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9권 고려 후기의 정치와 경제
  • Ⅱ. 경제구조의 변화
  • 4. 수공업과 염업
  • 1) 수공업
  • (4) 민간수공업

(4) 민간수공업

 민간수공업은 관청수공업에 비해 질이 떨어지고 생산체계의 전문성도 결여되어 있었다. 그러나 조공품·생필품의 생산을 중심으로한 민간수공업은 광범위하게 존재하였다.1140)金炫榮, 앞의 글, 108∼109쪽. 후기에 들어 관청·소 수공업의 붕괴로 많은 장인들이 독립수공업자로 전환하여, 민간수공업을 발전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민간수공업의 발전은 농업생산력 발달로 인한 잉여의 형성과 그것을 기반으로 성장한 부호나 재지세력 등 새로운 사치품 소비층의 출현에 힘입은 바 컸다. 민간수공업 발전은 또한 13세기 말의 貢物代納制 출현 등에 힘입어 더욱 발전하였고, 도시와 지방의 유통경제의 발달을 촉진시켜 민간상업이 발전하는 계기도 마련하였다.1141)魏恩淑,<고려후기 직물수공업의 구조변동과 그 성격>(≪韓國文化硏究≫6, 釜山大, 1993), 204∼207쪽.

 지방 민간수공업자 중에는 전업적인 수공업자가 상당히 있었다. 유동장·금장·나장·능장·금박장 등이 대표적이다.1142)徐明禧, 앞의 글(1993), 435∼436쪽. 이들은 지방관청의 수공업품 생산에 동원되었으며 평소에는 민간에 필요한 물품을 생산하였다. 충렬왕 22년(1296)에 중찬 洪子藩은 당시 鍮銅匠이 지방에 많이 살고 있는데, 주현의 관리가 유동을 거두어 그릇을 만듦으로 민간의 그릇이 날로 줄어들고 있다면서, 그 대책으로 유동장에게 기한을 정하여 개경으로 돌아오게 할 것을 건의하였다.1143)≪高麗史≫권 84, 志 38, 刑法 1, 職制 충렬왕 22년 5월. 이처럼 개경의 관청수공업에 부역해야 할 공장이 지방 주현에 많이 나가 있었다. 지방의 전업적 수공업자는 유기장 외에 농기구를 만드는 冶匠을 비롯하여 도기장 등이 있었다. 개경 유동장의 활동영역이 13세기말에 지방으로 확대되는 양상은 지방 유기수요가 증대함에 따라 지방수요에 대한 생산만으로도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1144)姜萬吉, 앞의 글(1975), 190쪽.
金東哲, 앞의 글, 213쪽.
徐聖鎬, 앞의 글(1992b), 105쪽.

 후기에 들어 지방의 민간수공업품 수요가 늘어나는 양상은 그릇의 수요에서 잘 볼 수 있다. 공양왕 3년(1391) 房士良은 구리나 철로 만든 그릇의 사용을 금하고 대신 자기나 목기로 만든 그릇을 사용할 것을 주장하였다.1145)≪高麗史≫권 85, 志 39, 刑法 2, 禁令 공양왕 3년 3월. 이러한 건의가 나오게 된 것은 일반민들까지 철기·유기 그릇을 사용할 정도가 되었으며 자기 생산능력 또한 민간수요에 부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1146)權丙卓,≪傳統陶磁의 生産과 需要≫(嶺南大 民族文化硏究所, 1979), 114쪽.
金東哲, 앞의 글, 213∼214쪽.
전라도 康津縣 大口 자기소와 같은 어용·관용 도자기를 생산하던 도요지에서도 교환을 전제로 한 민수용 ‘장내기’형 사발·대접·접시 등을 다량 생산할 정도로 고려 후기 도자기 요지의 80% 이상이 판매를 전제로 한 뚝배기형 도자기를 생산하고 있었다.1147)權丙卓, 위의 책.

