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9권 고려 후기의 정치와 경제
  • Ⅰ. 정치체제와 정치세력의 변화
  • 3. 고려왕조의 멸망
  • 2) 이성계의 집권과 고려왕조의 멸망
  • (3) 정몽주 살해와 이성계의 왕권찬탈

(3) 정몽주 살해와 이성계의 왕권찬탈

 이상 살핀 바와 같이 우왕 14년 위화도회군 이후 실권을 장악한 이성계는 개혁파사대부들의 협조하에 고려사회에 누적된 사회적 폐단을 제거하는 과감한 사회경제적 개혁을 단행하는 한편, 김저의 옥, 윤이·이초의 옥 등을 통해 자신의 집권에 방해가 되는 세력을 차례로 제거하면서 마침내 軍國의 大權을 장악하기에 이르렀다. 이로써 창왕 때에는 舊家世族세력이 잔존하여 이성계세력을 어느 정도 견제하였으나 공양왕을 옹립한 뒤로부터 국왕의 존재가 완전히 괴뢰에 불과하게 되었다.

 이성계의 인척이기도 한 공양왕은 천성이 우유부단한 貴公子로서 쓰러져가는 고려왕조의 국운을 재건하기에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0617)처음에 이성계가 興國寺에서 중신회의를 열고 정창군을 세우자고 발의할 때에 이성계의 심복이었던 趙浚도 “定昌君은 부귀한 가정에서 성장하여 다만 治財를 알 뿐 治國은 모른다”하며 반대할 정도였다. 대신 이성계는 소위 ‘공양왕옹립 9功臣’의 元勳으로서 守門下侍中(공양왕 원년 11월)·領三司事(동왕 2년 10월)를 거쳐 門下侍中(동년 12월)에 올랐으며, 아울러 領八道軍馬(동왕 2년 정월)·都摠中外軍事(동년 11월)의 무권을 겸하더니 동왕 2년 12월에 軍制를 개혁, 군최고사령부로서 三軍摠制府를 설치하고 이듬해 정월에 三軍都摠制使에 올라 완전히 군권을 장악하였다. 이처럼 이성계는 문무의 대권을 한 손에 쥐고 왕위를 형해화시켰을 뿐 아니라, 刑曹·憲司·臺諫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의 일파를 배치하여 그에 대항하는 잔존세력을 끊임없이 탄핵하여 제거하였다.0618)이 시기 臺諫의 활동은 종래 對王權規制의 기능보다는 新進士類와 舊族大臣 양대세력의 정권쟁탈전에 앞장서고 있었다고 지적된 바 있다(朴龍雲,≪高麗時代 臺諫制度硏究≫, 一志社, 1980, 209∼215쪽).

 하지만 이러한 이성계의 전횡은 그에 의해 왕위에 오른 공양왕뿐 아니라 그와 함께 위화도회군, 전제개혁, 공양왕 옹립에 이르기까지 그의 정책을 지지해 온 정몽주마저 이성계세력에서 이탈하게 하였다. 공양왕 2년 7월 이성계세력이 ‘이초당’을 다시 심하게 논핵하자 정몽주가 4대를 추봉하는 기회에 이색·권근 등을 사면하는 은혜를 내리기를 건의하였고,0619)≪高麗史節要≫권 34, 공양왕 2년 7월. 이에 헌부와 형조에서 반발하고 나서면서 정몽주와 이성계세력의 충돌이 시작되었다.

① 가을 7월에 大赦하였다. 찬성사 鄭夢周가 대간이 이초당을 논핵함이 매우 심하므로 왕에게 아뢰기를 ‘마땅히 4대를 추봉하는 기회에 李穡·權近 등을 사하는 큰 은혜를 내리소서’하니 그 말을 따른 것이다. ② 헌부와 형조에서 소를 올려 彛初黨의 죄를 다스리기 청하였다. 이튿날 대간이 다시 청하였으나 모두 대답하지 않았다. ③ 8월에 헌부와 형조에서 다시 이초당의 죄를 다스리기를 청하니 都堂에 내리어 의논하게 하였다. 정몽주가 아뢰기를 ‘이초의 무리는 죄가 명백하지 않으며, 또 사함을 받았으니 다시 논죄할 수 없습니다’ 하였으나, 왕이 오히려 여러 사람의 의논을 따라 禹玄寶·權仲和·慶補·張夏를 먼 지방으로 귀양보냈다(≪高麗史節要≫권 34, 공양왕 2년 7월·8월).

