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9권 고려 후기의 정치와 경제
  • Ⅱ. 경제구조의 변화
  • 1. 농장의 성립과 그 구조
  • 2) 농장의 발달과 그 구조
  • (1) 수조지집적형 농장

(1) 수조지집적형 농장

 농장이 형성되는 요인에 대해서는 이미 開墾·寄進·奪占·買得·長利0665)周藤吉之, 위의 글.·賜牌·投托0666)宋炳基, 앞의 글. 등이 지적되고 있다. 그러나 고려 후기 토지문제와 관련하여 가장 많은 기록을 남기고 있는 것이 토지의 탈점이다. 그것은 탈점이 그만큼 고려 후기의 사적 대토지소유의 성격을 규정하는 중요한 요인이 될 수밖에 없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불법적 탈점이 성행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이 시기 국가공권력의 붕괴와 농장의 확대가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반영하는 것이다.

 토지탈점이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은 앞에서도 본 바와 같이 12세기초부터였다. 주로 당시의 최고 권력자였던 이자겸과 그의 일문이 중심이 되었으며, 그러한 토지탈점이 본격화되었던 것은 무신집권기부터였고 원간섭기에 더욱 가속화되어 고려말까지 이어지고 있다.0667)宋炳基, 위의 글, 2∼8쪽.

 토지탈점을 주도했던 것은 주로 권력층에 있었던 자들과 권력기관이었다. 일반적으로 ‘權勢之家’·‘豪勢之家’·‘權豪’·‘權貴’라 불렸던 자들로서 구체적으로 諸王이라 불렸던 왕실의 종친, 宰樞의 고위관료와 巨家世族, 功臣, 사심관 등의 지방관, 鷹坊·怯怜口 및 內竪·忽赤·司僕·巡軍, 거기다 사원이나 諸宮院, 심지어는 국왕이 직접 토지탈점의 주체가 되었다.

 탈점대상도 종묘·학교·창고 등의 국가 내지 왕실소속의 토지, 寺社·祿轉·軍須 및 國人世業田 등 일반농민의 소유토지인 民田은 물론이요 양반전지까지도 포함하여 거의 전영역에 걸친 토지가 대상이 되었다. 그리고 본래는 사전이 설정되지 않았던 양계지역까지 탈점의 대상이 되었다.0668)≪高麗史≫권 132, 列傳 45, 叛逆 6, 辛旽 및 권 82, 志 36, 兵 2, 屯田 신우 원년 10월.

 탈점의 방식도 다양하였다. 앞에서도 언급하였듯이 몽고와의 전쟁 직후 토지는 황폐해질 대로 황폐해져 국가에서는 일반관료들에게도 과전은 물론이요 녹봉도 제대로 줄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원간섭으로 인해 정치권력이 대단히 불안정하였던 국왕은 왕의 측근이나 원과 관계를 맺고 있던 권력기관 등의 물적 토대를 마련해준다는 의미와 전쟁으로 인해 황폐화된 농경지를 복구하기 위한 목적으로 사패를 내려 재력이 있었던 권력층과 권력기관으로 하여금 개간에 참여케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사패를 통한 진황지의 개간은 그 규모가 제한되지 않았으므로 광대한 토지를 확보하여 사적으로 소유할 수 있었던 절호의 기회였기 때문에 고려 후기 농장이 형성되는 데 있어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그러나 복구가 완료된 다음에도 사패를 사칭하여 탈점을 행하고 있는 경우가 많이 보이고 이것이 사회문제가 되었다. 특히 ‘有主付籍之田’으로 이미 개간이 된 토지를 진황지라 속여 탈점하고 있었으며,0669)≪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經理 충렬왕 24년 정월 충선왕 즉위 下敎 및 권 135, 列傳 48, 신우 9년 3월. 또한 ‘冒受賜牌’한 토지를 本田으로 주장하기까지 하였다.0670)≪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祿科田 충목왕 원년 8월. 또한 권세가에서 문계를 조작하여 奴婢·田丁을 탈점하거나,0671)≪高麗史≫권 84, 志 38, 刑法 1, 職制 충렬왕 34년 충선왕 복위 下敎. 지방의 ‘姦黠吏民’과 짜고 문서를 위조하여 京外의 兩班·軍人의 家田·業田 등을 閑地라 속이거나, ‘我家田’이라 하여 탈점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0672)≪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田柴科 명종 18년 3월 下制.

