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9권 고려 후기의 정치와 경제
  • Ⅱ. 경제구조의 변화
  • 2. 수취제도의 변화
  • 2) 공부와 요역
  • (3) 수취기준의 변화

(3) 수취기준의 변화

 고려 전기 군현 내부에서 수세의 주된 대상은 토지와 노동력으로 집약할 수 있다. 요컨대 조세는 토지를 대상으로, 노동력 징발은 인정을 대상으로 부과하였고, 포나 개별노동으로 가능한 공물의 일부는 토지와 노동력이 고려된 戶를 대상으로 수취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고려 전기 노동력은≪고려사≫ 권 84, 志 38, 刑法 1, 戶婚條에서 “編戶 以人丁多寡 分爲九等 定其賦役”이라 한 바와 같이 인정의 다과를 기준으로 나눈 9등호제에 의거하여 징발하고 있었다. 이러한 9등호제는 충렬왕 17년(1291) 이전 어느 시기부터 3등호제로 변모하였다.0977)≪高麗史≫권 80, 志 34, 食貨 3, 賑恤 賑貸之制 충렬왕 17년 6월. 고려 후기에는 단순히 호등의 구분만 변한 것이 아니라 그 기준에서도 변화가 나타나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말하자면 요역의 징발이 단순히 인정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점차 토지나 가옥의 間架 등 자산을 고려하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삼국시대 이래 인신적 색채가 가장 완고하게 남아 있던 요역의 징발마저 자산과세가 등장하게 된 것은 세금의 수취에서 人身과세가 소멸되는 단초가 된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러면 이러한 세제 변화의 배경은 어디에 있을까. 수취양식은 해당시기의 사회경제적 배경과 불가분의 관련을 지니며 적용되는 만큼, 고려 후기의 다음과 같은 상황이 고려될 수 있겠다.

 첫째, 11세기 중엽부터 민의 유망현상이 확산되고 있었다. 이를테면 문종 원년(1047) 晉州牧使 崔復圭가 유리한 백성 13,000여 호를 안착시킬 정도였다.0978)≪高麗史≫권 7, 世家 7, 문종 원년 10월 경신. 민의 유망현상은 유리하지 않고 남아 있던 민에게 수취가 전가됨으로써 자연히 연쇄적인 유망을 초래하게 되었다.0979)당시 향촌사회에서 세금 징수가 隣保조직이라는 연대책임의 형태로 편성되어 있었다(具山祐,≪高麗前期 鄕村支配體制 硏究≫, 釜山大 博士學位論文, 1995, 208∼213쪽). 과장된 표현이긴 하지만 예종 즉위년(1105) 당시에 백성의 유망이 줄을 이어 열 집에 아홉 집은 비어 있다고0980)≪高麗史≫권 12, 世家 12, 예종 즉위년 12월 갑신. 한 것은 이를 대변하고 있다. 그리고 그 발생지역도 양계지역과 경상도 지역을 제외한 전 지역에 걸쳐 발생하고 있었다.0981)≪高麗史≫권 12, 世家 12, 예종 원년 4월 경인.

