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9권 고려 후기의 정치와 경제
  • Ⅱ. 경제구조의 변화
  • 2. 수취제도의 변화
  • 2) 공부와 요역
  • (1) 공부

(1) 공부

 고려시기 공부의 용례는 대략 세 가지로 사용되고 있다. 이를테면 조세,0883)≪高麗史≫권 80, 志 34, 食貨 3, 賑恤 恩免之制 예종 원년 3월. 군현에 부과되는 공물,0884)≪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서문. 공물을 포함한 세제 일반을 뜻하는 경우가0885)≪高麗史≫권 81, 志 35, 兵 1, 兵制 공양왕 2년 12월. 그것이다. 따라서 사료를 이용할 때 공부가 공물의 의미만 담고 있는지, 혹은 다른 용례로 사용되었는지 신중한 배려가 필요하다. 일단 여기서는 공부의 개념을 군현에 부과하는 공물의 용례로 한정시켜 서술하기로 하겠다.0886)朴鍾進,<高麗時期 稅目의 用例檢討>(≪國史館論叢≫21, 國史編纂委員會, 1991), 203∼206쪽 및 李貞熙,≪高麗時代 徭役制度 硏究≫(東亞大 博士學位論文, 1995), 16∼17쪽 참조.

 공부는 지방관청이 중앙정부에 바치는 현물세지만, 그 상당부분은 군현의 민을 사역시켜 조달하였다. 그러므로 중앙정부와 지방관청의 관계에 있어서는 현물의 수취지만, 군현과 민호의 관계에 있어서는 요역징발이라 할 수 있다. 요역은 役事의 종류에 따라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즉 토목공사·공물조달·조세운반 등이다.0887)李貞熙, 위의 책, 41∼42쪽. 이 가운데 공물조달과 조세운반은 정해진 수량과 기일이 있으므로 토목공사의 요역에 비해 비교적 정례적으로 부과되었다. 이 때문에 조선 전기의 경우 ‘常時雜役’·‘常時徭役’·‘常例徭賦’ 등으로 불리기도 했다.0888)≪太宗實錄≫권 30, 태종 15년 11월 무신
≪成宗實錄≫권 2, 성종 원년 정월 기해·권 160, 성종 14년 11월 신축 및 권 166, 성종 15년 5월 을묘.
이처럼 공물과 요역은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에 조선 성종 2년(1471) ‘役民式’에 의하면 20여 가지의 요역종목 가운데 5종목이 공물과 관련되었으며, 또 동왕 23년의≪大典續錄≫에는 16가지 종목 가운데 6가지가 공물과 관련되었을 정도이다.0889)有井智德,<李朝初期の徭役>(≪朝鮮學報≫30·31, 1964 ;≪高麗李朝史の硏究≫, 國書刊行會, 1985).

 이와 같은 공물의 조달은 고려 전기에는 각종 수공업제품의 생산에 전업적으로 종사하던 所民과 일반군현민에 의해 이루어졌다. 일반군현민이 부담하는 공물과 소민이 부담하던 생산물의 품목은 일치하는 것도 상당수 되지만, 기술적인 능력이 요구되는 물품생산은 주로 소민에게 부과되었으며 그에 반해 일반군현이 부담하는 공물은 原材料·半製品의 형태로 상납되어 京匠人에 의해 가공되었을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0890)姜晋哲,≪高麗土地制度史硏究≫(高麗大 出版部, 1980), 269∼270쪽.
朴宗基,≪高麗時代 部曲制硏究≫(서울大 出版部, 1990), 75쪽.
말하자면 고려 전기 수공업은 크게 관청수공업, 소 수공업, 농촌의 가내수공업으로 나뉘어져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 시기는 상품경제의 발달이 미약했던 만큼 관청수공업은 원료를 구입한 것이 아니라, 소민이나 일반농민으로부터 ‘공물’이라는 경제외적 강제를 통해 조달하고 있었다.0891)홍희유,≪조선중세수공업사연구≫(과학백과사전출판사, 1979 ; 지양사, 1989, 109쪽).
魏恩淑,≪高麗後期 農業經營에 대한 硏究≫(釜山大 博士學位論文, 1994), 170쪽.

