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9권 고려 후기의 정치와 경제
  • Ⅱ. 경제구조의 변화
  • 3. 농업기술의 발전
  • 1) 농법의 발전

1) 농법의 발전

 전시과체제의 붕괴와 농장의 발달로 특정지워지는 고려 후기 경제적 변동의 근본적인 원인은 생산력 발전으로 인해 야기된 경제구조상의 모순 때문이라 하겠다.1006)고려 후기 사회경제적 변동의 원인을 생산력의 발전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파악한 연구는 다음과 같다.
金容燮,<高麗時代의 量田制>(≪東方學志≫16, 延世大, 1976).
姜晉哲,<高麗時代의 地代에 대하여>(≪震檀學報≫53·54, 1982).
浜中昇,<高麗前期の小作制とその條件>(≪歷史學硏究≫507, 1982).
魏恩淑,<12세기 농업기술의 발전>(≪釜大史學≫12, 1988).
그러나 이들 논자들의 입장은 조금씩 다르다. 金容燮과 魏恩淑은 생산력 발전의 내용을 고려 전기에는 평전에만 주로 시행되던 상경농법이 후기에 들어와 산전에까지 널리 보급되어 가는 것으로 파악하는 데 비해, 姜晉哲은 휴한법에서 상경농법으로의 발전으로, 浜中昇은 불안정한 연작단계에서 안정적인 연작단계로의 이행으로 파악하였다.
당시의 생산력 발전의 정도를 수치로 정확히 밝힐 수는 없지만 생산력의 발전을 가능하게 했던 농업기술상에는 여러 가지 변화들이 나타나고 있었다.

 우선 수리시설의 발전을 들 수 있다.1007)魏恩淑, 위의 글, 83∼95쪽 참조 고려시대의 수리 관계 기록들을 살펴보면 12세기를 중심으로 주로 후기에 집중되어 나타나고 있다. 그 중에서도 크게 두 가지로 대별되는데 한 형태는 산곡간의 물을 막아 조성된 수리시설인 제언의 보수와 수축이며, 또 다른 형태는 연해안 저습지와 간척지를 개발하기 위한 河渠工事와 防川·防潮堤 공사이다.

 제언의 보수와 수축에 관한 실례는 문종연간에 翰林學士 李靈幹의 주청에 의해 南大池를 다시 수축한 것과1008)≪新增東國輿地勝覽≫권 43, 黃海道 延安都護府 山川. 현종연간과 인종 21년(1143)에 碧骨堤를 보수한 것,1009)≪新增東國輿地勝覽≫권 33, 全羅道 金堤郡 古跡. 의종 24년(1170)에 무너진 南川堤를 방리의 장정을 징발하여 고친 것,1010)≪高麗史≫권 19, 世家 19, 의종 24년 6월 경술. 무신집권기에 重房裨補로서 班主가 府兵을 동원하여 수축한 重房堤,1011)≪新增東國輿地勝覽≫권 13, 京畿 豊德郡 古跡. 그리고 명종연간에 司錄 崔正份에 의한 恭檢池의 수리1012)≪新增東國輿地勝覽≫권 28, 慶尙道 尙州牧 山川. 등이다. 이외에도 지역적으로 명시되어 나타나지 않지만 다음의 명종연간의 下制를 통해 볼 때 이 시기에 제언의 증·보수 사업이 전국적으로 전개되었을 가능성을 유추해 볼 수 있다.

(명종) 18년 3월에 制를 내리기를 ‘때를 맞추어 농사를 장려하고 힘써 제언을 수축하고 저수하며 관개하여 논밭을 묵히지 않도록 하여 백성들의 식량을 넉넉히 할 것이며, 또 뽕나무·닥나무·밤나무·잣나무·배나무·대추나무 등 과일 나무에 이르기까지 모두 때를 맞추어 심어 많은 이익을 얻도록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高麗史≫권 79, 志 33, 食貨 2, 農桑).