 이러한 현상은 무신집권 이후 토지겸병과 과중해진 부역수탈로 인해 심화되었고, 특히 30여 년간에 걸친 몽고와의 전란으로 본격화되었다. 즉 전란을 피해 산이나 海島로 옮겨 갔다가 전란이 끝난 후에 본래의 거주지로 돌아오는 경우도 많았지만, 오랜 전쟁으로 ‘人相食’할 정도로 굶어 죽는 사람도 속출하였으며0982)≪高麗史≫권 80, 志 34, 食貨 3, 賑恤 고종 46년 정월 및 권 25, 世家 25, 원종 즉위년 11월. 황폐해진 토지 때문에 본래의 거주지로 돌아오지 못한 사람도 상당수 존재했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유동적인 인정을 기준으로 삼아 혼란과 번거로움을 초래하기보다 토지와 같이 고정적인 것을 대상으로 과세할 필요가 생겼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토지소유의 불균형으로 인해 많은 無土之民 혹은 영세토지 소유자가 속출하는 실정에서 경제적 능력을 고려하지 않은 채 인정을 대상으로 수취하는 방법은, 역의 불균형을 심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을 것이다. 결국 종래의 인정다과에 의한 호등제는 혼란과 모순이 따르게 되어 호등제의 개편이 불가피해졌다. 12세기 후반부터 유민을 본관에 돌려 보내지 않고 現住地에 付籍하는 방안을 택한 것이라든지,0983)北村秀人,<高麗時代の貢戶制について>(≪人文硏究≫32­9, 大阪市立大, 1980), 676∼677쪽. 3등호제가 시행된 것은 9등호제에 의한 요역징발이 포기되고 있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둘째, 고려 후기 이래 급속도로 농업생산력의 발달이 진행되고 있었다. 12세기 이후 수리시설의 발달로 연해안 저습지로의 개발이 확대되었으며, 이와 병행하여 저습지와 산간의 척박지에도 耕種이 가능한 稻種이 수입되었고 地力증강을 위한 施肥術의 발전이 이루어졌다. 고려 후기의 이와 같은 농업기술의 발달은 단위면적당의 생산력을 증가시켰을 뿐 아니라,0984)고려 전기 5인 소가족의 자립재생산을 위한 최소한의 토지는 중등전 수전 1결과 한전 2결, 즉 3결 정도였던 것이, 고려 후기에는 1결이면 가능해지는 것이 이를 반영하고 있다(魏恩淑, 앞의 책, 84∼85쪽). 山地까지도 常耕化되었다. 그 결과 고려 전기에 비해 상대적으로 토지에 대한 관심과 경작의욕도 높아지게 되고 전국적인 토지의 상경화를 바탕으로 토지과세도 보다 용이해졌을 것이다.

 이러한 것은 고려 후기 양전제의 변동에도 반영되고 있다. 고려 전기의 결부제는 1結=(33步)2로 절대면적의 단위였다. 그러나 후기 농업생산력의 발전을 바탕으로 절대면적을 나타내던 전기의 결이 점차 생산량의 단위로 변화하게 된다. 고려 전기까지는 국가의 토지지배의 성격이 토지 그 자체에 대한 지배였지만 고려 후기를 거치면서 생산물에 대한 지배로 넘어가게 된다.0985)魏恩淑, 위의 책, 85쪽.
李宇泰,<新羅의 量田制-結負制의 成立과 變遷過程을 중심으로->(≪國史館論叢≫37, 1992), 50쪽.
그 결과 토지의 비옥도에 따라 단위면적의 소출량이 전기에 비해 두드러지게 차이가 났을 것이며, 이를 보완하기 위한 조처가 田品에 따라 量田尺이 다른 隨等異尺制가 시행되었을 것으로 보인다.0986)朴興秀,<新羅 및 高麗의 量田法에 대하여>(≪學術院論文集≫11, 1972).
金容燮,<高麗時期의 量田制>(≪東方學志≫16, 1975).
浜中昇,<高麗田品制の再檢討>(≪朝鮮古代の社會と經濟≫, 法政大學出版局, 1986).
呂恩映,<高麗時代의 量田制>(≪嶠南史學≫2, 嶺南大, 1986).
고려 후기의 이러한 상황을 배경으로 수등이척에 의한 양전이 시작되는 것과 궤를 같이 하여 요역징발의 대상이 토지과세의 현상으로 변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셋째, 고려 후기에 이르러 공부와 요역의 折價代納이 가능해지는 현상이 전개되고 있었다. 노동력의 징발이 직접적인 인신징발에 의존할 때는 당연히 국가의 민호에 대한 최대 관심사는 인정의 노동력일 것이다. 그러므로 요역을 징발하는 수취양식도 자연히 인정을 기준으로 하게 된다. 그러나 토지의 생산성이 높아지면서 역의 대납이 가능해지는 여건이 마련되면, 국가의 노동력 지배도 인정보다는 資産을 중시하는 경향으로 변화하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인정기준의 요역징발을 담당하던 전기 9등호제는 요역징발의 기능을 상실하게 될 것임이 예견되는데, 후기에 3등호제가 시행되고 있는 것은 단적인 예이다. 이를테면 9등호제의 소멸은 단순히 호등제의 변화에 그치는 문제가 아니고, 그 이면에는 요역부과의 기준이 변화하고 있음이 예고되고 있는 것이다.

 고려 후기에 전개되었던 이상의 상황을 염두에 두고, 고려 후기 요역제의 징발을 살펴보기 위해 다음의 사료를 검토해 보기로 하겠다.

