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9권 고려 후기의 정치와 경제
  • Ⅱ. 경제구조의 변화
  • 4. 수공업과 염업
  • 2) 염업
  • (2) 고려 후기 소금 전매제의 실시

가. 전매제의 성립

 12세기 이후 鹽所制가 붕괴되고 궁원이나 사원을 비롯한 권세가들에 의해 鹽盆이 탈점되어 국가의 鹽稅 수입이 크게 감소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충선왕은 소금에 대해 종래의 徵稅制에 대신하여 새로이 專賣制를 시행하였다.1180)고려 후기 소금 전매제에 대하여는 다음과 같은 연구가 있다.
孫弘烈,<高麗時代의 鹽業制度>(≪淸大史林≫3, 1979).
權寧國,<14세기 榷鹽制의 成立과 運用>(≪韓國史論≫13, 서울大, 1985).
姜順吉, 앞의 글.
洪鍾佖,<高麗後期 鹽業考>(≪白山學報≫30·31, 1985).
충렬왕 24년(1298)에 처음 즉위한 충선왕은 곧바로 소금의 전매제도를 실시하려 하였으나 즉위 후 7개월 만에 퇴위함으로써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1181)≪高麗史≫권 79, 志 33, 食貨 2, 鹽法 충렬왕 24년 정월. 그러나 그 후 10년 만에 복위한 충선왕은 비로소 소금의 전매제를 시행할 수 있었다.

 충선왕이 소금 전매제를 시행한 가장 큰 목적은 부족한 국가재정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다. 12세기 이후 권세가들에 의한 토지겸병과 인구집중의 결과 국가의 재정수입이 크게 감소하였고 30여 년에 걸친 대몽전쟁으로 국가재정은 더욱 궁핍해졌다. 뿐만 아니라 대몽전쟁 이후 일본원정에 소요되는 경비는 고려의 재정지출을 증대시키는 큰 요인이 되었으며, 또한 고려왕실의 빈번한 親朝에 따르는 경비와 고려국왕의 원나라에서의 생활에 드는 비용도 엄청난 것이었다. 이에 충선왕은 재정개혁을 단행하는 한편 새로운 재정정책을 수립하여 부족한 재원의 확보를 꾀하였는데1182)朴鍾進,<忠宣王代의 財政改革策과 그 性格>(≪韓國史論≫9, 서울大, 1983) 소금의 전매제는 바로 이러한 재원확보책의 하나였다. 특히 당시 원나라에서 실시되고 있던 榷鹽制는 충선왕으로 하여금 고려에서도 각염제를 실시하게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중국의 경우 해안선이 짧아 소금의 생산지가 극히 제한되었기 때문에 소금의 전매조건이 매우 유리하였다. 따라서 先秦시대부터 소금으로부터의 수익은 국가의 중요한 재원으로 주목되었으며 齊나 秦이 패권을 잡을 수 있었던 재정적 기초도 鹽利에 있었다. 그러나 역사상 처음으로 소금에 대한 전매법을 실시한 것은 漢 武帝 때였다.1183)한 무제는 연이은 外征과 토목사업 등으로 궁핍해진 재정상태를 타개하기 위해 소금의 생산과 판매에 관한 모든 권리를 국가가 장악하여 막대한 鹽利를 독점하는 것에 의해 재정을 유지하였다(影山剛,<前漢朝の鹽の專賣制>1·2,≪史學雜誌≫75­11·75­12, 1966 및 藤井宏,<漢代鹽鐵專賣の實態>,≪史學雜誌≫79­2·79­3, 1970).

