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9권 고려 후기의 정치와 경제
  • Ⅱ. 경제구조의 변화
  • 1. 농장의 성립과 그 구조
  • 3) 녹과전의 설치

3) 녹과전의 설치

 고려 원종 12년(1271)에 성립된 祿科田制度는0776)祿科田에 대한 연구는 다음과 같다.
白南雲,≪朝鮮封建社會經濟史(上)≫(改造社, 1937), 250∼254쪽.
深谷敏鐵,<高麗朝祿科田考>(≪朝鮮學報≫48, 1968).
閔賢九,<高麗의 祿科田>(≪歷史學報≫53·54, 1971).
李景植,<高麗末의 私田捄弊策과 科田法>(≪東方學志≫42, 延世大, 1984 ;≪朝鮮前期土地制度硏究≫, 一潮閣, 1986).
오일순,<고려 후기 토지분급제의 변동과 녹과전>(≪14세기 고려의 정치와 사회≫, 민음사, 1994).
당시 관료들의 녹봉이 부족하여 곤란한 현상을 해결하기 위해 京畿 8縣의 토지를 양반관료들에게 지급한 것이다.0777)≪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祿科田 원종 12년 2월.

 원래 고려의 관리는 전시과의 토지분급과 녹봉을 받아 생활을 보장받고 있었다. 그런데 전시의 분급제는 이미 고려 중엽에 보편적인 관리의 생활보장책으로서 의미를 잃게 된다. 그 까닭은 토지겸병이라는 일반적인 토지제도 문란과도 관계가 있지만 전시과제도 자체의 운영형태에 기인하는 바가 컸다. 관리의 진퇴와 이동이 거듭됨에 따라 토지의 수수·첨삭을 조정하는 것이 어려웠고, 더욱이 관리가 가문을 중심으로 세습되는 경우가 많은 귀족사회에서 정확히 관직을 매개로 職田이 수수되는 것은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하였다. 그러므로 전시과의 일환으로 지급된 토지는 실제로 세습되는 경우가 많았을 것으로 생각되며 이러한 경향은 직전의 절대량을 감축시켰고 마침내 귀족적 가문의 전통이 없는 신진관료들은 관직을 제수받음과 동시에 田柴를 지급받아 생활하는 것은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녹봉만이 관리들의 보편적인 공식상의 생활기반으로 되었던 셈이다.

 이러한 형편에서 토지제도와 수취체제의 문란으로 국고수입에 차질이 생기게 되면서 녹봉 분급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는 사례가 생기게 되었다. 국가의 재정난으로 녹봉을 감급하는 사례는 이미 12세기 말엽인 명종대부터 나타나고 있는데0778)≪高麗史≫권 80, 志 34, 食貨 3, 祿俸 西京官祿 명종 8년 4월. 그것은 무신집권으로 토지겸병이 본격화되고 전시과체제가 급격히 붕괴되었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대몽항쟁을 위하여 江都로 천도하고 수십년 동안 전국이 戰禍로 황폐되자 사정은 더욱 악화되어 새로운 해결책으로 토지의 급여가 처음 시도된 것이 고종 44년(1257)의 일이었다.0779)≪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祿科田 고종 44년 6월·田制 經理 고종 46년 9월. 즉 ‘分田代祿’의 원칙이 마련되어 給田都監이 설치되었으며 실제로 피난지였던 강화도의 토지 가운데 2천결은 公廩에, 3천결은 崔怡에게 지급하고 河陰·鎭江·海寧의 토지를 諸王 및 宰樞 이하에게 차등있게 지급하였다. 그러나 한정된 토지로 충분한 급전은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그러다가 대몽항쟁이 일단락되어 개경으로의 환도가 실현되고 경기 일원에 대한 고려조정의 통치력이 회복 강화되자 ‘분전대록’의 선례를 확대 실시하였는데, 원종 12년(1271) 2월에 녹과전을 지급한다는 결정이 내려지고0780)≪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祿科田 원종 12년 2월. 이듬해 정월에 정식으로 분급함으로써0781)≪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祿科田 원종 13년 정월. 녹과전의 성립을 보게 되었던 것이다.