① (신우 원년 2월) 유지를 내려 말하기를 ‘甲寅年(1314)의 양전 이후 三稅를 바치는 토지(三稅之田)가 누차 誅流한 관원들로 인해 창고에 몰수되어 3세의 과세대상에 들어가지 않는다. (그런데도) 주관하는 관청에서는 元案대로 징수하여 州郡이 괴롭게 여기고 있으니 都評議使司로 하여금 각 도의 按廉使에게 공문을 보내, 세를 내는 토지로부터 먼저 세를 거두고 나머지는 구별하여 거둠으로써 전과 같은 폐단을 없애도록 하라’고 하였다(≪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租稅).

② (공민왕 11년 9월) 재정경비가 부족하여 민에게 추가로 징수하는데 大戶는 쌀과 콩을 각 1섬(石), 中戶는 각 10말(斗), 小戶는 각 5말(斗)을 내게 하고 이를 無端米라 했는데 민이 괴롭게 여겼다(≪高麗史≫권 79, 志 33, 食貨 2, 科斂).

③ (신우 원년 2월) 교서를 내려 말하기를 ‘민을 사역하는 것은 힘써 좋은 법을 따르도록 해야 한다. 지금부터 각 지방의 民戶를 오로지 서울에서 행해지는 법에 의거하여 대·중·소 3등급으로 분간하여 중호는 둘을 합쳐 한 호로, 소호는 셋을 합쳐 한 호가 되도록 함으로써 무릇 差丁하여 징발할 때 힘을 모아 서로 도와 생업을 잃지 않도록 해야 한다’라고 하였다(≪高麗史≫권 84, 志 38, 刑法 1, 戶婚).

④ (신우 원년 8월) 都城 5부의 호수를 개정하였다. 무릇 가옥의 칸수가 20칸 이상을 1호로 하여 軍 1丁을 내며, 칸수가 적으면 혹 5家 내지 3∼4家를 합쳐 1호로 삼았다(≪高麗史≫권 81, 志 35, 兵 1, 五軍).

 위의 사료 ①에서는 갑인년에 양전한 이후, 관원과 장수가 여러 차례 주살되거나 유배되어 3세를 내는 토지가(三稅之田) 창고에 몰입됨으로써 3세의 대상에서 빠져있는데도 해당 관청에서는 元案에 의거하여 징수하므로 주군에서 괴롭게 여긴다는 것이다. 본래 3세는 租·庸·調를 지칭하는 것이므로0987)≪高麗史節要≫권 20, 충렬왕 4년 7월. ‘삼세지전’으로 표현되고 있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즉 3세가 갑인년에 양전한 토지대장에 입각해서 수취되고 있다는 것은 田租만이 아니라 용·조까지 전결의 다과에 따라 부과되고 있음을 의미하며, 그 때문에 ‘3세를 내는 토지’로 표현된 것으로 보여진다. 고려 후기 요역의 물납이 전개되었던 점을 감안한다면, ‘삼세지전’이라던가 ‘3세를 납입한다’는 표현도 충분히 납득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런데 여기서의 갑인년, 즉 충숙왕 원년(1314)은 전국적인 양전이 행해진 해인데, 이 때의 양전은 수등이척에 의한 방식으로 양전한 것이다.0988)수등이척제의 시행은 結負制의 변동과정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그 시행시기는 늦어도 충목왕 3년 이전까지는 마련되었다. 즉 결의 실적과 頃의 면적이 일치하지 않는 현상이 충렬왕 때부터 나타나고 있는 만큼, 충렬왕대 이후에는 수등이척제가 시행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고 있었다(金容燮, 앞의 글, 112쪽 참조). 수등이척에 의한 방식이 채택된 갑인년의 양전과 관련하여 요역의 징발도 토지과세가 적용되었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후기부터 조금씩 전개되던 자산과세의 현상이 일단 갑인년의 양전에서 정착되고, 이 때의 양안은 己巳年(공양왕 원년 ; 1389) 양전 때까지 수취기준이 되고 있다.0989)朴京安,<甲寅柱案考>(≪東方學志≫65, 1990).