 이 명종 18년(1188)의 교서는 무신정권 성립 이후 광범하게 전개되었던 농민항쟁에 대한 수습책의 일환으로 내려진 일련의 조처 가운데 하나였다.1013)朴宗基,<12, 13세기 農民抗爭의 原因에 대한 考察>(≪東方學志≫69, 1990), 139∼146쪽. 아마도 위에서 든 명종 때 최정빈에 의한 공검지 수리도 그 일환이 아니었을까 한다. 이러한 권농차원의 향촌안정책이 고려 후기의 사회모순 해결의 근본적인 대책은 되지 못했다 하더라도 어느 정도의 생산력 발전을 가능케 하여 농민안정에 이바지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형태의 국가적 관심은 고려 후기를 거치는 동안 지속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것은 비록 실시되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공민왕 때에 현령·감무를 登科士流로 임명하여 권농을 책임지우고 제언의 개·보수를 주도하도록 건의되고 있는 데서도 알 수 있다.1014)≪高麗史節要≫권 27, 공민왕 8년 12월.

 또 다른 형태의 수리시설로써 특히 12세기 이후에 들어와 특징적으로 보이는 것이 연해안 저습지와 간척지 개발을 위한 하거공사, 방천·방조제 공사이다. 인종 21년에 張文緯에 의한 樹州(경기도 부평)에서의 저습지 배수를 위한 溝渠공사,1015)<張文緯墓誌銘>(≪韓國金石文追補≫, 亞細亞文化社, 1963), 96∼97쪽. 의종대의 林民庇에 의한 溟州(강릉)에서의 漑田을 위한 浚渠사업,1016)≪高麗史≫권 99, 列傳 12, 林民庇. 의종 6년(1152) 李文著에 의한 洪州(홍성)에서의 渠준설,1017)<李文著墓誌>(≪朝鮮金石總覽≫上, 朝鮮總督府, 1919), 402∼403쪽. 의종 14년 吳元卿에 의한 靈光에서의 방조제수축,1018)<吳元卿墓誌銘>(≪韓國金石文追補≫), 172∼173쪽. 명종연간에 崔甫淳에 의한 齊安(해주)에서의 간척지개발과 安南大都護府(전주)에서의 방조제수축에 의한 간척지개발,1019)<崔甫淳墓誌>(≪朝鮮金石總覽≫上), 455∼459쪽. 몽고침입시 金方慶에 의한 葦島에서의 방조제공사와1020)≪高麗史≫권 104, 列傳 17, 金方慶. 守山堤보수,1021)≪新增東國輿地勝覽≫권 26, 慶尙道 密陽都護府 古跡. 고종 43년(1256)의 梯浦·瓦浦·狸浦·草浦 등에서의 방조제 수축에 의한 左·右屯田의 설치,1022)≪高麗史節要≫권 17, 고종 43년 2월. 李元尹에 의한 梁州(양산)의 저습지개발1023)崔 瀣,≪拙藁千百≫권 1, 送安梁州序. 등이 바로 그러한 사례이다. 이상의 사례들은 주로 국가의 권농책의 일환으로 수령들에 의해 대부분 주도된 것으로 보이지만, 12세기 이후의 연해안 저습지나 간척지 등은 재력을 가진 지배층이나 소농민들에 의해서도 사적으로 개간되었다.

 전시과체제의 붕괴 이후 고려 후기에 들어와 지배층의 물적 토대 가운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게 된 것 중의 하나가 賜給田이다. 이 사급전은 고려 후기 농장형성의 중요한 한 요인이 되었던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1024)姜晋哲,<高麗의 農莊에 대한 一硏究>(≪史叢≫24, 1980).
浜中昇,<高麗後期の賜給田について>(≪朝鮮古代の經濟と社會≫, 法政大學出版局, 1986).
그런데 이 사급전은 전시과체제의 붕괴로 인해 전시분급이 어려워진 상황 아래에서 지배층의 물적 토대를 마련해 준다는 의미도 있지만, 몽고병란 이후 전쟁복구의 일환으로 국가에서 閑田개발을 장려한다는 의미도 있었다. 원래 한전은 주인없는 황무지를 의미하나 사패를 빙자하여 ‘有主付籍之田’을 탈점하는 까닭에 사회문제화되었던 것이다.1025)≪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經理. 이 한전 중에는 원래 경작지였으나 방기된 陳田도 있고 그야말로 신개간지도 포함되었을 것이다.