 녹과전의 설치는 원종 10년에 실시된 田民의 辨正과 民戶의 計點, 貢賦의 更定이라는 시책과도 관련이 있는 것 같다.0782)閔賢九, 앞의 글, 61∼62쪽. 물론 이 때의 일련의 시책이 토지제도와 수취체제 전반에 대한 개혁을 수반한 것이 아니었다 하더라도 고려조정이 오랜 동안의 江都생활을 청산하고 원종 11년 출륙하는 데 대한 준비작업으로서의 의미를 지니는 것이었다. 따라서 거의 같은 때에 같은 여건 아래에서 이루어지는 녹과전의 설치도 새로운 상황에 접어든 고려가 체제의 재정비를 꾀하는 가운데 그 일환으로 이룩된 것이라 하겠다.

 따라서 녹과전의 설치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다음의 사료를 주목해 보자.

① 충목왕 원년 8월에 도평의사사에서 上言하기를 ‘선왕께서 관직을 설치하고 녹봉을 제정하여 1, 2品은 360여 석으로 하고 품계에 따라 차등을 두되 伍尉·隊正에 이르기까지 科數에 준하여 지급하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의식이 넉넉하여 모든 힘을 나라를 위해 진력하였습니다. 그 후 다시 兵亂으로 인하여 전야가 황폐해지고 貢賦가 결핍되고 창고가 텅 비어 재상의 녹봉이 30석을 넘지 못하였습니다. 이에 畿縣의 兩班祖業田 외에 半丁을 파하고 녹과전을 설치하고 科에 따라 나누어 주었습니다. 근래에 여러 공신과 권세있는 집안에서 賜牌를 冒受하여 스스로 本田이라 칭하면서 산천으로 표식를 하고 앞다투어 토지를 차지하니 古制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바라건대 선왕이 제정한 바에 따라 경기 8현의 土田을 다시 경리를 행하여 御分宮司田, 鄕吏·津尺·驛子·雜口分位田은 元籍을 조사해 헤아려 지급하고 兩班·軍·閑人口分田은 원종 12년 이전의 공문을 조사하여 나누어 주고 그 나머지 여러 사급전은 모두 회수하여 균등하게 職田으로 지급하고 나머지 토지는 국가에서 조세를 받아 국용에 충당하도록 합시다’ 하니 制하기를 ‘좋다’고 하였다(≪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祿科田 충목왕 원년 8월).

② 경기지방의 土田은 祖業口分田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모두 折給하여 녹과전으로 삼아서 행한 지 거의 50년인데, 근자에는 權豪之門에서 거의 빼앗아 가졌기 때문에 중간에 여러 번 혁파할 것을 논의하였으나, 문득 말을 고상하게 하고 왕을 기만하여 마침내 실시되지 못하였는데 이는 대신들이 고집하지 못한 소치입니다(≪高麗史節要≫권 25, 충목왕 즉위년 5월 金海君 李齊賢 上書).

③ 경기 8현의 토지는 원래 주인이 있으나 근래 나라에 변고가 많아 양반녹봉이 적어져서 처음에 墾地를 지급하였다. 그 나머지 荒地가 자못 많아 스스로의 이익을 앞세우는 자들이 틈을 타서 사패를 받아 그 주인을 인정하지 않고 官租도 납부하지 않고 그 이익을 독차지하고 있다. 또 양반에게 절급한 토지까지 겸병하여 직에 따라 遞受할 수 없는 사람도 많으니 有司로 하여금 다시 審驗하여 화해시켜 절급토록 할 것이며 江華의 토지 역시 均給하도록 할 것이다(≪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經理 충렬왕 24년 정월 충선왕 즉위 下敎).

 위에 열거한 사료에 의하면 녹과전은 경기 8현의 兩班祖業田을 제외한 半丁을 혁파하고 설치되었다고 하기도 하고, 祖業口分田을 제외하고 나머지 토지에 설치되었다고 하기도 한다. 이처럼 이 부분에 대해서는 전시과의 토지제도에 대한 견해가 다양한 만큼이나 견해가 엇갈려 있다.