 한편 사료 ④에 의하면 고려 전기 9등호제와 달리, 3등호를 편성하는 기준이 京中과 지방에 따라 2원적 구분이 적용되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이를테면 도성 5부는 가옥의 칸수를 기준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3등호제가 시행되면서 호의 기준이 경중과 지방이 달리 나타나는 것은, 경중은 지방과 달리 營農을 생업으로 하지 않는 계층이 많았기 때문에 가옥의 칸수가 적용되었던 것이다. 즉 인정다과에 의해 호등제가 편성될 때는 경중과 지방 할 것 없이 인정이라는 기준을 동시에 적용할 수 있었지만, 자산과세를 바탕으로 하게 되면서 그 구분기준을 달리 해야 했다. 이처럼 이원적인 구분기준으로 적용하게 되는 자체는 역으로 자산과세로의 변모를 입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경중에서 호등제의 편성을 가옥의 칸수로 한 것은 우왕대 이전으로 소급해서 생각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 시기보다 몇 달 앞서 지방의 민호도 ‘京中見行之法’에 따라 대·중·소의 3등급으로 분간하라고 하고 있기 때문이다(사료 ③). 그러면 경중에서 행해지던 3등호제의 시행시기는 언제일까. 이것은 앞에서 본 바와 같이 늦어도 충렬왕 17년(1291) 이전에 시행되었음이 분명하며, 이 때 호등제의 편성기준이 가옥의 間架임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우왕 이전에 이미 경중에서 가옥의 칸수를 기준으로 한 3등호제가 시행되었음을 고려해 보면, 우왕 원년(1375) 8월 도성 5부의 호수를 개정한 것은 기준을 정하는 가옥의 칸수를 다시 정하도록 한 것임이 드러난다. 이러한 점은 가옥의 칸수가 자주 바뀌고 있는 데서 알 수 있다. 이를테면 대호의 기준이 우왕 원년에는 20칸 이상이었으나, 3년에는 10칸으로 바뀌었으며0990)≪高麗史≫권 81, 志 35, 兵 1, 兵制 신우 3년 4월. 조선초에는 40칸으로 변하였다.0991)≪世宗實錄≫권 67, 세종 17년 3월 무인. 이는 노동력의 수요량에 따라 대호의 기준도 달라진 때문인데 우왕 3년에 비해 조선초의 경우 4배로 그 기준이 늘어나고 있는 것이 그 예이다.

 지방의 경우, 비록 우왕 원년 2월 외방의 민호도 경중에 따라 3등호로 분간하도록 하고 있지만, 사료 ②의 기록과 같이 공민왕 때 농민들로부터 3등호를 기준으로 增斂의 액수를 달리 하여 징수하고 있는 데서 그 이전부터 지방에도 3등호제가 시행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지방의 경우는 양전 문제가 선행되어야 하는 만큼 경중에 비해 시간이 훨씬 많이 걸리기는 하겠지만, 어쨌든 갑인년 양전시 자산과세가 적용되었음은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다.

 한편 고려 후기 토지과세가 참작되었다 하더라도 인정을 내는 토지의 기준규모가 어느 정도인지 그 구체적인 실체를 파악하기는 어렵다. 조선초의 경우는 8결을 단위로 1夫를 내도록 제도화되어 있었다.0992)≪經國大典≫권 2, 戶典 徭賦. 하지만 처음에는 요역의 부과단위가 5결을 1字丁으로 하는 것이었는데, 성종 2년(1471)에 8결단위로 바뀌었다고 한다.0993)≪成宗實錄≫권 9, 성종 2년 3월 임진.
조선 전기 요역징발의 부과단위에 대한 변화에 대해서는 姜制勳,<朝鮮初期 徭役制에 대한 재검토-徭役의 種目區分과 役民規定을 중심으로->(≪歷史學報≫145, 1995), 63∼68쪽 참조.
그러나 성종대 이후 8결 단위의 요역제가 성립된 이후에도 전조운반의 요역에는 5결 단위의 방식이 시행되고 있었다. 이런 사실은 ‘8結 出1夫’의 원칙이 모든 요역종목에 동원되는 원칙이 아님을 보여 주고 있다.0994)尹用出,<15·16세기의 徭役制>(≪釜大史學≫10, 1986), 13쪽.
姜制勳, 위의 글, 77∼80쪽.