 고려 전기의 소는 군현체제의 일환으로 매년 일정액의 공물을 부담하였다. 그러나 왕조 성립 이후 계속된 전쟁, 국가 행정기구의 비대화, 복잡한 대외관계의 전개는 금·은·동 등 소의 생산물에 대한 수요를 크게 증대시켜 소민에 대한 수탈이 과중되었다.0892)朴宗基, 앞의 책, 187∼188쪽. 이 때문에 예종대에 이미 京畿 州縣의 유망현상 가운데 소민의 유망이 가장 심각하였다.0893)≪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貢賦 예종 3년 2월. 이와 같이 소의 해체가 본격화되면서 소민의 부담은 일반군현민의 부담으로 전가되었다. 말하자면 12세기를 전후로 소제도가 해체되면서 공부제의 운영에도 변화가 생기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종래 소에서 생산되던 물품은 일반군현의 주민을 동원하여 수취하게 되었다. 예를 들면 충렬왕 15년(1289)에는 각 군현의 호에서 은·모시·가죽·비단·기름·꿀 등을 징수하였다.0894)≪高麗史≫권 79, 志 33, 食貨 2, 科斂 충렬왕 15년 3월. 이들 물품 가운데 은·가죽·비단 등은 재료를 마련하고 가공하는 데 적합한 자연조건이나 특별한 기술이 필요했을 것이므로, 종래에는 주로 소에 부과되었을 것이다. 또 충선왕 원년(1309)에 鹽專賣制를 시행하면서 소금생산자인 鹽戶를 일반군현민으로 충당하고 있는 것도 비슷한 사례이다.0895)≪高麗史≫권 79, 志 33, 食貨 2, 鹽法 충선왕 원년 2월.

 이와 아울러 전개된 중요한 변화로는 공부제의 折價代納이다. 일반군현민의 공물은 광종 즉위년(950)에 공물의 액수가 정해져 있었다.0896)≪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貢賦 광종 즉위년. 그런데 문종 20년(1066)부터는 공물의 일부품목을 포로 대납하는 것이 허용되었다.

왕의 명령으로 결정하기를 여러 주현에서 해마다 바치는 常貢의 일부인 소가죽·힘줄·뿔을 平布로 환산하여 대신 바치도록 하였다(≪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貢賦 문종 20년 6월).

 위와 같이 군현민이 매년 부담하는 常貢이었던 소가죽·힘줄·뿔 등을 현물 대신에 平布로 대납할 수 있도록 하였던 것이다. 이들은 활(弓)의 제작에 없어서는 안되는 재료로서 활 하나를 만드는 데에는 소가죽과 뿔도 필요했지만, 힘줄의 경우 보통 牛馬 3∼4마리의 힘줄이 필요하다.0897)姜晋哲, 앞의 책, 269쪽. 이처럼 활의 제작에 필요했던 공물이 절가대납되면서 다른 공물의 품목에도 점차 허용되어 갔다.

 군현민이 부담하던 공물 가운데 일부 품목에 공물의 절가대납이 가능했던 배경은 무엇일까. 이에 대해 각 군현이 부담하는 歲貢額 가운데 현지생산이 불가능한 물품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견해가 있다. 말하자면 소의 생산물에 대한 효과적인 수취를 가능케 하기 위한 보완적인 조치로 대납을 허용하고 있다는 것이다.0898)朴宗基, 앞의 책, 157쪽. 그러나 여기에서 간과할 수 없는 것은 고려 중기 이래로 전개되어 갔던 사회경제적 배경이다. 말하자면 공물을 대납하게 했다면 절가대납한 공물을 구입할 수 있을 정도로 민간생산과 유통경제가 발달해 있어야 한다. 이러한 여건을 구비하지 못한 상태에서는 공물의 징수가 현물세의 직접 징수로 나타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문종대 부분적이나마 공물의 절가대납을 허용하고 있는 것은 그렇게 해도 상관없을 정도의 조건이 마련되어 가고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예종 9년(1114)에 모든 직물류의 공물까지 대납화되고 있는 실정도 이런 점에서 주목된다. 즉 貢中布 1필은 平布 1필 15척으로, 貢紵布 1필은 평포 2필로, 貢綿紬 1필은 평포 2필로 절가대납하도록 규정하고 있다.0899)≪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貢賦 예종 9년 10월. 직물류의 생산에서 麻布였던 평포로의 절가대납이 허용되고 있는 것은 공부제 자체의 질적 발전이다. 뿐만 아니라 마직생산에 있어 항상적 잉여가 존재했음을 입증하는 것이기도 하다.0900)고려사회에서 麻는 자가수요와 공납용으로서의 가치 이외에도 가장 광범한 교환수단으로써 그 의미가 절대적인 것이었다. 마직업에 대해서는 魏恩淑, 앞의 책, 184∼186쪽 참조. 즉 직물생산을 평포로 대납하도록 한 것은 절가대납된 직물을 구입할 수 있을 정도로 민간생산이 성장했던 일면을 시사하고 있다.0901)姜晋哲,<韓國學硏究 半世紀 中世史>(≪震檀學報≫57, 1984), 42쪽.
다른 한편으로 공물의 조달과정이 직접적인 현물세의 수취에서 절가대납으로 이행하면서 아울러 유통경제의 활성화도 수반되었을 것이다.