 문서를 위조하는 것보다 더한 것이 소위 ‘水精木公文’이라는 것이었다. 林堅味·李仁任·廉興邦 등의 권신이 노비를 시켜 남의 토지를 수정목으로 때려 빼앗는 것을 일컫는 것인데 그 토지의 주인이 公家의 문권을 가지고 있어도 감히 시비를 가릴 수 없었다고 한다.0673)≪高麗史≫권 126, 列傳 39, 姦臣 2, 林堅味. 이것은 공문서 위조보다 더 심한 강탈이었다. 이렇게 광범위한 토지탈점이 나타날 수 있었던 것은 국가권력의 마비로 수조지에 대한 사적 권한이 강화되어 사전이 조업전화되었던 것이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0674)李景植, 앞의 책. 그런데 문제는 고려 후기 농장의 가장 대표적 형태였던 탈점으로 이루어진 농장의 성격이 어떠한 것이었나 하는 것이다.0675)대표적으로 姜晋哲은 소유권에 기초한 사적 소유지로, 浜中昇·李景植 등은 수조지의 집적으로 파악하고 있다.

 고려말 전제개혁 당시의 상소에 의하면 한 토지의 田主가 5, 6인에 달하고 따라서 일년의 수조가 5, 6번씩 이루어져 농민이 유망하고 호구가 텅비게 되었다거나,0676)≪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祿科田 신우 14년 7월 典法判書 趙仁沃等上䟽. 奸兇之黨이 ‘跨州包郡’하고 산천으로 표식을 삼아 모두 祖業之田이라 하고 서로 빼앗고 훔치니 一畝의 주인이 5, 6인이 넘고 1년의 수조가 8, 9번에 이른다는 사례들이 보이고 있다.0677)≪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祿科田 신우 14년 7월 大司憲 趙浚等 上書. 이는 고려 후기에 들어와 수조권 분급제가 극도로 문란해졌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수조권 분급제의 문란은 단지 수조지가 겹치는 형태로 농민들을 수탈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광대한 지역에 대한 수조권의 침탈을 통해 수조지 집적을 가능하게 할 수 있는 배경이 되었던 것이다.