 사급전에 의한 개간인지는 확인되지 않지만 安牧에 의한 坡州西郊의 황무지 개간이 그 대표적인 경우라 하겠다.1026)成 俔,≪慵齋叢話≫권 3.
姜晋哲이 말하는 경영형 농장의 대표적인 경우라 할 수 있다(姜晋哲, 앞의 글, 1980).
안목은 파주서교의 황무지를 개간하여 토지를 넓히고 그것이 손자 安瑗으로까지 이어져 수만 경에 이르는 농장과 백여 호의 노비를 소유하였다. 파주서교의 황무지는 임진강 하류의 저습지대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안원이 소유하고 있었던 노비 백여 호는 고려 후기 농민층 분화과정에서 창출된 몰락농민층도 다수 포함되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어쨌든 고려 후기에서 조선초에 걸치는 농장경영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이러한 저습지개간의 경우 외에도 재력이 있는 지배층은 상당한 자본을 필요로 했던 연해안 간척지개발에도 참여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와 같이 지배층에 의한 저지개발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소규모이기는 하나 소농민들에 의해서도 연해지역의 저지개발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공민왕대에 왜구침입에 대한 방비책으로 偰長壽가 상서한 내용을 살펴보면,1027)≪高麗史≫권 112, 列傳 25, 偰長壽. 연해지역이 토지가 비옥한 관계로 많은 농민이 연해지역에서 거주하고 경작하다가 왜구의 피해를 입고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피해를 입는다 해서 산간지역으로 옮기는 것도 옳은 방책이 못되었다. 왜냐하면 산간지역의 토지는 한정이 있어 농민을 먹여 살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대로 연해지역에 거주케 하면서 왜구를 방비할 계책을 주장하고 있다. 소농들에 의해서도 연해지역이 개발되어 간 증거라 하겠다.

 이와 같이 고려 후기에 들어와 진행되고 있는 연해안 저습지나 간척지개발의 추세는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더 활발해지고 있음은 이미 지적되고 있는 바이다.1028)조선 전기의 연해안 개발에 대해서는 다음의 연구가 있다.
李泰鎭,<16세기 沿海地域의 堰田개발>(≪韓國社會史硏究≫, 지식산업사, 1986).
―――,<15, 6세기 韓國 사회경제의 새로운 동향 : 低地 개간과 인구 증가>(≪東方學志≫64, 1989).
―――,<15, 6세기의 低平, 低濕地 開墾 동향>(≪國史館論叢≫2, 1989) 참조.
이러한 양상은 15세기의≪農事直說≫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나타나고 있다.≪농사직설≫에는 ‘草木茂密處’와 ‘沮潭潤濕荒地’의 개간방법에 대해 서술되어 있는데 산전개간에 해당되는 전자보다는 저습지개간에 해당되는 후자에 대해 훨씬 많은 비중을 두어 설명하고 있다.1029)≪農事直說≫種稻.≪농사직설≫에 삼남지역의 농민들이 현실적으로 행하고 있던 농법을 수록하고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둘 때 농민층에 의한 저지개발이 상당했음을 알 수 있다.

