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9권 고려 후기의 정치와 경제
  • Ⅱ. 경제구조의 변화
  • 5. 상업과 화폐
  • 1) 국내상업
  • (2) 지방상업

(2) 지방상업

 고려 후기 지방상업의 가장 기초적인 공간은 場市이다. 장시는 농민·영세 수공업자 등 직접 생산자층의 제품 생산과 교역에 바탕을 둔 교환시장이다. 장시는 관아 근처에 서는 州縣市로서, 조선 전기의 장시와는 단계적 차이가 있었다. 장시는 농민·영세 수공업자 외에 관리 등 여러 층과 남녀노소 등 모든 층이 교역하는 곳이었다. 장시는 개시지역, 교역참여자, 장날 등의 면에서 완전한 농촌시장으로 성립하지는 못하였다.1267)李景植,<16世紀 場市의 成立과 그 基盤>(≪韓國史硏究≫57, 1987).

 지방상업에서는 행상, 특히 船商의 활동이 활발하였다. 선상은 어염·미곡·도자기 등을 판매하는 비교적 규모가 큰 전업상인으로 전국의 상권을 연결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1268)金東哲, 앞의 글, 220∼222쪽. 남·서해안의 울주·김해·나주·진도·제주·은진 등과 동해안의 원흥 등은 선상 활동의 중심지였으며 대동강·예성강·한강·임진강·금강·낙동강 등을 이용한 상업활동도 활발하였다. 내륙과 연해의 수로·해로를 이용한 선상의 활동은 무신집권기 이후 더욱 발전하였으며 지방 장시를 발전시키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1269)홍희유, 앞의 책, 84∼87쪽.
金三顯,<고려후기 場市에 관한 연구>(≪明知史論≫4, 1992), 83∼85쪽.

 李詹은 경상도 蔚州에 대해, 땅이 기름지고 어염이 많이 생산되어 부자가 많았는데, 경인년(충정왕 2 ; 1350) 이후 매년 倭寇의 침입을 받아 가난한 자는 다른 곳으로 떠나고, 부자는 이익을 탐하다 피해를 크게 당하였다고 기술하였다. 부자들이 많아 왜구의 중요한 약탈대상 지역이 되었던 것이다. 울산 출신 부호의 구체적인 예로는 충렬왕 때 찬성사를 지낸 朴球를 들 수 있다. 박구는 울주 소속의 부곡민으로 선대가 부상이었다. 울산은 藿所가 위치할 정도로 미역 등 수산물이 풍부하여, 동해와 남해를 잇는 연안 상업의 중심지였다. 박구의 선대도 울산지역의 상업적 기반을 토대로 부상으로 성장한 것으로 보인다.1270)≪新增東國輿地勝覽≫권 22, 慶尙道 蔚山郡 古跡 古邑城 李詹 記文.
≪高麗史≫권 104, 列傳 17, 金方慶 附 朴球.
李貞信,<고려시대의 상업-상인의 존재형태를 중심으로->(≪國史館論叢≫59, 1994), 129쪽.
具山祐,<羅末麗初 蔚山地域과 朴允雄-藿所의 기원과 관련하여->(≪韓國文化硏究≫5, 釜山大, 1992), 46∼47쪽.

 제주도는 전라도 상인뿐 아니라1271)≪高麗史≫권 13, 世家 13, 예종 8년 6월 경술.
李齊賢,≪益齋亂藁≫권 4, 詩 小樂府.
송상이나 일본상인들이 수시로 왕래하는 등 국내상업과 대외무역을 연결시켜 주는 중심지였다. 송상인과 일본상인의 빈번한 왕래로 야기될 비상상태에 대비하여 국가에서는 防護別監을 특파해야 할 필요가 있었으나 사정이 여의치 못하여 원종 원년(1260) 2월에는 濟州副使 羅得璜으로 하여금 防護使를 겸하게 하였다.1272)≪高麗史節要≫권 18, 원종 원년 2월. 금강 유역의 은진현 市津浦도 선상들의 출입이 빈번한 지방상업의 중심지였다.1273)≪新增東國輿地勝覽≫권 18, 忠淸道 恩津縣 山川.
田壽炳,<朝鮮 太宗代의 貨幣政策-楮貨流通을 中心으로->(≪韓國史硏究≫40, 1983), 40쪽.
홍희유, 앞의 책, 86쪽.

 육상은 말·수레를 이용하거나, 손에 들고 등에 지고 다니면서 행상을 하였다. 육상의 활동과 관련하여 주목되는 것은 교통의 요지에 설치된 院의 발달이다. 원을 세운 주체는 국가·승려·개인 등 다양하였지만 중심이 되는 주체는 승려였다. 14세기말 경주와 울산 사이에 설치된 德方院은 어염상인이나 나그네를 위해 승려가 설치한 것이다.1274)權 近,≪陽村集≫권 13, 德方院記. 사원은 원을 장악함으로써 유통구조에서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것이 용이하였다.1275)李炳熙,≪高麗後期 寺院經濟의 硏究≫(서울大 博士學位論文, 1992), 106∼109쪽. 한강 하류의 沙平院은 13세기에 이미 상업의 중심지로 발전하였다. 사평원의 정경에 대해 李奎報는 큰 길은 나그네의 말짐·등짐으로 붐비고, 강가는 장사배·나룻배가 늘어서 있다고 묘사하였다.1276)李奎報,≪東國李相國集≫권 10, 古律詩 題沙平院樓. 공민왕 23년(1374) 관직을 사직한 趙云仡은 상주에 은거하다, 우왕 6년(1380)에 경기도 광주 古垣(夢村) 강촌으로 옮긴 후 板橋院과 사평원을 重營하여 院主를 자칭하였다. 조운흘은 경제활동에 유리한 지역에 은거하여 사평원 등을 중영하여 상업에 종사했다고 보여진다.1277)≪高麗史≫권 112, 列傳 25, 趙云仡.
안병우, 앞의 글(1994a), 313쪽.