 당시의 탈점대상 토지는 宗廟·學校·倉庫·寺社·祿轉·軍須田 및 國人世業田,0678)≪高麗史≫권 132, 列傳 45, 叛逆 6, 辛旽. 諸倉庫·宮司·御分之田,0679)≪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祿科田 신우 14년 7월 版圖判書 黃順常等 上䟽. 御分田, 宗室·功臣·侍朝·文武之田, 外役·津·驛·院·館之田0680)≪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祿科田 신우 14년 7월 大司憲 趙浚等 上書. 등이었는데, 물론 예외도 있었겠지만 대부분 일반농민층의 소유토지에 지목이 설정되어 수조되고 있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당연히 탈점은 수조권의 탈점이었다고 해야겠다. 또한 이 때에는 주로 군수에 충당하기 위해 私田이 설치되지 않았던 北界에까지 勢家의 탈점으로 사전화되어 갔다.0681)≪高麗史≫권 82, 志 36, 兵 2, 屯田 신우 원년 10월. 여기서의 사전도 의미상 소유지로서의 사전이 아니라 양반수조지로서의 사전으로 수조지 탈점과 집적이 북계까지 확대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흔히들 당시 농장의 광대함을 묘사하는 것으로 ‘山川爲標’라는 표현을 많이 쓰고 있다. 그러한 광대한 영역을 농장으로 삼은 대표적 사례로 종실 王璹의 海州지역 토지탈점을 들 수 있다.0682)≪高麗史≫권 90, 列傳 3, 宗室 1, 平壤公 基 附 順正大君 璹. 왕숙은 자신의 여동생인 伯顔忽篤이 원나라 仁宗의 총애를 받는 것을 기화로 권력을 이용하여 해주의 토지를 5천여 결이나 탈점한 까닭에 해주에서는 관인을 도당에 반납하기까지하였다.≪世宗實錄地理志≫에 의거하면 조선초 해주의 墾田은 총 28,919결이었다.0683)≪世宗實錄地理志≫권 152, 黃海道 海州. 그렇다면 고려말 조선초에 걸친 간전수의 증가분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5천여 결은 해주 전 토지의 약 1/5정도가 되는 셈이다. 이러한 엄청난 양의 토지가 개인에게 탈점되면 자연히 해주라는 하나의 행정단위가 감당해야 할 부세는 탈점되지 않은 토지에 더 부가하는 수밖에 없었다. 결국 서해도민들의 流離를 재촉하여 공허해진 주군이 5, 6에 달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심지어 남아있는 백성에게 부세를 부가하는 것도 힘들어 印을 도당에 반납하는 사태에까지 이르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광대한 면적의 토지를 단기일에 자신의 지배 아래 둘 수 있는 방법은 개간이나 매득 등으로는 불가능하고 탈점이라는 현상이 아니면 설명할 수가 없다. 탈점지에는 물론 소유지도 포함되었을 수도 있으나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주로 권력을 이용한 다양한 수조지의 탈점이 대부분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므로 수조권의 침탈은 바로 수조지로서 지목이 설정된 民田일 수밖에 없었다. 즉 권세가들이 민전을 빼앗아 산천으로 표시하고 公案을 작성하여 농장으로 만들었다던가,0684)尹汝衡,<橡栗歌>(≪東文選≫권 7, 七言古詩). 權貴가 민전을 침탈하고 奸氓이 그 세력에 붙어 부역을 면제받았다고0685)≪高麗史≫권 30, 世家 30, 충렬왕 11년 정월 을유. 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또한 康允紹의 경우 대장군 金子廷과 더불어 거짓으로 사패를 칭하여 민전을 多占하였다가 발각되어 그 토지를 新興倉에 몰수당했다고 하는데,0686)≪高麗史≫권 123, 列傳 36, 嬖幸 1, 康允紹. 사패전을 빙자하여 민전을 침탈했음에도 불구하고 강윤소에 의해 침탈된 민전이 그 민전의 소유자에게로 반환되지 않고 신흥창에 몰수된 것도 그 토지가 수조지로 지목이 설정되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와 같이 탈점을 통해서 형성된 농장은 물론 사적 소유지도 있겠지만 탈점의 가장 큰 원인이 수조권 분급제의 문란을 통한 수조권의 탈점이었으므로 그 성격은 수조지의 집적이었다고 생각된다. 이것이야말로 사적 대토지소유의 고려 후기적 특성으로, 고려 후기의 농장의 발달이라는 현상이 전기의 지배계급의 토지지배의 성격, 즉 수조권적 지배와 전혀 무관하지 않음을 말해준다.

 그렇다면 수조지집적형 농장의 토지지배의 성격은 어떠하였을까. 많은 사료에서 탈점은 ‘奪占田民’·‘擅奪人田民’·‘奪人田’·‘奪占人口土田’ 등으로 표현되고 있다. 이것은 토지탈점과 더불어 그 토지를 경작하고 있던 농민마저도 탈점을 했다는 뜻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① 왕이 元에 있을 때 哈伯平章이 康守衡과 趙仁規에게 ‘어제 칙명이 있었는데 백성을 안집할 것에 대해서 의논하여 와서 아뢰어라’고 하였으므로 왕은 곧 宰樞와 3품 이상에게 의논할 것을 명하니 모두가 말하기를 ‘上下 모두 處干을 철폐하고 賦役을 바침이 옳습니다’라고 하였다. 處干은 토지를 경작하여 租는 主에게 바치고 庸·調는 官에 바치니 바로 佃戶이다. 이 때 權貴들이 많은 백성을 모아 처간이라 하고 三稅를 포탈하여 그 폐단이 아주 심하였다. 그래서 수형은 ‘반드시 點戶하여 아뢰어라’고 말하였다(≪高麗史≫권 28, 世家 28, 충렬왕 4년 7월 을유).