 12세기 전후로 전개되었던 공물의 절가대납은 농민경영의 항상적 잉여를 기반으로 하고 있지만, 동시에 공물의 절가대납은 또 민간생산의 발달을 촉진시킴으로써 공물의 대납화를 확산시키는 역할을 했을 것이다. 13세기에 이르러 공물을 대납하는 청부업자까지 등장하고 있는 실정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된다. 이 시기 공물대납업자는 ‘諸司官吏’·‘謀利之人’·‘貨殖之徒’·‘郡人住京者’ 등으로 지칭되고 있었다.0902)≪高麗史≫권 84, 志 38, 刑法 1, 職制 충렬왕 22년 5월 및 권 78, 志 32, 食貨 1, 貢賦 충숙왕 후8년 5월·공민왕 원년 2월. 이외 고려 후기 공물대납과 관련된 연구로는 金東哲,<고려말의 流通構造와 상인>(≪釜大史學≫9, 1985), 4∼7쪽 및 朴鍾進, 앞의 글, 177∼179쪽 참조. 이들은 지방의 공물을 미리 바친 후 나중에 민으로부터 그 대가의 배를 받기도 하고, 심지어는 2∼3년 내지 4∼5년치의 공물을 미리 징수하기도 하였다.0903)≪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貢賦 공민왕 원년 2월. 이는 당시 공물대납자가 자신의 물건으로 대납 업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물품을 미리 수집, 비축할 수 있는 여건이 갖추어져 있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충렬왕 22년(1296)에 豪勢之家가 민간의 細布·綾·羅·韋席 등을 강제로 구입하여 민폐가 된다는 예도0904)≪高麗史≫권 84, 志 38, 刑法 1, 職制 충렬왕 22년 5월. 이런 사실을 설명해 주고 있다. 이와 같은 사례는 비록 강제로 구입하는 형태이기는 하지만 민간생산의 잉여가 존재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들 물품 가운데 세포도 숙련된 기술이 필요했지만, 특히 능·라 등의 고급견직물은 고려 전기까지만 해도 중앙이나 지방의 관청수공업에서 생산하던 것이었다.0905)홍희유, 앞의 책, 93쪽.
魏恩淑, 앞의 책, 169쪽.
그러던 것이 고려 후기에는 민간에서 구입할 정도로 민간생산이 질적·양적으로 성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이와 같이 고려 후기에 전개된 공부제의 변모와 관련하여 현물세의 수요가 증대되면서 새로운 현물세가 부가된다. 이를테면 고려 후기 집중적으로 등장하는 常徭·雜貢의 품목이 그것이다. 상요·잡공은 고려시기 세제의 내용과 관련하여 그간 연구자들이 주목하여 온 세목이다. 왜냐하면 상요·잡공의 품목을 어떻게 인식하는가 하는 것은 고려시대 세제의 기본품목을 설정하는 문제와 직결되어 있기 때문이다.0906)李貞熙, 앞의 책, 17∼22쪽. 그런데 연구자들 사이에 이견이 있지만, 상요·잡공이나 공부가 다 같이 현물세의 수취라는 점은 인정하고 있다. 공부제의 변모는 상요·잡공의 실체 및 변화방향과 관련하여 보다 부각될 수 있다. 따라서 상요·잡공에 대한 기존의 연구가 어떠한지 잠시 살펴본 후, 상요·잡공의 내용과 변화를 검토해 보기로 하겠다.