 그런데 夫의 개념은 인정을 가리키는 말이지만, 조선 후기에서는 8결의 田土를 의미하는 말이기도 한데 이는 조선 후기에 한정된 것만이 아니라고 한다.0995)李榮薰,<朝鮮後期 八結作夫制에 대한 연구>(≪韓國史硏究≫29, 1980), 80∼81쪽. 이러한 부의 개념과 연결될 수 있는 말이 고려에서의 ‘丁’이 아닌가 한다. 고려시기 요역노동에 동원되는 인정은 丁夫 혹은 丁匠의 용례와 같이 ‘정’으로 불려지고 있었다. 게다가 고려 후기에는 정의 의미가 변질되어 토지를 뜻한다는 지적이 주목된다.0996)金琪燮,≪高麗前期 田丁制 硏究≫(釜山大 博士學位論文, 1993), 175∼185쪽.

 이런 점을 고려해 볼 때 경상도의 토지는 조운하는 데 경비가 많이 드니 족정과 반정의 토지에 7결과 3결을 ‘加給’해서 세금에 보충하자는 공민왕 11년(1362) 밀직제학 白文寶의 건의는0997)≪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租稅 공민왕 11년 密直提學 白文寶 上箚子. 시사하는 바가 있다. 여기서의 가급은 실제로 토지를 지급해 주는 것이 아니라 17결의 족정은 7결을 감해서 10결을, 8결의 반정은 3결을 감해서 5결 만큼의 토지에 세금을 부과한다는 의미이다.0998)金琪燮, 앞의 책, 184쪽. 고려에서 족·반정 계열의 토지는 반정이 압도적이라는 측면을 고려하면, 조선 성종대 전조의 운반이 5결 단위로 이루어지고 있었던 점과 연결해 볼 때 주목할 만하다. 따라서 고려 후기 요역부과의 단위는 5결을 기준으로 作丁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이러한 추론은 우왕 14년(1388) 田租수취와 관련하여 20결·15결·10결로 세분화하여 作丁방식을 정하고 있다든지,0999)≪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祿科田 신우 14년 7월 大司憲 趙浚等 上書. 공민왕 5년 역적의 토지를 ‘計結爲丁’하여 군인에게 지급하고 있던 사례도 참고된다.1000)≪高麗史≫권 81, 志 35, 兵 1, 兵制 공민왕 5년 6월 下敎.

 물론 여말선초의 이행과정에서 토지생산력의 발달을 감안해야겠지만,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결의 성격이 절대면적이 아니라 생산량에 따라 면적단위가 변화하고 있었으므로 그다지 큰 차이는 없을 것이다. 조선 전기 요역단위의 변화를 감안해 본다면, 고려 후기에 있어서도 노동력 징발의 규모에 따라 作丁制의 방식이 편의에 따라 운영되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이런 점은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경중에서 노동력의 징발단위가 자주 변하고 있었던 것과 맥을 같이 하는 것으로 보인다.

 한편 이와 아울러 지적해 두어야 할 것이 있다. 다시 말하면 이처럼 요역징발의 수취기준이 인정다과에서 자산이 적용되는 형태로 변질되어 갔던 이면에는 요역징발의 기능을 가지던 고려 전기 9등호제 성격의 변화도 내포되어 있다.

 즉 세제수취에서 차지하는 호등제의 의미가 고려 전기 9등호제의 소멸과 더불어 점차 희석되어 가는 것이 아닌가 한다. 위에서 제시한 사료들은 모두 요역제와 호등제의 변화를 통해 수취기준의 변모를 살피는 데 참고가 되는 사례들이다. 그런데 사료 ②의 기사에서 3등호는 민호로부터 과렴을 징수하는 내용이며, 사료 ④는 경중에서 군인을 징발하는 내용이다. 군인의 징발은 인신지배라는 측면에서 요역과 동일한 성격을 지니지만, 고려 전기에는 백정호와 구별된 족정·반정호로부터 인정을 차정하는 형태로서 직역체계와 요역체계로 구별되어 있었다. 이외 충렬왕 17년(1291)에 원에서 보내 온 江南米를 방리의 대·중·소호에게 각각 3섬·2섬·1섬씩 나누어 주었던 예에서 알 수 있듯이1001)≪高麗史≫권 80, 志 34, 食貨 3, 賑恤 水旱疫厲賑貸之制 충렬왕 17년 6월. 고려 전기 호등제가 요역징발의 기능만을 담당했던 데 비해, 후기에는 노동력 징발 이외에 보다 다양한 기능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요컨대 고려 중기 이래 세제수취로서의 호등제의 역할이 점차 소멸되어 가고 있는 듯하다.

