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9권 고려 후기의 정치와 경제
  • Ⅱ. 경제구조의 변화
  • 4. 수공업과 염업
  • 2) 염업
  • (1) 고려 전기 소금의 생산과 유통

가. 소금의 생산체제

 고려 전기에 소금의 생산은 일찍부터 농업에서 분리되어 소금생산에 종사하는 전업적 생산자에 의해 주로 행해졌다. 물론 이 밖에 연해지역에서는 농업생산에 기반을 두면서 소금생산을 겸행하는 半農半鹽 형태의 생산자도 상당수 있었을 것이다. 전업적 소금생산자는 일반 民戶와 구별되어 鹽戶로 파악되었으며 이들 염호 가운데 일부는 鹽所에 편제되어 소금을 생산하였다.

 즉 일반적으로 이해되고 있는 바와 같이 고려시대 수공업은 관청수공업·민간수공업·소 수공업의 체제로 이루어 지고 있었다. 그 가운데 소 수공업에서는 아무 곳에서나 생산이 불가능한, 즉 현지성이 요구되는 물품의 생산을 담당하였다.1160)≪新增東國輿地勝覽≫권 7, 京畿 驪州牧 古跡 登神莊.
신라가 州郡을 세울 때 田丁과 戶口가 縣이 될 수 없는 곳에는 鄕을 두기도 하고 部曲을 두기도 하여 소재읍에 소속하게 하였다. 고려 시대에도 所라는 것이 있었는데, 金所·銀所·銅所·鐵所·絲所·紬所·紙所·瓦所·炭所·鹽所·墨所·藿所·瓷器所·魚梁所·薑所의 구별이 있었으며 각기 그 물품을 바쳤다.
따라서 현지성이 요구되는 물품의 하나인 소금 역시 국가의 수요에 충당하기 위해 소 수공업의 형태로도 생산되었다. 국가에서 요구하는 우수한 품질의 소금생산에 적합한 자연조건을 갖춘 연해지역에 염소가 설치되어 소금의 생산이 이루어졌던 것이다.1161)지금까지 고려시기 所제도에 관한 연구의 대부분은 고려 전기 전반적인 수공업 생산체제를 소체제로 이해하고 있다. 이러한 연구경향과 관련하여 고려 전기 소금의 생산체제 역시 鹽所制로 파악되고 있다. 즉 고려 전기에 소금의 생산은 염소라 불리는 특정행정구획의 주민인 염호에 의해 신분적·세습적·집단적인 역으로 행해졌다고 이해하거나(北村秀人,<高麗時代の「所」制度について>,
≪朝鮮學報≫50, 1969), 염소를 국가 중앙부에 직결된 특수행정구획으로 보는 것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염소가 고려 전기 염생산의 대부분을 차지하였던 것으로 보기도 하였다(姜順吉,<忠宣王의 鹽法改革과 鹽戶>,≪韓國史硏究≫48, 1985).

 그런데 이처럼 고려 전기 소금의 생산체제를 염소제로 이해한다면 당시 모든 소금 생산자와 생산시설이 염소로 편제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과연 고려 전기 모든 수공업 생산지역이 모두 소체제 속에 편입되었겠는가는 의문이다. 왜냐하면 염소의 경우를 볼 때 고려시기 염소의 수와 선초에 파악된 염산지 수 사이에는 너무나 큰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이미 소제도가 소멸된 후인 조선 초기의 자료이기는 하지만 염소의 수가≪世宗實錄地理志≫에 145개,≪東國輿地勝覽≫에 245개가 나타나 있다. 보다 많은 수의 소가 파악된≪동국여지승람≫을 기준으로 할 때 고려시기에는 적어도 250여 개 이상의 소가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전체 소의 종류가 15개 정도로 알려지고 있으므로1162)≪新增東國輿地勝覽≫권 7, 京畿 驪州牧 古跡 登神莊. 이 가운데 염소가 차지하는 비율을 1/15 내지 1/10 정도로 추정할 때 염소의 수는 20 내지 30여 개가 되는 셈이다.

 그런데≪세종실록지리지≫에 나타나는 조선 초기의 소금 산지의 수는 경기 45, 충청 45, 경상 39, 전라 60, 평안 30, 함길 15로 모두 234곳이다. 물론 고려에서 조선에 이르는 기간 동안 증가된 염산지의 수를 고려해야 하겠지만 고려시기 염소의 수와 선초에 파악된 염산지의 수 사이에는 너무나 큰 차이가 있다.

 또한 소 수공업 생산의 성격과 관련하여 고려 전기 전체 수공업에서 차지하는 소 수공업의 위치를 고려할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의 연구에 의하면 소는 광범한 계층을 대상으로 물품을 생산한 것이 아니라 극히 한정된 계층, 즉 왕실이나 국가기관의 수요품을 생산하여 이를 모두 국가에 공납했던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1163)北村秀人, 앞의 글.
朴宗基,≪高麗時代 部曲制硏究≫(서울大 出版部, 1990).