 지방의 도자기 생산은 11세기 후반 이후 확대되고 있었다. 이러한 양상은 1983∼1984년에 완도해저에서 발굴·인양된 도자기에서 잘 볼 수 있다. 30,701점의 출토 도자기 중 대접류가 2만여 점, 접시류가 1만여 점으로 대부분이 식생활용품이었음이 주목된다. 이들 도자기는 전라·경상·제주도 등 남해안 일대의 지방의 관청·사원·토호의 생활용 그릇으로 공급되었다고 보여진다.1148)文化財管理局,≪莞島海底遺物≫(1985).
尹龍二,≪韓國陶瓷史硏究≫(문예출판사, 1993).
이처럼 후기에는 도자기·유리와·유기제품 등에 대한 민간수요가 증가하여 갔다. 민간수요품 유통은 州縣市 중심의 국지적 유통 외에 당시의 상업발전 속에서 船商 등에 의해 보다 확대된 범위에서 이루어져 갔다.1149)徐聖鎬, 앞의 글(1992b), 108쪽.

 민간수공업 내에 전업적 수공업이 일부 발달하고 있었지만, 중심은 역시 농촌 가내수공업이었다. 가내수공업은 자가수요와 공물 납부용 생산이 주류를 이루었다. 가내수공업으로는 베·모시·비단을 짜는 직조업과 대자리·종이 수공업 등이 발달하였다. 직조업은 상품으로 널리 유통되었으며 베는 현물화폐로서 중요한 의의를 지니고 있었다. 직조업과 시장과의 관련성의 강화는 직조업 발전을 자극하는 요인이 되었다.1150)姜萬吉, 앞의 글(1975), 192∼193쪽.
徐明禧, 앞의 글(1993), 436∼437쪽.

 견직물은 絹·紬·綃·縑·綺·綾·羅·織金·錦 등 다양한 형태가 있었다. 그 가운데서도 羅가 가장 널리 사용되었다. 견직물은 왕복과 백관복 등의 의류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였다. 통교국에 대한 증여물, 신하에 대한 하사품, 관리 녹봉, 군수품 등 재정적 용도에도 충당되었다.1151)趙孝淑,≪韓國 絹織物 硏究-高麗時代를 中心으로-≫(世宗大 博士學位論文, 1993), 127∼128쪽·162쪽.
魏恩淑, 앞의 글, 192쪽.
北村秀人, 앞의 글(1985), 42∼43쪽.
견직물 생산의 발전에 하나의 획기를 이룬 것은 12세기 무렵이었다. 인종연간에는 林景和로 하여금 중국 五代 사람 孫光憲의≪孫氏蠶經≫을 이두로 번역하여 양잠진흥의 계기가 되도록 하였다. 중국 잠서의 도입에 의한 양잠기술의 발달은 견직물 생산의 발전을 촉진시켰다.1152)北村秀人, 위의 글, 46∼48쪽.
魏恩淑, 앞의 글, 198∼200쪽.

 고려 후기 직물업은 원간섭기라는 시대적 상황과 결부되어 매우 왜곡·변질되었다. 왕실이나 권세가들은 원과의 견직물 교역에 주력하였다. 그러나 抑賣抑買 등 강제교역을 통한 수탈로는 공급에 한계가 있었다. 따라서 권세가와 상인들은 관청·소 수공업에서 이탈한 장인들을 적극 포섭하여 견직물 등을 생산하고, 이를 이용한 대외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하였다. 권문세족의 경제적 기반은 농장과 함께 전기적 상업자본이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였다. 권세가 및 이들과 결탁한 상인층을 중심으로 한 견직업의 발전은 마직업 발전을 상당 부분 침식한 위에서 비정상적으로 발전한 것이었다.

 원의 수탈품 중 특히 주목되는 것은 모시이다. 고려의 모시로는 가늘기가 매미날개 같고 花紋이 섞인 최고급 花文苧布가 유명하였다. 모시 수탈이 심한 것은 元 국내의 모시가격이 높았고, 고려모시 품질이 상대적으로 좋았기 때문이었다. 원의 모시 수탈로 원간섭기에는 일종의 모시 特需가 일어났다. 권세가들은 이에 편승하여 많은 이득을 보았다. 화문저포와 같은 질좋은 모시의 생산은 주로 사원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며, 권세가들은 사원과 결탁하여 직물수공업을 통해서도 많은 이득을 얻었다. 하지만 이러한 모시 특수현상은 麻의 경작비율을 축소시켜 무전농민을 속출시키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1153)魏恩淑, 위의 글, 217∼233쪽.