 그러나 고려 후기, 특히 충정왕 2년(1350) 이래 빈번해진 왜구의 창궐로 漕倉·漕船이 약탈당하는 등 여러 요인에 의해 조운은 정상적으로 운영되지 못하였기 때문에 陸運을 강화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공민왕 5년(1356)에는 각 요충지에 院館을 세워 육운으로 세곡을 수송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왜구의 침략이 계속되고 육로 수송도 한계가 있어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동왕 20년(1371)에는 다시 원관을 수리하고 땔감을 비축하여 行旅에 편하게 하도록 하는 조치를 취하였다.1278)≪高麗史≫권 39, 世家 39, 공민왕 5년 6월 을해 및 권 80, 志 34, 食貨 3, 賑恤. 이와 같은 계속적인 육운 활성화 시책으로 원이 발달하게 되어 육상의 활동을 촉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1279)金三顯, 앞의 글, 91∼92쪽.
최재경,<조선시대 원(院)에 대하여>(≪嶺南史學≫4, 1975).
교통 요지에 자리잡은 일부 원은 상업발달에 따라 그 자체가 상업중심지로 발전하기도 하였다.1280)홍희유, 앞의 책, 80쪽.

 고려시대의 유통경제는 지방상업과 도시상업, 국내상업과 대외무역, 생산자 중심의 교환경제와 지배층 중심의 교환경제로 이원화되어 있었다. 이런 구조 속에서 사원·궁원·양반·토호 등 지배세력은 교역을 명분으로 농민의 잉여생산물을 사적·독점적으로 수탈하였다. 이들은 强與·强賣·强買·强市·反同·互市 등으로 표현되는 부등가 교환을 통해 세포·능라·대자리 등 고급 수공업품은 물론, 초피·송자·인삼·봉밀·황납·종이·쌀·콩 등까지도 강제 매매하였다.1281)李景植, 앞의 글. 이미 11세기 중엽에 표면화된 이러한 강제교역은당시 발달한 대외무역과 연결되어 생산자층의 잉여축적과 그에 기반하는 유통경제의 발달을 억제하였다.1282)채웅석,<12, 13세기 향촌사회의 변동과 ‘민’의 대응>(≪역사와 현실≫3, 1990), 55∼56쪽.

 권세가·관리·사원 등의 抑賣抑買는 원간섭기에 더욱 일반화되었다. 지배층은 강제교역을 통해 농민의 잉여생산물을 흡수하였으며 大府寺·迎送都監·國贐色·宴禮色 등 국가기관 역시 재정확보를 이유로 시전상인에 대한 억매를 강요하였다. 이렇듯 억매형태의 교환경제가 일반화된 배경에는 농민의 잉여생산 축적을 가능하게 한 농업·수공업의 발전이 있었기 때문이다.1283)권영국, 앞의 글, 436∼438쪽.
박종진, 앞의 글(1994), 263∼265쪽.

 지방상업의 강제교역 가운데 주목되는 것은 사원의 상업활동이다. 종교적 지위와 권력을 이용한 사원의 상업활동과 고리대는 대단하였다.1284)朴龍雲,≪高麗時代史(上)≫(一志社, 1985), 240쪽.
안병우, 앞의 글(1994b), 137쪽.
사원은 자체에서 생산하는 농산물과 수공업품을 판매하였으며, 사람이 많이 모여 드는 곳이므로 교역 장소로도 중요하였다. 사원과 농민과의 교역은 양자의 상하관계로 억매억매라는 강제교역이 많았다. 사원은 공물대납에도 참여하였으며 佛事를 구실로 농민의 재화를 흡수하였다. 뿐만 아니라 사원은 많은 말을 소유하였고 숙박시설인 院을 운영하여 유통망도 장악하였다.1285)李炳熙, 앞의 책, 100∼109쪽.

 사원은 파·마늘의 생산, 제염, 축산, 고리대, 양조 등 다양한 형태의 상업과 수공업에 관여하면서 지방상업의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1286)李相瑄,<高麗 寺院의 商行爲 考>(≪誠信史學≫9, 1991), 6쪽. 그러나 사원의 상행위는 권력과 경제력, 종교적 지위를 이용한 강제매매와 고리대적 수탈로 부작용이 많아 계속 개혁의 대상이 되었다. 사원뿐 아니라 관원, 특히 지방관도 강제교역의 한 주체였다. 이들은 부임할 때 고가의 물품을 가지고 가서 강제로 팔아 이익을 취하였다. 다양한 형태의 강제교역과 농장을 매개로 하는 유통기구의 존재, 사원 중심의 지방상업 등은 장시를 중심으로 하는 생산자층의 유통경제 발달을 억제하는 구조적인 요인이었다.1287)안병우, 앞의 글(1994b), 136∼13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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