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9권 고려 후기의 정치와 경제
  • Ⅱ. 경제구조의 변화
  • 2. 수취제도의 변화
  • 2) 공부와 요역
  • (2) 토목공사에서의 부역실태

(2) 토목공사에서의 부역실태

 국가권력이 人丁을 징발하여 사역시킨 요역의 형태는 현물세의 공납과 관련된 貢役, 축성이나 營建과 관련된 土木工事의 工役, 그 외 輸役을 비롯한 잡다한 勞役이 있었다. 개별민호의 입장에서 보면 이들 요역종목은 모두 민의 노동력을 징발하는 것이다. 그러나 국가권력의 차원에서 보면 국가-군현, 국가-개별민호의 두 가지 측면으로 구분된다. 따라서 貢役은 개별민호의 관점에서 본다면 당연히 요역의 한 종목이지만, 국가-개별민호의 차원에서 본다면 3세와 구별될 수도 있다. 즉 협의적 차원에서의 요역은 조·용·조 가운데 용과 관련된 것이므로, 貢役은 3세와는 독립된 공물과 관련된 요역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협의적 측면에서 본다면, 요역종목 가운데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토목공사와 관련된 역사이다.

 고려에서의 工役은 축성, 궁궐·관아·사찰 등의 營造, 제방·제언의 축조, 官船製作 등이 있었다. 이 가운데 특히 비중이 큰 것은 축성과 영건역이었다. 고려 전 시기를 통해 축성의 횟수는≪高麗史≫지리지에 나타난 것만 해도 170여 회에 이르고 있다. 영건역은 궁궐·관아의 영조 외에도 특히 도참사상과 불교의 융성으로 인한 離宮·사찰의 영조가 끊임없이 지속되었다. 대체로 토목공사의 역사는 대규모의 노동력이 필요한 경우가 많을 뿐 아니라 오랜 기간이 소요되는 특성이 있다. 그러므로 요역 징발대상의 범위가 양반에까지 미칠 정도로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부과되든지, 品從이나 군인 등의 동원 사례라든지, 심지어 노동부대인 工役軍이 존재했던 배경은 공역의 이러한 특성에 기인하는 것이다.

 고려 전기에 있어서 공역의 赴役실태는 대체로 역의 직접 징발이지만, 후기에 이르러 역의 대납이 가능해지는 것 같다. 왜냐하면 고려 전기에는 조·포·역이라 하여 역의 직접징발로 표현되고 있는 것에 비해, 후기에는 3세를 지칭할 경우 조·포·역이라는 용례는 보이지 않고 희소하긴 하지만 租·庸·調라 하여 용이라는 명칭이 사용되고 있다.0934)≪高麗史節要≫권 20, 충렬왕 4년 7월. 이것은 단순히 세제의 용례에서만 나타나는 변화가 아니라 내용상의 변화도 포함되는 것으로 생각한다. 용의 용례는 唐制에 있어서는 正役, 즉 중앙정부에서 동원하는 요역에 대한 物納이었다. 예컨대 1일을 闕役하는 경우 絁絹이면 3尺, 포이면 3尺 7寸 5分의 비율로 징수했는데, 당에서는 역의 직접징발보다 용을 납부하는 것이 더 일반적이었다.0935)曾我部靜雄,≪均田法とその稅役制度≫(講談社, 1953), 238쪽. 당에서도 본래 3세는 租·役·調의 용례가 원칙이었는데,0936)李貞熙, 앞의 책, 25∼26쪽. 흔히 조·용·조로 지칭되고 있는 것은 이런 상황에 기인하고 있다. 고려 전기의 경우 3세의 명칭이 조·포·역이라 하여 역으로만 표현되고 있는데 비해 용의 용례는 후기에 한해서만 보이고 있다든지, 정도전이≪조선경국전≫에서 “有身則出某物爲庸”이라 하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 고려에서도 용은 역의 물납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고려 후기 3세의 용례가 조·용·조로 표현되고 있는 것은 역의 수취과정에서 물납이 전개되었던 변화와 관련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고려 후기 공물의 납부제에서도 대납이 확산되어 간 점과 맥을 같이 한다. 왜냐하면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공물의 상당부분은 민호의 노동력을 수취한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고려 후기에 이르면서 공물의 절가대납이 허용되었던 점과 아울러 토목공사의 역에서도 역의 물납이 가능해지는 사회경제적 상황이 전개되고 있었다.

