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9권 고려 후기의 정치와 경제
  • Ⅱ. 경제구조의 변화
  • 4. 수공업과 염업
  • 1) 수공업
  • (1) 관청수공업

(1) 관청수공업

 관청수공업은 왕실·관청의 수요품, 군수품, 조공품 등 지배층의 수요를 충족하기 위한 것이었다. 따라서 그 수공업품은 전문성이 높고 수준도 뛰어났다. 관청수공업은 중앙·지방의 관청이 수공업장을 설치하고 工匠을 징발하여, 제품을 만드는 체제로 운영되었다.1096)홍희유,≪조선중세수공업사연구≫(과학백과사전출판사, 1979 ; 지양사, 1989, 85∼86쪽).
金炫榮,<고려시기의 所에 대한 재검토>(≪韓國史論≫15, 서울大, 1986), 108쪽.
안병우,<고려시대 수공업과 상업>(≪한국사≫6, 한길사, 1994), 111쪽.
姜萬吉, 위의 글, 184∼187쪽.

 중앙 관청수공업은 수도 개경의 중앙관청에 소속된 수공업장이 중심이 된 국왕·귀족의 생필품·사치품, 중앙관청의 필요품, 군수품, 국가행사의 필요품 등을 주로 생산하였다. 관리체계의 최고 담당기관은 工部(工曹)였다. 공부는 충렬왕 원년(1275)에 폐지되었다가, 24년(1298)에 공조로 명칭을 바꾸어 다시 설치되었다. 그러나 또 다시 폐지되었다가 공민왕 5년(1356)의 관제개혁 때 다시 설치되었다.1097)金東旭,≪韓國建築工匠史硏究≫(技文堂, 1993), 71쪽. 중앙 관청수공업은 직능에 따라 繕工寺, 軍器寺 등 14개 부서로 분화되어 있었다.1098)리용태,≪우리 나라 중세과학기술사≫(과학백과사전출판사, 1990), 78쪽. 이들 관청은 그 비중에 따라 판사(정3품)∼승(정9품)에 의해 지휘, 통제되었다. 행정관리 체계는 신분적 위계질서가 철저하였으며, 그 등급은 단순히 생산의 규모나 중요성에 의해 규정되는 것은 아니었다. 기본적으로 어느 계층의 수요품을 생산하는가에 따라 규정되었다.1099)홍희유, 앞의 책, 86∼88쪽.
徐明禧, 앞의 글, 419∼421쪽.

 중앙 관청수공업은 정부의 수요에 따라 분류되었고, 각 관청마다 각종 공장이 전속되어 있었다.1100)姜萬吉, 앞의 글, 184쪽. 공장에게는 일종의 호적과 같은 工匠案(百工案牘)이 작성되어, 이 안에 의해 공장의 공역 동원이 이루어졌다. 공장안은 공장에 대한 국가의 파악과 역 수취를 위해 작성되었다. 공장은 왕경과 지방으로, 지방은 각 출신 지역별로 공장안에 등록·편제되었다. 그러나 고려시대에는 조선시대처럼 경·외공장 같은 법제적 구분은 없었다.1101)姜萬吉, 위의 글, 188쪽.
洪承基,<高麗時代의 工匠>(≪震檀學報≫40, 1975), 66쪽.
徐聖鎬,<高麗前期 지배체제와 工匠>(≪韓國史論≫27, 서울大, 1992), 90∼93쪽.

 관청수공업의 공정은 세분화되어 있었다. 군기감의 경우 공장의 업종은 皮甲匠·牟匠 등 13종이나 되었다. 이처럼 업종이 다양한 것은 분업체계를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1102)안병우, 앞의 글, 113쪽. 공장은 관청에만 예속되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관청수공업장에 동원되는 일정 기간의 공역일을 제외하고는 자기 영업을 할 수 있었다. 공역에 종사할 경우에도 지급되는 대가가 고려 후기로 올수록 점차 임노동적인 성격으로 변하였다. 예를 들면 고종 36년(1249) 강화도에 있던 정부를 개경으로 옮기기 위한 궁궐 복구공사에 종사한 공장에게 은 20근·포 200필을 지급하였다.1103)≪高麗史≫권 23, 世家 23, 고종 36년 4월 병진. 원종 15년(1274)에는 원의 요청으로 일본원정 전함 300척을 건조하였는데, 이 때 동원된 공장과 인부 30,500명에게 3개월 급료로 34,312석 5두를 지급하였다.1104)≪高麗史≫권 27, 世家 27, 원종 15년 2월 갑자. 이들은 부역의 형태로 동원되었지만 일정한 노임을 받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1105)姜萬吉, 앞의 글, 187∼188쪽.

 공장은 취업기간과 기술수준에 따라 지유승지·지유부승지·지유행수·지유·행수교위·행수부위·행수대장·행수부장 등 다양한 칭호를 가지고 있었다. 일반 공장은 이들의 지휘를 받고 있었다.1106)白南雲,≪朝鮮封建社會經濟史(上)≫(改造社, 1937 ; 하일식 옮김, 백남운전집 3, 이론과 실천, 1993, 81쪽). 공장의 구체적인 모습은 韓仲敍를 통해 잘 알 수 있다.