 역사적으로 볼 때 농경지의 개발과정은 구릉과 평야가 맞닿은 지역에서 시작하여, 점차 구릉지역으로 확대되고, 그 이후 토목기술의 상당한 발전과정을 거쳐 비로소 연해안지역이 개발된다고 한다.1030)渡部忠世,≪アジア稻作の系譜≫(法政大學出版局, 1983), 234∼238쪽. 고려 후기에 들어와 앞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전기의 산전개발과는 달리1031)전기의 산전개발에 대해서는 魏恩淑,<高麗時代 農業技術과 生産力 硏究>(≪國史館論叢≫17, 1990), 13∼15쪽 참조. 연해안 저지대로 농경지가 확대되어 나가는 것은 그에 상응하는 토목기술의 발전이 따라 주었을 것임을 짐작케 한다. 비록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이 시기에 운하개착공사가 시도되었다.1032)李平來,<高麗後期 水利施設의 확충과 水田개발>(≪역사와 현실≫5, 1991), 162쪽. 泰安과 瑞州의 경계에 있는 炭浦와 倉浦를 연결하기 위한 운하공사가 인종대에 처음 시도된 이래 의종과 공양왕대에까지 계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1033)≪新增東國輿地勝覽≫권 19, 忠淸道 泰安郡.
≪高麗史≫권 116, 列傳 29, 王康.
≪高麗史節要≫권 9, 인종 12년 7월·권 11, 예종 8년 10월 및 권 35, 공양왕 3년 7월.
비록 기술상의 한계로 인해 실패하였지만 그러한 시도 자체가 토목기술의 발전을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고려 후기의 수리사업의 발전과정에 대해 또 하나 주목해야 할 것은 수리규모의 축소이다. 고대의 제언들은 지금 남아 있는 자료에 의하면 대체로 국가적 규모의 사업으로 행해지던 대규모 수리시설로 보인다. 신라 원성왕 6년(790)에 행해진 벽골제 증축에는 全州 등 7州로부터 인부가 징발되고 있으며,1034)≪三國史記≫권 10, 新羅本紀 10, 원성왕 6년 정월. 동왕 14년(798 ; 唐 貞元 14)의 永川 菁堤修治 사업에도 전국 각지에서 法功夫 14,140인이 동원되고 助役으로 切火·押梁 두 군에서 인원이 동원되고 있다.1035)李基白,<永川菁堤碑 貞元修治記의 考察>(≪新羅政治社會史硏究≫, 一潮閣, 1974), 292∼296쪽. 조선시대의 기록이지만 벽골제의 중수에 전라도의 각 군에서 民丁 1만 명이 동원되고 있는 것을 보면 앞의 원성왕 6년의 것도 그와 비슷한 규모가 아니었을까 한다.1036)≪新增東國輿地勝覽≫권 33, 全羅道 金堤郡 古跡. 또한 고부군의 訥堤 중수에도 11,580명이 동원되는 대역사였음을 볼 때1037)≪世宗實錄≫권 3, 세종 원년 2월 경자. 고대 수리시설의 규모를 짐작케 해준다.

 이들은 인력동원에서도 대규모였을 뿐만 아니라 여러 지류의 물을 모아 저수하여 관개하는 과정에서 자연히 주변 여러 군현의 이해가 엇갈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상주 공검지의 경우, 공검지가 상주에 위치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상주의 속현이었고 상주보다도 상류에 있었던 함창현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러한 관계로 인해 함창현은 농지가 수몰된 것이 많을 뿐 아니라 관개의 이익은 하류에 있는 상주민에게로 돌아가 함창현민의 불만은 대단히 컸던 것으로 보인다.1038)≪新增東國輿地勝覽≫권 29, 慶尙道 咸昌縣 山川. 이와 같이 한 현의 일방적인 희생 아래 제언이 축조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지방제도와의 연관성에서만 이해가 가능하다. 즉 함창현이 상주의 속현인 까닭에 그러한 제언축조가 가능했던 것이다. 이처럼 여러 군현의 이해가 걸쳐 있던 대규모 수리시설일수록 군현세에 따라 이해가 엇갈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고려 후기에 들어와 나타나는 속군현의 승격과 부곡제 해체 등의 일련의 지방제도의 변화는 더 이상 군현세에 따른 희생이 강요되는 형태의 수리사업 추진을 불가능한 것으로 만들었다. 지방제도가 더욱 정비되는 조선 초기에 와서 국가주도의 대규모 제언의 보수와 수축이 대부분 실패로 돌아가 결국 군현단위에서 독자적으로 수리사업을 시행하는 방향으로 나갔던 것도 바로 그러한 이유에서였다.1039)菅野修一,<李朝初期農業水利の發展>(≪朝鮮學報≫119·120, 1986), 341∼348쪽.

 앞의 제언관계 사료에서도 나타나듯이 제언의 경우 남대지·벽골제·공검지 등 예로부터 있어 왔던 시설보수에 주력하였고, 신축의 경우 중방제나 남천제 정도에 그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제언의 신축이 없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되는데 사료에 나타나지 않는 것은 국가적 규모의 대규모 사업이 점차 사라져 갔기 때문일 것이다.

