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20권 고려 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Ⅰ. 신분제의 동요와 농민·천민의 봉기
  • 1. 신분제의 동요
  • 1) 신분제 동요의 배경

1) 신분제 동요의 배경

 흔히 의종 때 일어난 武臣亂을 지표로 삼아 고려사회를 그 이전과 이후로 나누어 전자를 전기사회로, 후자를 후기사회로 보고 있다. 적어도 신분사의 관점에서 볼 때 이러한 구분은 적절한 듯하다. 무신란은 무신들이 정변을 통하여 집권할 수 있었던 계기가 되었다. 그들의 집권은 성공하였고, 그들이 주도하는 정치가 한 세기에 걸쳐 지속되었다. 무인들의 집권이 그토록 장기간에 걸쳐서 성공적이었다고 하는 사실은 그 자체가 고려의 신분제도에 커다란 변화가 있었음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무신들도 귀족이었지만, 그들은 문신귀족들의 밑에서 그들의 주도 아래 움직일 수 있었을 뿐이다. 무신들은 문신들의 위에 오를 수는 없었다. 무신란의 발생이 지니는 신분사적 의미를 크게 보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고려 후기사회의 신분사에서 다음으로 주목되는 것은 고려가 元의 정치적 간섭을 받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물론 이 사실은 무신란의 경우와는 달리 그 자체가 곧바로 신분제도의 변화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원의 간섭을 받게 되면서 원의 세력과 연결을 맺고 새로이 權門世族들이 지배 세력으로 등장하였다는 점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001) 고려 후기의 권문세족에 관해서는 閔賢九,<高麗後期 權門世族의 成立>(≪湖南文化硏究≫6, 1974)과<高麗後期의 權門世族>(≪한국사≫8, 국사편찬위원회, 1974)의 연구가 있다. 이에 관한 보다 상세한 설명은 朴龍雲,<權門世族과 新進士類의 社會>(≪高麗時代史≫, 一志社, 1987), 527∼539쪽이 참고가 된다. 한편「권문세족」이라는 용어가 적절하지 않다는 견해도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러한 개념을 규정해 주는 여러 특성들이 정당한지의 여부일 것이다. 현재까지는 이 문제를 다룬 선학들의 논의에 커다란 결함이 발견되지 않는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관례대로 이 용어를 사용하기로 한다. 金光哲,≪高麗後期 世族層硏究≫(東亞大出版部, 1991) 참조. 이것은 신분제도의 변화와 밀

 접한 관련이 있는 것이다. 새로 등장한 권문세족 가운데에는 종래의 문벌과는 구별되는 새로운 계층도 포함되어 있었다. 고려 후기 권문세족을 대표하는 평양 조씨의 경우 군인 출신의 趙仁規가 몽고어 통역을 맡은 일로 발돋움하게 되었다는 것은 다 아는 사실이다.002) 閔賢九,<趙仁規와 그의 家門>(上)·(中)(≪震檀學報≫42·43, 1976·1977).

 무신란의 발생과 원의 간섭은 지배계층 내부의 신분상 지위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가령 무신란으로 무신들의 신분적 지위는 올라갔지만, 반대로 문신들의 경우는 낮아졌다. 그러나 원의 간섭을 받게 되면서는 다시 무신들의 지위는 내려가고 문신들의 경우는 올라갔다. 다만 무신란을 계기로 지배계층 의 신분상 지위에 나타난 이러한 변화가 전면적이었던 데 비하여 후자의 경우에서는 부분적이었다고 할 수가 있고, 또 전자에서 변화의 진행이 급격하였는 데 비하여 후자의 경우는 점진적이었다고 할 수가 있다.