 한중서는 강종 2년(1213)에는 高嶺寺 飯子, 고종 9년(1222) 靑林寺 銅鐘, 고종 25년(1238)에는 神龍寺 小鐘과 神泉寺 반자, 그리고 고종 39년(1252)에는 安養社 반자 등을 주조하였다. 그는 侍衛軍士→匠→大匠의 순으로 승진하였으며, 고종 25년에는 別將同正이란 동정직도 가지고 있었다.1107)朴敬源,<高麗鑄金匠考-韓仲敍와 그의 作品->(≪考古美術≫149, 韓國考古美術史學會, 1981). 상층 수공업자에게 직위를 준 것은 생산의욕을 높이고 일반 수공업자에 대한 통제와 감독을 강화시키는 데 일정한 역할을 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1108)徐明禧, 앞의 글, 421쪽. 비록 동정직이지만 有品官 진출이 근본적으로 금지되어 있던 공장에게 동정직 제수는 작지 않은 명예였다. 물론 모든 공장에게 유품직이 내려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공장에 대한 賞이나, 경제력을 바탕으로 한 유품직의 획득, 또는 중앙공장의 지방이주나 지방공장의 출신지역 이탈이 증가하는 추세 속에서, 이에 대한 국가의 대응책 등으로 동정직이 수여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이탈 추세가 늘어남에 따라 전기 수공업체계는 크게 동요되지 않을 수 없었다.1109)徐聖鎬,<高麗 武臣執權期 商工業의 전개>(≪國史館論叢≫37, 1992), 106∼107쪽.

 관청수공업장의 생산활동은 시장생산이 아니므로, 작업기간이 길수록 민간수공업의 발달을 저해하였다. 중앙집권력과 관청수공업 관리체계가 약해짐에 따라 일부 수공업자는 지방에 흩어져 독립적인 수공업자로 전환되어 갔다. 관청수공업이 쇠퇴함에 따라 중앙관청에서는 필요한 물품을 거의 모두 시전에서 구입하는 상태가 되었다. 이리하여 충렬왕 22년(1296)에는 중찬 洪子藩에 의해 지방에 나가 있는 개경의 鍮銅匠을 기한을 정하여 개경으로 돌아오게 할 것이 건의될 정도로1110)≪高麗史≫권 84, 志 38, 刑法 1, 職制 충렬왕 22년 5월. 이 무렵 개경의 관영수공업에 부역해야 할 경공장들은 지방의 주현에 많이 나가 있었다. 이러한 공장의 출신지역 이탈은 이미 무신집권기 이래로 심화되어 있었다.

 지방 관청수공업장은 지방의 주요 수공업지역에 설치된 것으로서 錦綺坊·雜織坊·甲坊 등이 있었다. 금기방은 고급 비단이나 일반 견직물, 잡직방은 여러 잡직물, 갑방은 가죽제품 또는 능라비단을 짜는 수공업장이다.1111)홍희유, 앞의 책, 92쪽.
―――,≪조선상업사-고대·중세-≫(과학백과사전종합출판사, 1989), 75쪽.
그러나 금기방 등 지방 생산조직은 지방 관청수요를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중앙 관청수요를 위한 것이었다. 지방관청 자체의 수요를 위한 수공업장도 있었으나, 그 수나 규모는 미미하였다.1112)徐明禧, 앞의 글, 421∼422쪽.

 충선왕 3년(1311) 이전에 동경(경주)에는 갑방이란 창고가 있었는데 이 창고는 백성에게서 능라를 수탈하여 저장하는 창고였다고1113)≪高麗史≫권 107, 列傳 20, 權㫜. 한다. 경주의 수공업장인 갑방이 금기능라 등의 생산기구가 아니라, 중앙에 납부하는 능라 등 공물을 민에게서 수취하여 보관하는 창고로 변한 것은 지방 관청수공업의 쇠퇴 양상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한편 이러한 갑방의 쇠퇴는 일반농민의 능라 직조기술의 성장에 반비례하는 것이었다. 은병을 가지고 민간의 능라를 강제적으로 매득하는 것도 민간수공업 성장을 반영하는 현상이다.1114)홍희유, 앞의 책(1979), 93쪽.
北村秀人,<高麗時代の絹織物生産について>(≪人文硏究≫37­9, 大阪市立大, 1985), 65∼66쪽.
안병우, 앞의 글, 126쪽.

 京市에서는 綾·羅·絲·絹·紗·綃 등 다양한 견직물이 판매되고 있었다. 경시에서의 판매가 활발하게 된 것은 국내 견직물 수요가 증대함에 따라 나타난 현상이었다. 고려말에는 대소 신하가 사·라 등 의복을 입는 것을 금지하고 검소함을 강조하였다. 또한 귀천을 막론하고 다른 나라의 물건을 다투어 구입한다고 하면서, 工商賤隷가 사·라·능·단을 입는 것을 금하여 사치풍조를 없애고 신분질서를 엄하게 하도록 하였다.1115)≪高麗史≫권 46, 世家 46, 공양왕 3년 5월 무술 및 권 85, 志 39, 刑法 2, 禁令 공양왕 3년 3월. 이러한 양상은 이 시기 고급 견직물 수요층이 매우 확대되어 갔음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중앙 관청수공업이 쇠퇴함에 따라 개경의 권세가 사이에는 自家에서 고급 견직물을 만드는 경우도 생겼다. 黃綾布를 자가생산한 崔怡의 경우가 그 대표적인 예가 될 것이다.1116)北村秀人, 앞의 글, 70∼7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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