 첫째 견해는 사료 ①에 의거하여 녹과전은 畿縣에 있는 군인전 계통의 足丁과 양반공음전시를 잇는 양반조업전을 제외한 그 밖의 기존 토지가 혁파되고 그에 대신하여 설치되었다고 보았다.0783)閔賢九, 앞의 글, 63쪽.

 이 견해는 양반조업전에 대하여 양반영업전, 즉 공음전시로 파악하는데 양반영업전에 대해 전시과체제의 붕괴과정에서 원래 그 자체의 본질로 지니고 있었던 사유적 내용을 표면화시킨 것이라는 설을0784)李佑成,<高麗의 永業田>(≪歷史學報≫28, 1965). 그대로 따른 것이다. 전시과의 과전들이 고려 후기에 들어와 조업전화되어 사회적 문제를 야기시켰던 것은 분명하지만0785)사전의 조업전화에 대해서는 李景植,<高麗末期의 私田問題>(앞의 책) 참조. 모든 양반조업전을 이전의 공음전시였다고는 할 수 없다. 그리고 족정에 대해서도 워낙 다양한 견해가 있는 만큼 바로 군인전계통으로 연결시킬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둘째는 사료 ③에 의거하여 녹과전은 종래의 전시과 계통의 수조지 점유관계가 존속하고 현실적으로 승인되고 있는 가운데 기왕의 분급수조지는 그대로 둔 채, 원종 10년 기사년의 양전사업으로 파악된 진전개간지나 새로 起墾된 加耕田에 대해서만 수조권을 분급한 것이라 보는 경우이다. 즉 녹과전은 기왕의 분급수조지가 조업전화한 현실을 인정하고 붕괴된 전시과의 운영을 회복할 수 없다는 고려정부의 처지에서 나온 미봉책이라 하여 녹과전의 의미를 대단히 한정적으로 보았다.0786)李景植, 위의 책, 56∼66쪽.

 그러나 사료 ③의 墾地는 그 뒤에 나오는 荒地와 대비되는 용어로 반드시 새로 개간된 토지만을 의미한다고는 볼 수 없다.0787)오일순, 앞의 글, 274쪽. 사료 ①에 분명히 “경기 8현의 양반조업전 이외의 반정을 혁파하고 설치되었다”는 기록이 있으므로 신개간지에만 녹과전이 설치되었다고 보기는 어렵지 않나 한다.

 셋째는 고려 전기의 전시과체제에서는 전시과로 지급되는 ‘役口之分田’과 군현민의 古來丁田을 족정·반정 단위로 묶어 일정한 직역을 부과하는 ‘戶別之丁田(足半之丁田)’의 두 계열의 토지가 존재하는 것으로 보고, 혁파된 반정은 丁田계열토지로써 녹과전은 경기 8현의 정전계열 토지의 수조권을 양반관료에게 지급한 것이며, 양반조업전은 양반의 사적 소유지로 녹과전 분급에서는 제외되었다고 보는 견해이다. 특히 고려 전기에 전시과계열 토지는 부곡지역에, 정전계열 토지는 군현지역에 비정되었다는 주장을 하고 있는데, 그렇기 때문에 12세기 이후 부곡지역의 해체로 이 지역에 지급되었던 전시과의 전지는 양반·군인·한인의 세전토지로서 사적 소유지로 변해가고 녹과전은 바로 군현지역에 있던 정전계열 토지인 반정을 파하고 설정되었다고 한다. 더 나아가 사료 ②에서는 경기 8현의 토지 중 祖業口分田을 제외한 나머지 토지를 절급하였다고 하는 점에 주목하여 처음 녹과전을 지급할 당시에는 경기 8현의 정전계열토지 중 양반조업전을 제외한 반정만을 파하였다가 충렬왕 34년 무렵에는 경기 8현의 정전계열토지 중 양반조업전 외의 족정도 파하고 녹과전을 지급한 것으로 파악하였다.0788)오일순, 위의 글, 274∼282쪽.