 그 근거로 전라도 康津縣 소재의 瓷器所인 大口所·七良所 등의 窯址에서 발견된 도자기 파편 가운데 일상 생활품은 거의 없다는 점을 들고 있다. 즉 당시 자기소에서는 일반민을 위한 도자기는 생산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해 당시 자기소에서 생산된 자기의 종류, 제작 수법, 자기의 빛깔 등의 측면에서 살펴볼 때 생산물 중 대부분은 교환을 전제로 한 민수용 청자였음을 주장하는 연구도 있다.1164)權丙卓,<高麗後期 陶磁器所의 經營形態>(≪大丘史學≫15·16, 1978).

 또한 당시 전국에 산재해 있던 자기소들 가운데서 강진 소재의 대구소·칠량소 등에서는 왕실이나 국가기관의 수요품을 생산하였지만 나머지 자기소에서는 일반 민수품을 생산하였을 가능성도 있다. 따라서 소 생산물의 일부는 공납의 형태로 국가에 납부하고, 나머지는 사회적 수요의 충족을 위해 공급하였다는 견해도 있다.1165)權丙卓, 위의 글.
姜順吉, 앞의 글.
손영종,≪조선수공업사≫(1) (과학백과사전출판사, 1990).

 그러나 일반적으로 소는 수공업 생산의 기술수준이 낮고 원료의 생산지가 편재되어 국가에서 필요로 하는 물품을 안정적으로 확보하는 것이 어려웠던 때에 나타난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즉 국가는 우수한 품질의 국가수요품을 안정적으로 확보할 필요성에서 종래부터의 수공업품이나 특산물의 생산지역을 소라는 특수생산집단으로 편제하여 이들을 파악·지배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소는 기본적으로는 국가수요에 충당하기 위한 양질의 물품이 생산되는 지역이나 생산이 가능한 지역에 설정되었던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렇게 볼 때 고려시기의 염소도 전체 염산지 가운데서 우수한 품질의 소금이 생산되는 일부 지역에만 설치되었을 것이고, 당시 전체 염생산체제 가운데에서 일부분을 차지하였을 뿐이었다.

 한편 염소에 편제되지 않은 대부분의 소금 생산자는 일반 군현에 소속되어 소금생산에 종사하였다. 이들은 같은 군현민이지만 농업을 주로 하는 일반 민호와는 구별되는 鹽戶로 파악되어 국가에 매년 일정액의 염세를 납부하는 부담을 지는 한편 일반 민간의 수요를 위한 소금을 생산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소의 소속과 관련하여 종래 연구에서는 소가 국가 중앙부, 즉 왕실이나 중앙관청에 직속된 특수행정구역으로 이해되어 왔다.1166)北村秀人, 앞의 글.
홍희유,≪조선중세수공업사연구≫(과학백과사전출판사, 1979 ; 지양사, 1989).
그러나 최근의 연구에서는 군현이 부담해야 할 특정의 貢物을 생산하는 데 적합한 조건을 갖춘 군현 아래의 일반 촌락으로 이해되고 있다.1167)朴宗基, 앞의 책.
姜順吉, 앞의 글.
즉 소는 일반 행정구역과 독립된 별개의 행정구역이라기보다는 군현을 구성하는 여러 촌락들 가운데서 특정의 국가 수요품 생산에 적합한 자연적·사회적 제조건을 갖춘 지역이었던 것이다.1168)朴宗基, 위의 책. 이처럼 특수물품 생산지인 소는 고려 초기 군현제 정비과정에서 일반 촌락과 함께 군현의 하부단위로 편성되었다.

 따라서 鹽所 역시 군현 내의 촌락 가운데서 국가에 부담해야 할 貢物인 소금을 생산하는 데 알맞은 조건을 갖춘 연해지역으로 군현제 정비과정에서 성립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염소 가운데는 촌락을 이루지 못하는 작은 규모, 즉 단순히 수공업제품이나 특산물을 생산하는 곳이나 장소의 의미를 지닌 것도 많았을 것으로 보인다.1169)고려 전기의 所는 아직 지방 행정단위로까지는 파악되지 못하고 단순히 특정 물품이나 수공업품을 생산하는 곳의 의미에 불과하였으나 고려 후기로 가면서 비로소 향·부곡과 동격의 위치, 즉 향·부곡과 함께 임내 또는 특정행정단위로서의 지위를 확보하게 되었다고 본 견해도 있다(金炫榮,<고려시기의 所에 대한 재검토>,≪韓國史論≫15, 서울大, 1986).