 조선초의 경상도지방에 국한된 것이지만 제언관계 기록을 가장 상세히 남기고 있는≪慶尙道續撰地理志≫를 살펴보면 고려시대에 주현, 속현이었던 곳을 막론하고 관개면적이 10결 전후의 소규모 제언이 상당수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이 제언들이 모두 조선초에 들어와 갑자기 축조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고려 후기 이래 군현단위의 수리규모의 소규모화 현상은 주군현뿐 아니라 속군현 등에서도 독자적인 수리사업을 추진하여 경제적 성장을 달성했을 것이며 이러한 경제적 성장이 밑거름되어 주읍으로의 승격이나 속군현 토성의 上京從仕에 의한 중앙진출도1040)李樹健,<高麗後期 支配勢力과 土姓>(≪韓國中世社會史硏究≫, 一潮閣, 1984). 가능하게 되었으리라 생각된다. 즉 고려 후기의 속군현의 주읍으로의 승격, 부곡제 지역의 소멸 등 지방제도의 변동은 수리사업의 발전 등과 같은 농업생산력의 발전에 따른 이들 지역의 경제적 성장에서 기인하는 바 크다 하겠다.

 고려 후기에 들어와서 나타나는 수리시설의 발달과 농업지대의 연해안 저지대로의 확장은 농법상에 있어서도 그에 상응하는 발전이 예상된다. 특히 수전농법에 있어서 많은 발전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 반영이 新種子의 출현이다.1041)이에 대해서는 魏恩淑, 앞의 글(1988), 95∼102쪽 참조. 고려뿐 아니라 11세기를 전후해서 중국·일본·타이 등지의 연해안 저습지대가 거의 동시에 개발되고 있는데, 여기에 공통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 환경적응력이 강한 稻種으로서 인디카형 赤米種의 출현이라고 한다.1042)飯沼二郞,<東, 東南アジアのイナ作史における十一世紀>(≪世界農業文化史≫, 八坂書房, 1983), 227쪽. 이 도종은 한발과 저습에 대한 적응력이 강해서 특히 저습지대와 산간지대의 冷水지역, 척박토양의 湧水田과 용수시설이 부족한 旱魃田에서 재배되고 있었다 한다. 이러한 종자로서 중국에 등장한 것 중의 하나가 북송의 眞宗이 大中祥符 5년(1021)에 福建省으로부터 도입해온 占城稻이다. 이 종자는 원래 진종이 江淮兩浙의 三路지역의 한발에 대비하기 위해 도입한 것이나 그 후 강남농업의 전개에 큰 역할을 하였다.1043)加藤繁,<支那における占城稻栽培の發達に就いて>(≪支那經濟史考證(下)≫, 東洋文庫, 1952).
周藤吉之,<南宋に於ける稻の種類と品種の地域性>(≪宋代經濟史硏究≫, 東京大學出版會, 1962).
바로 이 점성도가 연해안 저습지대가 개발되어 가기 시작하던 12세기 이후의 고려사회의 농업사적 요청에 의해 저습지개발에 적당한 도종으로 도입된 것이 아닐까 한다.

 고려시대의 사료에는 직접적으로 나타나지 않지만 원으로부터 몇 차례에 걸친 강남미의 도입이 있는 것을 보면1044)≪高麗史≫권 80, 志 34, 食貨 3, 賑恤 충렬왕 17년 6월·18년 6월·21년 4월. 당시 중국에 널리 퍼져 있던 점성도의 도래는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그러한 증거가 조선시대의 농서에는 반영되어 있다.1045)徐浩修,≪海東農書≫권 2, 穀名 山稻.
徐有榘,≪林園經濟志≫本利志 권 7, 穀名攷 山稻.
일제시대의 조사자료에 의하면 우리 나라에서 인디카형 적미종1046)이것이 점성도의 末裔라고 한다(原史六,<朝鮮に於ける一印度型稻の殘存>,≪農業及園藝≫17­6, 1942).의 분포지역은 낙동강하류인 밀양·김해·진주 등 경남의 거의 전역과 경북 일부지역, 충남 서천·청양, 전남 구례·순창, 경기도 가평, 평북 태천 등 거의 한반도 전역에 걸쳐 나타나고 있다. 이들 지역들은 주로 연해안이나 강 주변이었다는 것을 염두에 둘 때 저습지역의 개발을 위한 도종임을 충분히 알 수 있다.