 상요·잡공이≪高麗史≫에 최초로 나타나는 것은 고종 13년(1226)의 일이다. 즉 “전라도의 기근이 심하므로 甲申年(고종 11년) 이후의 三稅, 상요·잡공은 감면해 주도록 하라”고 하고 있다.0907)≪高麗史≫권 80, 志 34, 食貨 3, 賑恤 고종 13년. 이 내용으로 미루어 상요·잡공은 적어도 고종 11년 이전에는 이미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고려사≫의 기록만으로는 상요·잡공의 존재에 대해서는 알 수 있을지언정 그 실체에 대해서는 알기 어렵다. 이에 대해 구체적 내용을 알려주는 유일한 사료는 鄭道傳의≪朝鮮經國典≫賦稅條이다. 이 기사의 내용은 앞으로 서술하고자 하는 내용에 중요한 참고가 되므로 관련된 부분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국가의 賦稅之法은 租는 토지에 대해 내고, 상요·잡공은 그 지역의 소출에 따라 관부에 납부하니 대개 唐의 租·庸·調를 모방한 것이다. … 그러나 조는 토지의 開荒을 조사하여 소출의 수효를 계산할 수 있지만, 상요·잡공은 다만 관부에서 바치는 액수만을 정해 놓았을 뿐, 호에서 무슨 물건을 내는 것이 調가 되며, 身에 대해서 무슨 물건을 내는 것이 용이라는 것을 분명히 말하지 않고 있다. 그리하여 관리들은 이런 약점을 이용하여 함부로 수탈하므로, 민은 더욱 곤궁해지고 豪富들은 곳곳으로 피해 국가의 재용은 도리어 부족해졌다(鄭道傳,≪朝鮮經國典≫上, 賦典 賦稅).

 상요·잡공에 대한 기존의 연구를 살펴보면, 위 사료에서 정도전이 상요·잡공을 용·조에 대비시킨 점을 그대로 받아들인 견해가 최초이다.0908)今掘誠二,<高麗賦役考覈>(≪社會經濟史學≫9­3·4·5, 有斐閣, 1939). 상요·잡공의 내용에 대한 구체적 설명은 없지만 이 연구의 핵심은 3세=조, 상요=용, 잡공=조로 파악하는 것이다. 이 견해의 가장 큰 약점은 3세를 조에 한정시켜 본 것인데, 3세는 사료상 분명히 조·용·조를 모두 포함하고 있으므로0909)≪高麗史節要≫권 20, 충렬왕 4년 7월. 기존의 연구자들이 모두 비판하고 있다.0910)朴鍾進,≪高麗時代 賦稅制度 硏究≫(서울大 博士學位論文, 1993), 50∼54쪽.
李貞熙, 앞의 책, 175∼191쪽.

 그러나 이외에도 이견이 적지 않다. 우선 상요·잡공을 공물의 구성요소로 이해하는 견해가 있다.0911)姜晋哲,<農民의 負擔>(앞의 책), 281∼284쪽. 또 잡공은 공물의 구성요소로 파악하되, 상요는 요역 가운데 지방에서 부과하는 役으로 이해하는 연구도 있다.0912)金載名,≪高麗 稅役制度史 硏究≫(韓國精神文化硏究院 博士學位論文, 1994), 125∼148쪽. 이들 견해의 한계성은 상요·잡공의 용례가 고려 후기에 집중된다는 특성을 설명하기 곤란하다는 점이다. 이러한 점을 고려하여 상요·잡공은 공부의 구성요소이기는 하지만 고려 후기 공부의 절가대납과 관련하여 집중적으로 부과된 것으로 이해하는 견해도 있다.0913)李貞熙,<高麗後期 徭役收取의 實態와 變化>(≪釜大史學≫9, 1985), 172∼183쪽. 상요·잡공을 공부와 동일한 것으로 보는 이유는 상요·잡공을 고려 전기 이래 나타나는 徭貢의 약칭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0914)≪高麗史≫권 80, 志 34, 食貨 3, 賑恤 충선왕 24년. 그러나 요공이 상요·잡공과는 별개의 세목으로 해석되는 사료가0915)≪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貢賦 충숙왕 원년 정월. 존재하는 만큼 구별하는 것이 합리적으로 생각된다.