 우선 고려 후기 수취체제는 대토지소유의 확대와 더불어 민의 자립적 재생산을 위협할 정도로 지나치게 부담이 되고 있었다. 12세기를 전후한 고려사회는 고려 초기 이래 꾸준히 발전시켜 온 농업생산력의 발달과, 유통경제의 활성화 등으로 인해 사회적 생산력이 확대되는 가운데 점차 소농민 경리도 성장되어 갔다. 그러나 한편으로 고려 중기 이후 난숙한 귀족문화를 지탱하기 위해 국가에 의한 수취체제가 강화되고,0937)≪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租稅 문종 7년 6월조에는 稅米 1碩當 耗米를 1升에서 1斛당 7升으로 증액하고 있다. 모미를 증액시킬 수 있었던 것은 수취강화에 그 목적이 있겠지만, 역으로 그 정도로 생산력의 발전이 있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채웅석,<12, 13세기 향촌사회의 변동과 ‘민’의 대응>,≪역사와 현실≫3, 1990, 54쪽). 지배층의 대토지소유의 확대 및 강제적 교역행위 등을0938)고려시대 권세가의 교역을 통한 이익추구는 피지배층에 대한 강제적 교역형태인 抑買·互市·反同 등의 방법으로 이루어졌다(李景植,<16世紀 場市의 成立과 그 基盤>,≪韓國史硏究≫57, 1987). 통한 수탈도 강화되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민이 수족도 놀릴 수 없을 정도로 가중한 力役의 수탈에 시달리자, 群盜가 되든지0939)≪高麗史≫권 79, 志 33, 食貨 2, 農桑 인종 6년 3월. 무뢰배가 되어 유언비어를 퍼뜨리는 등 노골적으로 저항하였다.0940)≪高麗史節要≫권 14, 희종 6년 4월. 또 호에서 이탈하여 避役하는 것과 같은 소극적인 저항을 꾀하기도 하였다.

 이후 민의 피역저항은 농장의 확대와 상호관련되어 더욱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농장의 발달로 인해0941)魏恩淑, 앞의 책, 5∼9쪽.
안병우,<고려후기 농업생산력의 발달과 농장>(≪14세기 고려의 정치와 사회≫), 295∼300쪽.
인구의 탈점과 아울러 자진해서 농장으로 들어가는 투탁의 형태가 늘어갔다. 게다가 원간섭기에서는 피역의 방안으로 고려의 영역을 벗어나 원의 영역으로 이주하는 형태가 광범위하게 전개되었다.0942)김순자,<원간섭기 민의 동향>(위의 책), 384∼388쪽. 농장에 투탁하거나 원으로 이주한 자들은 면세·면역되었다.0943)≪高麗史≫권 28, 世家 28, 충렬왕 4년 7월 을유조에 權貴들이 민을 모아 조·용·조 3세를 포탈하고 있다는 사례가 참조된다. 하지만 결국 殘民의 부담 증가로 귀결되어 연쇄적인 유리 현상을 초래하였다.0944)鄭道傳,≪朝鮮經國典≫上, 賦典 版籍.

 이와 같이 重斂이나 역역의 가중에 시달리거나 토지에서 이탈된 농민들은 살길을 찾아 다른 방면으로 나가게 되었다. 예를 들면 요역을 피하기 위해 수천, 수만에 달하는 많은 사람들이 승려가 되었다거나,0945)≪新增東國輿地勝覽≫권 47, 江原道 淮陽都護府 山川 金剛山. 혹은 유리하여 遊手가 되거나, 농업을 포기하고 工商에 종사하든지 심지어 도적이 되기도 했다.0946)鄭道傳,≪朝鮮經國典≫上, 賦典 經理. 그런데 유리한 농민들이 택한 길 가운데 유수가 되었다는 점은 특히 주목된다.

 국가에서는 노동력의 부족을 해소함과 아울러 유리하지 않은 민호의 요역부담을 경감시키는 방안으로 品從이나 僧徒 및 군인을 징발하는 등 요역대상자가 아닌 사람들을 동원하는 이례적인 조처를 취하기도 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유수들을 활용하는 방법으로 물납, 혹은 부분적인 雇立이라는 방안을 강구하였던 것 같다.