② 이 때 여러 번 兵亂을 겪어 백성들이 많이 流亡하니 朱悅을 慶尙道로, 郭汝弼을 計點使로 삼아 全羅道로 파견하여 백성들을 招集하게 하였다. 왕이 內庫處干은 역에 동원하지 말 것을 명령하였으나 주열 등이 따르지 않았으므로 이로 인해 파면되었다(≪高麗史≫권 106, 列傳 19, 朱悅).

③ 忻都가 帝에게 아뢰기를 ‘高麗 宰相들은 民戶를 많이 占匿하여 賦役을 면제하고 회피하니 금할 것을 청합니다’라고 하였다(≪高麗史≫권 28, 世家 28, 충렬왕 4년 6월 정축).

④ 權勢之家에서 널리 田莊을 설치하고 人民을 招匿하여 賦役을 바치지 않는 자는 所在官司에서 民을 推刷하여 貢戶에 충당할 것이다(≪高麗史≫권 79, 志 33, 食貨 2, 戶口 충숙왕 12년 10월 下敎).

⑤ 이 때 鷹坊·怯怜口 및 內竪賤口들이 모두 賜田을 받아 많게는 수백 결에 이르고 적어도 삼사십 결을 내려가지 않았다. 일반백성을 佃戶로 삼고 무릇 타인의 토지라도 경계안에 있는 것은 아울러 收租를 하니 州縣의 賦稅는 한되 한홉도 거둘 수가 없었다(≪高麗史節要≫권 20, 충렬왕 8년 9월).

 위의 사료를 통해 당시 고려의 고위관료들이 많은 민호를 은닉하여 부역을 포탈하고 있었던 것이 원나라 조정에서까지 문제가 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權貴들은 民을 多聚하여 處干이라고 부르고 三稅, 즉 租·庸·調를 모두 포탈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처간에 대하여 사료 ①에서 租는 田主에, 庸·調는 官에 바치는 佃戶라고 규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전호는 실질적인 토지소유의 주체로서 조선초 과전법체제에서의 전객농민과 같은 의미를 지녔다고 할 수 있겠다.0687)李景植도 佃戶는 병작반수제하의 차경농민을 의미하는 것과 수조권자에 납조하는 토지의 소유주를 의미하는 두 가지가 존재하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는데, 이 사료에 보이는 處干은 후자인 전객농민이었다고 보았다(李景植, 앞의 책, 49쪽). 그러므로 사료 ①의 佃戶를 지주에 1/2의 생산물지대를 바치는 존재로만 보고 고려 후기 농장의 일반적인 경영형태가 전호로부터 지대를 수취하는 것으로 파악하는 것은 잘못된 해석이라고 할 수 있겠다. 최근 李榮薰은 조선 전기의 佃戶는 국전제하에서 국가에 납조하는 일반농민층을 의미하는 것으로 파악하고, 17세기 이후에는 병작제하의 작인과 같은 의미로 그 용어의 의미가 반전되었다고 한다(李榮薰,<朝鮮佃戶考>,≪歷史學報≫142, 1994). 이러한 해석은 고려시대의 전호개념을 이해하는 데 많은 시사를 준다. 앞으로 많은 연구가 뒤따라야 하겠지만 필자의 생각으로도 고려시대의 전호는 일반농민층을 의미하거나 수조권자에 납조하는 수조지 경작농민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한다. 그렇지 않고 처간을 병작제하의 소작전호로 이해한다면 권귀가 수탈하는 지대는 그들의 당연한 권리행사이기 때문에 3세의 포탈이라 하여 불법으로 간주하고 폐지하자는 안이 나올 리가 없는 것이다.0688)李景植, 위의 책, 49∼50쪽. 사료 ②에서도 內庫소속의 처간은 소작전호가 아니라 내고에 납조를 해야 하는 내고 소속의 수조지농민을 의미한다고 생각된다.

