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9권 고려 후기의 정치와 경제
  • Ⅱ. 경제구조의 변화
  • 3. 농업기술의 발전
  • 2) 목면의 재배

2) 목면의 재배

 우리 나라에서 목면 관련기록으로 가장 빠른 것은 신라 경문왕 9년(869)에 당나라에 대한 進獻品의 하나로 白氎布를 보낸 경우이다.1062)≪三國史記≫권 11, 新羅本紀 11, 경문왕 9년 7월. 이 백첩포는 고려 혜종 2년(945) 고려에서 後晉에 보낸 공물 가운데에도 보이고 있다.1063)≪高麗史≫권 2 世家 2, 혜종 2년.

 전 세계의 면품종은 6종류가 있는데, 중국에 들어온 것은 두 종류였다. 하나가 亞洲棉(木棉, Bombax tree)으로 원산지는 인도이며 월남·버마를 거쳐 海南·云南 등으로 전파된 것이 있고, 다른 하나는 非洲棉(草棉, Gossypium)으로 원산지는 아프리카이고 중앙아시아를 거쳐 중국서북으로 전해졌다 한다. 전자로 짠 직물을 桐華布라 하고, 후자로 짠 직물을 백첩포라고 한다.1064)澤村東平,≪朝鮮棉作綿業の生成と發展≫(朝鮮纖維協會, 1941), 7∼8쪽.
中國農業遺産硏究室 編,≪中國農學史(下)≫(科學出版社, 1984), 32∼33쪽.
실제 우리 나라에 전해진 것은 목면이 아닌 초면종인데 앞에 든 백첩포는 바로 초면직물을 말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시기 목면 관련사료는 위에서 든 사례 외에는 찾아볼 수가 없기 때문에 신라말 고려초에 중국에의 진헌품이 과연 우리 나라에서 생산된 것인지 의심하는 견해도 있다.1065)경문왕대의 백첩포는 국내산이 아니라 우연히 외국으로부터 수입되어 진귀품으로 唐에 進俸된 것으로 보고 있으며, 고려 초기 혜종대의 기록도 중국연해 제항의 중개무역에 의해 수입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澤村東平, 위의 책, 7∼20쪽). 그러나 설령 신라말 고려초의 백첩포가 우리 나라에서 재배된 면화로 짠 직물이었다 하더라도1066)閔吉子는≪翰苑≫蕃夷部 高麗條 “高驪記云 其人亦造錦 紫地纈文者爲上 次有五色錦次有雲布錦 又造白疊布 …”를 인용하여 이미 고구려에도 목면이 직조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閔吉子,<織物의 種類에 關한 硏究>,≪敎育論叢≫6, 國民大, 1986, 111쪽). 그것은 결코 일반화되었다고 볼 수는 없을 것 같다. 아마도 목면은 고려 이전에 이미 전래된 것 같으나 재배에 성공하지 못했다고 보는 것이 옳을 듯하다.1067)朴性植,<麗末鮮初의 木綿業에 대하여>(≪大丘史學≫17, 1979), 62쪽.

 중국의 경우도 면화가 알려진 것은 漢代에서 六朝에 걸치는 시기였지만 정작 널리 확산된 것은 宋末 元初였다. 黃道婆라는 여자에 의해 取子車·繅絲車 등의 직기들이 널리 대중화되면서였다고 한다.1068)天野元之助,≪中國農業史硏究≫(御茶の水書房, 1979), 482∼498쪽. 短纖維였던 목화를 수작업에만 의존하여 직포하기란 지극히 힘들었기 때문에 일반에의 대중화는 씨를 분리하고 실을 방적할 수 있는 그와 같은 機器의 출현이 아니면 불가능하였던 것이다.