 이를테면 大市를 改營할 때 5部坊里의 양반호에서 米粟을 거두어 사람을 고용해서 부역시킨 희종 4년(1208)의 사례가 있다.0947)≪高麗史≫권 21, 世家 21, 희종 4년 7월 정미. 여기서의 미속은 양반호에게 역을 부담하는 대가로 징수한 것이다. 보통 양반이 요역을 부담할 경우 직접 요역을 부담하기보다 특수한 혜택이 주어졌다. 말하자면 노비로 하여금 代立케 하는 방법과 물납이 그것이다. 양반이 요역을 대립하는 사례는 고려 전 시기에 걸쳐 가능했지만, 물납의 경우는 고려 후기에 이르러 보편화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왜냐하면 역의 代役과는 달리 역을 물납하게 되면 부족해진 만큼의 노동력을 충당할 수 있는 상황이 존재하고 있어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즉 역의 물납으로 징수한 미속을 경비로 삼아 사람을 사서 供役시킬 수 있었던 것은, 고려 후기 유휴노동력이 존재하고 있던 상황에서 가능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러한 역의 물납은 요역 대상자가 아닌 품종이나 신역의 부담자인 其人役에서도 적용되고 있었다. 즉 충혜왕 복위 4년(1343)에 諸君 이하 대신에 이르기까지 役夫를 내어 鍮銅을 납부케 하는데, 하루 闕役하는 경우는 기인의 예와 같이 포를 거두게 한 데서 알 수 있다.0948)≪高麗史≫권 83, 志 37, 兵 3, 工役軍 충혜왕 후4년 5월. 여기서의 역부는 백관의 품계에 따라 낸 품종이다. 품종이 궐역하였을 때 기인의 예에 따라 포를 징수했다는 것은, 기인의 궐역시 포를 징수하는 처벌규정이 마련되어 있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왜냐하면 포의 징수가 궐역하는 대신에 취해진 벌금의 의미를 지니고 있지만, 체형을 가하는 것이 아니라0949)丁夫와 雜匠의 경우 징발을 당하고도 어물어물하고 떠나지 않으면 체형을 가하고 있는 점이 참고된다(≪高麗史≫권 84, 志 38, 刑法 1, 戶婚). 포로 납부케 한 것은 고려 후기의 변화가 아닌가 생각된다. 물론 이 자체가 바로 조선 전기에 나타나는 代立의 공인과 같은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궐역에 대해 포의 수취를 허용하고 있었던 것은, 고려 후기 역제 변화에 기인된 것임과 동시에 대립의 공인이 제도화되기 전의 예비단계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한편 양반의 경우에는 요역의 수취가 대역이나 役價 수취 등 역의 물납이 확인되지만, 민호의 경우에는 유감스럽게도 구체적인 기록이 없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근거를 바탕으로 민호의 경우도 가능해진 것이 아닐까 짐작된다.

 첫째, 앞에서도 지적한 바와 같이 고려 중기부터 전개되었던 유망현상이 고려 후기 토지탈점의 확대와 병행하여 토지에서 이탈된 인민들이 증가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이들 유리민만 역부로 고용된 것은 아니고 빈농 중에서 고용되는 사례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빈농의 경우는 역시 借耕을 통해 농사를 지었을 것이며, 또 호에 편제되어 역의 파악대상이었던 만큼 역부로 고용되었던 노동력의 급원은 호의 파악에서 분리된 이들 유망민이 많은 비중을 차지할 것이다. 이처럼 고용할 수 있는 인적 자원이 갖추어져 있는 상황에서는, 고려 전기처럼 역의 직접 징발만을 고수하기보다는 물납으로 대체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요컨대 역의 물납은 농민층의 입장에서도 무상의 노동력의 수취를 줄임으로써 자립적 재생산을 보장받고자 했을 것이지만, 집권층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여서 농민경영의 안정이 농민의 이탈을 막고 안정적인 수취를 할 수 있다면 굳이 역의 물납을 반대했을 리 없다. 당시 농장의 확대가 광범위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던 점을 고려하면 지배층의 입장에서도 대립제나 물납제가 농장의 경영에 유리한 만큼 반대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둘째, 고려 후기 국가에서 파악할 수 있는 노동력의 부족현상이 심화되면서 遠地의 인민을 동원해야 하는 비효율성이 문제되었을 것이다. 공민왕대 加定別抄가 요역과 방수를 부담하기 위해 就役處와 防戍地의 먼거리를 왕래하는 불편이 따르자 이를 개선하는 방안으로 沿海郡民을 모두 방수에 충당하되 요역을 면제시키고, 별초는 방수를 면제하는 대신 연해군민의 요역까지 부담하도록 한 사례는 이를 입증하고 있다.0950)≪高麗史≫권 82, 志 36, 兵 2, 宿衛 공민왕 5년 5월. 사실 1개월이 소요되는 役事에 전라도나 경상도처럼 遠道에 속한 지역에서 인정을 징발할 때는, 왕래일자를 포함해서 50여 일이 소요될 뿐 아니라 역사를 끝내고 귀환하는 동안 많은 질병자나 굶어 죽는 사람도 있었던 것이다.0951)尹用出,<17·8세기 役夫 募立制의 성립과 전개>(≪韓國史論≫8, 서울大, 1982), 117∼118쪽.