 이처럼 漢代에 이르러 소금의 전매제가 처음 실시되었지만 이후 중국의 역대 왕조들은 소금의 전매제도를 시행하지 않았다. 唐왕조 역시 소금의 ‘禁榷不行’을 기본 방침으로 삼았다. 이것은 山澤의 이익을 만민에게 개방한다는 전통적인 聖政 이념과 함부로 제도를 ‘改更新設’하여 민을 혼란하게 하지 않는다는 중국적인 정치사상 때문이었다. 또한 당왕조 초기에는 재정규모가 작고 조직도 간결하여 직접세 이외의 간접세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러나 安史의 亂 이후 만성적인 재정궁핍 상태가 계속되어 부족한 재원을 보충하기 위해 第五琦·劉晏 등에 의해 다시 각염제가 실시되기에 이르렀고, 그 결과 소금으로부터의 수입이 급증하여 중앙 세입의 과반수를 차지하는 제1의 중요 재원이 되었다.1184)日野開三郞,<兩稅法成立以前において唐の榷鹽法>(≪社會經濟史學≫26­2, 1960).

 五代의 혼란을 수습하여 중앙집권적인 정치통일을 완성한 송왕조는 국가경제의 조정에 뜻을 두고 소금에 대해서도 당·5대의 鹽法을 집대성하여 생산과 유통체제를 크게 정비하였다.1185)河上光一,<北宋代淮南鹽の生産構造と收鹽機構>(≪史學雜誌≫73­12, 1964).
吉田寅,<北宋において河北榷鹽論について>(≪東洋史學論集≫3, 東京敎育大, 1954).
辛 徹,<北宋時代東南鹽の官賣法の推移に就いて>(≪東方學≫34, 1967).
―――,<北宋時代官賣法下末鹽鈔の現錢發行法について>(≪東洋史硏究≫36­3, 1977).
이것은 그 후에도 계승되어 원·명의 염법에 큰 영향을 주었다.

 元代에는 빈번한 대외원정과 통일 후의 대규모 賜與, 토목사업 등에 막대한 경비가 지출되어 일찍부터 鹽利가 중시되었다. 원이 남송을 멸망시키기 이전에는 소금의 생산지가 북중국에만 제한되어 생산액이 적었지만 남송의 멸망을 계기로 강남 연해지방이 원의 세력권으로 들어옴에 따라 소금생산은 급격히 증대되었다. 그리하여 원 세조 至元 말년 무렵에는 소금으로부터의 재정수입이 총세입의 2/3에 달하게 되어 각염제의 성패가 국정의 존부를 좌우할 만큼 염세수입이 중요한 재정부문을 차지하기에 이르렀다.1186)田山茂,<元代の榷鹽法について>(≪史學硏究≫9­2, 1937). 이처럼 염세 수입이 원의 재정상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던 시기에 원에서 생활했던 충선왕은 鹽利의 중요성에 대해 깊이 인식하였을 것이다.

 충선왕의 在元 기간인 원의 世祖∼成宗代는 각염제가 정비되어 가던 시기였다.1187)원 세조는 즉위초 혼란한 질서를 회복하고 재정의 기초를 확립하기 위해 주력하였는데, 특히 鹽法의 정비를 시도하여 종래 鹽榷課稅所가 酒·鐵·茶와 함께 소금을 관장하던 것을 轉運鹽使로 하여금 소금만을 따로 분리시켜 담당하게 하였다. 그 후 각지의 경략이 진전되고, 특히 남송 멸망 이후 문물제도의 정비에 따라 팽창하는 막대한 경비의 충당을 위해 鹽法은 더욱 정비되어 세종 말년에서 成宗 大德 4년(1300)에 걸쳐 완성된 榷鹽制는 원말까지 거의 그대로 계승되었다(田山茂, 위의 글). 이 때 원의 수도인 大都에서 생활하던 충선왕은 원의 여러 문물제도를 직접 접할 수 있었다. 당시 고려는 심한 재정난에 허덕이고 있었기 때문에 충선왕은 재정난를 극복하는 방법으로 원의 각염제를 주목하였을 것이다. 이는 충선왕이 즉위와 동시에 가장 먼저 소금의 전매제를 시행하였던 사실로부터도 짐작할 수 있다.