 이와 더불어 강남 도종의 일종으로 蟬鳴稻와 같은 早稻種의 도입도 보이고 있다.1047)李奎報,≪東國李相國集≫권 14, 古律詩 得蟬鳴稻. 선명도는 晉代 郭義恭의≪廣志≫에 나타나는 종자로서 도작법이 근본적으로 달라지는 송대 이후에는 이러한 종자가 소멸되기 때문에 고려 후기의 사료에 선명도가 보이는 것은 고려 후기까지도 도작법이 송 이전의 휴한단계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1048)李泰鎭,<畦田考>(앞의 책), 70∼71쪽. 그러나 淸代의 지방지인 廣西省의≪思恩府志≫에서도 선명도의 존재가 확인되는 것을 보면1049)飯沼二郞, 앞의 글, 233쪽. 선명도는 송대 이후에 사라진 것이 아니라 강남농법이 발전하면서 조도종으로서 발전된 농법에 스스로를 적응시키면서 계속적으로 재배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고려 후기의 문집에 나타나는 선명도는 이전부터 우리 나라에 존재한 것이 아니라 선명도의 원산지가 중국 강남지역이었다는 것을 염두에 둘 때 고려 후기에 점성도와 더불어 도입된 강남미의 일종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특히 이러한 조도종의 도입은 早·晩稻種의 다양한 분화와 함께 이에 따른 다양한 도작법의 발전을 가져왔지 않았나 한다. 또한 기후조건상 조도의 필요성이 있었던 북부지역에까지 도작지역을 확대시키는 역할도 담당했을 것이다.

 ≪농사직설≫에는 種稻法으로 早稻水耕直播法·晩稻水耕直播法·乾耕法·揷種法(移秧法)이 순서대로 기재되어 있다. 이것으로 미루어 15세기까지 가장 보편적인 도작법은 수경직파법이었다. 이앙법의 경우 수리시설의 미비로 인해 경상도와 강원도 일부지역에서만 행해졌다고 한다.1050)金容燮,<朝鮮後期의 水稻作技術>(≪朝鮮後期農業史硏究≫Ⅱ, 一潮閣, 1971).
宮嶋博史,<朝鮮農業史上における十五世紀>(≪朝鮮史叢≫3, 1980).
李鎬澈,≪朝鮮前期農業經濟史≫(한길사, 1986).
조선초가 이러한 상황이라면 고려시대에도 이앙법이 도작법으로 존재하기는 했으나 극히 제한된 일부지역에서만 행해졌을 것으로 보기도 한다.1051)金容燮, 위의 글, 9∼11쪽. 고려 후기에도 이앙법이 행해졌음을 전해주는 사료는 다음과 같다.

(공민왕) 11년에 密直提學 白文寶가 箚子를 올려 말하기를 ‘江淮의 백성들이 농사를 지으면서 수해와 한재를 근심하지 않은 것은 수차의 힘 때문입니다. 우리 나라 사람들은 논을 다루는 자는 반드시 크고 작은 도랑을 파서 물을 댈 뿐이요 수차로 물을 쉽게 댈 수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논 아래에 물웅덩이가 있고 그 깊이가 한 길도 못되는데 그 물을 내려다 볼 뿐 감히 퍼올리지 못합니다. 그래서 낮은 땅은 물이 항상 괴어 있고 높은 땅은 풀이 무성해 있는 것이 십중 팔구나 됩니다. 마땅히 계수관에게 명령하여 수차를 만들게 하고 그 만드는 법을 배우게 한다면 민간에 전해 내려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가뭄의 해에 대비하고 황무지를 개간하는 데 있어서 제일의 계책입니다. 또 백성들이 下種(직파)과 揷秧(이앙)을 겸해 쓰면 역시 한재를 막을 수 있고 곡식종자를 잃어 버리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高麗史≫권 79, 志 33, 食貨 2, 農桑).