 다시 말해 탈점으로 인한 토지의 겸병현상이 사회문제화되었던 것은, 물론 수조지가 겹쳐 1년에 몇 번씩 수조하였기 때문일 수도 있었지만, 탈점자가 단순히 탈점지로부터 조세만을 수취한 데서 나온 것이 아니라 경작농민까지 예속시켜 국가에 마땅히 바쳐야할 庸·調까지도 포탈했다는 데 문제가 있었다. 그리고 이것은 수취체계의 문란을 야기시키는 것과 동시에 국가의 입장에서 보면 ‘貢賦之田’의 침탈이자 국가 기반인 公民을 침탈당한 것이었다.

 사료 ④에서는 권세지가가 농장을 널리 설치하여 인민을 은닉하고 부역을 바치지 않자 소재관사로 하여금 추쇄하여 貢戶에 충당할 것을 명하고 있다. 사료 ⑤에서는 원간섭기라는 특수상황 아래에서 권력에 기생하고 있었던 응방·겁령구·내수천구들조차 많게는 수백 결에서 적게는 30∼40결에 이르는 賜田을 지급받고 백성들을 佃戶로 삼고 있으며, 특히 지급된 사전의 경계내에 있는 토지는 지급된 賜田이 아닌 데도 불구하고 불법적으로 수조하고 있다는 사실은 수조지의 침탈임을 분명히 말하여 준다. 또한 사료 ⑤의 佃戶도 소작전호가 아니라 사료 ①에서와 같이 처간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므로 고려 후기에 탈점 등을 통하여 집적된 수조지로 형성된 농장의 토지지배는, 원래는 수조지를 경작하던 농민이었으나 탈점으로 인해 수조지와 더불어 그 자신마저도 예속화된 농장농민 즉 佃戶로부터 조·용·조를 수취하는 방식이었던 것이다. 이것은 당시에 국가와 일반소농민 간의 조·용·조 수취를 매개로 한 생산관계와 성격상 같은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농장의 경영은 권세가의 경우 국가권력을 이용하거나 또는 가신이나 노비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었다.

① 이 때 왕은 별도로 御庫를 설치하여 이름을 內房庫라 하여 內侍 1인으로 하여금 관장하게 하였다. 朝臣을 각 도로 나누어 보내어 勸農使라 칭하고 公私良田을 택하여 백성을 모아 耕種케 하고 그 貢賦를 면제하였다 (≪高麗史≫권 79, 志 33, 食貨 2, 科斂 충렬왕 15년 3월).

② 농장을 사방에 설치하고 家臣인 文成柱로 전라도를, 池濬으로 하여금 충청도를 관리하게 하였다. 두 사람이 다투어 취렴을 일삼았는데 백성에게 稻種 1斗를 주고 米 1碩을 거두기를 예사로 하였다(≪高麗史≫권 130, 列傳 43, 叛逆 4, 金俊).

③ 兼幷之家의 收租하는 무리들이 兵馬使·副使·判官이라 칭하거나, 혹은 別坐라고 칭하고 종자 수십인과 말 수십필을 타고 다니면서 수령을 업신여기고 안렴사의 규찰을 꺾고 음식을 마음대로 먹고 廚傳의 경비를 낭비하고 있습니다. 가을부터 (다음해) 여름에 이르기까지 무리를 지어 횡행하면서 폭행하고 약탈하는 것이 도적의 갑절이나 되니 외방이 이로 말미암아 凋弊하게 되었습니다. 佃戶의 집에 들어가서는 酒食을 싫증나도록 먹고 말에게 穀粟을 싫도록 먹이고, 新米를 먼저 바치게 하고 綿·麻·脚錢(여비)·榛·栗·棗·脩에 이르기까지 抑賣함이 租의 십배를 거두니 租를 바치기 전에 재산은 이미 없어져 버립니다(≪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祿科田 신우 14년 7월 大司憲 趙浚等 上書).

④ 이 때 林堅味·廉興邦 등이 오래도록 정권을 잡고 재물을 탐하는 것이 끝이 없었다. 白州人田 수백 경을 빼앗아 蒼頭 李光을 庄主로 삼았다. 또 여러 사람의 토지를 빼앗아 1년의 收租를 2, 3번이나 하였다(≪太宗實錄≫권 2, 태종 원년 10월 임오).