 현재 우리 나라의 목면도입은 공민왕 13년(1364)에 文益漸이 원으로부터 목면씨를 가지고 온 것을 최초로 보는 것이 일반화되어 있다.1069)목면전래에 대하여 가장 자세하게 전하고 있는 사료 중의 하나인≪太祖實錄≫의 기사에 의하면 문익점이 원에서 고려로 돌아와 고향인 진주에서 목면을 재배하기 시작한 때가 至正 24年 甲辰年(1364)이라고 한다(≪太祖實錄≫권 14, 태조 7년 6월 정사). 지금도 이것을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을 뿐 아니라 당대에도 그러했던 것 같다. 즉 우왕 원년(1375년)에 문익점을 목면도입의 공으로 典客主簿에 임명하고 있으며,1070)≪太祖實錄≫권 4, 태조 7년 6월 정사. 조선에 들어와서도 태종 원년(1401)에 목면전래의 공으로 그의 아들에게 벼슬을 내린 것에서도1071)≪太宗實錄≫권 1, 태종 원년 윤3월 경인. 알 수 있다. 이들에 대한 관직수여 등의 표창은 국가의 목면보급의 의지와도 맞물려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는데 그렇다면 보편적으로 알려진 것처럼 조선시대에 들어와 정책적인 목면보급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이미 고려말부터 국가는 정책적으로 목면보급에 힘썼던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1072)崔永好,<高麗末 慶尙道地方의 木綿 보급과 그 주도세력>(≪考古歷史學志≫5·6, 東亞大, 1990), 253쪽.

 그런데 과연 문익점이 목면의 최초 도입자인가는 의문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문익점 이전에도 원나라와의 인적·물적 교류를 통해 목면이 고려에 들어올 가능성이 충분히 있었기 때문이다.

 李穡이 남겨 놓은<詠木綿布>1073)李 穡,≪牧隱詩藁≫권 10, 詠木綿布.라는 시에 의하면 원과의 교류를 통한 목면종자의 유입은 얼마든지 가능했음을 알 수 있다. 이 시는 이색이 충목왕 4년(1348)에서 충정왕 3년(1351)에 걸쳐 원나라의 국자학에 유학하고 있을 당시를 회상하면서 읊은 것이다. 여기에서 강남출신인 葉孔昭는1074)葉孔昭에 대해서는 周藤吉之,<高麗末期より朝鮮初期に至る織物業の發達>(≪淸代東アジア史硏究≫, 日本學術進興會, 1972), 467쪽 참조. 이색에게서 苧根을 구하고 그는 목면종자를 보내겠다고 하였다. 이색에게 저근을 구한 것은 이색의 고향이 모시로 유명한 韓山이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그러므로 문익점이 아니라도 원에 왕래하면서 목면의 가치를 인식한 사람들에 의해 도입되었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고 할 수 있다.1075)周藤吉之에 의하면 목면종자는 문익점이 고려에 가지고 들어온 공민왕 13년 이전에 이미 강남으로부터 해상교통을 통해 들어오지 않았을까라고 한다(周藤吉之, 위의 책, 463∼469쪽). 이미 원과의 교류를 통해 목면은 상당량 수입되고 있었다. 원 황제의 사여품이라는 형식을 통하거나1076)≪高麗史≫권 31 世家 31, 충렬왕 22년 12월. 사행무역1077)≪高麗史≫권 115, 列傳 28, 李崇仁.등을 통해서도 들어왔기 때문에 당연히 신소재로서의 목면은 문익점 이전에도 고려에 꽤 알려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도 문익점이 굳이 최초의 목면도입자로 인식된 것은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단섬유였던 목면의 직포가 대중화되기 위해서는 기기의 보급이 전제되어야 하는데 그와 같은 기기의 도입과 보급을 목면재배와 더불어 시도했던 이가 바로 문익점과 鄭天益 등이었기 때문일 것이다.1078)≪高麗史≫권 111, 列傳 24, 文益漸.
≪太祖實錄≫권 14 태조 7년 6월 정사.

 그런데 목면이 누구에 의해 주도적으로 도입, 보급되었나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또 하나 유의해 보아야 할 것은 공민왕 13년(1364)이라는 시점이 목면도입의 원년으로 인식되고 있는 점이다.