 무신란의 발생이나 원의 간섭과 함께 신분사의 관점에서 중요한 것은 공민왕에 의한 개혁이다.003) 공민왕의 개혁은 여러 차례 있었다. 그가 즉위하면서 李齊賢을 내세워 개혁을 추진한 적도 있고, 동5년에는 洪彦博을 중심으로 한 개혁의 시도도 있었다. 그러나 그의 개혁 가운데 가장 과감한 것은 동14년 辛旽을 기용하여 추진한 것이었다. 이에 관한 상세한 설명은 閔賢九,<辛旽의 執權과 그 政治的 性格>(上)·(下)(≪歷史學報≫38·40, 1968) 및<益齋李齊賢의 政治活動-恭愍王代를 중심으로->(≪震檀學報≫51, 1981)에서 얻을 수 있다. 그에 의한 개혁은 권문세족을 대표하는 종래의 附元세력을 제거하는 데 초점이 맞추어진 것인데, 그 결과 이른바 新進士大夫가 새로이 지배귀족으로 등장하게 되었다.004) 고려 후기의 신진사대부의 등장과 성격에 관한 초기의 연구로는 李佑成,<高麗朝의‘吏’에 대하여>(≪歷史學報≫23, 1964)가 있고, 이것을 바탕으로 한 金潤坤,<新興士大夫의 대두>(≪한국사≫8, 국사편찬위원회, 1974)가 참고가 된다. 한편 신진사대부의 등장과 활동을 충선왕이나 각별히 공민왕과 연관지어 보다 구체적으로 파악하고 있는 연구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閔賢九, 앞의 글(1974b).
李成茂,<兩班層의 成立過程>(≪朝鮮初期 兩班硏究≫, 一潮閣, 1980).
李泰鎭,<高麗末 朝鮮初의 社會變化>(≪震檀學報≫55, 1983).
朱碩煥,<辛純의 執權과 失脚>(≪史叢≫30, 1986).
朴龍雲, 앞의 책.
그런데 朴龍雲은 신진사대부보다는 新進士類라는 용어가 더 적절하다고 하였지만(위의 책, 540∼542쪽), 필자는 판단이 잘 서지 않는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일반적 관행대로 신진사대부라 칭하였다.
공민왕의 개혁은 지배귀족층 내부에 이러한 변화를 가져왔다는 점에서 무신란의 발생이나 원의 간섭에 버금가는 중요성이 있다.005)신진사대부의 현저한 대두가 공민왕의 개혁과 관련이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당장 정국을 주도하게 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권문세족과 맥락이 닿는 보수세력들의 위력이 고려 말까지 살아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대국적으로 보아서 신진사대부가 정국에서 중심세력이 되어갔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런데 무신란의 발생이나 원의 간섭 또는 공민왕의 개혁이 단순히 지배귀족 내부의 변화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한 정치적 변화들은 하위계층의 신분이동에 대하여서도 커다란 영향을 주었던 것이다. 그러한 사실들로 해서 우리는 고려 후기의 신분제의 동요를 이야기하는데 있어서 이 세 가지의 정치적인 변동에 각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커다란 정치적 변동이 주요 계기가 되어 고려 후기에 와서 신분제가 동요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신분제의 동요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고려시대 신분제 운영의 기본 원칙은 신분계층 사이에서의 이동은 최대한 억제되어야 한다는 점이었다. 신분계층은 저마다 국가에 대 하여 일정한 역할을 하도록 기대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당연히 그들은 저마 다 신분상의 지위도 달랐다. 그들이 사회적으로 누려야 하는 권리(특권)와 의 무(부담·제약)가 각기 달랐던 것이다. 이러한 원칙은 그 정도가 통일신라시대의 경우에 비할 바는 못되었지만 고려에서 아직도 엄격하게 지켜졌다.