 또 고려 후기 役과 布가 절가대납되는데, 상요·잡공은 바로 역과 포를 토산물로 대납하는 것이라는 연구도 있다.0916)李惠玉,<高麗時代 三稅制에 대한 一考察>(≪梨大史苑≫18·19, 1982).
―――,≪高麗時代 稅制硏究≫(梨花女大 博士學位論文, 1985), 132∼138쪽.
그러나 상요·잡공이 역과 포의 대납을 위한 현물세라는 견해는 조선 태조 원년(1392)의 기사를 살펴보면 모순이 있음을 알 수 있다.

戶布를 징수한 것은 잡공을 면제하기 위해서인데, 前朝말에는 호포를 바치고 있는데 또 잡공을 징수하여 민폐가 되고 있으니, 지금부터 호포는 모두 면제하소서(≪太祖實錄≫권 1, 태조 원년 7월 정미).

 즉 잡공을 면제하기 위해 호포를 부과하고 있는데 만일 잡공을 포의 대납을 위한 현물세로 이해한다면, 調布→잡공→호포의 결과가 되어 버린다. 이런 문제점 때문에 이 견해는 이후 수정·보완되었다. 상요·잡공은 고려 후기에 부가되는 세목으로서 용·조에 이중으로 부과된 세목, 이를테면 身과 戶를 매개로 하여 토지소출로 납부하는 현물세라는 것이다.0917)이혜옥,<고려후기 수취체제의 변화>(≪14세기 고려의 정치와 사회≫, 민음사, 1994), 203쪽.

 이상의 연구동향을 간략하게 정리하면 상요·잡공의 실체는 고려 후기에 부가된 현물세가 된다. 그러면 고려시기 공물이라는 세목이 있는데 왜 고려 후기 상요·잡공이라는 현물세가 부가되는 것일까. 공물이나 상요·잡공이 모두 현물세라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상요·잡공의 등장 배경은 위에서 언급한 고려 후기 공물제도의 변모에 있다는 것에 귀착된다. 말하자면 공부제의 변화와 아울러 고려 후기 현물세의 비중이 증대되는 상황이 전개되었다는 점이다. 그 배경으로는 고려 전기 전업적으로 물품을 생산하던 所제도의 붕괴와, 고려 후기 대원관계로 인한 공물의 수요 증대, 농장의 확대로 인한 담세자의 감소, 그리고 고려사회가 도달하고 있던 생산수준 내지 유통경제의 수준 등을 지적할 수 있겠다.0918)李貞熙, 앞의 책, 182∼186쪽.

 그러면 이와 같은 배경을 기반으로 부가된 상요·잡공의 내용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 이에 대해서 앞의≪조선경국전≫의 내용을 다시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우선 그 내용 가운데 “상요·잡공의 품목에 대해 지방관청에서 납부해야 되는 수량만을 정해 놓았을 뿐 구체적인 품목에 대해서 정해 놓지 않았으므로 수탈의 소지가 있다”고 하였는데 이는 상요·잡공의 징수가 개별민호에게 부과되던 調가 아니라, 지방관청을 대상으로 한 점에서 공물과 관련되어 있음을 짐작하게 한다.