 즉 백문보는 중국 강남지방의 농민들이 이용하는 수차를 도입하여 旱荒에 대비할 것을 주장하면서 또 농민들로 하여금 下種과 揷秧을 겸하게 하여 한발에 대비하고 종자의 유실을 방지할 것을 건의하고 있다. 직파법은 가뭄이 들 경우 유리하나 종자의 유실이 많고 이앙은 종자의 유실은 적으나 가뭄에는 불리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당시의 농민들은 종자의 유실이 적은 이앙법을 선호했다는 뜻이고 정부에서는 한발이 들어 농사를 망칠 것을 염려하여 직파와 이앙을 겸할 것을 장려했을 것이다. 그러나 정부측의 의도와는 달리 직파법에 비해 제초의 측면에서든, 단위면적당 생산성의 측면에서든 유리했던 이앙법은 상당히 확산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위의 백문보 차자 외에도 비가 오지 않아 농가에서 이앙을 못해 많은 사람이 굶주렸다는 기록이나1052)崔 瀣,<三月二十三日雨>(≪東文選≫권 4, 五言古詩). 들녘에서 이앙가가 울려 퍼지고 있다는 시의 내용1053)朴孝修,<星來靑雲樓上偶題>(≪東文選≫권 16, 七言律詩). 등에서 볼 때 물론 한계가 있었던 것은 분명하나 이앙법이 지역에 따라서는 꽤 일반화되었던 것이 아닐까 한다.

 12세기 이후 저습지나 연해안 개발을 통해 수전지역이 확대되어 감에 따라서 수도작법도 다양한 발전을 했을 것이라 짐작되지만, 특히 몽고와의 오랜 기간의 전쟁 등은 많은 노동력을 감소시켜 이것을 만회할 수 있는 농법이 발전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특히 노동력 절감에 유리했던 이앙법은 농민층이 한발에 의한 失農의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선호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볼 때 고려 후기의 도작기술은 선진지역의 경우 이미≪농사직설≫단계에 도달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와 더불어 시비법에 있어서도 발전이 보이고 있다.1054)魏恩淑, 앞의 글(1988), 102∼109쪽.

그 고을 僧正이 瓮川驛路에서 도둑에게 해를 당하고 겨우 숨만 붙어 있었다. 驛吏가 그를 보고 그 까닭을 물으니 승정이 말하기를 ‘내가 베 약간필을 가지고 어떤 사람의 집을 가는데 밭에 거름주던 일꾼들(糞田役人)이 술을 마시는 것을 보았으며 어떤 곳을 가다가 어떤 사람이 김매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얼마쯤 가는데 어떤 사람이 뒤에서 큰 소리로 말하기를 ‘나는 김매는 사람이다. 불러서 이야기하려 하였는데 대답하지 않는 것은 무슨 까닭이냐’하더니 대답할 겨를도 없이 나를 치고 베를 빼앗아 갔다’하였다. … 선생이 거름준 밭의 주인(糞田主)에게 물어 말하기를 ‘내가 들으니 네가 일군들에게 술을 먹일 적에 승정이 지나가니 승정의 베에 대해 말한 자가 있다고 하는데 숨기지 말라’하였다(鄭道傳,≪三峯集≫권 4, 行狀 高麗國奉翊大夫檢校密直提學寶文閣提學上護軍榮祿大夫刑部尙書鄭先生行狀).

 이 사료는 정운경이 충혜왕 복위 5년(1344)에 福州判官으로1055)여기서의 福州는 경상도 안동을 가리킨다(≪高麗史≫권 57, 志 11, 地理 2, 安東府). 있을 때 승려를 죽인 범인을 색출한 내용이다. 여기에서 주목되는 것은 糞田役人과 糞田主이다. 내용상으로 보아 분전주와 분전역인의 관계는 주종관계로 보이지 않으며 분전시에 일시적으로 노동력을 차용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다면 분전주는 농번기에 분전역인과 같은 노동력을 차용할 수 있었던 富農이나 小農上層으로 보이고, 분전역인은 일시적으로 농번기에나마 노동력을 팔아야 했던 당시 광범위하게 창출되고 있었던 몰락농민층, 즉 傭作貧農이 아니었나 한다.