 그런데 그 경우 사료 ②의 ‘祖業口分’을 조업전과 구분전으로 이해하고 있다.0789)오일순, 위의 글, 282쪽.
여기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해석이 있다. 閔賢九도 조업전과 구분전으로 해석하고 전자는 양반조업전, 후자는 군·한인구분전이라 하였다(閔賢九, 앞의 글, 63쪽). 이경식은 양반구분전이 고려 후기에는 조업전화되어 조업구분전으로 불린것으로 파악하고 있고(李景植,<高麗時期의 兩班口分田과 柴地>,≪歷史敎育≫44, 1988), 武田幸男·姜晋哲은 양반조업전으로 해석하고 있다(武田幸男,<高麗時代の口分田と永業田>,≪社會經濟史學≫33­5, 1967 및 姜晋哲,<高麗末期의 私田改革과 그 成果>,≪韓國中世土地所有硏究≫, 一潮閣, 1989).
그렇다면 구분전에는 군·한인 구분전이 당연히 포함되는 것이고 군·한인 구분전은 정전계열토지이므로, 정전계열토지 중 양반조업전 외의 족정을 모두 파했다고 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모순이다.

 어떻든 田丁制를 포함한 足丁·半丁에 대한 여러 견해가 분분한 실정이므로 여기에서 분명한 판단을 내리기는 어렵다. 다만 족정·반정이 職役과 연계되어 있었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고 있으므로 녹과전 설치를 통해 경기지역에 한해서 최소한 직역과 연계된 반정이 혁파된 것으로 보는 것이 옳을 듯하다. 이것은 이 지역에서부터 이후의 보편적 현상이 된 役과 土地의 분리현상을 정부가 일부나마 인정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런데 족정·반정이 양반을 포함한 직역자에 대한 토지분급의 단위가 되기도 한 것을 보면0790)呂恩暎,<高麗時代의 田丁>(≪嶠南史學≫3, 嶺南大, 1987).
尹漢宅,<고려 전시과체제하에서의 농민신분>(≪泰東古典硏究≫5, 翰林大, 1989).
李景植,<高麗時期의 作丁制와 祖業田>(≪李元淳敎授停年紀念 歷史學論叢≫, 敎學社, 1991).
반정 중에는 양반직전도 포함되었을 것인데 과연 그러한 사전도 혁파되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사실 이미 사전의 광범위한 조업전화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실정이었기 때문에 양반조업전의 제외는 기왕의 분급수조지가 조업전화한 현실을 인정하고 조업전화한 분급수조지는 제외시켰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0791)李景植, 앞의 글(1986), 60쪽.

 녹과전은 경기지역에 한해 직역과 연계되어 있던 반정을 파하여 양반관료에게 지급하였다. 그렇다면 예전에 특정한 직역(대표적으로 군역·기인역 등)을 지면서 반정에 대한 1/10 면조권 혹은 수조권을 가지던 것을 해제하여 그 수조권을 양반관료에게 대신 지급한 것으로 보인다.0792)오일순은 전기의 전시과는 부곡지역에서 1/4조를 수취하였으나, 녹과전은 군현지역에서 1/10조를 수취하는 것에서 양 제도의 차이점을 구하고 있다(앞의 글, 282∼283쪽).
한편 閔賢九는 녹과전의 경영형태는 전호제였고 1/2조를 수취하였다고 보았다(앞의 글, 73∼80쪽). 그러나 이것은 사전조율과 전호제에 대한 해석의 오류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한 의미에서 전시과·녹과전·과전법은 본질적으로 토지지배의 측면에서 동일한 성격을 가지는 것으로 보아야겠다.

 또한 경기 8현이 녹과전의 설정지였다는 사실은 이 이외의 지역은 여전히 기왕의 수조지 점유관계, 곧 전시과 계통의 수조지 점유관계가 존속하고 이것이 현실적으로 승인되고 있음을 말하여 준다. 그러므로 녹과전이 설치되었다 하더라도 토지분급제와 관련된 고려지배층의 물적 기초는 여전히 전시과계통의 사전이었다. 따라서 녹과전은 고려 전기의 전시과제도를 대체하고 이루어진 토지제도가 아니라 전시과의 보완책이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 같다.

