪朝鮮前期土地制度硏究≫, 一潮閣, 1986, 69∼70쪽).

 이에 이성계는 조준을 천거하여 대사헌 요직에 앉혀0587)≪太宗實錄≫권 9, 태종 5년 9월 신묘. 구체적으로 개혁작업을 현실화시켰다. 우왕 14년(1388) 7월에 제출된 제1차 上書에서 조준은 전제문란과 토지겸병에 따른 폐해로 백성들의 원망이 하늘에 닿아 각종 재해가 끊이지 않고 있음을 지적하고 이에 부국강병과 인륜회복을 위한 방도로 전제개혁을 제시하였다. 즉 ① 현직관료에게 祿科田柴의 지급 ② 在內諸君·현직관리·閑良官(在京者에 국한)과 수절하는 관리의 처에게 口分田 지급 ③ 유자격 군인에 한한 軍田 지급 ④ 투화인에게 投化田 지급 ⑤ 향리 및 津·鄕·所·部曲·庄·處의 吏와 院·館의 直에게 外役田 지급 ⑥ 城隍·鄕校·紙匠·墨尺·水汲·刀尺 등에게 位田 지급 ⑦ 백성으로서 附籍되어 차역되는 자와 공사천인으로서 차역되는 자에게 호당 1결씩의 白丁代田 지급 ⑧ 裨補사찰에 寺社田柴 지급, ⑨ 驛田의 지급 ⑩ 수령에게 外祿田 지급, ⑪ 각 관청에 公廨田을 지급하자는 것이었다. 이는 고려 전기의 田制를 회복을 통해 관료·군인·백성의 생계 확보와 국가기관의 재정을 확보해주자는 것이다.

 요컨대 토지국유를 전제로 하되 그 수조권 일부를 국가의 공역을 담당하고 있거나 그럴 자격을 가진 개인 또는 각 기관에 분급하자는 것이다. 이 외에도 丁號를 千字文으로 표시하여 성명을 쓰지 않음으로써 후에 함부로 조업화, 즉 사전화되는 것은 방지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그리고 수조율은 1결당 20두로 하여 농민의 부담을 줄였으며, 아울러 토지 지급과 受領에 불법 행위를 할 경우 사형에 처한다는 강력한 조치까지 명시하였다. 아울러 군량확보가 전혀 되어 있지 않은 현실을 감안하여 비상조치로서 私田으로부터 3년간 국가가 수조할 것을 제의하기도 하였다.0588)≪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祿科田 신우 14년 7월 大司憲 趙浚等 上書.

 이 조준의 사전혁파안은 왕명에 따라 都堂에서 논의되었다. 정도전·윤소종은 조준의 주장에 찬성하였으며 鄭夢周가 중립적인 태도를 보이기는 하였지만, 시중 이색은 “가벼이 舊法을 고치는 것이 不可하다”는 반대입장을 표명하고 이에 李琳·禹玄寶·邊安烈·권근·柳伯濡 등이 지지함으로써 반대 의견이 우세하였다. 이에 다시 백관회의에 회부되었으나 참석자 53명 가운데 찬성한 사람은 18, 19명이요, 나머지는 모두 반대하였는데 그 반대자는 모두 巨室子弟였다고 한다.0589)韓永愚, 앞의 책, 45쪽.

 요컨대 일시에 사전을 혁파하자는 개혁론에 찬성한 사람은 신진사대부 가운데 급진파에 속하는 몇몇 인물들이었고, 권문세족은 말할 것도 없고, 신진사대부 가운데 이색과 같은 온건론자들까지 ‘祖宗의 舊法’인 사전을 한꺼번에 폐지할 것이 아니라 그 자체는 그대로 두고 소유권분쟁이나 지나친 수취율 등의 폐단만을 제거하자는 입장을 갖고 있었다. 즉 조업전화한 사전을 인정하는 측과, 이것 역시 불법이므로 폐지해야한다는 입장의 대립으로 정리할 수 있다.0590)李景植, 앞의 책, 71∼83쪽.

 이처럼 조준의 개혁안은 소수의 지지밖에 받지 못하였으나 그를 이어 같은 달 간관 李行, 판도판서 黃順常, 전법판서 趙仁沃 등이 잇따라 전제개혁을 요청하는 상소를 올림으로써 사전혁파는 하나의 論戰으로 발전되었다. 이들이 제시한 전제개혁의 기본 방향과 이념은 대략 토지의 공유화, 均田制의 실시, 什一稅法의 실시, 농민에 대한 불법적 수탈 엄금 등을 통한 國用과 軍需확보에 있었다. 이 중에서 가장 핵심을 이루는 것은 균전제의 문제로서 토지를 누구에게 어떤 조건으로 재분배하느냐의 문제였다.0591)韓永愚, 앞의 책, 44∼45쪽.