 소금 전매제 시행의 또 하나의 목적은 대몽전쟁 이후 원세력을 배경으로 새로이 등장한 신흥권력층의 세력약화를 위한 것이었다. 무신란 이후 문벌 중심의 귀족사회가 붕괴되면서 새로운 지배세력이 등장하였는데, 특히 이들 중에는 여원관계 정립 이후 원세력을 배경으로 정치·경제적 기반을 넓힘으로써 신흥권력층이 된 자들이 많았다. 이들은 원과의 결탁관계를 통해 경제력을 확대하고 정치권력을 강화하면서 왕권에 위협적인 세력으로 등장하였다.1188)閔賢九,<高麗後期의 權門世族>(≪한국사≫8, 국사편찬위원회, 1974). 이러한 시기에 왕위에 오른 충선왕은 이들 권문세족을 억압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일련의 정치개혁을 시도하였다.1189)李起男,<忠宣王의 改革과 詞林院의 設置>(≪歷史學報≫52, 1971).
朴鍾進, 앞의 글.
권영국,<14세기 전반 개혁정치의 내용과 그 성격>(≪14세기 고려의 정치와 사회≫, 민음사, 1994).

 특히 재정기구의 개편과 신설을 통한 국가와 왕실 재정기구의 강화, 典農司 설치에 의한 賜給田租의 公收 등은 왕권을 강화함과 동시에 권세가들의 세력기반을 약화시키려는 조처로 주목되는 사실이다.1190)朴鍾進, 위의 글. 소금 전매제의 시행도 이러한 개혁들과 같이 권세가 세력의 억압이라는 차원에서 나타난 정책의 하나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충선왕은 소금의 전매제를 실시하여 권세가들의 중요한 경제기반의 하나인 鹽盆을 국가가 관리함으로써 재정난을 해결함과 동시에 그들의 세력기반을 약화시키려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소금 전매제 실시의 가장 직접적인 목적은 부족한 국가재원의 확보에 있었기 때문에 전매제의 시행을 위해서는 소금생산의 발전과 그것을 기반으로 하여 얻어질 수 있는 전매수입이 전제되어야 하였다. 고려 후기 소금 전매제의 시행은 소금이 상품으로 널리 생산되고 그로부터 일정한 전매수익이 보장될 수 있을 정도로 소금생산이 발전하고 있었던 사정이 배경이 되었던 것이다.

 고려시대의 소금생산은 후삼국의 혼란기를 거치면서 파괴되었던 생산력이 점차 회복되고 제염기술이 변화하는 등 국초 이래 꾸준한 발전을 보이지만 특히 12세기 이후 큰 발전을 이루는 것으로 생각된다. 즉 12세기 이후에는 소금생산이 크게 발전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사회경제적인 조건들이 마련되고 있었다. 먼저 12세기 이후 점차 증대되어 온 流民은1191)채웅석,<12, 13세기 향촌사회의 변동과 ‘민’의 대응>(≪역사와 현실≫3, 1990).
박종기,<12, 13세기 농민항쟁의 원인에 대한 고찰>(≪東方學志≫69, 1990).
소금의 생산과정에 필요한 많은 노동력의 공급을 가능하게 하였으며, 특히 궁원이나 사원을 비롯한 권세가들에 의한 염분 경영이 확대될 수 있는 좋은 조건이 되었다. 宮院·寺院 및 권세가들은 국가로부터 鹽盆을 賜與받거나1192)≪高麗史≫권 93, 列傳 6, 崔承老. 信徒들로부터 시납받기도 하였지만,1193)松廣寺 소장 문서 중<國師當時大衆及維持費>라는 문서에 의하면 參政事인 崔怡가 왕의 안녕을 기원하면서 寶城郡 임내 南陽縣에 있는 鹽田 7곳과 昇平郡 吐叱村에 있는 염전 6곳을 修禪社에 시납한 사실을 알 수 있다. 고려 중기 이후 점차 진전되는 대토지겸병과 함께 경제력이나 권력을 배경으로 사사로이 염분을 설치하거나 奪占을 통해1194)≪高麗史≫권 7, 世家 7, 문종 10년 9월. 염분의 소유를 확대하였다. 이들은 국가로부터 사여받은 염분에 대해서는 염세를 수취하였고, 私置하거나 탈점한 염분은 奴婢 등의 노동력을 동원하여 직접 경영하였을 것이다.