 당시 교통사정의 불편은 고려 전기부터 속군현에서 백여 리나 떨어진 주현까지 왕래하는 데 따른 인민의 고충이 말이 아니었다고 하여 일찍부터 문제가 되어 이를 시정하는 일환으로 속현의 독립화가 이루어지기도 했다.0952)≪新增東國輿地勝覽≫권 27, 慶尙道 玄風縣 樓亭 仰風樓. 또 京中과 가까운 京畿·楊廣·交州지역, 특히 경기민은 다른 지역에 비해 손쉽게 인정을 징발할 수 있다는 지리적 위치로 인해 요역의 부담이 과중했음은≪고려사≫에 잘 나타나 있다. 이런 점을 감안해 보면 굳이 遠地의 인정을 징발하기보다는 물납제를 허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셋째,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요역과 상호중첩되어 실현되었던 공물에서도 절가대납이 확산되었던 후기의 사회경제적 변동을 감안하면 굳이 요역의 직접 징발만을 고수했을 리는 없을 것이다. 따라서 공역의 대납 및 물납이 전개되고 있었던 점과 관련하여 요역의 물납도 허용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특히 고려 후기에는 노동력을 물납으로 대체할 수 있을 정도의 경제적 여력을 갖춘 민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점도 주목된다.

 예컨대 고려 후기 토지소유의 불균등은 계급분화 빈부격차의 심화를 가져와 한편으로는 ‘遊手之徒’가 창출되는 가운데, 다른 한편으로는 농업생산력의 발전을 기반으로 부를 축적한 ‘富民’·‘富室之家’·‘富强兩班’ 등으로 표현되는 자들이 발생하고 있었다.0953)안병우, 앞의 글(1994), 328∼334쪽. 禁內를 개축할 때 돈이 부족하자 人家에서 돈을 빌려 재목과 기와를 샀다고 하는 충숙왕 복위 2년(1333)의 기사가 있다.0954)李 穀,≪稼亭集≫권 2, 記 禁內廳事重興記. 이 때 돈을 빌려준 인가는 바로 부민이었을 것이다. 요역징발에 있어서 양반이라도 돈이 없는 경우 직접 就役하였듯이0955)≪高麗史≫권 29, 世家 29, 충렬왕 6년 3월 임자. 재력이 없는 빈농층은 직접 취역을 하지만, 생산적 잉여를 갖춘 사람들은 물납을 매개로 요역문제를 해결하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이와 같이 민호의 부역징발에서 역의 물납이 허용되는 상황이 전개되면, 물납으로 감소된 만큼의 노동력이 보완되어야 할 것이다. 즉 부분적인 고용노동의 현상이 그것이다. 공양왕 2년(1390) 도평의사사의 廳舍를 새로 지을 때 나무를 자르거나 塼石을 마련하는 작업에 ‘雇直之徒’를 사역시켰으므로 백성들은 한 달 동안 작업을 하면서 힘든 줄을 몰랐다고 한 사례가 있다.0956)≪新增東國輿地勝覽≫권 5, 開城府 下 古跡 都評議使司 鄭道傳記. 보통 궁궐이나 관청을 영조할 경우 대규모의 노동력이 필요한 부분으로는 기초공사, 재료를 마련하고 운반하는 작업, 건물조성 등의 세 단계가 있다. 이 중에서 기술적인 작업을 제외한 대부분은 일반민의 요역노동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상례였다. 그런데 재료마련의 노동에 고용노동이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외에 양반호로부터 米粟을 거두어 ‘就賃供役’하고 있다거나 또 충렬왕대에도 양반 가운데 僕隷가 없는 자는 祿牌를 팔아서 ‘雇傭赴役’하고 있다.0957)≪高麗史≫권 29, 世家 29, 충렬왕 6년 3월 임자. 신역이라 할 수 있는 기인역도 포로 대납하든지 혹은 ‘雇人代立’으로 수행하고 있었다.0958)≪高麗史節要≫권 35, 공양왕 3년 3월. 심지어 토목공사의 부역에 민호를 전혀 동원하지 않고 완전히 고립제에 의존했던 사례도 있었다. 이를테면 공양왕이 불교와 관련된 역사를 수행하면서 민호를 사역시키지 않고 유수만을 동원시켰던 것이다.0959)≪高麗史節要≫권 35, 공양왕 3년 5월.