 녹과전은 설치된 지 얼마되지 않은 충렬왕 4년(1278)에 다시 절급되었다.0793)≪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祿科田 충렬왕 4년 12월. 그러나 토지겸병의 추세 속에서 권귀들에 의해 사급전의 명목으로 탈점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충목왕 원년(1345)에는 경기 8현의 토지를 양전하면서 녹과전을 개편, 보강하기도 하여서0794)≪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祿科田 충목왕 원년 8월. 녹과전은 관료들의 경제기반으로서의 역할을 문란한 상태이기는 하지만 과전법이 성립되기까지 대체로 지속하고 있었다.0795)≪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經理 공민왕 11년 및 권 81, 志 35, 兵 1, 兵制 신우 3년 2월.

 녹과전은 경기 8현, 즉 長湍·松林·臨津·兎山·臨江·積城·坡平·麻田에 지급되었다.0796)白南雲, 앞의 책, 251쪽.
閔賢九, 앞의 글, 67∼68쪽.
이처럼 녹과전의 설치가 경기 8현으로 국한된 것은 전시과가 양계지방을 제외한 전국의 주현에 설치되었던 점과는 큰 대조를 이루고, 반면에 과전법의 경기지급원칙과는 상통하고 있다.

 경기 8현으로 국한된 것은 대체로 중앙의 관리가 대부분인 급여대상자에게 경기의 땅을 주어 예우하고 편리를 제공한다는 뜻과 토지겸병에 따른 농장발달의 추세 속에서 녹과전을 보호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뿐만 아니라 녹과전 설치 당시의 고려는 북방에서는 반란이 일어나 그 지역이 몽고에 편입되고 남방에는 삼별초의 영향력이 미치는 형편에 놓여 있었으므로 그 통치력의 작용범위도 실제로 제약받고 있었던 것이다.0797)閔賢九, 위의 글, 69쪽. 이같은 취지와 여건 아래에서 잠정적으로 경기 8현에 설치되었던 녹과전은 고려말까지 그대로 그 지역을 벗어나지 않고 유지된 것으로 보인다.

 녹과전의 분급대상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내용은 나타나지 않은 채 ‘文武官’·‘百官’·‘兩班’ 등의 명칭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녹과전이 녹봉에 대신하여 지급되었다는 것은 녹과전 분급이 녹봉지급원칙과 일정한 관계가 있을 것임을 짐작케 한다.

 고려의 녹봉제는 문종 30년(1076)에 정비되는데 그 내용은 妃主祿, 宗室祿, 文武班祿, 權務官祿, 東宮官祿, 西京官祿, 外官祿, 雜別賜, 諸衙門工匠別賜로 구분되어 규정되고 있다. 이같은 녹봉제는 예종 16년(1121)에 州鎭將相將校祿이 추가 정비되고, 인종조에 이르러 녹제의 전면적인 갱정이 이루어졌는데 이 인종갱정록제가 녹봉제로서는 최종적으로 완비된 것이다.0798)李熙德,<高麗 祿俸制의 硏究>(≪李弘稙博士回甲紀念 韓國史學論叢≫, 新丘文化社, 1969).
崔貞煥,<高麗 祿俸制의 運營實態와 그 性格>(≪慶北史學≫2, 1980).

 그런데 이상의 각종 녹봉 가운데 일반 관리 특히 현직관리를 대상으로 한 것이 문무반록이었다. 녹과전의 분급이 녹봉제와 연관을 지니면서 그 대상으로 백관·문무관·양반이 나타나는 점을 고려할 때 구체적인 녹과전의 분급결수는 알 수 없으나 ‘문무반록’의 급여체계대로 녹과전도 분급된 것이 아닐까 한다. 그리고 녹과전이 ‘隨職遞受’한다는 것은0799)≪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經理 충렬왕 24년 정월. ‘문무반록’과 마찬가지로 현직 양반관리에게만 지급되는 직전이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0800)閔賢九, 앞의 글, 69∼73쪽. 그리고 설정지역이 경기 8현에 국한되어 있었기 때문에 구체적인 지급액수는 알 수 없지만 아마도 대단히 미약하였을 것이다.

