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20권 고려 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Ⅰ. 신분제의 동요와 농민·천민의 봉기
  • 1. 신분제의 동요
  • 2) 양인·천인의 신분이동
  • (2) 양인의 신분하락

(2) 양인의 신분하락

 위에서 일반 양인과 천인이 신분을 상승시키는 모습을 더듬어 보았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높은 신분으로 오를 수 있는 출세의 사다리만이 주어진 것은 아니었다. 양인 가운데에는 반대로 낮은 신분으로 전락되어야 하는 비운을 맞는 이들도 많았던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아래에 보이는 몇 개의 사료에 눈을 돌려보기로 하자.

① 빈민으로 조세때문에 자식을 판 사람은 관청에서 물어주어 그 (팔려간 자식)를 되돌려 주도록 하라(≪高麗史≫권 80, 志 34, 食貨 3, 賑恤 恩免之制 충렬왕 22년 정월 旨).

② 요즈음에 양인을 억압하여 천인으로 만드는 일이 매우 많다. 그 담당관청으로 하여금 그 文契가 없거나 속여서 위조한 자를 탄핵하여 죄를 주도록 하라. … 양반의 노비는 그 주인의 役이 따로 있어서 옛부터 公役과 雜歛이 없었는데 지금은 良民이 모두 권세가에 들어가서 官役을 받들지 않아 반대로 양반의 노비로써 대신하여 양민의 역을 하게 하고 있으니 지금부터는 일체 금하게 하라(≪高麗史≫권 85, 志 39, 刑法 2, 奴婢 충렬왕 24년 정월 敎).

③ 오래된 부채를 빙자하여 양인을 겁주어 노비로 삼아 부리는 자에 대해서는 전의 判에 賤口의 役價를 1년에 5升布 32필 반으로 한 예에 따라서 계산하여 상환하고 모두 다 역을 면제하여 주십시오(≪高麗史≫권 85, 志 39, 刑法 2, 禁令 충목왕 원년 5월 整理都監狀).

④ 처음에 貞和宮主의 오빠가 승려로 桐華寺에 거주하였는데 양인을 속여 천예를 삼으니 늘어나 천수백 호에 이르렀다. (王)王有 등이 그들을 대대로 부리니 整治都監이 사리를 밝혀서 양인으로 돌아가게 하였다(≪高麗史≫권 91, 列傳 4, 宗室 2, 忠烈王子 江陽公 滋).

⑤ 都僉議使司가 啓奏하여 ‘흉년으로 굶어죽는 사람들이 매우 많은데도 진휼하여 살릴 수가 없으니 양인으로서 능히 스스로 먹을 수 없는 이들은 부유한 사람으로 하여금 먹이게 하고 부리기를 당대에 그치도록 하며 사람이 노비를 두었지만 능히 먹이지 못하는 경우에는 그를 먹이는 사람으로 하여금 영구히 노비로 삼게 하소서’라고 하였다. 왕이 양민을 천예로 인정하는 것을 싫어하여 그 啓書를 불태웠다(≪高麗史≫권 39, 世家 39, 공민왕 10년 5월 갑술).

⑥ 權奸의 親黨이 兩府에 포진하였으며 중외의 요직이 사사로운 인연 아님이 없어서 권세를 오로지하여 방자하게 관작을 팔고 남의 토전을 탈취하여 산야를 점령하고, 남의 노비를 탈취하여 천백으로 떼를 이루고 陵寢·宮庫·州·縣·津·驛의 전토에 이르기까지 점거하지 않음이 없었다. 주인을 배반한 노예와 賦稅를 도피한 양민들이 淵藪같이 모여들어서 안렴사와 수령이 감히 징발하지 못하였다(≪高麗史≫권 126, 列傳 39, 姦臣 2, 林堅味).