 게다가 민호에 의해 수행되던 단순노동 외에 기술자인 工匠의 경우도 고용노동에 의해 동원되기도 했다. 궁궐안 청사를 개축하던 충혜왕 당시 관청에 역부를 청하여 얻지 못하자 사적으로 공장을 고용하고 家童을 사역하여 일을 마쳤다.0960)李 穀,≪稼亭集≫권 2, 記 禁內廳事重興記. 또 重房을 개축할 때 일반 역부는 경군이 맡았지만, 공장의 경우 승려로서 집에 있는 자들이 고용되었는데 다투어 나갔다는 것이다.0961)李 穡,≪牧隱文藁≫권 6, 記 重房新作公廨記. 이 때 공장으로 고용된 사람들의 성격에 대해서는 확실하지 않지만, 임금을 받을 수 있을 정도의 기술자인 것만은 틀림없다.

 특히 이 당시 부역실태에서 주목되는 것은 재목과 기와를 샀다든지, ‘雇車輸材’했다는 점이다.0962)위와 같음. 이러한 사례가 민호의 역을 줄이기 위해 상당히 배려를 한 경우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당시의 고용여건을 짐작하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된다. 시장에서 재목과 기와를 구입한 것은 종래와는 다른 양상이다. 전기의 경우라면 당연히 민의 요역노동에 의해 나무를 자르고 운반했으며, 이것은 당시 경기민을 비롯하여 교주·양광도민의 중요한 工役이었으며 輸役이었다.0963)李貞熙, 앞의 책, 53∼54쪽. 그리고 이들 재료를 운반할 때의 장비도 당연히 민호가 스스로 마련하도록 했는데 이제는 ‘雇車’하고 있었다. 기와의 경우도 고려 전기와 같이 所民의 신역에 의해 충당되는 것이 아니라 기와를 구입하고 있다. 종래 민호의 요역노동에 의존해서만 조달될 수 있던 것들이 구입에 의해 가능해 졌다는 것은, 그 정도로 민간수공업의 성장 내지 유통경제의 기반이 마련되어 있었음을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고려 후기 役事에서 무상의 노동력 수취를 부분적으로나마 고용노동에 의해 축소시켜 주었던 것은 전기에 비해 달라진 점으로 주목된다. 이와 같이 고용노동을 통해 민의 요역노동이 축소된 것은 무신집권 이래 치열하게 전개되어 왔던 농민항쟁의 산물이라 하겠다. 희종대 유직품관인 양반에게 요역이 처음으로 부과되었다든지, 원간섭기인 14세기 개혁정치의 성격이 수취체제상의 모순을 해결하려는 데 집중되어 있었던 것은0964)권영국,<14세기 전반 개혁정치의 내용과 그 성격>(≪14세기 고려의 정치와 사회≫) 참조. 이런 사정을 반영한 것이 아닌가 한다.

 한편 고려 후기 雇立에 의한 부역형태는 주로 중앙정부가 주관하는 요역에 보다 빈번하게 나타나고, 지방관아에서 주관하는 요역동원의 경우에는 지방관의 임의대로 맡겨진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왜냐하면 토목공사의 역을 수행하기 위해 민호를 징발할 경우 遠地之民을 동원함으로써 생기는 문제점이 나타나는 것은 중앙정부의 역이기 때문이다. 또 중앙에서 주관하는 역사는 지방관부의 역사에 비해 대체로 많은 인원이 소요되는 대규모적인 성격을 지닌 것이므로 부분적으로나마 고립에 의한 방법이 채택될 가능성도 높았을 것이다.