 위의 사료를 통해 이초당 사건에 대한 처벌에 있어 정몽주와 공양왕이 뜻을 같이하여 형량을 낮추거나 사면에 처하였으나, 그 후에도 이성계일파로 보여지는 대간들의 상소가 끊이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의 공격에 지친 왕은 이를 도당에서 심의하도록 하자, 정몽주는 “이초의 무리가 죄가 명백하지도 않고 또 용서를 받았으니 다시 논죄할 수 없다”는 강경한 자세로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려 하였다. 하지만 이미 대세를 이루고 있는 대간들의 뜻에 따라 우현보 등을 귀양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초당에 대한 정몽주의 태도를 둘러싸고 司憲府·刑曹·門下府 郎舍들 간에는 정몽주를 옹호하는 세력과 그 반대세력으로 나뉘어 첨예하게 대립하였다. 결국 대사헌 金士衡을 중심으로 집의 安景儉·崔遠, 장령 許周·崔兢, 지평 趙庸, 형조판서 安景恭 등이 뭉쳐 정몽주에 동조하는 좌시중 鄭寓·좌사의 崔云嗣·헌납 李蟠·정언 權壎 등과 대립하여 서로를 탄핵함으로써 대간의 업무가 마비될 정도였다.0620)≪高麗史≫권 104, 列傳 17, 金方慶 附 士衡. 이로써 이초당 처벌문제로 인하여 대간직 내부에는 비록 열세이기는 하였지만 이초당을 옹호하는 ‘鄭夢周黨’이 형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아울러 이 사건은 정몽주와 공양왕의 결속을 돈독히 하는 계기가 되었다. 공양왕 2년(1390) 11월 김종연사건으로 숙청된 심덕부를 대신해 이성계가 시중의 자리에 올랐을 때 공양왕은 정몽주를 수시중에 임명하여 이성계를 견제할 수 있도록 하였다. 더욱이 이듬해 봄 군제개혁을 통해 이성계가 군통솔권의 수뇌인 3도도총제사가 되고 趙浚·鄭道傳·裵克廉 등이 각각 左·右·中軍摠制使로서 군권을 장악하자 정몽주 동조세력들은 활발한 대간활동을 통해 이성계세력을 견제해 가고 있었다. 물론 공양왕 역시 이들을 지지하면서 소위 이성계세력에 의해 숙청되었던 ‘5罪’0621)5罪란 ① 王氏를 세우는 의논을 저지시키고 禑의 아들 昌을 세운 자(禑昌黨 ; 李穡·曹敏修 등), ② 金宗衍의 모의에 참여한 자(宗衍黨 ; 池勇奇·朴可興 등), ③ 신우를 맞이하여 왕씨를 영구히 끊게 하려는 자(禑昌黨 ; 변안열·우현보 등), ④ 尹彛와 李初를 上國에 보내어 친왕이 천하의 군사를 움직여 이성계를 치도록 요청한 자(彛初黨), ⑤ 선왕의 서손을 꾀어 반역을 도모한 자(池湧奇)를 칭한다(≪高麗史≫권 117, 列傳 30, 鄭夢周).의 인사들의 형벌을 감해주었다.0622)劉璟娥, 앞의 책, 113∼115쪽 참조.

 그리하여 같은 해 9월에도 사헌부에서 소위 立昌黨·迎禑黨·彛初黨 관련자들에 대한 가중처벌을 요구하자, 왕은 정몽주·尹虎·柳曼殊·金溱 등을 불러 의논하여 이색과 우현보를 석방하고, 조민수·변안열은 가산을 몰수하며 李乙珍은 율에 따라 단죄하며, 池勇奇·朴可興은 그대로 유배해 두되, 禹仁烈·王安德·朴葳 등은 경외에 편리한 대로 살게 할 것을 명하였다. 이 자리를 빌어 처음부터 彛初黨의 죄가 분명치 않다고 주장해 온 정몽주는 “지금 이후 다시 이들을 論劾하는 자는 誣告罪로 다스리겠다”고 선언함으로써 이성계 일파와의 정면 대결을 선언하였다. 아울러 이를 계기로 정몽주는 5죄로 처벌되었다가 풀려난 인사들을 그의 세력 내지 그의 동조세력으로 끌어들일 수 있게 되었다.

좌상시 金震陽이 말하기를 ‘(鄭)夢周·李穡·(禹)玄寶가 李崇仁·李種學·趙瑚를 보내어 신 등에게 말하여 李 判門下가 공을 믿고 권력을 마음대로 하는데 지금 말에서 떨어져 병이 위독하니 먼저 우익인 趙浚을 제거한 후에야 도모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 (≪高麗史≫권 117, 列傳 30, 金震陽).