 이처럼 녹과전이 양반관리들만을 급여의 대상으로 하였다는 점은 양반관리는 물론 군인·한인·잡류·향직자 등을 아울러 대상으로 하는 토지분급제도인 전시과의 경우와 비교해 볼 때 주목되어야 할 것 같다.

 녹과전의 설치가 전시과의 전면적인 부정, 혁파를 통해 이루어진 것은 아니지만 토지제도가 전반적으로 문란해진 상황에서 새로운 조치로서 녹과전이 설치되었을 때 군인이나 한인계층이 그 대상에서 제외됨으로써 이들이 적극적인 관심의 대상에서 배제된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대체로 전시과체제에서 전정의 피지급층이었던 계층들이 새로운 국가적 분급을 통한 적극적 관심의 대상에서 탈락되는 것은 단순한 토지제도 측면에서 뿐만 아니라 고려사회 전반의 발전을 반영하는 것이다.0801)閔賢九, 위의 글, 72∼73쪽.

 녹과전은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관리들의 녹봉이 부족하게 되자 이를 보충하기 위해 토지를 분급한 것이다. 그러므로 녹과전의 설치로 녹봉지급이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명종 때부터 재정난으로 녹봉이 감축되어 지급되던 것이 江都에서 대몽항쟁을 하고 있을 때는 물론이요, 개경으로 환도한 직후 일본원정에 따른 전비부담의 격증으로 국가와 왕실의 재정은 거의 파산상태에 이르게 되어 녹봉을 제대로 지급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녹봉을 관장하는 左倉의 기능과 반록의 명맥은 미약하나마 유지되고 있었다.0802)崔貞煥,<高麗 祿俸制의 變遷>(≪高麗·朝鮮時代 祿俸制 硏究≫, 慶北大 出版部, 1991), 195∼203쪽.

 대몽항쟁이 일단락되고 일본원정이 끝난 뒤 국가재정이 많이 호전되어 녹봉지급이 재개되었으나 당시의 어려운 재정상태로는 충분하게 지급할 수는 없었던 것 같다. 앞의 사료 ①에서 볼 수 있듯이 1, 2품으로 360석을 받아야 할 재상의 녹봉이 30석에 불과한 실정이었고 반면에 권세가들이 겸병한 토지는 산천으로 표시할 만큼 광대하였다. 공민왕의 즉위후 祿制 자체의 개혁이라기 보다는 불급한 관원의 도태, 토지겸병의 금지, 식읍에서의 수취를 녹봉의 재원으로 환속시키는 등 문란해진 녹제를 쇄신해 보려고 하였으나, 토지제도의 개혁이 이루어지지 않는 한 재정상태의 문란은 계속될 수밖에 없는 것이고 따라서 국가재정상태와 직결되어 있던 녹봉의 지급이 제대로 될 리가 없었던 것이다.0803)崔貞煥, 위의 책, 203∼217쪽.

 그러나 녹봉은 미흡하나마 고려말까지 존속되어 녹과전과 더불어 관료들의 생활보장책으로써 함께 주어졌음은 명백한 사실이며, 이 점에서 전기의 양반전시와 녹봉의 경우는 다를 것이 없었다.

 녹과전은 현직의 양반관료만이 분급대상이 되었다. 그렇다면 전시과체제하에서의 여타계층에 대한 토지분급은 어떠하였던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와 관련하여 다음의 사료가 주목된다.

선왕이 제정한 內外田丁은 각각 職役에 따라 골고루 나누어 주어 생활의 밑천으로 삼게하고 또 국가의 각종 경비를 지출하도록 하였는데 근래에 와서 세력있고 교활한 무리들이 遠陳田이라 칭하고 산천으로 표하여 불법적으로 사패를 받아서는 자기 소유로 하고 公租를 바치지 아니하므로 토지는 비록 널리 개간되었다 하더라도 국가에 들어오는 것은 해마다 줄어들고 있다. … 마땅히 여러 도들의 안렴사와 수령들에게 명령하여 철저하게 추궁하여 밝힌 다음 주인에게 돌려 주도록 할 것이며 만약 주인이 없는 땅이 있으면 이것은 內外의 軍人과 閑人들에게 주어서 立戶充役하게 할 것이다(≪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經理 충렬왕 24년 정월 충선왕 즉위 下敎).