 사실 당나라 때에도 있어서도 중앙정부의 역을 수행하는 경우에는 역의 직접 징발보다 역의 물납인 庸이 보다 일반적이며, 지방관부가 주관하는 역사에 있어서는 물납도 가능했지만 주로 역의 직접 징발이었다.0965)한편 이와 달리 고려시대 역의 징발은 당제와 마찬가지로 고려 전기부터 역의 물납이 보편적이었다고 보기도 한다(金載名, 앞의 책, 121∼123쪽). 역의 물납제는 고려나 당 모두가 교통이 불편했던 당시의 상황에서 중앙의 역사가 있을 때 京師까지 遠地의 백성을 징발해야 하는 비효율성 때문에 취해진 조처일 것이다. 비교적 농민층의 경리가 안정되었던 고려 전기에 있어서도 특히 경군의 역역징발이 가혹하여 도망하는 사례가 속출했다든지,0966)경군의 역역 가중에 대하여는 다음의 연구가 있다.
李基白,<高麗 軍役考>(≪高麗兵制史硏究≫, 一潮閣, 1968), 139∼141쪽.
洪承基,<高麗初期 中央軍의 組織과 役割-京軍의 性格>(≪高麗軍制史≫, 陸軍本部, 1983), 59∼61쪽.
李貞熙,<高麗時代 徭役의 運營과 그 實態>(≪釜大史學≫8, 1984), 69∼70쪽.
경기민의 요역부담이 다른 지역에 비해 과중한 폐단이 제기되곤 했다.0967)邊太燮,<高麗時代 京畿의 統治制>(≪高麗政治制度史硏究≫, 一潮閣, 1977), 270∼271쪽. 지리적 위치상 이들은 경중의 역사에 손쉽게 징발할 수 있는 이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상에서 고려 후기 역의 물납제와 고립제가 전개되었음을 살펴보았다. 그러면 토목공사에 있어서 역부를 고용할 경우 역부에게 노동력의 대가를 지불할 경비는 어떤 식으로 마련되었을까. 당시의 국가재정은 농장의 확대라든지 몽고와의 오랜 전란 등으로 극도로 궁핍했던 만큼, 요역대상자로부터 역을 물납하는 대가로 징수한 米·粟·布 등이 주된 자원이 아닐까 한다.0968)品從의 경우 하루 闕役한 대가로 米 1석을 징수한다든지(≪高麗史≫권 28, 世家 28, 충렬왕 3년 7월 경인), 其人의 경우 하루에 1필을 징수하고 있는 사례에서 알 수 있다(≪高麗史≫권 83, 志 37, 兵 3, 工役軍 충혜왕 후4년 5월). 그러나 당시 요역대상자가 납부하는 代役價가 어느 정도였는지 그 구체적인 규정은 알 수 없다. 다만 당제의 경우 代納價나 雇價의 가격이 하루에 능·사·견 등 비단은 3척이고, 布로는 3尺 7寸 5分이었던 점이 참고될 정도이다.0969)≪舊唐書≫권 48, 志 28, 食貨 上, 高祖 武德 7년.

 그런데 고려 후기에 고립제가 상당한 정도로 전개되었다고는 하지만, 고립제가 부역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직접 징발에 비해 그다지 큰 것은 아닐 것으로 짐작된다. 또 물납제 역시 당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궐역하는 자가 개별적으로 납부하는 것이 대부분이고, 조선 후기 정부에 의해 일괄적으로 실시된 收布制의 단계까지는 이르지 못한 것으로 볼 수 있겠다.