 12세기 이후 유민의 증가는 대규모 소금생산에 필요한 많은 노동력의 공급을 가능하게 하여 권세가들에 의한 대규모 경영이1195)대규모 경영이란 작업장의 크기는 대규모이지만 그 전체가 하나의 공정을 분업과 협업에 의해 유기적으로 결합된 조직체를 구성하여 일괄적인 생산공정을 실현하였던 것은 아니고, 단지 여러 개의 비슷한 규모의 생산설비(鹽盆)가 합쳐진 집합체로서, 생산공정은 각 생산설비마다 개별적으로 수행되는 것이었다. 이는 대규모 鹽盆이나 煮鹽용구 등의 제작에 따르는 기술적 한계 때문이었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이러한 기술적 제약 때문에 대규모 경영에서도 특별히 우수한 능률을 가진 대규모 용량의 염분이 설치되어 생산성이 높은 작업이 행해졌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발전할 수 있는 조건으로 작용하였다. 그리하여 이러한 조건을 바탕으로 이들에 의한 염분의 탈점이나 새로운 염분의 설치가 늘어나고 있었다.1196)≪高麗史≫권 79, 志 33, 食貨 2, 鹽法 충렬왕 24년 정월 및 충선왕 원년 2월. 이처럼 12세기 이후 증대되고 있던 유민은 소금생산에 충분한 노동력을 제공할 수 있게 되어 그 생산이 더욱 확대되는 좋은 조건이 되었던 것이다.

 유민은 고려의 전성기로 일컬어지는 문종대부터 이미 나타나기 시작하여 토지겸병이 진전되는 12세기 이후 더욱 증가하였으며, 장기간에 걸친 대몽전쟁으로 인해 만성화되었다. 유민의 대부분은 농장에 흡수되었지만 권세가들이 경영하는 제염장에도 흡수되어 소금생산을 위한 노동력이 되기도 하였을 것이다. 고려 중기 이후 궁원이나 사원 및 권세가들이 염분의 소유를 확대시킬 수 있었던 배경에는 바로 그들의 대규모 염분 경영을 가능하게 해준 노동력으로서 유민의 증대라는 사회적 조건이 있었던 것이다.

 유민의 증대라는 사회적 조건의 성숙과 함께 대몽전쟁 전후 소금의 생산지도 양적으로 확대되었다. 대몽전쟁 기간중 다수의 인민이 山城이나 海島로 入保하여 새로운 농지를 개간하거나1197)≪高麗史≫권 104, 列傳 17, 金方慶.
≪高麗史節要≫권 17, 고종 43년 12월.
농법을 개량하였으며,1198)金容燮,<高麗時期의 量田制>(≪東方學志≫16, 延世大, 1975).
李泰鎭,<14·5세기 農業技術 발달과 新興士族>(≪東洋學≫9, 檀國大, 1979).
宮嶋博史,<朝鮮農業史上において15世紀>(≪朝鮮史叢≫3, 1980).
浜中昇,<朝鮮前期小作制とその條件>(≪歷史學硏究≫507, 1982).
魏恩淑,<高麗時代 農業技術과 生産力 硏究>(≪國史館論叢≫17, 1990).
농지를 얻지 못한 피난민들은 어업이나 제염업 등 비농업적 산업으로 전업하였다.1199)≪新增東國輿地勝覽≫권 12, 京畿 江華都護府 形勝 崔滋 三都賦. 특히 제염은 그 원료가 무한하고 생산도 용이하여 쉽게 선택할 수 있는 생계수단이 되었을 것이다. 이에 따라 섬을 중심으로 한 연해지방은 농경지의 개간과 함께 소금 생산지도 새로이 개발되거나 확대되어 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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