 그리하여 개혁파는 반대를 무릅쓰고 조준의 구상대로 남부 6도의 量田과 3년 동안 모든 公私田을 公收한다는 안을 실행에 옮겼다. 이를 위해 각 도의 장관인 諸道按廉使를 都觀察黜陟使라 고쳐 대간의 추천을 받아 그 실무진을 구성하였다. 정당문학 成石璘을 楊廣道, 전평양윤 張夏를 慶尙道, 전밀직부사 崔有慶을 全羅道, 전밀직상의 金士衡을 江陵道, 밀직제학 趙云仡을 西海道의 도관찰출척사로 각각 임명하여 전국의 土田을 改量하게 하고 중앙에는 給田都監을 두었다.0592)≪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經理 신우 14년 8월. 이 양전사업은 강력히 추진되어 이듬해 10월(1389) 일단 완료되었다(己巳量田).

 한편 전제개혁을 위한 양전사업이 전국적으로 진행되자 이에 반대하는 여론을 의식한 창왕은 私田租 全額公收를 완화하여 그 조를 반만 거두어 충당케 한다는 교서를 반포하였다. 하지만 개혁파는 이러한 완화조치가 그들의 개혁을 좌절시킬 수 있는 단서가 된다고 보고 반대파에 대한 강력한 대응으로 맞섰다. 즉 사전혁파를 반대하는 거물 즉, 전제개혁의 반대자이며 창왕옹립으로 이성계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였던 曹敏修를 탄핵하여 유배하였다.0593)≪高麗史節要≫권 33, 신우 14년 7월. 이에 창왕 역시 사전조 반수안을 철회하였으니 이로써 사전은 사실상 폐지된 셈이다.0594)朴龍雲, 앞의 책, 579쪽.
한편 이 때의 ‘私田租半收案 撤回’의 해석을 놓고 전면적인 私田公收 폐지로 해석하는 입장도 있다(李相佰, 앞의 책, 145쪽 및 韓永愚, 앞의 책, 45쪽).

 이처럼 대세는 개혁론자들의 주장대로 기울고 있었다. 하지만 비록 대세가 사전의 몰수와 재분배라는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게 되었지만 온건개혁론자들은0595)고려말 이성계세력에 대한 분류는 아직 명확하게 이루어져 있지 않은 듯하다. 즉 조선건국을 주동한 이성계세력을 급진개혁론자 또는 역성혁명파라고하여 집단 내 갈래를 짓지 않았다. 다만 대체로 사전개혁에 반대한 신진사대부를 온건개혁론자 또는 온건개선론자로, 사전개혁에 찬성하고 이성계의 왕위 즉위를 찬성한 사람을 급진개혁론자로 분류하고 있다(柳昌圭,<高麗末 趙浚과 鄭道傳의 改革 방안>,≪國史館論叢≫46, 國史編纂委員會, 1993, 128쪽 참조). 이 글에서도 전제개혁 이후 대립된 이성계세력 내의 분화 모습을 온건개혁론자와 급진개혁론자라는 말을 빌어 사용하기로 하겠다. 분급수조지를 京畿에 한정시키는 지역제한 조치를 폐지할 것을 주장하며 그들의 기득권을 조금이나마 유지하려 하였다. 만약 이것이 관철된다면 이들은 지금까지 그들이 점유하여 온 사전을 그대로 지급받을 가능성이 컸으며, 이는 자기 소유지 위에 수조지를 겹쳐 받게 되어 다시 농장의 경영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개혁파들은 처음부터 관인층의 수조지는 京畿에 한하고, 여타 지역의 토지는 供上이나 녹봉·군수 등의 재원인 보편적 국가수조지로 한다는 원칙을 세워두었으므로 그같은 온건파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0596)李景植, 앞의 책, 88쪽.

 이후 개혁파는 자기들의 계획을 급진전시켜 창왕 원년(1389) 9월 給田都監주재하에 새로이 受田할 관인의 선정작업을 시작하였다.0597)≪高麗史≫권 137, 列傳 50, 신창 원년 9월. 그리고 이해 11월에 발생한 金佇사건을 계기로 사전개혁에 미온적인 창왕과 그 반대세력을 축출하고 공양왕을 옹립하여 개혁을 위한 토지정리 사업을 마무리지었다. 공양왕 원년(1389) 12월 조준의 제3차상서를 통해 종래의 전제개혁 원칙을 재확인하고 동왕 2년 정월 科田절급 대상자들에게 과전지급문서인 田籍을 나누어 주었다. 이어 그 해 9월에 公私田籍을 市街에서 불사르고, 동왕 3년(1391) 5월 科田法에 관한 기본 법규를 반포하였다.

 이 때 공양왕은 자신의 대에 이르러 ‘祖宗이래 私田의 法’이 혁파되었다고 한탄하면서 눈물을 흘렸다고 하였듯이 이 전제개혁은 고려왕조를 버텨온 세족들의 경제적·사회적 기반을 제거한 것으로, 곧 고려왕조의 몰락을 뜻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사전혁파, 즉 과전법 실시는 신흥군벌이며 신흥귀족인 이성계의 휘하에 있는 장병과 신관료군의 양성과 그들의 보수 밑천을 마련한 것이기도 한 점에서 새 왕조 조선의 경제기반을 마련한 것이었다.0598)李景植, 앞의 책, 4쪽.
朴龍雲, 앞의 책, 58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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