 이 기록들은 경제적으로 가난하여 생계를 꾸리기가 어려운 양인 농민 가운데에 노비가 되거나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많았음을 말하여 준다. 사료①은 생활이 어려워 자식을 아예 노비로 팔아버리는 일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⑥에서는 조세를 부담하기 어려운 일반 양인 농민이 권세있는 이들의 농장에 상당수가 모여들었다고 하는데, ②에 의하면 그 수가 많아서 양반 노비들이 양인 농민이 국가에 져야할 공역·공과의 부담을 대신 맡고 있을 정도였다. ④에서 왕유 등이 대대로 부렸다고 하는 천수백 호의 양인들도 그들의 농장에 모여든 사람들이었다. 물론 권세가에 모여든 양인들이 곧바로 노비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왕유 등이 부린 천수백 호의 양인들도 속아서 노비가 되었던 사람들이다. 노비가 된 것이 그들의 자의가 아니었다는 뜻이 된다.

 그러나 자의건 타의건 그것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노비가 되기를 바라는 양인은 거의 없었을 것이라는 점에서 그러하다. 그렇게 되지 않을 수 없었던 불가피한 여건이 더 중요하다. 속이는 줄 뻔히 알고 있지만 가난한 그들로서는 그러한 상황을 피할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⑤에서 가난하여 살 수 없는 이들을 당대에 한하여 부리게 하는 조건으로 부유한 사람이 먹여주게 하자고 한 제의에 대해 공민왕이 그렇게 되면 남의 노비를 만들어 주는 조치가 된다고 하여 반대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가난하여 굶어 죽을 상황에 놓인 양인은 오직 그를 먹여주는 사람의 자비를 기대하는 것 말고는 따로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줄 이가 그렇게 많을 수가 없었으리라는 사실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는 것이다. ③에서도 부채를 가지고 양인을 노비로 삼는 일을 금지시키고 있지만 국가에서 그들의 빚을 탕감시켜줄 수 없는 바에야 부채를 갚을 능력이 없어 채권자의 집에 가서 일을 할 수밖에 없는 사람은 채권자의 의도대로 마침내는 그의 노비가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물론 경제적으로 궁핍하지 않은 일반 양인 을 권세가가 억압하여 자기의 노비로 만드는 일도 있기는 하였겠지만, 억압 을 받는 이들의 대부분은 경제적으로 궁핍하였을 것이다.

 일반 양인 가운데 노비로 전락하는 예들이 흔히 있었음을 보아 왔지만, 그들은 대부분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가장 큰 이유도 그러한 경제적 열악성에 있었다. 그러므로 일반 양인들 가운데에는 경제적인 요인에 의하여 신분을 위로 상승시켜 관직자가 되는 이들도 있었지만 반대로 신분이 떨어져 노비가 되는 이들도 있었다는 말이 된다. 신분 을 상승시키는 양인들은 대체로 부유하였다. 일반 양인 가운데 경제적으로 부유한 이들은 재화를 가지고 신분을 높이는 기회를 가지는 경우가 있었지 만 반면에 가난한 이들은 가난 때문에 신분이 낮아질 수밖에 없는 경우도 있었다. 물론 이러한 현상은 고려 전기에도 있었지만, 후기사회에는 더욱 두드러지게 되었다.

 일반 양인에게 있어서 신분을 높이는 것과 그것을 내리는 일 가운데 어느 쪽이 더 현저하였는지는 지금 갑자기 단정할 수가 없다. 아무튼 이렇게 눈에 띄게 나타난 신분이동이 신분제의 근본을 크게 흔들어 놓는 일이었음은 분명하다. 고려 후기에 와서 지배세력은 전례없이 자주 바뀌어 갔다. 문신에서 무신으로, 무신에서 권문세족으로, 권문세족에서 신진사대부로 바뀐 것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이러한 지배세력의 변화가 양인을 포함한 각계 각층 사이의 신분이동을 촉진하였다. 그러나 양인과 천인을 포함한 각계 각층 사이에 나타난 신분이동이 반대로 그러한 지배세력의 교체를 촉진시켜 주었다는 점도 의문의 여지가 없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고려 말에 와서 조선의 새로운 체제를 준비하게 되는 신진사대부의 대두도 결국 이러한 전례없는 신분이동의 한 결과였다고 이해해도 무리가 없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양인과 천인의 신분이동이 가지는 역사적인 의의는 우선 여기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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