 위의 사료를 통해 공양왕 4년(1392) 4월, 이전까지 이성계세력에 의해 탄핵받아 유배되었던 이색과 우현보가 정몽주와 대등한 입장에서 이성계세력을 탄핵하고 나서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이종학·이종선·이숭인·조호 등 우창당으로 유배되었던 인물들도 정몽주의 동조세력에 합류하고 있었을 알 수 있다. 즉 정몽주와 같은 정치노선을 가진 인물뿐 아니라 이색·조호·우현보 등과 같이 우왕·창왕대의 정치질서를 유지하려 했던 세력들도 이성계의 역성혁명을 저지하기 위해 정몽주와 연대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0623)劉璟娥, 위의 책, 120쪽. 이로써 공양왕 4년초에 이르면 이성계세력에 대항하는 정몽주를 중심으로 고려왕조를 옹호하는 세력이 결집되었다고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공양왕 3년 9월부터 4년 4월 정몽주가 살해되기 전까지 우창당과 연대한 정몽주에 합류한 세력은 이성계세력을 압도하고 있었다고 보인다.

 그리하여 한산부원군으로 복직된 이색에게 이성계는 끓어 앉아 술을 청해야 했고0624)≪高麗史≫권 115, 列傳 28, 李穡. 반면 鄭道傳은 대간을 비방했다는 죄목으로 형조의 탄핵을 받아 奉化縣에 유배되었다가 다시 羅州, 保州로 이배되었다. 趙璞·尹紹宗·南在·南誾 등 역시 유배되고, 吳思忠은 삭탈관직되는 등 이성계에게 충실한 개혁파 사대부들은 거의 중앙정계에 남아 있지 못하였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문하부 낭사 김진양은 소를 올려 조준·정도전 등을 극형에 처하도록 요구하였다. 왕의 재가만 얻는다면 이성계의 우익을 모두 제거하고 이성계까지 제거할 수 있을 정도로 공양왕 4년의 정국은 정몽주 동조세력들이 언론직을 장악하고 있었던 것이다.0625)劉璟娥, 앞의 책, 121쪽 참조.

 그러나 공양왕은 이성계의 독주에 지쳐 있었지만 정몽주세력의 요구에 놀라 이성계세력에 대한 탄압을 중지하게 하고 정도전을 廣州로, 조준을 泥山으로 가까이 옮기도록 명하였다. 이어 남재·조박·윤소종·오사충 등 역시 수원으로 불러들여 국문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소강의 기회를 포착한 李芳遠은 이성계에게 事勢의 위급함을 알려 정몽주 제거라는 비상수단을 동원, 실천에 옮겼다. 결국 정몽주는 善竹橋에서 격살되고 그의 黨類마저 모두 유배되었다.

 이와 같이 이성계는 최후로 남아 있던 고려왕조 유지론자인 정몽주를 제거하였다. 아울러 왕조교체를 반대하였던 이색을 비롯하여 이숭인·조호·김진양·李擴·偰長壽·金履·이무·이빈·安魯生·崔關·金膽, 우현보와 그의 당여 및 종실 南平君 和·壽延君 珪 등 20여 명을 먼 곳으로 귀양보내었다.0626)≪高麗史節要≫권 35, 공양왕 4년 6월.
鄭在勳, 앞의 글, 75∼77쪽.

 왕실을 두호하던 중신과 종실을 모두 잃고 고립무원에 빠진 공양왕은 4년(1392) 7월 밀직제학 이방원과 사예 趙庸을 불러 동맹의 형식을 빌어 이성계에 의지하여 고려왕조를 유지할 것을 요구하였다. 하지만 이성계파 우시중 裵克廉은 “왕이 昏暗하여 君道를 이미 잃고 인심이 떠나 있어 社稷과 生靈을 맡길 수가 없습니다”하며 폐위상소를 올리니, 결국 왕대비의 명으로 공양왕은 폐위되어 原州로 방출되었다.0627)≪高麗史節要≫권 35, 공양왕 4년 7월 신묘. 이로써 고려왕조의 國璽는 마침내 이성계에게 넘겨져, 1392년 7월 17일 權知高麗軍國事로서 즉위하니0628)≪太祖實錄≫권 1, 태조 원년 가을 7월 17일 병신. 34대 475년에 걸친 고려왕조는 무대 뒤로 사라지고 말았다.

<朴天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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