 이 사료는 앞의 사료 ③의 녹과전에 대한 조치와 더불어 이루어진 충선왕의 下敎이다. 이에 의하면 직역에 따른 田丁의 분급원칙을 강조하면서 이같은 전정의 정상적 보유상태를 되찾도록 하고, 특히 군인과 한인을 立戶充役시킬 수 있는 無主田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이 조치의 바탕에는 국가재정을 보강하려는 강력한 의도가 엿보이지만 직역과 연결되어 입호충역의 바탕이 되는 田丁의 정비를 꾀하고 있다는 점, 그러나 녹과전은 전혀 달리 거론됨으로써 두 계열의 토지는 성격을 달리하는 별도의 토지로 간주되고 있다는 점이 특히 중요시된다.

 녹과전의 설치로 양반관리에 대한 직전의 개편, 재분급이 이루어지자 군·한인전 계열의 토지에 대해서도 정비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토지를 보유함으로써 각종의 戶가 성립되고, 이 호를 단위로 역이 부과되는 초기체제를 지향하는 선상에서 전정의 정비가 시도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같은 정비는 녹과전의 설치와 비견될 적극적, 개혁적 조치를 통해 이루어지지 않고 붕괴된 이전의 체제를 복구한다는 소극적 단계에 머물렀다.

 실제로 군인 및 한인 등에 대한 전정의 정비는 어떠한 양상을 지니고 전개되었는지 그 정확한 내용은 알 수 없지만 직역과의 밀착하에 입호충역의 체제를 바탕으로 한 전정의 원래 모습을 되찾도록 하는 정비는 실현되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당초 전정제가 붕괴되는 것은 그것을 가져야 할 계층이 갖지 못하게 되는 데서 시작되었지만 실제로는 전정과 역의 분리된 상태가 그 붕괴의 내용이었다. 따라서 역·신분·토지의 여러 부문에 걸친 사회관계의 변화에서 초래된 전정의 붕괴를 소극적 조치를 통해 환원, 복구시키려는 시도 자체가 무리였다.0804)閔賢九, 앞의 글, 83∼84쪽. 경기지역에 한한 것이기는 하지만 직역과 관련된 반정을 혁파하고 녹과전을 설치한 것은 이후 직역과 관련된 토지가 어떤 방향으로 처리될 것인가 하는 것을 짐작케 하는 것이다.

 당시 군인전의 경우를 보면 그 지목은 유지되고 있었으나 실제로 군역을 지는 군인에게는 토지가 돌아가지 않고 남에게 침탈당하거나, 군역을 지지 않는 유력자의 차지가 되고 있었다.0805)≪高麗史≫권 111, 列傳 24, 金續命·권 119, 列傳 32, 鄭道傳 및 권 81, 志 35, 兵 1, 兵制 공민왕 5년 6월 下敎. 결국 공민왕 5년(1356) ‘三家爲一戶’制의 성립은 3가를 하나의 군호로 묶어 군역을 부과하는 방법으로 군역부과에 따른 족정지급을 포기한 것으로0806)閔賢九,<高麗後期의 軍制>(≪高麗軍制史≫, 陸軍本部, 1983). 전정과 군역의 분리현상을 정부가 현실로 인정한 것이다.

 그러한 사정은 한인전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던 것으로 보아0807)≪高麗史≫권 81, 志 35, 兵 1, 兵制 공민왕 5년 6월 下敎. 역과 토지의 분리는 고려 후기의 일반적인 현상이 되어갔음에 분명하다. 그것은 역과 유리된 토지가 직역에 대한 반대급부로서의 役分田이 아니라, 직역의 개념과는 무관하게 생활보장의 의무만을 지니는 口分田으로 인식되고 있음에서도 알 수 있다.

