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9권 고려 후기의 정치와 경제
  • Ⅱ. 경제구조의 변화
  • 5. 상업과 화폐
  • 3) 화폐의 유통
  • (2) 은병과 소은병

(2) 은병과 소은병

 숙종 6년(1101) 주조된 銀甁은 고려말까지 본위화폐로서, 보조화폐인 포화와 함께 통용되었다. 12세기 이후 매매·뇌물·조세대납·물가표시 등의 주요 수단으로 은 유통이 늘어나면서 구리를 섞는 盜鑄현상이 발생하여, 은병가치가 떨어졌다. 질 나쁜 은병이 유통되고 질 좋은 은병은 축재수단으로 사용되었다. 고려 후기에는 은의 해외유출이 심해 국가보유 은이 부족하였기 때문에 은병을 새로 주조하기가 어려웠다.1361)李能植,<麗末鮮初의 貨幣制度>(≪震檀學報≫16, 1949), 147쪽.
田炳武,<高麗時代 銀流通과 銀所>(≪韓國史硏究≫78, 1992), 104쪽.
안병우,<고려시대 수공업과 상업>(≪한국사≫6, 한길사, 1994), 145쪽.

 구리가 섞인 악화은병의 가치를 안정시키기 위해, 충렬왕 8년(1282)에는 은병을 쌀로 환산하는 折米率이 정해졌다. 개경은 은병 1개에 쌀 15∼16석, 지방은 18∼19석으로 교환율을 정하고, 경시서가 그 해 농사의 풍흉에 따라 조절하도록 하였다.1362)≪高麗史≫권 79, 志 33, 食貨 2, 市估 충렬왕 8년 6월.
金柄夏, 앞의 글(1972), 33∼34쪽.
崔虎鎭, 앞의 책, 32쪽.
權仁赫,<朝鮮初期 貨幣流通 硏究-特히 太宗代 楮貨를 中心으로->(≪歷史敎育≫32, 1982), 86쪽.
이듬해는 감찰사에서 종래 쌀 20석하던 은병 값을 10석으로 개정하려고 하였으나 시전상인 등이 매매를 거부하여 종전대로 가격을 실시하였다.1363)≪高麗史≫권 84, 志 38, 刑法 1, 職制 충렬왕 22년 5월.
李能植, 앞의 글, 152쪽.
13세기 후반 은병 가격은 대개 쌀 20석 내외였다. 종전보다는 값이 하락하였으나 여전히 고액이어서, 일반민보다는 귀족이나 상인을 중심으로 유통되었다. 특히 권세가의 민에 대한 강제교역의 중요한 수단으로 많이 이용되었다.1364)≪高麗史≫권 79, 志 33, 食貨 2, 市估 충렬왕 9년 7월. 민간뿐 아니라 조정에서도 구리를 합주했기 때문에 은병 가치는 계속 하락하였다. 그래서 충숙왕 15년(1328) 12월에는 上品甁은 賨布 10필, 貼甁은 布 8∼9필로 값을 정하여 강력히 시행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구리가 많이 섞여 민간에서 따르지 않으므로 잘 시행되지 않았다.1365)≪高麗史≫권 79, 志 33, 食貨 2, 市估 충숙왕 15년 12월.
金柄夏, 앞의 글(1972), 34쪽.
崔虎鎭, 앞의 책, 32쪽.

 이처럼 고려 후기에는 은병이 상품은병과 첨병의 두 종류로 유통되었고, 개경과 지방이 가격 차이가 있었으며, 또한 은병 가격이 점점 하락하였다. 이처럼 은병의 종류와 가격이 변하고 있는 것은 유통경제와 관련하여 주목되는 현상이다. 이는 유통경제의 발달에 따라 은 1근으로 만든 은병은 너무 고액이어서 유통구조상에서 불편하며, 또한 원간섭기에 은 유출 증가에 따른 은 부족으로 은병의 질이 계속 저하되면서 나타나는 현상이기도 하였다.1366)전병무,<고려 충혜왕의 상업활동과 재정정책>(≪역사와 현실≫10, 1993), 247쪽.

 충혜왕이 즉위한 후 처음 취한 경제조치가 小銀甁의 주조였다. 충혜왕은 원년(1331) 4월에 소은병을 발행하고 구은병 사용을 금하였다. 소은병의 크기는 구은병보다 작지만 1개당 5승포(종포) 15필로 책정하였다. 충숙왕 15년(1328)의 상품은병이 종포 10필이었으므로 약 1.5배 오른 셈이다.1367)≪高麗史≫권 79, 志 33, 食貨 2, 貨幣 충혜왕 원년 4월.
金柄夏, 앞의 글(1972), 34쪽.
崔虎鎭, 앞의 책, 32쪽.
그러나 李能植은≪高麗史≫권 79, 志 33, 食貨 2, 貨幣 공민왕 5년 9월조에 은병 1근 값이 100여 필이라고 한 것에 근거하여 소은병의 가치가 구은병에 비해 약 1/7 정도 축소되었다고 하였다(李能植, 앞의 글, 154쪽).
부족한 재정을 마련하기 위하여 은병의 크기를 축소하면서도, 전보다 가격을 높게 책정하여 부등가교환을 추진한 것이 아닌가 한다. 충혜왕은 함량이 부족한 소은병을 유통시켜 그 차액을 도모하고, 구은병 사용을 금지시켜 권세가들이 은병을 함부로 주조하여 교역하는 것을 막고 유통경제를 직접 장악하려고 하였다.1368)전병무, 앞의 글(1993), 247∼248쪽. 즉 국가가 소은병의 地金價値 이상의 가치를 일방적으로 선언함으로써 소은병의 주조 이익을 차지하려는 의도가 내포되어 있었다.1369)井上正夫,<高麗朝の貨幣-中世東アジア通貨圈を背景にして>(≪靑丘學術論集≫2, 한국문화연구진흥재단, 1992), 208쪽.
그러나 은의 순도가 높아졌기 때문에 소은병의 가치가 오른 것으로 파악하기도 한다(金柄夏, 앞의 글, 1972, 34쪽 및 崔虎鎭, 앞의 책, 32쪽).

 소은병 주조는 은의 부족에 의한 것이지만 은병 사용에 대한 요구가 증가한 것을 반영한 것으로 화폐유통의 일정한 발전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소은병도 성공적으로 유통되지는 못하였다.1370)안병우, 앞의 글, 145∼146쪽. 소은병도 주조 후 곧 위폐가 나오고 점차 구리의 합주가 증가하였다. 소은병은 은병인지 구리인지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나빠져 고려말에는 거의 유통되지 않았다. 다만 일부 지방에서 조선초까지 유통되었다.1371)金柄夏, 앞의 글(1972), 34쪽.
崔虎鎭, 앞의 책, 32∼3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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