 고려의 직물수공업은 중기 이후 견직물·저직물·마직물 등에 걸쳐 전반적인 발전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발전은 몽고와의 전쟁과 원의 수탈 등으로 인해 왜곡되게 되었다. 원제국의 등장은 아시아에서 유럽대륙에 걸친 일체의 정치적 장애를 제거하고 육상교역로를 열었기 때문에 그 이전시기와는 비교할 수 없는 대외무역의 발전을 이룩하였다. 원간섭기의 고려도 말단이나마 그 교역구조에 참여할 수 있었다. 그 결과 원간섭기의 고려는 전시기에 비해 대외무역이 크게 발전하였고 국내의 유통경제도 활성화되었다. 그러나 원간섭기 유통경제의 발전이 반드시 고려사회경제의 정상적인 발전으로 이어진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특히 직물수공업의 경우 원과의 교역이 가능하였던 견직물과 특히 모시의 특수는 일부의 지배층과 그들과 결탁한 상인층에는 부를 가져다 주었을런지 모르겠지만 대부분의 농민을 피폐하게 만들었다.1079)魏恩淑,<고려후기 직물수공업의 구조변동과 그 성격>(≪韓國文化硏究≫6, 釜山大, 1993), 212∼233쪽.

 그러나 원나라의 쇠퇴는 원나라를 중심으로 한 교역구조에 커다란 변동을 초래했을 것이다. 반원정책이 표면화되고 명나라가 등장하는 공민왕대에 들어와 특히 모시 관련사료는 현저히 줄어들고 있다. 이것은 원나라가 쇠퇴하면서 지금까지의 모시 특수가 상당히 타격을 받았으리라는 것을 짐작케 한다. 그러면서 원나라 시장을 대상으로 했던 견직물이나 모시 중심의 직물생산체계는 조정되지 않을 수 없었다. 농민들도 원나라로부터의 요구가 줄어들면서 강압적인 수탈구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바로 이러한 시점에 있었기 때문에 새로운 의료였던 목면에 관심이 돌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원간섭기에도 여러 차례의 개혁정치가 행해졌으나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고 본격적인 개혁정치가 시도될 수 있었던 것은 공민왕대 이후부터였다는 사실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1080)권영국,<14세기 전반 ‘개혁정치’의 내용과 그 성격>(≪역사와 현실≫7, 1992).

 이 목면의 전래는 피폐해있던 농가경제에 커다란 활력소가 되었다. 고려 중기 이후에 발전을 보이고 있는 견직물과 모시는 결코 대중적 의료가 되지 못하였고 우선적 수탈대상이 되었기 때문에 일반 농민들의 잉여창출에 직접적인 기여를 했다고는 보기 힘들다. 또한 가장 대중적 의료였던 마의 경우는 조선초까지도 세역을 권장하고 있는 실정이었다.1081)≪農事直說≫種麻.

 우리 나라는 목면도입 이전에 일반 서민들의 동절기 의복이 어떤 것이었는지 연구된 것이 거의 없다. 그런데 우리와 사정이 비슷했을 일본에서는 서민들은 겨울철에는 마포를 누빈 옷을 입거나, 그렇지 않으면 보온성이 적은 마포를 추울 때에는 여러 겹을 껴입고 겨울을 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자연히 추위로 질병에 걸려 해마다 많은 빈민들이 사망하거나 고생을 했으며,1082)武部善人,≪綿と木綿の歷史≫(御茶の水書房, 1989), 45∼48쪽. 또한 신축성이 적은 麻는 피부에 잘 붙지 않기 때문에 한기를 막기 위해서는 다듬이질을 계속하여 섬유를 부드럽게 해야 했다고 한다.1083)永原慶二,≪新. 木綿以前のこと≫(中央公論社, 1990), 46∼48쪽.

 우리 나라도 사정이 비슷했을 것으로 짐작되는데 방적이나 직포 이외에도 다듬이질처럼 쉴틈없이 계속해야 했던 작업은 가족들의 의복을 전담하고 있던 여성들에게는 엄청난 노역이었음에 틀림없다. 덧붙여 해마다 국가에 부담해야 하는 稅布생산까지 포함한다면 직조기술의 완만한 발전을 염두에 둔다 하여도 실제로 일반농가에서 자가소비나 貢布 이외에 상품화하기 위해 생산한다는 것은 사실상 거의 불가능하였다고 생각된다.