 그러나 한편으로 고려는 신분제를 시행하면서 신분이동을 어느 정도 허용하고 있기도 하였다. 문반이든 무반이든 또는 향리이든 군인이든, 그 자식들이 아버지의 役과 신분과 지위를 이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였지만, 그렇다고 그 자식들 모두가 언제나 반드시 그러했던 것은 아니었다. 고려시대에 限職制度가 시행되었다는 사실도 이와 관련이 있다. 한직의 제약을 받는 많은 신분계층은 원칙을 따지면 관직에 나아갈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雜類라든지 工匠·승려·군인 등이 그러하였다. 그들은 그들에게 주어진 본래의 임무만 대대로 이어받아야 할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본래의 임무를 벗어나 신분을 바꾸고 관직에 나아갈 수도 있었다. 다만 그럴 경우 나아가는 관품이나 관직에 제약이 따랐다. 제약을 가진 대로나마 그들이 관직자가 될 수 있었다는 사실도 역시 하나의 엄연한 원칙으로 살아있었다. 한직제도는 바로 이 원칙을 전제로 하고 시행된 제도였다. 과거제도의 시행에서도 이러한 원칙은 존중되었다. 과거시험은 문관을 채용하는 것인데, 본래의 원칙대로 한다면 문반에게만 응시의 자격이 주어져야 마땅할 것이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그렇지 않았다. 무반은 말할 것도 없고 지방의 향리들이나 군인·잡류 등도 응시할 수 있게 하였으며, 일반 양인 농민들에게도 과거에 나아갈 수 있는 문은 열려 있었다.006) 다만 그들이 응시할 수 있는 과거는 明經科와 雜科에 한하였다. 製述業에는 그들이 나아갈 수 없었다고 보는 견해가 유력하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李基白,<高麗貴族社會의 形成>(≪한국사≫4, 국사편찬위원회, 1974;≪高麗貴族社會의 形成≫, 一潮閣, 1990), 67쪽.
朴龍雲,<高麗時代의 科擧-製述科의 應試資格->(≪高麗時代 蔭敍制와 科擧制 硏究≫, 一志社, 1990), 239∼243쪽.
―――,<高麗時代의 科擧-明經科에 대한 檢討->(위의 책), 571∼537쪽 참조.

 이와 같이 고려 전기의 신분제도는 모든 사람들이 제각기 특정한 신분계층에 속하여 일정한 임무를 대대로 수행하여야 하였지만, 한편으로는 그 신분계층을 벗어나서 다른 임무를 세습할 수도 있었다. 이것은 신분을 고정시키는 원칙과 함께 신분을 이동시키는 원칙이 고려의 신분제도 운영에서 아울러 공존하고 있었음을 뜻한다. 상반되는 이 두 원칙이 실제에 있어서 조 화를 이루고 있었던 것이 고려 전기의 신분제도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두 원칙에 있어서 우선적이고 더 중요했던 것은 신분을 고정시키는 원칙이었다. 신분을 이동시키는 원칙은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원칙이었다. 그러므로 이 둘의 조화라는 것도 전자가 훨씬 더 우대되고 그것에 더 큰 비중이 두어진 속에서 이루어진 그러한 의미의 조화였던 것이다.

 고려 후기에 와서 보이게 되는 신분제의 동요란 이와 같이 두 원칙 사이 에 있었던 종래의 조화가 깨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신분이 고정되는 일보다는 신분이 이동하는 일이 더 두드러진 현상이 되었다. 지배계층의 변화만 보아도 전기사회에서는 보기드문 일들이 나타났다. 이미 언급하였듯이 무신들이 한 세기에 걸쳐서 집권하게 되었던 것은 전혀 새로운 사실이었다. 원나라의 간섭을 받게 되면서는 원과 연결을 맺고 그 비호 속에서 정국을 주도하는 새로운 성격의 지배세력으로 권문세족들이 크게 대두하였다. 고려말이 가까워지면서 지방의 향리출신들이 중앙의 정계에 진출하여 강력한 정치세력을 이루게 되는 것도 전기사회의 경우에 비하여서는 크게 눈에 띄는 일이었다. 그러나 고려 후기사회에 있어서 신분이동을 보여주는 극적인 예는 아무래도 하급 신분계층들의 경우에서 찾아볼 수 있다. 비근한 예로 李義旼은 노비신분으로 군인이 되었다가 최고의 권력자가 되었다. 金俊도 노비출신으로 마침내 정치권력을 장악한 사람이었다. 辛旽 역시 노비신분으로 승려가 되었다가 끝내 정치권력을 한 손에 거머쥔 바가 있었다.