⑤ (普虛는) 廣州 迷元莊에 우거하면서 친척을 모아 드디어 家를 이루었다. 보허가 왕께 아뢰어 미원장을 승격하여 縣으로 삼고 監務를 설치하였다. 보허가 주로 호령하고 감무는 다만 進退할 따름이었다(≪高麗史≫권 38, 世家 38, 공민왕 원년 5월 기축).

 충렬왕대에는 전쟁으로 인한 황폐화가 제대로 회복되기도 전이었지만 일본원정으로 인한 수탈, 몽고세력과 왕실의 측근세력들에 의한 토지겸병이 더욱 확대되어 국가재정은 악화 일로에 있었다. 게다가 왕실의 반전비용 등도 막대한 것이었기 때문에 그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과렴을 행하였을 뿐 아니라 御庫를 별도로 설치하여 비합법적인 방법으로 재원을 마련했던 것으로 보인다.0689)朴鍾進,<忠宣王代의 財政改革策과 그 性格>(≪韓國史論≫9, 서울大, 1983), 61∼69쪽. 위의 사료 ①은 勸農使를 이용하여 충렬왕이 자신의 사재축적을 위한 농장을 경영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또한 겸병지가의 수조하는 무리들이 병마사·부사·판관·별좌와 같은 명칭을 쓸 수 있었던 것도 권세가가 농장경영에 있어 국가권력을 이용하였다는 증거이다(사료 ③).

 보허는 자신이 우거하고 있던 미원장을 현으로 승격시켜 감무까지 설치하였는데 전원을 광점하고 횡포를 저질러도 사람들이 감히 어쩔 수 없었다고 한다. 보허의 농장경영에는 감무와 같은 국가권력의 대행자를 이용하였음이 자명하다(사료 ⑤). 미원장은 원래 왕실소속의 莊 중에 하나였을 것이나 공민왕과의 정치적 인연으로 보허에게 하사된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장은 왕실에 소속된 수조지였지만 개인에 의해 점유되어 가고 있음을 볼 수 있다.0690)莊과 處에 대한 연구는 다음과 같다.
旗田巍,<高麗時代の王室の莊園―莊·處>(≪朝鮮中世社會史の硏究≫, 法政大學出版局, 1972).
姜晋哲,≪高麗土地制度史硏究≫(高麗大 出版部, 1980).
李相瑄,<高麗時代의 莊·處에 대한 再考>(≪震檀學報≫64, 1987).
朴宗基,≪高麗時代 部曲制硏究≫(서울大 出版部, 1990).

 이외에도 최씨집권자의 한사람이었던 崔沆은 內外의 兩班·軍人·閑人 등이 父祖傳來하던 田丁을 침탈하고 色掌員이라는 관리자를 보내어 外民으로 하여금 경작케 하여 흉년에나 진전에도 풍년의 예와 같이 수조를 하여 물의를 일으키고 있었다.0691)許興植,<尙書都官貼>(≪한국의 古文書≫, 민음사, 1988), 275∼279쪽. 이 경우 사료 ③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추수기에만 파견되어 수조하는 예도 있었지만, 김준과 같이 가신을 통하거나(사료 ②) 염흥방처럼 노비를 장주로 삼을 경우에는(사료 ④), 그들은 대체로 농장이 설치된 지역에 상주하면서 주인을 대신하여 경영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김준농장에서처럼 단순히 취렴만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재생산이 어려웠던 농장농민을 대상으로 파종시에 종곡을 빌려주고 고리대를 행하거나, 심지어는 원간섭기에 대원수출을 통한 상업적 이득을 얻을 수 있었던 桑·苧 등의 특정작물을 강제로 경작하도록 할 정도로0692)魏恩淑,<고려 후기 직물수공업의 구조변동과 그 성격>(≪韓國文化硏究≫6, 釜山大, 1993) 참조. 농업경영에 깊숙히 간여를 하기도 한 것 같다. 그것은 농장내에서 면·마·각전·밤·대추 등이 억매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을 보면(사료 ③), 농장농민에 대한 수탈이 租稅만이 아니었음을 추측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수조지집적형 농장의 확대가 광범위하게 일어났던 것은 국가공권력의 와해를 틈타 가장 손쉽게 경제적 대가를 치르지 않고 부를 확대할 수 있는 길이었던 이유도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일반 소농민층의 담세능력의 제고라는 측면도 작용하지 않았을까 한다.