 이와 같은 것은 중국의 사례도 참조된다. 이를테면 중국에서의 호등제는 宋代까지 존속하였지만, 그 기능은 향촌에서 직역을 차정하는 데 기능하였을 뿐이며 세액수취의 의미는 사라졌다고 한다. 송대에 나타나는 ‘定戶’의 용례가 당제와 같이 세제수취를 위한 것이 아니라 단순히 호를 정한다는 의미를 가지는 것뿐이라고 하는 점은1002)船越泰次,<唐代戶等制雜考>(≪日野開三郞博士頌壽紀念論集 中國社會·制度·文化史の諸問題≫, 中 國 書 店 , 1987), 213∼214쪽. 매우 주목된다. 그 단적인 이유는 송대에 이르러 일반과세가 토지를 대상으로 하게 됨으로써, 호등제는 인신을 파악하는 직역 차정의 기능만 할 뿐 세제수취에서의 역할은 더 이상 할 필요가 없게 된 것이다.

 고려에서 호등제의 의미는 군인이나 요역 등 인신을 징발하는 역할을 하고 있지만, 송대와 같이 단순히 ‘호를 정한다’는 의미의 호등제로 이행하고 있는 것으로 본다. 더구나 호등제의 편성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고려 후기가 송대 초기와 유사한 발달단계에 있기 때문이다.1003)송대의 경우 호적의 작성에서 토지와 호구를 분리하여 파악하고 있으며, 호등제의 구분기준이 토지로 정착되면서 토지와 함께 가옥의 間架稅가 나타나고 있다(曾我部靜雄, 앞의 책, 347쪽). 고려 후기에도 호적작성에서 토지와 호구가 분리되어 기재되었고(金英夏·許興植,<韓國中世의 戶籍에 미친 唐宋 戶籍制度의 影響>,≪韓國史硏究≫19, 1978, 45쪽), 지방에서 토지과세가 시행되면서 경중은 가옥의 칸수가 과세대상으로 등장하였다. 고려 후기와 송제의 차별성이라면, 고려에서는 요역의 징발이 토지과세라 하더라도 아직 호등제가 제반 분야에서 다소 기능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고려 후기 사회가 아직 완전히 토지과세로 이행하지 못한 측면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비록 고려 후기 전개된 자산과세는 호등제를 매개로 실현됨으로써 조선 성종 2년(1471)에 성립된 명실상부한 計田法과는 단계적 차이는 있지만, 다음의 두 가지 측면에서 의의가 크다. 하나는 인정의 다과에 의해 요역을 징발하던 9등호제가 가옥의 칸수 내지 토지과세에 따른 3등호제로 재편될 수 있을 만큼, 고려 후기 사회가 세제 전반에 있어서 토지를 과세대상으로 할 수 있을 정도로 토지의 생산성이 높아졌다는 것이다. 요컨대 인정을 기준으로 징발되던 요역은 토지과세로 자리를 넘겨주게 되는 반면, 수취대상에 있어서 군역만이 인정을 과세대상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백정농민층이 고려 후기 이래 군역의 주된 담당자로 등장하는 것은 이러한 역제변화에 기인하고 있는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지속적으로 조선왕조에 계승되고 있다는 점이다. 조선초의 요역징발 기준은 태조 2년(1393)부터 토지과세가 등장하며, 적어도 정종 즉위 이후에는 확고히 자리잡게 된다.1004)일반적으로 조선 토지과세가 시행된 시기는 세종 17년이며, 그 이전에는 計田法과 計丁法·折衷法 등 기준이 자주 변화하였다는 견해가(有井智德, 앞의 책) 받아들여져 왔다. 그러나 이와 달리 정종대 이미 토지과세가 확립되었다는 견해가 제시되기도 하였다(姜制勳, 앞의 글, 65쪽). 이 때 시행된 계전법은 조선왕조의 성립과 더불어 갑작스럽게 나타난 것이 아니고 고려 후기 토지과세의 전개를 바탕으로 가능한 것이었다. 이러한 것은 비록 고려와 달리 5등호이기는 하지만, 세종 17년(1435) 호적작성에서1005)≪世宗實錄≫권 67, 세종 17년 3월 무인. 고려 후기의 이원적 호등제의 구분을 채택하여 지방은 토지를 기준으로 하고 京中은 가옥의 칸수로 하고 있는 데서도 확인할 수 있다.

<李貞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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