 그 원인은 농업생산력의 뒷받침 등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당시 농민들이 한 필의 포를 저축해 둔 집이 적었던 실정은0970)≪高麗史≫권 79, 志 33, 食貨 2, 貨幣 공민왕 5년 9월. 수포제의 시행을 어렵게 만드는 요소였다.0971)고려 후기 麻布의 생산감소는 원지배하의 모시 특수와 관계가 있다. 즉 농민들은 지배층의 모시수탈로 인해 자기경영을 위한 마포의 생산노동을 희생하고 모시생산에 진력해야 했다는 점이 지적된 바 있다(魏恩淑, 앞의 책, 200∼207쪽). 빈농은 자신의 자가수요도 충분하지 못한 상태에서 물납보다는 직접 취역을 택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와 더불어 麻布생산 자체에 소요되는 노동시간량도 제약의 요소였다. 綿布가 15세기 후반기 正布의 자리를 넘겨 받는 이유는 면포가 의류로서 실용적인 가치가 있다는 점 외에도 면포를 만드는 데 드는 노동시간이 마포에 비해 불과 1/5의 노동시간밖에 소요되지 않는 이점이 있었기 때문이다.0972)宋在璇,<16세기 綿布의 貨幣機能>(≪邊太燮博士華甲紀念論叢≫, 三英社, 1985), 391쪽.
魏恩淑, 위의 책, 214쪽.
15세기 후반 이후 군역·요역·공부에 있어서 면포에 의한 대납현상이 전개될 수 있었던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감안해 보면, 고려 후기의 물납제가 보편화되지 못한 일면을 이해할 수 있겠다.

 이와 같이 고려 후기에 전개되었던 물납제와 고립제는 비록 당시 사회경제적 제약으로 인해 많은 한계성을 내포하고 있지만,0973)고려 후기에는 고립제의 비중이 조선 후기와 같이 노동력 부족현상을 메울 수 있는 단계까지는 이르지 못하였다. 또 토목공사에 고용된 역부의 성격도 조선 후기에 등장하는 募軍에 비해 한계성이 있었다. 즉 상당한 정도로 민간수공업이 성장하고 유통경제가 발전했다고 하지만, 조선 후기와 달리 상품화폐경제의 수준까지 발달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 결과 고려 후기 고용역부가 고용될 수 있는 분야는 주로 토목공사에 한하였고, 중앙정부의 통제도 강하게 받았으므로 조선 후기와 같이 ‘賃傭爲業’하는 형태로는 발전하지 못한 것 같다(李貞熙, 앞의 책, 220∼222쪽). 고려 전기 역제와는 다른 모습이 전개된 자체만으로도 의의가 있다. 말하자면 물납제나 고립제는 토지소유의 불균형이나 수취체제상의 모순 등으로 인해 발생된 극심한 계급분화 현상을 배경으로 한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일정하나마 농민층의 경제적 성장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요역노동이 물납제나 고립제라는 방식으로 대체할 수 있기 위해서는 농민층의 생산적 잉여가 전제되어야 하기 때문이다.0974)이러한 점은 고려 후기 구휼제도의 변화에서도 참조된다. 즉 소농민을 구휼하기 위한 의창미의 마련이 전기와 달리 후기에는 일반농민으로부터 추렴하는 烟戶米法을 채택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농민층에 어느 정도 항상적 잉여가 존재하고 있음을 반영하는 것이다(魏恩淑, 앞의 책, 99∼105쪽). 뿐만 아니라 국가에 의한 노동력의 직접징발이 축소되게 되면, 농민층은 축소된 정도의 노동력을 자립적 재생산에 투여하는 데 유리한 조건으로 삼을 수 있었을 것이다.

 또 고려 후기 역제변화는 조선 초기 역제의 대립화 현상을 촉진시키는 역할을 했을 것이라는 점에서도 주목된다. 조선 초기에는 집권층인 사대부가 고려 후기 향촌사회에서 수취상의 모순이 소농민의 유리와 몰락으로 이어지는 것을 체험했던 만큼, 고려 후기 공물이나 역의 대납이 오히려 포와 역의 직접징발의 이중수탈로 전개되어 불균형이 심화되었던 실정을 개선하기 위한 시책을 펴게 되었을 것이다. 그 시책의 방향은 역의 물납화와 공물의 포납화가 아니라, 역의 직접징발과 현물세의 수취였다. 이는 15세기 중반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던 收布制를 결사적으로 막으려 했던 의도에서도 짐작된다. 그러나 이러한 집권층의 의도와는 달리 세종대에서부터 토목공사에서 民丁이 ‘雇人自代’하는 현상이 적지 않았으며,0975)≪世宗實錄≫권 112, 세종 28년 5월 경오. 15세기 후반부터는 토목공사에 동원되던 역졸의 대립이 공인되면서 요역의 수포제가 시행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고 있었다.0976)尹用出, 앞의 글, 125∼126쪽. 이러한 것은 고려 후기 부역실태에서 나타난 변화가 조선초 일시적으로 비중이 약화되긴 했지만, 점진적으로 지속되어 간 바탕 위에서 가능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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