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9권 고려 후기의 정치와 경제
  • Ⅱ. 경제구조의 변화
  • 4. 수공업과 염업
  • 1) 수공업
  • (3) 사원수공업

(3) 사원수공업

 고려시대는 불교가 국교화하여 사원이 국가나 귀족의 보호를 받았다. 사원은 종교 도량이지만 방대한 寺領이 있어 미곡을 집적하였고, 우수한 수공업품을 생산하였다. 처음에는 자체 수요를 위해 운영하였으나 생산이 늘어나자 일반 수요품까지 조달하게 되었다. 특히 직포·제와·제염·양조업 등이 발달하였다.1132)姜萬吉, 앞의 글, 193∼194쪽.
李載昌,≪高麗寺院經濟의 硏究≫(亞細亞文化社, 1976), 55∼63쪽.
朴龍雲,≪高麗時代史(上)≫(一志社, 1985), 240쪽.
충렬왕 때 한 여승이 제국대장공주에게 白苧布를 바쳤는데, 가늘기가 매미날개 같고 꽃무늬를 넣어 짠 것으로, 공주가 상인에게 보였지만 모두 전에 보지 못한 것이라 하였다. 이처럼 사원에서는 花文苧布와 같은 뛰어난 직물을 직조하였으며 기술도 이전보다 크게 향상되었다.1133)≪高麗史≫권 89, 列傳 2, 后妃 2, 齊國大長公主.
劉敎聖, 앞의 글, 1039∼1040쪽.
사원에서 짠 직물은 주로 승려의 의복, 왕실·귀족 헌납품, 조공품 등으로 이용되었다.

 기와류는 사찰 건축용 기와에 사용되었으며, 특히 유리와 제조술이 뛰어났다. 제와기술이 발달하여 민간제품보다 우수한 것이 생산되었다. 제와업은 조선시대로 연결되었는데, 조선 초기 製瓦場인 別瓦窯는 승려에 의해 운영되었다.1134)劉敎聖, 위의 글, 1038∼1039쪽.
姜萬吉,<別瓦窯考-朝鮮時代의 製瓦業發展->(≪史學志≫1, 檀國大, 1967).
제와기술의 뛰어남은 승려 六然의 사례에서 잘 볼 수 있다. 충렬왕 3년(1277)에 왕은 승려 육연을 강화에 보내어 유리와를 굽게 하였다. 그는 廣州와 義安(경상도 창원)에서 흙을 가져다,1135)홍희유, 앞의 책(1979), 127쪽에서는 광주와 의안의 두 지역으로 구분하였다. 그러나 徐明禧, 앞의 글(1993), 431쪽과 李相瑄,<高麗 寺院의 商行爲 考>(≪誠信史學≫9, 1991), 25쪽에서는 廣州의 義安土로 보고 있다. 黃丹을 많이 사용하여 구웠는데 南商(南道商人)이1136)劉敎聖, 앞의 글, 1040쪽에서는 南道商人으로, 金東哲,<고려말의 流通構造와 상인>(≪釜大史學≫9, 1985), 217·220쪽에서는 남도상인·전라도상인으로 파악하였다. 그러나 리용태, 앞의 책, 118쪽과 陳高華,≪元史硏究論稿≫(中華書局, 1991), 107쪽에서는 중국의 남쪽상인으로, 손영종·조희승,≪조선수공업사(1)≫(공업출판사, 1990), 345쪽에서는 송나라 상인으로 파악하였다. 판매하는 것보다 품질과 색상이 뛰어났다고 하였다.1137)≪高麗史≫권 28, 世家 28, 충렬왕 3년 5월 임진. 품질과 색상이 뛰어난 것은 질좋은 광주와 의안의 흙을 사용한 때문인 면도 있지만, 그보다는 특히 황단을 사용했기 때문인 것 같다. 황단은 鉛丹(Minium, Pb3O4)으로 용융점이 낮아, 유리의 주성분인 산화규소(SiO2)와 결합하여 용융점을 낮추면서 녹으므로 표면을 매끄럽게 하고 기공을 작게 하여 물의 침투를 막는 효과가 있었다.1138)金東哲, 앞의 글, 217∼218쪽.

 사원에서 만든 수공업품은 품질이 우수하여 상업발달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사원은 종교적 지위나 권력을 배경으로 抑賣抑買 등 강제교역의 주도적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충선왕 원년(1309)에 소금전매제를 실시할 때, 사원의 염분도 중요한 개혁대상이 되었다. 충선왕 4년에 僧人推考都監을 세워 승려의 상행위를 금지시켰고 충숙왕 3년(1316)에도 관직이 있는 자와 승려의 상행위를 금지시켰으나, 사원의 상업활동을 막지 못하였다. 이후에도 승려의 상행위가 계속 국가의 논의 대상이 되었지만 이러한 조처에도 불구하고 사원의 상업·수공업·고리대 등은 여전히 성행하였다.1139)姜萬吉, 앞의 글(1975), 202∼203쪽.
안병우, 앞의 글, 136∼138쪽.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