 또 하나 주목할 것은 위의 사료에 보이는 분전의 실태이다.≪농사직설≫의 시비체계를 살펴보면 수전에서의 시비와 한전에서의 시비가 뚜렷이 구분되어 있다.1056)李泰鎭,<14, 15세기 農業技術의 발달과 新興士族>(앞의 책).
閔成基,<朝鮮時代의 施肥技術>(≪朝鮮農業史硏究≫, 一潮閣, 1988).
李鎬澈, 앞의 책.
김용섭,<농사직설의 편찬과 기술>(≪애산학보≫4, 애산학회, 1986).
수전의 경우 糞, 新土, 莎土, 牛馬糞, 連枝杼葉(鄕名 加乙草), 人糞, 蠶沙 등을 初耕과 再耕사이에 분전하고 있다. 이들은 대체로 腐熟되지 않은 거름으로서 수전의 저습한 토양에 넣어 糞耕함으로써 골고루 시비하는 효과뿐 아니라 부숙을 촉진시키는 효과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수전의 경우 수경일 때만 그렇고, 건경이나 旱稻일 때에는 한전시비와 마찬가지로 파종시에 熟糞과 尿灰 등을 써서 糞種을 행하고 있다. 한전에는 기경시에 분전이라 할 수 있는 火糞과 豆科綠肥에 해당하는 掩耕을 하고 있는데, 그 외에는 대체로 파종시에 숙분과 뇨회 등을 분종하고 있다. 그러나 麻田의 경우에는 初耕 후와 파종 후에 우마분을 분전하고, 大小麥田의 경우에는 파종 후에 廐肥를 분전하고 있다. 한전에서는 糞灰 등의 완전히 부숙된 乾糞이 사용되는 것은 토양 자체가 수전과 달리 건조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앞의 사료에서 분전주가 따로이 분전역인을 동원하여 특별히 분전을 행하였다면 한전에서의 糞種처럼 파종과 시비작업이 따로 분리될 필요가 없는 것이라던가 火糞이나 掩耕을 의미하는 것 같지는 않다. 문맥상 최소한 여기서의 분전은 수전에서의 분전이나 대소맥전에서의 파종 후의 구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분전되고 있는 시비의 내용은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수전의 경우 신토·사토와 같은 토분이나 연지저엽과 같은 생초분과 인분·잠사·우마분 등의 분이었다. 특히 우마분은 마전과 만도수경전, 이앙전의 기비로서 수·한전을 가리지 않고 사용되고 있는데 이것은 生糞이 아니라 堆肥糞이었다 한다.1057)閔成基, 위의 책, 232쪽. 또한 수전에 사용되었던 ‘糞’이라고 표기된 것도 내용상 牛馬廐糞이 아닐까 추정되고 있다.1058)閔成基, 위의 책, 233∼234쪽. 맥전에서의 追肥인 廐肥도 우마구분이었음을 볼 때≪농사직설≫단계에서는 수·한전을 막론하고 가장 많이 이용되고 있는 것은 우마구분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당시의 농가경영에 있어 우마의 소유는 수·한전 모두에 있어 耕地用으로만이 아니라 시비라는 차원의 의미에서도 대단히 중요했음이 분명하다. 중국의 경우1059)米田賢次郞,<中國古代の肥料について>(≪滋賀大學學藝學部紀要≫13, 1963). 구비법 즉 踏糞法은≪齊民要術≫에 첨가되어 있는 唐代의 기록으로 보이는<雜說>에 처음으로 소개되고 있다. 이 때의 답분은 小畝 300묘를 가진 中農을 표준으로 하여 쓴 것이지만 소 한 마리가 월동하여 만들 수 있는 답분은 겨우 6묘만을 시비할 수 있었기 때문에 보편적이었다 할 수 없겠다. 그 후 元代의≪王禎農書≫에는 시비 가운데 답분이 가장 보편적으로 이용되고 있을 정도로 변화를 보이고 있다 한다. 그렇다면 고려 후기에는≪제민요술≫단계에서처럼 답분이 극히 일부분만 사용된 단계를 훨씬 넘어 수·한전을 막론하고 상당히 이용되고 있었지 않았나 한다.

 소를 소유할 수 있었던 부농의 경우 이러한 농법발달을 기반으로 부를 축적하여 신분상승을 도모하기도 하였을 것이다. 충렬왕대에 들어와 마련된 納粟補官制와 같은 것은 그러한 것을 합법화시켜 주고 있다.1060)≪高麗史≫권 80, 志 34, 食貨 3, 賑恤 納粟補官之制. 그러한 사례로 대표적인 것이 명종연간의 私奴 平亮의 경우이다.1061)≪高麗史≫권 20, 世家 20, 명종 18년 5월. 少監 王元之의 婢壻였던 평량은 免賤하여 산원동정직까지 얻고 있는데 그것이 ‘務農致富’에 의하였다고 한다. 이 ‘무농치부’야말로 농업기술의 발전이 사회적인 신분변동까지를 야기한 근본원인이 되었음을 입증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魏恩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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