 상요·잡공의 품목이 공물과 관련되어 있음을 시사하고 있는 만큼, 공물의 성격을 통해 상요·잡공의 품목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공물은 국가에서 지방관청을 대상으로 수취할 때는 현물세의 형태를 취하고 있지만, 군현에서 개별민호에 부과할 때는 그 상당부분을 노동력의 징발인 貢役의 형태로 수취하고 있었다. 상요의 의미는 문자 그대로 ‘常時徭役’의 뜻으로 해석되므로 노동력의 징발과 밀접한 연관이 있음을 알 수 있다.≪조선경국전≫에서 상요를 ‘有身則出某物’이라 한 것은 이런 점에서 주목된다. 즉 상요를, 노동력 징발을 매개로 징수하는 품목으로 인식하고 있던 까닭에, 호를 매개로 하는 잡공과 구별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비해 잡공의 문자적인 의미에서 살펴보면 ‘잡다한 공물’의 뜻으로 해석할 수 있겠다. 이를테면 충목왕 즉위년(1344)에 李齊賢이 “지난번에 강제로 거둔 포를 다음해의 잡공으로 충당할 것”을 건의한 내용에서0919)≪高麗史≫권 110, 列傳 23, 李齊賢. 포가 잡공의 품목임을 알 수 있다. 또 창왕 때 尹紹宗 등은 林堅味 일당의 재산을 잡공에 충당하도록 상소하였다.0920)≪高麗史≫권 126, 列傳 39, 姦臣 2, 李仁任. 여기서 임견미 일당의 재산을 잡공에 충당하도록 한 것으로 미루어 적어도 잡공이 노동력의 직접징발이 아님은 분명해진다. 이로써 잡공은 포를 비롯하여 잡다하게 바치는 물품이라고 정리할 수 있겠다. 게다가≪조선경국전≫에서 잡공을 ‘有戶則出某物’이라 한 점도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요컨대 정도전은 잡공을 상요의 인신수취와 달리 호를 대상으로 수취하는 현물세로 파악하고 있었다.

 즉 잡공은 공물을 구성하는 품목 가운데 개별민호의 노동으로 조달될 수 있던 물품이 아니었을까 한다. 정도전이 상요와 잡공의 품목을 굳이 구분하여 파악하고 있는 것은, 상요와 잡공이 동일한 현물세이면서도 그 과세대상이 身과 戶로 구별되는 요소가 있었기 때문으로 보여진다.

 그러면 고려 후기에 부가된 상요·잡공은 조선왕조가 성립되면서 어떻게 변모하고 있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우선 상정할 수 있는 것은 고려에서 조선왕조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공물의 내용이 달라질 것이라는 점을 예상할 수 있다. 그 배경은 다음의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고려 전기 공물의 주요한 부담자였던 소가 15세기에 이르면 완전히 해체된다는 점이다. 그렇게 되면 조선초의 군현민이 부담하던 공물의 품목도 당연히 고려시기와는 차이가 날 것이다. 이를테면 고려시대에 절가대납하도록 했던 소가죽과 소뿔 등이 조선조에는 잡공의 품목으로 되었다.0921)≪世宗實錄地理志≫권 150, 慶尙道. 또 고려에서는 炭所나,0922)≪新增東國輿地勝覽≫권 7, 京畿 驪州牧 古跡 登神莊. 驛의 중요한 부담이던 柴炭貢이0923)≪高麗史≫권 80, 志 34, 食貨 3, 賑恤 恩免之制 충렬왕 24년 정월·34년 8월 및 공민왕 12년 5월. 조선초의 경우 京畿民戶의 중요한 잡공이 되었다.0924)≪太宗實錄≫권 1, 태종 원년 정월 갑술. 본래 고려에서 각 驛의 시탄공에 대한 용례는 상요·잡공과 병렬되어 나타나는 등, 잡공과 구분되는 품목이었던 것이다. 이외에도 조선초의 잡공에 대한 품목으로는 馬草·材木·油蜜·厚紙·華席·脯脩 등이0925)≪太宗實錄≫권 13, 태종 7년 정월 갑술.
≪世宗實錄≫권 23, 세종 6년 3월 갑진.
있다. 이 가운데 후지의 경우는 고려시기에 紙所가 있었던 점으로 미루어 상당수가 소의 공물이었다.

 다음으로 들 수 있는 것은 새 왕조의 성립과 더불어 세제개혁이 단행되었던 점과 결부된다. 태조 원년(1392) 10월에 貢賦詳定都監을 설치하여 공물을 상정하도록 하고 있다. 당시 개혁의 방향은 고려시대의 제도적 폐단을 제거하고, 토지의 산물에 의거하여 공부의 등급을 정하되 납부할 액수를 減量하는 것이었다.0926)≪太祖實錄≫권 2, 태조 원년 10월 갑신.