 이미 지적되고 있지만 고려 후기에 조·용·조 이외에 상요·잡공 등의 부가세의 등장은 단순한 수취체제의 문란과 국가에 의한 과도한 수탈차원이 아니라 농업생산력의 발전으로 일반 소농민층의 담세능력이 그만큼 향상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0693)고려 후기 수취체제의 변화에 대해서는 다음의 연구가 있다.
李惠玉,<高麗時代 貢賦制의 一硏究>(≪韓國史硏究≫31, 1980).
―――,<고려 후기 수취체제의 변화>(≪14세기 고려의 정치와 사회≫, 민음사, 1994).
朴鍾進,<高麗前期 賦稅의 收取構造>(≪蔚山史學≫창간호, 1987).
―――,<高麗時期 稅目의 용례검토>(≪國史館論叢≫21, 1991).
李貞熙,<고려 후기 수취체제의 변화에 대한 일고찰-상요, 잡공을 중심으로->(≪釜山史學≫22, 1992).
그러나 수조지에 대한 조세의 수취율은 전기와 같았기 때문에 늘어난 농민의 잉여에 대한 수탈욕구를 토지와 경작자 농민에 대한 직접지배의 방식으로의 전환을 통해 달성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한편 농민의 입장에서도 겨우 1결 이하를 소유하고 있는 영세농0694)이 시기 소농민 가족의 재생산 가능선은 1결이었으나 빈농의 경우에는 토지소유규모가 겨우 數畝에 불과하였다(魏恩淑,<고려 후기 소농민경영의 성격>,≪釜山女大史學≫10·11, 1993 참조).이 이 시기 수취체제의 문란으로 인해 국가로부터 규정된 이상의 각종 수취를 감당하면서 공민으로 남아 있느니 차라리 권세가의 농장에 투탁하여 권세가에 수탈당하는 편이 나았던 측면도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전민탈점은 늘어난 소농민의 잉여까지도 확보하고자 하였던 권세가와 국가로부터의 지나친 수탈을 피하고자 하였던 농민 양측의 이해가 결합되어 나타난 측면도 있었다. 권귀가 민전을 침탈하고 奸氓은 그 권귀의 힘을 이용하여 부역을 면제받고 있으며0695)≪高麗史≫권 30, 世家 30, 충렬왕 11년 정월 을유. 가렴구주에 시달리는 齊民이 다투어 鷹坊으로 투속하여 그 수를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었다는 것이나,0696)≪高麗史≫권 28, 世家 28, 충렬왕 3년 7월 병신. 무릇 호강지가에 은닉된 농민들은 날로 富逸해가고 孑遺殘民만이 부렴에 시달리고 있었다는0697)≪高麗史節要≫권 23, 충렬왕 34년 10월. 사실에서도 그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와 같이 고려 후기의 수조지집적형 농장은 국가공권력이 붕괴되는 가운데 수조권자들이 자신의 수조지에 대한 권한을 강화해 나가는 과정에서 불법적 탈점 등이 강행되면서 나타난 것이었다. 그리고 탈점은 단지 수조지에 대한 탈점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경작농민까지도 탈점하여 그들로부터 조세는 물론이요, 국가에 바쳐야 할 용·조까지도 포탈하였다. 그 경영의 방식도 농장주의 가신이나 노비 등 사적 대리자에 의해 이루어져 농장주의 토지에 대한 사적 권한이 한층 강화되어 갔던 것이다. 이렇게 국가로부터 수조의 권한을 위임받은 것에 불과한 수조지에 점차 사적 권한이 강화되고 있었다는 사실은 고려 후기에 들어와 전반적으로 사적 소유권이 발전되어 가는 것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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