 이것에 비해 목면은 직물이 가진 보온성으로 인해 서민들에게는 겨울을 따뜻하게 지낼 수 있게 했을 뿐 아니라 또한 연작이 가능하였다.1084)≪農桑輯要≫에서도 목면은 연작이다. 우리 나라의 면작에 관한 최초의 기록으로 보이는≪四時纂要≫種木綿法의 기록에도 연작이다(閔成基,<『四時纂要』 種木綿法과 朝鮮棉作法>,≪朝鮮農業史硏究≫, 一潮閣, 1988). 그러나 무엇보다도 목면이 가진 경제성은 다른 어떤 직물을 직조하는 것보다 훨씬 노동시간을 단축할 수 있었다는 데 있다. 보다 구체적인 자료를 통해 이를 살펴보기로 하자.

 비록 일제시대에 조사된 자료이지만 면과 다른 직물의 조제 및 방적과정에서의 노동생산성을 비교하면 다음<표>와 같다.1085)이<표>는 澤村東平,≪近代朝鮮の棉作綿業≫(未來社, 1985), 140쪽의 도표를 참고하여 생산량을 g으로 산출하여 재작성한 것이다.

종 류 1 일 생 산 량
調製飼育(g) 同 比 率 紡 績(g) 同 比 率
綿 絲
麻 絲
苧 絲
絹 絲
紬 絲
658.75
815.25
1136.25
52.5
47.25
1.00
1.24
1.73
0.08
0.07
264
55.5
60
60
31.125
1.00
0.21
0.23
0.23
0.12

<표>각 직물의 조제 및 방적과정의 노동생산성 비교

 위<표>를 통해 목면이 같은 대중적 의료였던 마와 비교해 얼마만큼 노동시간을 절약할 수 있었는지 분명히 알 수 있다.

 면의 조제과정은 수확하여 목화송이를 말린 후 씨아기로 씨와 솜을 분리하고 활로 틀어 솜을 부풀게 하는 과정까지이다. 마의 경우는 수확 후 구덩이를 파고 거기에 돌을 넣어 불을 지펴서 돌을 달군 후 그 위에 삼단을 놓고 풀이나 거적을 덮어 물을 끼얹으면서 그 증기를 이용하여 삼을 찌고, 식기 전에 껍질을 벗겨 잿물에 빨아 검은 물을 빼고 햇볕에 말리기까지의 과정이다. 이 과정까지는 마가 면에 비해 생산량이 약간 더 상회한다고 할 수 있지만 이 과정에서 마는 면과는 달리 남자의 노동이 총노동의 약 63%를 점하고 있음을 감안해야 할 것이다.1086)澤村東平, 위의 책, 126쪽.

 방적과정은 면은 솜을 수숫대에 말아 손가락 굵기의 고치를 만들고 이것을 물레에 자아서 실을 뽑게 된다. 마는 삼껍질을 물에 축여 손톱으로 길게 째고, 짼 삼을 삼톱 등으로 훑어 살을 뺀 뒤 일일이 한올씩 끼워 허벅지에 대고 비벼서 연결하기까지의 과정이다. 그런데 이 방적과정에서 같은 양의 실을 만드는 데 면은 마의 1/5의 노동시간밖에 소요되지 않음을 앞의<표>에서 알 수 있다.

 수확 후 방적까지의 이러한 노동시간의 단축은 다른 직물이 모두 원시적인 수작업에 의존하고 있음에 비해 목면은 씨아·활·물레 등의 機器를 사용하고 있다는 데 큰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조제에 걸리는 시간은 마와 면이 거의 비슷했다고 하므로1087)澤村東平, 위의 책, 141∼147쪽. 방적까지의 이러한 월등한 노동생산성은 목면이 도입되자마자 급속히 확산될 수 있었다고 한다.1088)일본에서도 목면이 도입되자마자 단기간 내에 마를 대체하게 된 가장 큰 이유가 직조과정에서의 노동시간의 현격한 단축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한다(永原慶二, 앞의 책, 46∼48쪽).

