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20권 고려 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Ⅰ. 신분제의 동요와 농민·천민의 봉기
  • 1. 신분제의 동요
  • 2) 양인·천인의 신분이동
  • (3) 이성계 일파의 집권과 양인·천인의 신분고정

(3) 이성계 일파의 집권과 양인·천인의 신분고정

 고려 후기 이래로 두드러지게 나타난 양인과 천인들의 신분이동은 고려 말 李成桂 일파가 집권하면서부터는 크게 둔화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아래에 보이는 일련의 사료들을 검토하여 보기로 하자.

①-㉮ 公私奴隷·州驛吏·工·商·雜類로서 외람되이 관직을 받은 자는 청컨대 憲司로 하여금 관품을 논함이 없이 모두 그 직을 빼앗을 수 있도록 허락하여 주십시오…㉯ 옛적에는 백성의 나이 16세이면 丁이 되어 비로소 國役에 복무하게 되고 60세에 老가 되어 役을 면하였습니다. 주·군이 매년 計口籍民하여 按廉에 올리면 안렴은 戶部에 올려서 조정에서 징병하고 調役하는 일이 손바닥을 가리키는 것과 같았는데 근래에 이 법이 한번 무너지매 수령이 그 州의 호구를 알지 못하고 안렴이 한 도의 호구를 알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원컨대 지금 마땅히…전토의 많고 적음으로써 그 호를 編籍하되 상·중·하로 삼고 또 호를 양·천으로 나누어 수령은 안렴에게 바치고 안렴은 版圖에게 바치게 하여 조정에서 무릇 징병과 조역할 때에는 이에 의거하게 하십시오…㉰ 禾尺과 才人이 갈고 심는 일을 하지 않고 앉아서 백성의 조세를 먹고 있으니…원컨대 이제부터는 그들이 거주하는 주·군에서 그 인구수를 헤아려 그 籍을 만들어 流移할 수 없도록 하고 빈 땅을 주어서 부지런히 씨뿌리고 갈게 하여 평민과 더불어 같게 하여 주십시오(≪高麗史≫권 118, 列傳 31, 趙浚 창왕 즉위년 趙浚條陳時務).

② 諸色工匠으로 공로가 있는 사람은 錢穀으로써 상을 주고 職事는 허락하지 마십시오(≪高麗史≫권 81, 志 35, 兵 1, 兵制 공양왕 원년 2월 諫官上疏).

③ 양인을 억압하여 천인으로 만드는 것은 和氣를 感傷케 하는 것이니 王旨가 있은 뒤부터 한 달을 한하여 모두 방면하게 하고 위반하는 자는 엄중히 다스린다(≪高麗史≫권 85, 志 39, 刑法 2, 奴婢 충목왕 원년 2월 敎).

④ 人物推辨都監이 奴婢決訟法을 정하여‘양인과 천인이 서로 혼인하는 것은 이제부터 律에 의하여 禁斷한다…’고 하였다(≪高麗史≫권 85, 志 39, 刑法 2, 奴婢 공양왕 4년).

⑤ 노비를 放役하는 자가 뒤에 폐단을 생각하지 않고 그 자손에 이르기까지도 방역시키는 자가 있으므로 그 자손이 役을 맡지 않기 때문에 분수에 넘치는 마음을 가지고 冒名하여 직을 받고 良族과 결혼하여 명예를 어지럽히고 혹은 本主를 모해하고 官法을 두려워하지 않아서 소송을 감히 합니다. 원컨대 이제부터는 애정과 공로를 논하고서 방역한 노비는 다만 그 일신에게만 그치고 자손에게는 미치지 말게 하소서(≪高麗史≫권 85, 志 39, 刑法 2, 奴婢 공양왕 4년 都官上書)

 사료 ①-㉮에서 조준은 노비·공장·상인은 말할 것도 없고 향리나 잡류까지도 관직에 나아간 자는 모두 그 직에서 축출하고자 건의하였다. ②에서도 어느 간관은 공장이 공이 있으면 전곡으로 상을 주고 관직에 제수하지 말라고 요구하였다. 그러한 요구는 노비·공장·상인향리·잡류가 어떤 공을 세웠다고 하더라도 관리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견해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 견해는 더 나아가 각 신분층은 저마다의 신분상의 지위를 지키면서 대대로 그에게 주어진 임무를 충실히 이행하여야 한다는 생각에서 나온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양인이 노비로 전락하는 것도 바람직한 것이 아니었다. ③에 보이는 바와 같이 양인이 억압으로 천인이 되는 것을 엄중히 금한다는 국왕의 교서도 역시 당시 개혁파들의 그러한 생각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양인은 양인으로 남아 있으면서 그가 할 일을 세습적으로 해야만 하였다. 천인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천인이 양인이 되는 것도 엄격하게 금지되었다. ④에 보이듯이 천인이 양인과 혼인하는 것을 엄금한 것이나, ⑤에 나타나 있듯이 주인이 노비의 공을 인정하여 자애심을 가지고 해방시키는 경우에도, 어디까지나 그 노비 당사자에 국한시켜야 한다는 都官의 견해는 모두 그와 관련이 있는 사실들이다. 천인도 양인이 그러하였듯이 천인신분으로 남아 있어야 했던 것이다.

 이 둘 사이의 경계가 더욱 뚜렷하고, 그것이 오래 가도록 하기 위하여 고려 말의 개혁론자들은 호적제도를 정리하고자 하였다. 즉 고려 후기 이래로 문란하여진 호적제도를 바로잡기 위하여 조준은 호적제도에 있어서 중요한 두 가지 기준을 제시하였다. 하나는 경작토지가 많은가 적은가 하는 점을 기준으로 상·중·하의 3등급으로 編戶하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양인인가 천인인가를 기준으로 分戶하라는 점이다. 이 호적제도의 정비는 신분이동을 금지·억제하여 신분제도를 고정적이고도 안정적으로 운용하는 데 긴요한 것이었다.

 이와 관련하여 화척과 재인을 호적으로 파악하고자 한 점도 중요하다(①- ㉰). 그들은 본래 양인이라고는 해도 일정한 곳에서 생업을 하고 살지 않았고 또 호적도 없이 사회에서 천대를 받고 있던 사람들이었다. 조준은 그들에게도 일정한 지역에서 농사를 짓도록 국가가 배려해야 하며, 더 이상 떠돌아 다니지 않도록 거주지에서의 호적에 올려야 한다고 하였다. 조준의 의도는 그들의 신분상 지위를 높여주면서 동시에 그것을 고정시켜 놓자는 것이었다.

 고려 후기에 접어들면서 양인과 천인의 신분이동은 이전보다 매우 커졌다. 양인과 천인의 상층부는 신분을 상승시킬 수 있는 기회를 더 많이 가지게 되었고, 반대로 그 하층부는 신분을 낮추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을 전에 비하여 더 많이 부딪쳐야 했다. 그러나 고려 말에 이르러서는 오래 지속되어 온 이러한 신분의 이동이나 유동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양인과 천인 사이의 경계를 엄격하게 하면서 각 신분층이 위로 아래로 움직이는 것을 봉쇄하려는 시도가 정치권에서 강력하게 추구되었기 때문이다. 양·천의 구별과 신분의 고정에 주로 바탕을 둔 신분제도의 새로운 정비작업은 役制의 정비 노력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이었다. 아무튼 그와 같은 일은 이성계를 펀드는 조준과 같은 개혁론자들에 의하여 집요하고도 진지하게 그리고 성공적으로 추진되어 갔던 것이다.

<洪承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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