 염호의 소금생산 방식은 鹽盆 등 비교적 간단한 생산설비와 가족노동에 의거한 소규모 생산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즉 고려 전기에서 후기에 이르는 동안 소금생산 방식에서 커다란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므로 고려 후기 榷鹽制 실시 당시의 염생산 방식과 비슷하였을 것이다.1170)그러나 고려 전기 鹽所에서의 소금생산은 염소의 주민인 鹽所民(鹽戶)에 의해 신분적·세습적·집단적 役으로 행해졌다고 보는 견해(北村秀人, 앞의 글)와 개별적 세대들로 구성된 자연호가 아니라 수공업 생산에 직접 참가할 수 있는 장정 노동력으로 구성된 법적인 수세단위인 편호들에 의해 분업과 협업체제로 생산이 이루어졌을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홍희유, 앞의 책). 후자의 경우 자연호에 기초한 개별적인 세대단위의 호로서는 생산이 어려웠던 조건에서 일정한 장정 노동력으로서 협업노동에 기초하여 생산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기 때문에 일부 특수한 부분을 제외하고는 대체로 편호제에 의해 노동력이 편성되고 그에 기초하여 공물 수탈이 진행되었던 것으로 본다.

 고려 전기에 국가는 염업에 대해 생산자로부터 일정액의 鹽稅를 징수하는 징세제를 실시하였다. 따라서 염호는 국가에 매년 일정액의 소금을 염세로 납부하고 남은 소금은 자유로이 처분하여 생계를 유지하였다. 염소에 편제된 염소민 역시 일반 염호와 마찬가지로 일정액의 소금을 공물로 납부하고 나머지 소금은 자유로이 처분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일반 염산지에 비해 우수한 품질의 소금이 생산되는 염소의 경우 국가에 의해 보다 많은 통제를 받았고, 수취면에서도 보다 무거운 부담을 졌을 것이다. 특히 우수한 제품이 나오는 일부 염소는 국가에 의해 그 생산과 처분 등 경영활동을 엄격히 통제받았을 가능성도 있다.1171)중앙집권력이 강하였을 때는 소에 대한 국가의 통제가 강화된 반면 직영하는 대상은 상대적으로 적었을 것이고, 중앙집권력이 약화되었을 때는 통제는 약화된 대신에 왕실·관청의 직영은 상대적으로 많았을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손영종, 앞의 책). 이처럼 대부분의 소는 국가로부터 일정한 간섭은 받았지만 경영활동은 자율적으로 진행하여 일정량을 공물로 바치고 나머지는 처분하여 생계비로 충당하는 민간수공업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이들 염호는 소금생산을 전업으로 하였으므로 농업생산은 극히 보조적인 생계수단의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1172)그러나 所民의 경우 자신들에게 부과된 특정의 역에 집단적으로 동원되었고, 나머지 기간은 대부분 본래의 생업인 농업생산에 주력하였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朴宗基, 앞의 책). 소금의 생산은 강수량이 적고 일조시수가 많은 봄과 가을에 집중되었으므로 농업생산과 그 시기가 일치하였다. 뿐만 아니라 煮鹽활동 자체는 물론 자염에 필요한 연료의 조달 등에 막대한 시간과 노동력이 소요되어 소금생산과 농업활동을 겸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따라서 농업생산은 일부 염호에 의해 극히 부분적으로 행해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전기의 염생산체제는 12세기 이후 사회변동에 따라 변화되어 갔다. 사원이나 권세가들에 의해 鹽盆의 奪占이나 私置가 심화되었고, 일반적인 소체제의 붕괴와 함께 鹽所도 해체되어 갔다. 특히 소체제의 해체는 수공업 생산력의 전반적인 발전에 따라 소제도 유지의 필요성이 소멸되는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1173)일반적으로 소체제가 해체되는 요인으로, 소에 대한 과중한 부담으로 인한 소민의 저항과 지방제도의 개편에 따라 일반군현으로 승격하거나 직촌화하는 것 등이 지적되고 있다. 이전에는 소라는 극히 제한된 지역을 중심으로 생산되던 양질의 국가 수요품이 이제는 생산 기술의 발전과 생산지의 확대로 소 이외의 지역에서도 생산이 가능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고려 중기 이후 새로이 등장하는 常徭·雜貢 등의 稅目은 전반적인 수공업 생산기술의 발전에 따라 종래 소에서 부담하던 각종 물품의 생산과 공납이 점차 일반주현으로 옮겨간 결과 나타나게 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12세기 이후 권세가들에 의한 염분의 탈점 등으로 국가의 鹽稅 수입이 감소하고, 전반적인 수공업 생산력의 발전에 따라 소의 존재의의가 상실되면서 鹽所制가 붕괴되는 상황에서 충선왕은 재정확보를 위한 방법으로 종래의 徵稅制와 염소제에 대신해 새로이 榷鹽制를 시행하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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