 이러한 직물업에 있어서의 노동생산성의 향상은 직물업에 있어서의 배 이상의 생산력발전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직물에 있어서의 이와 같은 노동생산성의 향상은 같은 노동시간으로 마직에 비해 단연코 많은 생산이 가능하였기 때문에 농가경제에는 상당한 도움이 되었으리라는 것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직물업에 있어서의 이러한 생산력발전은 경제구조상에도 많은 파급효과를 가져왔다. 목면생산이 늘어나면서 면포는 15세기 후반기부터는 麻布로부터 正布의 자리를 넘겨 받았고1089)宋在璇,<16世紀 綿布의 貨幣機能>(≪邊太燮博士華甲記念史學論叢≫, 三英社, 1985). 특히 군역이나 요역·공부에 대한 면포로의 대납현상이 광범위하게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1090)田川孝三,≪李朝貢納制の硏究≫(東洋文庫, 1964).
李泰鎭,<軍役의 變質과 納布制의 實施>(≪韓國軍制史≫近世朝鮮後期篇, 陸軍本部, 1968).
고려 후기에도 부분적으로 그러한 현상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1091)이에 대해서는 다음의 연구가 참고된다.
李惠玉,<高麗時代의 庸(役)制 硏究>(≪梨花史學硏究≫15, 1984).
李貞熙,<高麗後期 役收取의 實態와 變化>(≪釜大史學≫9, 1985).
金東哲,<高麗末의 유통구조와 상인>(≪釜大史學≫9, 1985).
權寧國,<14世紀 榷鹽制의 成立과 그 運用>(≪韓國史論≫13, 서울大, 1985).
하지만 그것이 제도로서 완전히 정착되지 못한 것은 여러 가지의 원인이 있었겠지만 원간섭기의 각종 직물의 엄청난 수탈과 함께 당시 직물의 주종을 이루었던 견·저·마 등이 노동시간을 많이 요구하는 것이었으므로 직물생산량에 있어서의 한계도 한 원인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요역과 군역·공부 등에 대한 포납화는 농가경영이 米·棉作을 중심으로 전업화되어 감을 의미하는 것이고 이에 따라 소농민은 농업경영에 있어 한층 제고된 자율성과 생산성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이다. 바로 소농민경영의 안정이 달성될 수 있는 기초가 마련된 것이었다. 이러한 생산력의 기초에서 원간섭기 이후의 농가경제의 피폐는 상당 정도 회복되고, 여말선초 농가의 직물생산은 마·면교체를 전면적으로 시행하게 되었다.1092)오랜 전통을 가지고 전국 각지에서 광범위하게 진행되어 오던 마직업은 14세기말에 삼남지방에서부터 면직업이 급속히 발전하게 되자 면화재배가 불가능한 북부지방에서 주로 발전하였다. 그리고 북부지방은 견직업도 남부지방에 비해 상대적으로 발전하여 조선시대에는「南綿北布」「南綿北絲」라는 지역적 분업을 가져와 농촌가내수공업은 자가수요나 공물생산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시장을 위한 상품생산으로 발전하고 있었다(홍희유,≪조선중세수공업사연구≫, 과학백과사전출판사, 1979 ; 지양사, 1989, 218∼224쪽).

 여말선초를 거치는 역사발전의 추세가 소농민경영의 자립성 제고에 있었다고 한다면 소농민의 자립을 가능케 해준 것은 농업생산력의 발전과1093)李泰鎭,<14·15세기 農業技術의 발달과 新興士族>(≪東洋學≫9, 檀國大, 1979 ;≪韓國社會史硏究≫, 지식산업사, 1986).
―――,<高麗末·朝鮮初의 社會變化>(≪震檀學報≫55, 1983 ; 위의 책).
더불어 바로 이 목면이었다. 이러한 경제적 가치를 지닌 것이었기 때문에 비록 삼남지방을 중심으로 한 것이기는 하나 십년이 못되어 전국에 퍼졌다는 말이1094)≪太祖實錄≫권 14, 태조 7년 6월 정사. 나올 정도로 급격히 확산될 수 있었던 것이다.

<魏恩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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