 따라서 우선 그 폐단을 제거하는 일환으로 고려 후기 민의 원성이 되었던, 橫斂·豫徵·加徵·공납청부 등의 사례들이0927)李惠玉,<高麗時代 貢賦制의 一硏究>(≪韓國史硏究≫31, 1980), 86∼87쪽. 규제되었을 것이다. 또 공부의 납부액을 감량하는 조처로써 민에게 여러 가지로 부가되는 결과가 되었던 調布0928)≪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貢賦 예종 9년 10월.·공부·호포·상요·잡공 등의 현물세에 대해서도 대폭적인 손질을 가했을 것이다. 이 때 개혁의 방향은 고려 후기 폐단으로 작용했던 절가대납 대신에 현물의 수취였던 것 같다. 즉 잡공을 면제하는 대가로 징수한 호포가 결과적으로 잡공과 함께 부과되는 현상을 보이자 호포를 폐지하고 잡공을 존속시키는 방안을 채택하고 있는 것이다. 종래 중복되게 존재했던, 포(調)·공부(貢布, 貢役, 토산물)·상요·잡공·호포 등의 현물세를 공부로 단일화하는 작업으로 귀착되었다. 이는 조선조에서 調가 공물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 데서 입증된다.

 조선왕조에 있어서 기본세목은 “有田則有租 有身則有役 有戶則有貢物”0929)≪世宗實錄≫권 32, 세종 8년 4월 신묘.이라 한 바와 같이 조세·요역·공물로 정리되고 있다. 그리고 공물은 “有田則有租 有戶則有調”0930)≪世宗實錄≫권 42, 세종 10년 12월 을해.라 하여 調와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그 결과 고려시기 조·포·역·공부로 정리되는 수취체제는 고려 후기 공부제의 변화를 거치면서 조세·공부·요역의 체계로 성립되었던 것이다.0931)고려시기 租·庸·調 및 貢物의 세제에서 조선조 租稅·貢物·徭役으로 나타나면서 調와 공물이 동일한 것으로 인식되다가, 드디어 調의 용례마저 소멸하게 된다. 이러한 것은 세제변화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요컨대 삼국시대 이래 인신적 색채가 가장 오래 존속되었던 調布의 수취가 신라통일기 이행과정에서 戶布의 수취로 되었다가, 조선왕조의 성립과 더불어 완전히 자취를 감추게 된 것이다. 調의 소멸은 고려 후기 공부제의 질적 변모를 바탕으로 한 산물이며, 다른 한편으로 이 시기 광범하게 전개되었던 농민층의 저항이 가져온 결실이었을 것이다(李貞熙, 앞의 책, 188∼190쪽).

 이와 같이 여말선초 세제변화를 배경으로 조선초의 공부제가 성립된 이상, 상요·잡공의 성격은 조선초와 고려 후기가 동일하지 않다. 우선 조선초의 상요는 기록에 ‘상요’만으로는 나타나지 않지만, 앞에서 언급한 ‘常時徭役’·‘常例徭賦’ 등이 상요와 같은 의미로 보여진다. 왜냐하면 이들 용례는 공물이 군현민의 노동력에 의해 조달되는 경우의 요역을 뜻하는 만큼 고려 후기 상요와 연결되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조선초의 잡공은, 기록에 나타나는 품목들을 살펴보면 글자 그대로 ‘잡다하게 바치는 공물’이며, 잡공의 물품은 민의 개별노동으로 생산되는 것도 있지만 요역징발의 방식으로 납부되는 품목도 많다. 이런 점을 고려해 보면 잡공은 정부에서 군현에 부과하는 물품 그 자체를 강조할 때 사용되는 용례로서 상요보다 포괄적인 의미를 지닌, 즉 공물의 품목이 잡다하기 때문에 불려진 용례가 되고 있다. 특히 조선에서의 요역의 용례가 役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고려시기와 달리 요역에 의해 생산된 물품까지 아울러 뜻하는 사례가 많다는 점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게 생각된다.0932)田川孝三,≪李朝貢納制の硏究≫(東洋文庫, 1964), 37쪽 참조. 요컨대 조선시대의 상요·잡공은 고려시대처럼 고유명사로서의 세목이 아니라 공물이 조달되는 성격을 지칭하는 보통명사로 바뀌었던 것이다.0933)尹用出,≪17·18세기 徭役制의 변동과 募立制≫(서울大 博士學位論文, 1991), 17∼18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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