 고려 후기의 신분 이동은 높은 신분으로 상승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반대로 낮은 신분으로 하강하는 경우도 있었다. 비근한 예로 반역을 꾀한 죄로 귀족들이 하루아침에 관노비로 전락하는 경우도 정치적 변동이 심하였던 고려 후기에 흔히 볼 수 있는 일이었다. 또 꼭 그런 경우가 아니라고 해도 정치적으로 몰락하여 점차 지방으로 내려가 在地品官이 되는 귀족들도 나타났다.007)이와 관련하여서는 朴恩卿,<高麗後期 地方品官勢力에 관한 硏究>(≪韓國史硏究≫44, 1984)가 크게 참고가 되며, 그 밖에도 다음과 같은 연구가 있다.
千寬宇,<麗末鮮初의 閑良>(≪李丙燾華甲紀念論叢≫, 1956;≪近世朝鮮史硏究≫, 1979).
浜中昇,<麗末鮮初の閑良について>(≪朝鮮學報≫42, 1967).
韓永愚,<麗末鮮初 關良과 그 地位>(≪韓國史硏究≫4, 1969).
물론 그렇다고 그들이 귀족의 지위를 당장 버리게 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상당한 수는 종국에 가면 귀족의 지위에 겨우 매달려 있거나 더 운이 나쁘면 일반 양인과 별반 차이가 없는 존재가 되었다. 이것은 고려 전기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현상이었다. 일반 양인층의 경우도 신분상 지위의 하락은 드문 일이 아니었다. 이와 관련하여 주목되는 것은 고려 후기에 農莊制가 발달하였다는 점이다. 권력을 배경으로 한 세력가들에 의하여 대토지 소유가 늘어나고 이것은 농장제의 발달을 가져왔다. 그 결과 많은 자작농들이 전호로 밀려나게 되었으며, 심하면 노비신분으로 전락하기도 하였다.008) 壓良이나 投托에 의하여 일반 양인 가운데 노비로까지 전락하는 일이 많았다는 점에 대해서는 洪承基,<奴婢의 社會經濟的 役割과 地位의 變化>(≪高麗貴族社會와 奴婢≫, 一潮閣, 1983), 198∼200쪽 참조.

 신분이동이 이러한 정치적 변동이나 경제적 변화에 따라서 찾아지기도 하였지만, 제도의 변화에 힘입어서 일어나기도 하였다. 고려 후기에 접어들면서 문반과 무반 사이에 교차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 결과 문반도 무반직에 나아가고 무반도 문반직에 나아갈 수 있는 일이 보편화되었다.009) 邊太燮,<高麗朝의 文班과 武班>(≪史學硏究≫11, 1961;≪高麗政治制度史硏究≫, 一潮閣, 1971), 321∼329쪽. 그리고 添設職 제도를 두어서 관리가 되는 이들의 수를 늘리기도 하였다. 이 첨설직에 나아가는 계층은 주로 士人과 향리층이었지만, 일반 양인이나 천인들의 경우도 농민·공장·상인과 같은 일반 양인이나 노비와 같은 천인들이 첨설직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010) 添設職制度는 공민왕 3년에 軍功을 세운 사람들에게 상으로 주기 위하여 시행되기 시작하였는데, 이에 대한 연구로는 鄭杜熙,<高麗末期의 添設職>(≪震檀學報≫44, 1978)이 있다. 또한 고려 후기의 신분이동과 관련하여 중요한 것은 충렬왕 원년(1275)부터 시행된 納粟補官制度였다.011)≪高麗史≫권 80, 志 34, 食貨 3, 納粟補官制.
朴龍雲, 앞의 책, 586∼587쪽.
일반 양인이 군공과 같은 특별한 공적이 없다고 하더라도 일정한 양의 白銀이나 米를 바치면 관직에 나아갈 수가 있었다. 이것이 얼마나 철저하게 시행되었는지는 잘 알 수가 없지만, 돈을 주고 관직을 사는 것을 합법적으로 보장하여 주었다는 점에서 주목해야 할 사실이다. 또 이미 알려져 있듯이 고려 후기에 와서는 部曲制가 점차 혁파되어 갔다. 이것은 일반 郡縣人보다 낮은 사회적 지위를 가지고 있던 鄕·所·部曲人들이 더 이상 군현인과 구별되지 않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요컨대, 문무교차제·첨설직제·납속보관제의 시행이나 부족제의 폐지와 같은 제도상에 보이는 변화들이 또한 당시의 신분이동을 보다 쉽게 해주었던 것이다.

<洪承基>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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