 피폐한 농가경제 회복에 큰 활력소가 된 것은 목면의 전래였다. 목면 보급은 경상도 지역을 중심으로 확대되었다. 보급 주도세력이나 이들과 혈연적·지연적인 관계를 가진 일족들의 본관지나 원거주지를 중심으로 보급·재배되면서 점점 다른 지역으로 확대되어 갔다.1154)崔永好,<高麗末 慶尙道地方의 木綿 보급과 그 주도세력>(≪考古歷史學志≫5·6, 東亞大 博物館, 1990). 목면은 보온성이 높아 농민생활의 안정을 가져오고 연작이 가능하며, 다른 직물보다 노동시간이 단축되는 등 효용성과 경제성이 뛰어났다. 여말선초에 농촌 직물생산에서 ‘麻綿交替’가 일어나면서, 소농민의 자립을 제고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1155)魏恩淑, 앞의 글, 237∼242쪽. 목면재배의 성행은 의생활 변화를 가져온 것만은 아니었다. 면포가 교환과 부세납부에서 마포를 밀어내고 正布·常布로서 자리잡게 되어 농가소득 증대에 크게 이바지하였다.1156)남원우, 앞의 글, 71∼72쪽.

 직조수공업의 발달은 직조·염색 기술의 발달에 의해 상호 규정되고 있었다. 원대에 유행하던 元曲<漁樵記>에서 고려의 뛰어난 염직물이 소재로 읊어질 정도로, 고려의 염직 기술은 정평이 있었다. 崔滋는<三都賦>에서 당시 사람들이 ‘불면 날 듯하고 안개같이 얇고 고운’ 직물을 입었다고 읊었다. 이것은 고려 염직의 우수성을 보여주는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치자나무·산뽕나무·地黃·紅花·朱紅·蘇木·紫草 등 식물성 염료를 이용하여 다양한 색상을 염색하였다. 충렬왕 때 직조된 花文苧布는 당시 직조·염색 기술의 발달수준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고 하겠다. 모시는 화문저포·織文苧布·細苧布·文苧布·紋苧布 등 다양하고도 우수한 품질이 생산되었다. 현존하는 염직 실물자료는 대부분 佛腹藏遺物들이다. 이 유물 가운데 織金으로 만든 유물이 남아 있는 것이 주목된다. 직금은 직물 조직 사이에 금실을 끼우면서 짜는 방법으로, 당시 공예의 각 방면에서 널리 쓰이던 嵌入法의 일종이다. 직조업의 직금, 도자기의 상감, 금속공예의 銀入絲, 목공예의 나전기법과 같이 고려의 가장 특징적인 시문기법인 감입법이 거의 같은 시기에 유행하는 시대적 특징을 보이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1157)張慶姬,<14世紀의 高麗 染織 硏究>(≪美術史學硏究≫190·191, 1991).
趙孝淑,<高麗時代 織造手工業과 織物生産의 實態>(≪國史館論叢≫55, 1994).

 고려 후기에 민간수공업이 발달함에 따라 전업적 수공업자들이 늘어나고 명산지가 형성되었다. 직조업은 청주의 雪綿, 안동의 명주실, 京山의 黃麻布, 海陽의 黃紵布, 평양과 경주의 견직업 등이 유명하였다. 제지업은 전주의 名表紙가 유명하였으며, 안동은 돗자리수공업, 양산은 참대가공업으로 유명하였다. 민간수공업은 직조·돗자리·제지·참대가공 등 다양한 분야에서 지역적으로 발달하고 있었으며, 이러한 지역적 분업의 성립은 지방상업을 발전시키는 촉매역할을 하였다.1158)홍희유, 앞의 책(1979), 146∼147쪽.
―――, 앞의 책(1989), 75쪽.
안병우, 앞의 글, 129쪽.
그러나 아직은 억매억매 등 강제교역에 의해 발전이 저지되고 있는 한계를 지니고 있어 비록 민간수공업이 발전했다 하더라도 조선시대처럼 場市 발달을 동반한 발전단계는 아니었다.1159)蔡尙植·金琪燮, 앞의 글, 251∼252쪽.

<金東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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