 앞에서 언급한 사료 ①의 충목왕 원년(1345)에 행한 경기 8현에 대한 조치로서 그 목적은 무엇보다도 사급전으로 침탈당한 녹과전의 재건, 재분급에 가장 큰 역점을 두었던 것이지만, 이 가운데 원종 12년 이전의 공문을 조사하여 折給하라는 ‘兩班·軍·閑人口分田’이 주목된다. 여기서 군·한인 구분전은 바로 종래의 군인전·한인전을 의미하는 것으로 소위 후기구분전으로 보인다.0808)武田幸男,<高麗時代の口分田と永業田>(≪社會經濟史學≫33­5, 1967). 군인전·한인전이 구분전으로 지칭되는 것은 역과 유리되어 있는 사정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특히 이같은 구분전이 녹과전이 성립되는 원종 12년을 기준삼아 거론되고 있는데, 군인전이나 한인전이 새로이 구분전으로 파악되게 되는 것이 녹과전의 성립과 관계가 깊음을 알 수 있다. 사료의 내용상으로는 양반, 군·한인구분전을 원종 12년 이전의 근거대로 절급하라 하여 제도상의 변화를 고려하고 있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녹과전제도의 성립으로 직전의 개편이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군인전이나 한인전계열의 토지에는 이와 상응할 적극적 개혁이나 실효성 있는 새로운 조치가 취하여지지 않음으로써 그 붕괴가 방치, 촉진되어 마침내 역과 유리되어 구분전으로 파악되기에 이르렀던 만큼 군인전이나 한인전계열 토지의 변화에 있어서 녹과전의 성립은 중요한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0809)閔賢九, 앞의 글(1972), 86∼89쪽.

 그 후 공민왕 5년 6월에 군·한인전계열 토지에 대한 재건이 시도되지만0810)≪高麗史≫권 81, 志 35, 兵 1, 兵制 공민왕 5년 6월 下敎. 실효를 거두지는 못한 채 그러한 상태로 과전법의 성립에 이르게 된다. 과전법은 우왕 14년(1388 ; 창왕 즉위) 7월 趙浚의 제1차 上書에서 중요한 기틀이 마련되고 이어서 李行·黃順常·趙仁沃 등의 연이은 상서를 거쳐 공양왕 원년(1389) 조준의 제2차 상서에 이르러 실질적인 기본규정이 잡히게 되어 결국 공양왕 3년 5월에 법제적으로 확정된다.

 확정된 과전법의 내용을 보면0811)≪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祿科田 공양왕 3년 5월. 時散을 막론하고 居京의 사대부에게는 경기의 과전을 주고 外方의 한량관리에게는 군전을 주도록 되어 있다. 주목되는 것은 관리에 대한 급전은 과전으로 일원화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조준의 제1차 상서에 나타나는0812)≪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祿科田 신우 14년 7월 大司憲 趙浚等 上書. 현직자를 대상으로 했던 녹과전시와 시산관을 두루 대상으로 했던 구분전을 교묘하게 일원화한 것이다. 현직자에 한하여 품질에 따라 지급하는 祿科田柴와 現職者·散職者 모두에게 공통적으로 품질에 따라 지급하는 구분전이 합쳐져서 현직자와 산직자의 대우에 차이를 크게 두는 과등규정이 마련되고 이 과등에 따라 일원적으로 지급하게 된 것이 과전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과전법에서 산직자에 대한 급전량은 적은 것이었고 따라서 현직자에 대한 커다란 비중을 고려할 때 고려 후기 녹과전의 현직위주의 성격이 과전으로 이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과전법에 나타나는 군전은 한량관리에게만 주는 것으로 고려 전기에 군역과의 긴박관계하에서 전시과 속에 포함되어 존재했던 군인전은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다시 말해 과전법이 성립되면서 녹과전은 과전으로 계수되지만 직역과 연계되어 있던 군인·한인전 계열 토지는 제도상으로 완전히 소멸되어 국가적 토지분급제도에서 사라지게 되었다.0813)閔賢九, 앞의 글(1972), 90∼95쪽.

<魏恩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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